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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주요공적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 주도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2차 만세운동을 주도

체포 후 경성감옥에서 2년간 옥고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김원벽

김원벽 , 1894 ~1928 , 독립장 (1962)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대표로 경성에서 열린 두 번의 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3·1만세운동의 선봉장이 되었던 선생의 삶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머리말

1928년 4월 12일 조선의 각 신문에 한 남자의 부고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행여 살릴 수 있을까 부인이 단지(斷指)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외일보』는 남자의 일생을 핵심만 추려서 보도하였다.

선운동우회(鮮運同友會)의 상무이사 김원벽(35세)씨는 지난 2일 이래 사리원 자택에서 발진티푸스로 치료중이더니 9일 오후 여섯 시에 불행히 별세하였는데 씨는 기미운동 당시 47인 중 1인으로 활동을 하다가 그 후 출옥 이후에도 교육계 기타 조고계(操觚界)에 비상히 헌신적으로 분주하다가 최근 이삼년은 조선 운수업계에 몸을 바쳐 작년 이래 다사다난한 문제를 일으키는 일역일점주의에 맹렬한 반대운동의 투사로 그간 조선 운송사업에 없지 못할 한 페이지를 차지한 청년지사였는데 씨의 장의는 선운동우회 회장(會葬)으로 11일 발인하리라더라.

부고의 주인공은 35세의 김원벽이었다. 3·1운동 때 학생시위의 주역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달리 만세시위를 기획하고 집행한 지도자였다. 출옥 후에는 교육계와 언론계에서 활동하고, 죽기 직전에는 조선총독부의 소운송업 통합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원벽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지만 의외로 그의 생애는 안개 속이다. 공적 기록이 서로 다르고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일화도 떠돈다. 시대의 요구에 충실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김원벽의 생애를 충실한 고증으로 재구성하였다.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태화관)
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태화관)

안악에서 경성으로

김원벽은 1894년 5월 20일(양력 1894. 06. 24.)에 김태석(金泰錫)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이었다. 3·1운동으로 체포된 뒤 받았던 예심판사의 신문조서와 경성감옥의 『수형자명부』에는 이도면 별지리(別岐里)로, 경성복심법원의 요시찰문서인 『왜정시대인물사료』는 이도면 생팔리(生八里) 107번지로 기록하였다.

은율군은 황해도의 서북부에 위치하였다. 동쪽으로 안악군, 서쪽으로 송화군, 남동쪽으로 신천군, 북쪽으로 서해와 대동강 하구에 인접하였다. 이도면은 바다를 끼고 군의 북쪽에 자리했다. 면사무소가 있는 감정리 등 12개의 리(里)로 구성되었다. 이도면에 생팔리는 있지만 별지리는 없었다. 당시 지도를 보면 생팔리의 중심이 별지동이었다. 『경신사』의 서술을 따르자면 김원벽의 출생지는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 생팔리 별지동이다.

아버지 김태석은 장로교 목사였다. 김태석은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황해도 안악군 교동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였다. 김태석은 선교사 언더우드와 깊은 교분을 가진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 기독교 인사였다. 나중에 김원벽이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는 데는 이러한 인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경신사』에서는 김원벽이 1901년 은율군 이도면 소재의 숭실학원을 거쳐 평양의 대성학교에서 배우고 1908년 4월에 경신학교에 입학했다고 전한다. 1901년 은율면교회가 세운 광선학교(光宣學校)를 시작으로 은율군에서는 각 면의 예배당이 부설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다. 숭실학원도 이렇게 세워진 15개 중 하나였다. 교육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독교 교육과 신학문의 기초를 이때 접했을 것이다.

숭실학원 이후 배움의 여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평양의 대성학교이다. 은율에서 바다를 건너면 광량만이고 진남포였다.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평양이었다. 대성학교는 1908년 9월에 예비과와 초등과 모집 공고를 내고 9월 26일에 개교하였다. 초등과는 중학과정이었고 예비과는 초등과를 준비하는 학생을 위해 특별히 설치되었다. 김원벽이 대성학교를 다녔다면 1908년 4월에 경신학교에 입학을 할 수가 없었다.

