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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직
정환직
, 1844 ~1907
, 대통령장
(196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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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엄(東广)의 출생과 관직 생활
1) 가계와 성장
정환직(鄭煥直, 1843~1907)은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리(慶尙北道 永川郡 紫陽面 檢丹里)에서 아버지 정유원(鄭裕玩)과 어머니 순천 이씨(順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초명은 치우(致右), 자는 좌겸(左兼), 호를 우석(愚石)이라 하였으나, 1900년 고종이 하사한 이름과 자호(字號)로 개명하여 이름을 환직(煥直), 자를 백온(伯溫), 호를 동엄(東广)이라 하였다.1)
정환직의 영일 정씨 가문은 고려 중기 예종(睿宗)·인종(仁宗)·의종(毅宗) 3대의 임금을 섬긴 직신(直臣)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의 후예이다. 정환직은 정습명의 25세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며, 성균관 생원 정하호(鄭夏濩)의 증손이다.
정환직은 성품이 강직하고 영민하여 12세인 1855년 향시(鄕試)에서 장원(壯元)을 하는 등 학문에 열중하였다.2) 그러나 가세가 넉넉지 못하여 의술을 연마하며 각처를 주유(周遊)하던 중, 44세인 1887년(고종 24) 형조판서 정낙용(鄭洛鎔)의 추천으로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가 되었다.3) 당시 정환직은 서울에서 의술로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같은 영일 정씨인 정낙용의 추천을 받았던 것이다. 정환직이 출사하기까지 가세가 빈한(貧寒)했던 가족들은 영천·금릉·영천·죽장 등지를 전거(轉居)하다가 자양면 검단리로 돌아왔다.4)
정환직이 출사하기 전까지 각처를 전전하며 남긴 시 94수는 대부분 명승고적을 돌아보며 지은 것인데, 그 중 〈회향시(懷鄕詩)〉는 서울에서 고향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국을 한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논설 〈무우성기(無憂城記)〉에서 돈의 폐단을 지적하였고, 〈출교외문야인(出郊外聞野人)〉에서는 매관매직과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며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5) 따라서 이 기간 중 정환직은 당면한 시국을 탄식하며 정치를 강론하는 등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관직 생활
정환직은 1887년(고종 24) 12월경부터 형조판서 정낙용의 천거로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6) 당시 정환직은 서울에서 의술로 명성을 얻고 있었고, 정낙용과 같은 영일 정씨였기 때문에 추천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888년(고종 25) 정환직은 충무위사용행의금부도사 겸 중추원의관(忠武衛司勇行義禁府都事兼中樞院議官)으로 벼슬이 올랐다. 1894년 2월 동학농민이 봉기하자 삼남지방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으로 파견되어 토벌작전에 참여하였고, 곧이어 5월 청·일 양군이 출병하여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완전사(翫戰使)로 당시 군무대신 조희연(趙羲淵)과 동행하여 청·일 양군의 전투를 직접 관전하였다.7)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조선정책을 강화하고 내각재편과 내정개혁을 급격히 진행하였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이후 종래의 '척양척왜(斥洋斥倭)'에서 '항일구국(抗日救國)'을 표방하고 전국적으로 재기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황해도 일대의 동학농민군 토벌에 일본군이 개입하여 토벌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정환직은 〈일병의뢰반대상소(日兵依賴反對上疏)〉를 올려 일본군에 의뢰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10월 선유사겸토포사(宣諭使兼討捕使)로 황해도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때 정환직은 〈초유문(招諭文)〉을 발포하여 농민군을 효유하였고, 나아가 구월산 일대의 농민군을 진압하였다.8)
1895년 정월 정환직은 태의원(太醫院) 시종관(侍從官, 典醫)이 되었고, 동년 8월 시찰사겸토포사(視察使兼討捕使)로 삼남지방을 순시하던 중 진주(晉州)에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소식을 듣고 귀경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뒤 2년 동안 서강(西江)의 사저에서 은거하였다.