김원벽은 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판사 호리 나오요시(堀直喜)의 신문을 받았다. 이때 김원벽은 경성(지금의 서울)에 오기 전까지 본적지에서 살았다고 답변하였다. 본적지는 출생지와 다르게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교동이었다. 교동은 아버지 김태식의 목회지였다.

김원벽은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3학년을 마치고 4학년 때 경신학교로 전학했다고 진술하였다. 명신학교는 재령군 재령읍에 설립된 사립학교로서 1908년에 중학교를 설치하였다. 안악군과 재령군은 이웃해 있었다. 1910년 10월 명신학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인가를 받아서 3년제의 보통과와 고등과를 두었지만 1911년 9월 재정난으로 고등과를 폐지하였다. 1911년에 제1회 졸업생 4명을 배출했는데 제2회 졸업생은 1915년에야 나왔다.

3학년을 마칠 때쯤 고등과가 없어졌다. 김원벽은 어쩔 수 없이 1911년 가을에 정든 명신학교를 떠나 서울의 경신학교로 전학했다. 예정에 없던 서울살이였다. 김원벽은 경신학교를 1년 다니고 1912년에 제7회로 졸업했다. 동기생은 김원벽을 포함해 7명이었다. 충남 공주의 이병주(李秉周), 평북 의주의 김진건(金鎭鍵), 황해도 서흥의 이기석(李基石), 재령의 김창덕(金昌德), 옹진과 사리원의 김두영(金斗永)과 김병식(金秉植) 등이었다. 나중에 이병주는 김원벽과 함께 연희전문학교의 3·1운동을 이끌었다.

연희전문학교의 인기남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김원벽은 1914년 4월부터 12월까지 잠시 사립보광학교(普光學校)의 교사를 지냈다. 20세 때였다. 김원벽의 교사 생활은 8개월 정도였다. 아마도 이듬해인 1915년 4월에 설립된 한국기독교대학(Korean Christian College)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한국기독교대학의 개교식은 1915년 4월 12일 서울의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열렸다. 대학은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 8개의 방을 빌려 강의실로 사용했다. 최초의 입학생은 모두 61명이었으며, 세 가지의 입학 조건을 충족한 사람들이었다. 목사 아들이며 경신학교를 졸업한 김원벽도 무난히 입학 자격을 얻었다.

1. 신체 조건 : 지원 학생은 최소한 만으로 17세가 넘어야 하며, 안정된 의사가 발행한 건강증명서를 제시해야 한다.

2. 도덕 조건 : 교수진 혹은 일부 목사가 아는 사람이 작성한 품행이 단정하다는 증명서가 있어야 한다.

3. 학업 조건 : 지원 학생은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다는 증명서를 제시해야 한다.

한국기독교대학은 개교 이후 바로 교명을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으로 바꾸었다. 조선기독교대학은 대학교육을 표방했지만 조선총독부가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고등교육을 억제하였다. 총독부는 조선기독교대학의 개교 직전에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고 「전문학교규칙」을 공포하였다. 이 규칙들은 사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 고등교육에 해당하는 전문교육을 하려면 상당한 설비와 교원을 갖추고, 학교를 유지할 수 있는 재단법인을 설립하도록 규정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917년 4월 7일 사립 연희전문학교 기독교연합재단법인의 설립 인가가 났다. 자연스레 교명도 조선기독교대학에서 연희전문학교로 바뀌었다.

조선기독교대학이 개교할 당시 학교 당국은 학생들에게 문과, 이과, 상과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학제는 2년이었지만 예비 과정이 부족해서 3년을 배워야할 것으로 학교는 예상하였다. 1915년도 입학생이라면 1917년 3월에 졸업해야 했지만 위와 같은 사정으로 김원벽은 여전히 학생이었다. 게다가 연희전문학교가 「전문학교규칙」에 의거한 학교로 인정되면서 문과는 3년제로 바뀌었다. 1917년에 김원벽은 연희전문학교 문과 2학년으로 조정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학적부에는 1917년 입학으로 기록되었다.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은 얼마 뒤인 1917년 6월 21일 연희전문학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 일대에 29만여 평의 부지를 구입하였다. 학교 부지를 확보하자 연희전문학교는 1917년 가을부터 임시로 목재 가교사 건축에 들어가서 1918년 초 봄에 완공하였다. 치원관으로 명명된 교사가 완공되면서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 세들었던 연희전문학교는 신촌으로 이사하였다. 1920년 9월 스팀슨홀이 신축되기 전까지 연희전문학교의 모든 강의는 치원관에서 이루어졌다.

YMCA회관을 함께 사용하는 데다 기독교인이 많았던 만큼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은 기독교청년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김원벽도 그랬다. 다만 김원벽이 아직 젊었기 때문에 YMCA의 공식 직함을 맡거나 하지는 않았다. 전국연합회와 경성기독교청년회의 총무를 겸임하던 윤치호를 통해서만 모습을 나타냈다. 윤치호는 1912년에 소위 데라우치총독암살사건으로 불리는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조작이었음에도 징역 6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환영회에서 윤치호는 ‘오십이각(五十而覺)’이라는 제목으로 “경거망동은 우리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한다. 조선을 구제할 자는 오직 힘이니, 힘은 청년들이 도덕적으로 지식적으로 수양함에서 나오고, 그러한 뒤에도 교육과 산업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함에서 나온다.”고 답사를 했다. 청중의 예상보다 약한 내용이었다. 김원벽은 윤치호의 반대파였다.

윤치호는 꾸준히 일기를 썼는데 김원벽은 네 번 등장했다. 일기에 따르면 1916년 11월 6일 김원벽과 백남진(白南震), 장두철(張斗徹), 박희도(朴熙道), 송병휘(宋秉輝), 노준탁(盧俊鐸) 등은 YMCA 월례회에서 윤치호를 비난했다. 1917년 6월에도 인사 때문에 대립했다. 윤치호는 김원벽 등의 배후에 전임 총무였던 이상재(李商在)가 있다고 생각했다. 총독부는 인사 외에 다른 이유로도 대립한다고 보았다. 6월 4일 열린 중앙기독교청년회 총회에서 김원벽 등은 보고서에 서기를 쓰는 게 기독교의 상례인데 총무 윤치호가 일본 천황의 연호인 다이쇼(大正)를 사용했다고 비판하였다.

특사 이후 현실을 인정하고 총독부와 대립을 삼가던 윤치호에 대한 청년 지도자들의 문제 제기였다. 행동을 같이 한 노준탁은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다. “김원벽은 웅변도 잘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고 세력이 있는 편”이라는 평을 들었다.

3·1만세운동의 주역으로

김원벽이 학업과 YMCA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던 1918년 말, 5년 동안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침탈을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1918년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민족자결주의를 제기하였다. 무력의 시대는 가고 ‘정의와 인도(人道)’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가 널리 퍼졌다. 김원벽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8년 11월 30일 총독부의 첩보 문서에 김원벽과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의 동정이 실렸다. 「경성 민정휘보」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는, 근래 경성의 청년들 사이에서 ‘새(新) 하와이’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보고를 시작하였다. ‘새 하와이’는 경성 시외의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를 가리키며 그곳에는 연희전문학교가 있었다.

하와이에서 반일 조선인들이 불온한 말을 쉬지 않는 것처럼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항상 그렇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경성 시내와 떨어진 외딴 마을이기 때문에 더욱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하였다. 불온한 말을 일삼는 학생 중에서도 김원벽과 노준탁은, 윌슨 대통령이 정의와 인도를 바탕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쓰고 그 결과 조선에 자유와 평등의 공화제가 다가올 것으로 말하고 다녔다.

이번에 휴전조약의 성립을 보기까지는 미국이 참전한 결과이다. 또 이번 대전에서 제국주의는 완전히 패하고 전세계는 민주주의에 지배받는 것으로 되었다. 생각건대 작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5약소국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재미동포는 박용만과 안창호를 대표자로 파견하고 그들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구제를 요청하였다. 대통령도 역시 그 회의에 대해 많은 동정을 표시함으로써 오는 (파리)강화회의에서 그가 주장하는 정의인도주의를 바탕으로 조선을 위해 진력할 것으로 믿는다. 이에 우리가 희망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화정치를 구가하는 날도 멀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였다. 국제정세에 밝은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주의원칙이 조선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국의 안창호, 중국의 여운형, 일본 유학생 현상윤과 서춘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안창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 승인을 요구하자는 견해를 단호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가 정의와 인도라는 새로운 보편적 국제질서의 원리로 제시·확산되던 상황만은 인정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파견하려는 신한청년당을 비롯한 여러 경로의 활동들이 그러했다.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일본유학생의 독립운동을 추동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도쿄유학생 400여 명은 조선YMCA회관에서 조선청년독립단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2·8 독립선언은 국내 천도교와 기독교, 그리고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크게 자극하였다.