1896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고 아관파천으로 전 국민의 반일감정은 한층 격앙되었다. 이에 정환직은 의병에 관한 〈여신대장방략론(與申大將方略論)〉과 아관파천에 대한 대응책으로 〈기정부의석(寄政府議席)〉을 올려 그 대책을 세우도록 촉구하였다.9)
1897년 8월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 정환직은 동년 10월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로 고종의 시종관(侍從官)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1898년 〈토역상소(討逆上疏〉를 올려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역신들을 소환 처벌하고 국모시해를 응징하도록 촉구하였다.10)
1899년 11월 활빈당과 화적이 전국적으로 활동하자 정환직은 삼남검찰겸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에 임명되어 삼남 일대의 민정을 시찰하였다. 이어서 1900년 여름에는 원수부위임(元帥部委任)에 임명된 뒤, 삼남시찰사(三南視察使)를 겸하여 삼남지방을 순시하였다. 곧이어 동년 겨울 삼남도찰사(三南都察使)로 승직하여 순시하던 중 경주부윤(慶州府尹)을 파면하였다. 또 울산과 양산에서는 민원을 야기하였으므로11) 봉세관(捧稅官)에 의해 송환되어 구금되었으나 국왕의 신임으로 석방되었다. 이에 정환직은 사직하였다가 후일 다시 시종신(侍從臣)으로 입직하였다. 1901년 11월 20일 밤 종묘에서 화재가 났을 때 시종신으로 황제와 태자를 피신케 한 공로로 이름과 자호(字號)를 하사받았다.12)
1902년 정환직은 당시 정치적으로 시급한 문제를 지적하는 십조소(十條疏)를 올렸는데, 명국법(明國法)·교육(敎育)·제용관(除冗官)·거현량(擧賢良)·축간세(逐奸細)·참패역(斬悖逆)·항외국(抗外國)·금유식(禁遊食)·양병(養兵)·금복무(禁卜莁) 등 부국강병과 국권수호를 위한 것이었다.13) 1904년 정환직은 김옥균·안경수·우범선에 관한 한성신문의 기사를 보고 〈변파황탄설(辨破荒誕說)〉을 반포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유생 곽종석 등을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였다.14)
1905년 정환직은 삼남도찰사겸토포사(三南都察使兼討捕使)로 부산·동래·경주를 시찰하던 중 동래에서 보의당(報義堂)을 훼철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였다. 그러나 정환직은 모략을 받아 경주에서 시찰사 강용구(康容九)에게 직권을 박탈당하고 상경하여 평리원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나,15) 곧 무죄 석방되어 복직되었다. 이때 고종은 정환직을 시종원으로 불러 위로하고 “짐(朕)이 화천(華泉)의 물(水)을 취(取)하여 경(卿)과 마시고자 하노라” 하며 무죄 석방하였다.16) 그 후 정환직은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고종의 부름을 받아 다시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905년 12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으로부터 “경(卿)이 화천(華泉)의 물(水)을 아는가. 짐망(朕望)하노라”는 밀조(密詔)를 받고 창의를 결심하였다.17)
산남의진과 동엄
1) 산남의진의 결성과 동엄
1905는 12월 5일(양 12. 30)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은 정환직은 관직을 사퇴하고 창의를 계획하였다. 우선 장자 정용기(鄭鏞基)에게 거의(擧義)의 뜻을 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용기가 대의를 밝히며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결의함으로써 부자는 함께 창의하기로 하였다.