박희도(왼쪽)와 이갑성(오른쪽)
박희도(왼쪽)와 이갑성(오른쪽)
박희도(왼쪽)와 이갑성(오른쪽)
박희도(왼쪽)와 이갑성(오른쪽)

1919년 1월 말 김원벽은 YMCA에서 같이 활동했던 박희도의 주선으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의 학생 대표들을 관수동의 중국요리점 대관원에서 만났다. 강기덕(보성전문), 이공후(전수학교), 김형기(경성의전), 주종의(경성공전), 한위건(경성의전) 등과 주익, 윤화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주익과 박희도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는 만큼 독립운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제안했다. 김원벽은 2월 3, 4일경에 강기덕과 김형기를 만난 뒤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로 확실하게 결심하였다.

이어 2월 12일과 14일 음악회를 빙자해서 남대문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의 이갑성 집에서 김원벽, 김형기, 윤자영, 김문진, 배동석, 한위건 등 각 전문학교의 대표자들이 다시 모였다. 이 자리에서 해외 독립운동 정세를 논하고 서로 독립사상을 북돋웠다. 이후 김원벽은 학생대표로서 강기덕과 만나서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협의했다.

그 결과 2월 20일에 승동교회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모인 각 학교 대표자는 경성전수학교 전성득과 윤자영, 경성의학전문학교 김형기와 한위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김문진과 이용설,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강기덕과 한창환,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등이었다.

김원벽은 기독교계의 박희도와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는 강기덕, 한위건과 함께 각 중등학교의 학생 대표자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다. 김원벽은 경신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담당했다. 강기덕은 서북친목회와 중앙학교, 선린상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을 만나서 독립의식을 불어넣었다.

드디어 3월 1일 오후 두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되고 독립선언서가 인쇄되면서 학생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아무래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려면 학생들의 협조를 얻지 않으면 안되었다. 2월 28일 밤 각 전문학교의 대표와 중등학교의 대표가 만나서 독립선언서를 나누고 배포 장소를 학교별로 정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서는 김원벽이 2월 28일 정오의 기도회를 이용해서 만세시위 일정과 장소를 공지하였다. 비밀 엄수를 당부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3월 1일 정오가 지나자 시내 각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학생을 비롯한 수만의 군중이 탑골공원에 모였다. 손병희 등 33인은 급히 장소를 변경하여 인근의 태화관에서 모임을 가졌다.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결국 두시 반쯤에 탑골공원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에 나섰다. 경성 전역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결국 경찰과 헌병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학생을 중심으로 두 번째 시위가 준비되었다.

학생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던 서울 탑골공원 전경(연도미상)
학생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던 서울 탑골공원 전경(연도미상)
3월 5일, 학생대표들과 제2차 만세시위를 전개한 남대문역 전경(1920년)
3월 5일, 학생대표들과 제2차 만세시위를 전개한 남대문역 전경(1920년)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현재 서울역) 광장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김원벽과 강기덕은 인력거를 타고 시위를 이끌었다. 강기덕은 바로 체포되었지만 김원벽이 탄 인력거는 남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은 주모자인 김원벽을 잡으려고 사정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김원벽은 이때 쇄골이 부러져서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하였다.

김원벽을 비롯한 민족대표 48인의 고등법원 예심은 1920년 3월 22일에 끝났다. 체포된 지 1년도 더 지난 때였다. 경성지방법원은 김원벽 등에게 법정 최고형을 내릴 수 있는 내란죄를 적용했지만 고등법원이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김원벽에게 보안법 제7조를 적용하여 징역 2년을 선고하였다. 미결구류 360일을 포함하였다.