정환직 부자의 계획은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집하여 거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환직 부자는 서울진공을 위한 북상계획을 실현한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즉 강원도를 거쳐 서울에서 합류하여 황궁을 옹호하며 배성일전(背城一戰)하기로 작전을 세웠다.18) 정환직 부자가 수립한 서울진공작전은 당시 서울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허위·이강년·여중룡 등이 1906년 5월 5일 구상했던 서울진공작전의 초기 단계이기도 했다.19)
1906년 1월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영남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영남 일대를 순회하며 동지를 모으고 이한구(李韓久)와 함께 영천·부산 등지를 거쳐 1월말 서울로 돌아왔다. 정환직은 창의를 위한 군자금으로 고종의 하사금 5만 냥과 전 참찬 허위로부터 받은 퇴관 동료들의 모금 2만 냥을 확보하였다.20)
한편 정환직은 퇴관 동료들과 군략상의 급무를 논의하며, 유산군인(流散軍人)들을 모아 시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의병 활동에 필요한 무기와 군수품은 외국인을 통해 구입하기로 하였다. 우선 정환직은 청나라 사람 왕심정(王心正)을 통해 양식총 500병(柄)과 기타 군수품을 구입하기로 하고 2월 중순 그를 상해로 보냈다.21)
산남의진의 결성와 함께 정환직은 서울진공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아들 정용기를 독려하는 한편, 서울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정환직의 순절과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최세윤 대장이 지휘하는 산남의진의 서울진공작전도 지대별 유격전으로 변화하였지만, 산남의진의 서울진공을 위한 북상계획은 창의 초기부터 꾸준히 추진된 작전이었다.
2) 정용기의 투쟁과 동엄
1906년 3월 정용기는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창의(倡義)하였다. 정용기의 창의는 아버지 정환직의 후원과 협력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자신도 아버지와 같이 당시의 세태를 충분히 인식하고 국권회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정용기(1862. 12. 13~1907. 9 . 1)는 아버지 정환직과 어머니 여강 이씨(驪江李氏)의 장자로서 1862년 12월 13일 검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활달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정의로운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러나 공부는 가정환경에 따라 15세 미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1876년 15세의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을 따라 김산 봉계로 이거하였다. 당시 봉계에는 먼 친척인 연일 정씨들이 세거하고 있어 정환직 일가는 살 길을 찾아 이거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정환직이 각지를 유람하고 있었기에 정용기는 농사와 공예업에 종사하며 가사를 돌보았다. 그 후 죽장 창리로 이거하면서 경주의 여강 이씨 이능경(李能璟)·능종(能種) 형제·이한구(李韓久)·재종제 정순기(鄭純基) 등과 깊이 사귀게 되었다.22)
1887년 부 정환직이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로 관직에 나아가자 상경하였다. 정용기는 1905년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대세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음에 분개하여 존황실(尊皇室)·축간세(逐奸細)·금사술(禁邪術)·보생민(保生民)·금유식(禁遊食)·축잡류(逐雜類) 등의 내용을 의정부에 건유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행위를 탄핵하는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을 발표하기도 하였다.23)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아버지 정환직이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자 함께 영남에서 창의하여 북상하기로 하였다. 1906년 1월 정용기는 영남(嶺南)에서 창의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영천에 이르러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 등과 거의를 결정하고 경고문(警告文) 및 통문(通文)을 각처로 배포하였다. 그리고 영천에 창의소를 차리고 각처에 사람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이한구는 청송으로 들어가 동지를 모으고, 정순기는 영해의 신돌석(申乭石), 이규필은 흥해의 정래의(鄭來儀) 등을 초청하여 사방에서 동지들을 모았다.24)
1906년 3월 정용기는 대장으로 추대되어 진호(陣號)를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하고, 부서와 조직을 편성하였다.25) 산남의진은 창의 초기부터 그 목표를 서울진공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진공작전은 창의 초기부터 실시되어 정용기는 각처에 주둔하고 있던 산남의진의 지역부대를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회합하도록 연락한 후, 3월 5일 행진을 시작하여 영천·청송지방을 경유하여 북상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던 정환직도 4월 중순에 모집된 의병 100여 명을 강원도 강릉의 남쪽 금광평(金光坪)으로 보내어 산남의진을 맞이하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용기 대장은 신돌석의병진(申乭石義兵陣)이 영해에서 토벌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1906년 4월 28일 경주 우각(牛角)을 지나다가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간계로 대장 정용기는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수감되었다.26)
대장 정용기는 경주를 떠나 대구로 이송되면서 중군장 이한구로 하여금 산남의진을 이끌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한구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영천·강구·청하 등지를 전전하며 신돌석의진과 연락·활동하다가 1906년 7월 하순 진영을 해산하였고,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9월 대구경무청에서 석방되었다.27)
영천으로 돌아온 정용기는 재기를 모색하였다. 이때 서울에서 내려온 정환직은 산남의진의 요인들을 만나 1907년 5월 관동지방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4월 정용기는 산남의진의 진용을 다시 편성하고 재기하였으며, 정환직은 1906년 2월 거의 전부터 추진하던 무기반입을 위해 다시 청나라 사람 왕심정(王心正)을 중국에 보내는 등 무기의 확보에 전력하고 있었다.28)
1907년 4월 재기한 산남의진이 본격적으로 의병투쟁을 재개한 시기는 7월부터이다. 우선 산남의진은 관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신돌석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동해안 쪽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면서 북상의 길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해·청하·청송·포항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북상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1907년 8월말 정환직은 산남의진의 관동진출을 기다리던 중 심복 수십 인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갔다. 그리고 동해안으로 내려와 청하를 거쳐 영천에 이르러 아들 정용기를 만나 산남의진의 북상을 재촉하였다. 이와 같이 정환직은 서울진공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아들 정용기를 독려하는 한편, 서울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정용기는 9월 초순에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를 위해 8월 29일 본진 선발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죽장의 매현(梅峴)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이튿날 일본군이 입암(立巖)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산남의진은 9월 1일 새벽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매복을 하였다. 그러나 산남의진은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참모장 손영각(孫永珏)·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 수십 명의 장령들이 전사하는 참변을 당하였다.29)
입암전투(立巖戰鬪)의 참패로 산남의진의 지휘부는 무너지고, 산남의진이 추진하던 서울진공작전은 다시 미루어지게 되었다.
3) 동엄의 투쟁과 순절
입암전투에서 참패한 1907년 9월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각오로 군사를 모집하고 진영을 재편성하였다. 입암전투 참패 이후 산남의진은 진영을 재조직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우선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한 산남의진은 9월 3일부터 9월 12일 사이에 보현산(普賢山) 주위 인근지대에 흩어진 군사를 집결하도록 하고, 여러 장령과 종사들을 각지로 보내 군사를 모으고 적세를 탐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월 12일 밤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진을 옮기고, 청하·영덕·청송 등지에서 군량을 모으는 한편, 울산분견대(蔚山分遣隊) 병사 출신의 우재룡(禹在龍)·김성일(金聖一)·김치현(金致鉉) 등이 군사를 훈련시켰다.30)
북동대산에 진을 친 산남의진은 9월 22일 흥해(興海), 9월 28일 신녕(新寧), 9월 29일 의흥(義興) 등지를 공략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0월 2·3일에는 청송 두방(斗坊)에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전군이 패주하였다. 10월 5일 산남의진은 추격하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보현산으로 집결하였고, 곧이어 진영을 2대로 편성하여 일대는 청송, 일대는 기계로 이동하였다. 10월 11일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흥해분파소(興海分派所)를 습격한 이후 청하·영덕·북동대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31)
이와 같이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청송의 보현산 일대와 영일의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의병 토벌을 위해 증파된 일본군은 안강·기계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전을 전개하였고, 그에 따른 의병진의 탄약과 장비의 소진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초 산남의진이 서울진공작전의 일환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던 관동지방으로의 북상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지는 형편이었다.
이리하여 정환직은 관동 진출을 위한 최후의 방책으로 진용을 분산하여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즉 정환직은 “내가 먼저 관동(關東)으로 들어가 중인(衆人)을 기다릴 것이니 중인은 각지로 나아가 탄약 등을 구하여 관동으로 들어오라”고 명하고, 병사들은 상인·농부 등으로 변장시켜 모두 파견하였다.32)
그러나 산남의진이 관동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11월 6일 정환직은 청하면 각전(角田)에서 일본군에게 피체되었다. 정환직은 영덕에서 대구로 이송되어 귀순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거부하였고, 영천으로 돌아오던 중 남쪽 교외(郊外)에서 총살·순절하였다. 1907년 11월 16일이었다. 정환직은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33)
身亡心不變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
義重死猶輕 (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後事憑誰託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 (말없이 앉아 오경을 넘기노라)
주석
1) ≪山南倡義誌≫, 1946년, p.5. 1900년 11월 20일 밤 종묘 화재 시에 황제와 태자를 모시고 피신한 공로로 이름과 자호(字號)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2) 山南義陣遺史刊行委員會, ≪山南義陣遺史≫, 1970년, p.15.