3 · 1 운동 민족대표 재판기록
3 · 1 운동 민족대표 재판기록

‘신생활’의 세계로

1921년 11월 4일 오전 아홉시 반 김원벽은 공덕동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함께 2년을 선고받은 박희도, 이필주, 박동완 등 17명이 함께 나왔다. 『동아일보』는 당일 감옥 밖에서 출소를 기다리던 가족과 지지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獨立宣言關係者 金原璧 朴熙道 朴東完 李弼柱 金完圭 崔聖模 朴準承 洪秉箕 羅仁協 林禮煥 羅龍煥 申錫九 申洪植 李明龍 梁甸伯 權秉悳 李鍾勳등 十七人의 滿期出獄 이년의 긴 형기 맛치고 작 사일 오젼에 京城監獄에서 十六人, 西大門監獄에서 一人(寫)
獨立宣言關係者 金原璧 朴熙道 朴東完 李弼柱 金完圭 崔聖模 朴準承 洪秉箕 羅仁協 林禮煥 羅龍煥 申錫九 申洪植 李明龍 梁甸伯 權秉悳 李鍾勳등 十七人의 滿期出獄 이년의 긴 형기 맛치고 작 사일 오젼에 京城監獄에서 十六人, 西大門監獄에서 一人(寫)

이개년 징역의 선고를 받고 이 세상 지옥이라는 감옥 속에 있는 그들의 가족은 낮이면 낮이 길고 밤이면 밤이 길게 만기출옥을 손을 꼽아 고대하며 눈 쌓인 밤과 달 밝은 저녁에 부질없이 그들의 신상을 염려하다가 만기출옥의 날을 당하매 이른 아침부터 혹은 전차로 혹은 인력거로 혹은 도보로 경성감옥을 향하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고 각 청년단체에서 그를 태워 데리고 오고자 준비한 자동차가 칠팔대나 감옥 문전에 늘어섰으며 시시각각으로 모여드는 군중의 수효는 점점 늘어 그들이 출옥할 때에는 수천의 남녀 군중이 백목 차일을 친 듯이 늘어섰었다.

아들을 기다리는 노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린 딸, 선생님을 잃은 학생들이 애타게 기다렸다. 많은 군중 속에서 행여 보지 못할까 크게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영웅의 귀환을 준비하는 청년들도 분주히 움직였다.

기자들은 독립운동가의 소감 한 마디라도 전하려고 바쁘게 뛰어다녔다. 흰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은 김원벽은 매우 냉정한 태도로 “옥중에서 고초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만기되어 출옥하니까 그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러면서도 쓸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11월 5일자 동아일보

감옥에서 나와 일주일을 경성에서 지낸 김원벽은 11월 12일에야 고향 안악으로 떠났다. 옥살이로 지친 몸을 쉬어야 했지만 고향은 그를 편안히 두지 않았다. 그 또한 각계의 강연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12월 4일 저녁 7시에 김원벽은 안악읍예수교회에서 「생존적 요구는 종교상 가치」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튿날인 5일에도 그는 안악기독여자청년회 주최의 강연회에서 수백 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시대 변천과 여자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두 시간에 걸쳐 열변을 토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동창포교회 강습회에서 「인류 생존의 요구」, 안악여자청년회에서 「시대의 변천과 여자 활동」 등의 강연을 했다. 김원벽은 몸을 추스르는 틈틈이 감옥에서 가다듬은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전파했다.

1922년 1월 9일 김원벽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잡지 『신생활』을 발행하는 신생활사의 창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창립총회는 1월 15일 오후 7시 경성 해동관(海東館)에서 열렸다. 이사장은 함께 경성감옥에서 출옥한 박희도였고, 전무이사는 이병조였다. 김원벽은 강매(편집부장 겸임), 김명식(주필 겸임), 이경호(영업부장 겸임), 이승준, 민관식과 함께 이사로 참여했다.

2월 11일에 열린 이사회에서는 백아덕(白雅悳, Arthur L. Becker)과 원한경(元漢慶, Horace Horton Underwood), 이강윤 등 3명의 이사를 증원했다. 원한경과 백아덕은 연희전문학교 교수이자 미국인 선교사였다. 당시 조선인이 잡지를 발행하면 원고와 납본 단계에서 두 번 검열을 받았는데, 일본인이나 외국인을 발행인으로 세우면 납본 검열 한 번으로 족했다. 대체로 이사진은 황해도 출신의 민족운동자가 다수였다.