3) ≪山南倡義誌≫, 1946년.
4) 山南義陣遺史刊行委員會, ≪山南義陣遺史≫, 1970년. 여기에서 정환직 일가가 각처를 전전하였다는 것은 증손 정희영의 기억으로 생각된다. 정환직은 그의 나이 28살인 1871년 남쪽 지방을 여행할 때 '금릉(金陵)'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山南倡義誌≫에서는 1876년 이거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주하기 전부터 같은 일가가 살고 있는 금릉을 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5) ≪山南義陣遺史≫, 1970년, pp.47~64.6) ≪山南倡義誌≫(下), 1946년. ≪騎驢隨筆≫(宋相燾)에 의하면 ‘고종 정해(1887)에 북부도사(北部都事)에 제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7) ≪山南倡義誌≫(下), 1946년, p.3.
8) ≪山南義陣遺史≫, 1970년, pp.70~81.9) ≪山南義陣遺史≫, 1970년. pp.101~105.
10) ≪高宗實錄≫ 卷三十九, 光武三年 一月, 〈前都事鄭煥直疏〉. ≪獨立新聞≫, 1898년 12월 16일, 〈전도사 정환직 언사소〉.
11) ≪皇城新聞≫, 1901년 6월 4일, 〈民訴鄭討捕〉.
12) ≪山南倡義誌≫(下), 1946년, p.5.
13) ≪山南倡義誌≫(下), 1946년, p.5. ≪山南義陣遺史≫, 1970년, pp.70~81.
14) ≪山南義陣遺史≫, 1970년, pp.132~138.
15) ≪山南倡義誌≫(下), 1946년, p.5.16) ≪山南倡義誌≫(下), 1946년, p.6.17) ≪山南倡義誌≫(下), 1946년. (전략)使卿으로 不離左右者는 “朕이 取和泉之水而欲飮卿하노라.(하략) 乙巳勒約之後로 上下人心이 沸騰하고 大少政事를 敵이 無不干涉이라 帝鳴咽曰 卿이 和泉之水을 知乎아 以朕望二字하로 下賜하시거늘(하략) ≪山南倡義誌≫에서는 ”和泉之水“라 기록하고 있지만, 원래 고사는 ”華泉之水“이다.
18) ≪山南義陣遺史≫, 1970년, pp.147~148. ≪山南倡義誌≫(下), 1946.
19) 呂中龍, ≪南隱先生遺集≫卷之二, 〈乙巳日記〉.
20) ≪山南義陣遺史≫, 1970년, pp.148~149.
21) ≪山南倡義誌≫(下), 1946, pp.148~149.
22) ≪山南倡義誌≫(下), 1946년, 14~15.
23) ≪山南倡義誌≫(下), 1946년, p.16.
24) ≪山南倡義誌≫(下), 1946년, pp.17~18.
25) ≪山南倡義誌≫(下), 1946년, pp.18~19.
26) ≪山南倡義誌≫(下), 1946년, pp.18~20.
27) ≪山南倡義誌≫(下), 1946년, p.20.
28) ≪山南倡義誌≫(下), 1946년, pp.7~8.
29) ≪山南倡義誌≫(下), 1946년, pp.25~27.
30) ≪山南倡義誌≫(下), 1946년, pp.9~10.
31) ≪山南倡義誌≫(下), 1946년, pp.11~12.
32) ≪山南倡義誌≫(下), 1946년, pp.13~14.
33) ≪山南倡義誌≫(下), 1946년, p.14.
정환직이 순국한 뒤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은 흥해의 최세윤(崔世允)이 취임하였다. 최세윤은 1896년 안동의진의 아장(亞將)으로 참여한 바 있었고, 정환직이 산남의진의 제2대 대장으로 취임하자 흥해지역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1908년 7월 장기(長鬐) 용동(龍洞)에서 피체되어, 1916년 8월 9일 옥중에서 단식·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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