이사로서 경영을 책임질 뿐 김원벽은 신생활사에서 따로 급여를 받지 않았다. 그는 1922년 3월부터 1923년 4월까지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의 서기로 일했다. 월수입은 60엔 정도였다. 직장이 따로 있었지만 김원벽은 『신생활』의 보급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22년 7월 6일부터 한 달간 신생활사의 지사 설치와 기사 모집을 위해 펑티엔(奉天), 창춘(長春), 하얼빈(哈爾濱), 다롄(大連)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잡지 『신생활』 창간호는 1922년 3월 11일에 발행 예정이었다. 신생활사는 3월 8일 창간호를 납본했는데 총독부는 치안방해를 이유로 창간호의 발매를 금지하였다. 신생활사는 어쩔 수 없이 문제된 기사를 삭제해서 임시호를 발행하였다. 창간호의 수난에서 알 수 있듯이 『신생활』의 운명은 순탄하지 못했다. 제4호(4월 11일)는 압수되었다. 제6호(6월 1일)도 발매금지 되어서 임시호로 나왔다. 제11호와 제12호는 발매금지, 제13호와 제14호는 압수되었다. 특히 러시아혁명기념 특집호로 발행한 제11호와 제12호가 크게 문제로 되었다. 12월 22일 검사국은 발매금지와 함께 사장 박희도,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과 유진희를 신문지법과 1919년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민족대표관할재판서 결정서
민족대표관할재판서 결정서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 불려서인지 방청객이 구름같이 몰렸다. 결국 『신생활』은 1923년 1월 8일자로 발행금지, 곧 폐간 처분을 받았다. 1월 16일에 열린 공판에서는 박희도에게 징역 2년 6개월, 주필 김명식에게 징역 2년, 기자 신일용과 유진희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했다.

신생활사는 「취지서」에서 자유와 평등의 신생활을 강조하였다. 개조와 혁신의 시대에 모든 인류가 누려야 할 권리이지만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자유와 평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는 개조를 필요로 하는데 사회의 개조는 인간의 개조를, 인간의 개조는 생활의 개조를 필요로 한다는 논리였다. 이 생활의 개조가 신생활이었다. 신생활은 주지(主旨)에서 밝힌 대로 평민문화의 건설과 자유사상의 고취를 통해서 이룰 수 있었다.

신생활사의 경영진은 기자들의 『신생활』 편집권을 인정하였다. 잡지 편집은 주필 김명식을 중심으로 기자 신일용, 이성태, 정백 등의 몫이었다. 그들은 조선에서 갓 등장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들은 신사상의 소개를 통한 자유사상의 고취를 모색했는데, 신사상의 중심은 막스주의였다. 그 외 크로포트킨과 슈티르너, 라파르그와 모리스 등을 소개했다. 이 사상들이 당대의 모순인 자본주의 체제 비판과 극복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은 이러한 활동 속에서 불거진 사건이었다.

경찰의 요시찰문서는 김원벽을 “배일사상이 치열하며 사회주의 숭배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 자”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의 행적이나 글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김원벽이 3·1운동 이전에 사회주의를 접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년 동안의 감옥 생활에서 사회주의와 만나기란 더욱 어렵다. 출옥 이후 김원벽은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는데 대부분의 강연 장소는 예배당이었다. 강연 주제도 거의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신생활사 이사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 주요한 직책도 맡았다. 1922년 3월 30일 승동교회에서 열린 예수교청년회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는 사교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박희도는 간사장이었다. 신생활사는 대표자 40여 명을 위한 초대회도 열었다. 5월 21일에는 승동교회의 면려청년회 창립총회에서 회장에 해당하는 통령(統領)을 맡았다.

시대일보 기자

『신생활』의 폐간 이후 김원벽은 종래처럼 강연 외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최남선이 새롭게 창간하는 시대일보의 창간에 합류하였다. 3·1운동으로 복역한 후 최남선은 1922년 9월 3일 타블로이드판 주간잡지 『동명』을 창간했다. 『동명』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1923년 6월 3일자 통권 40호를 끝으로 자진 정간하였다. 일간지를 발행하려는 최남선의 뜻이었다.

1923년 10월 김원벽이 시대일보 창립위원으로 서북지방 출장에 나섰다. 창립 주금(株金) 모집을 위한 출장이었다. 오랜 준비를 거쳐 시대일보는 1924년 3월 31일에 창간하였다. 편집·영업·서무의 3국 체제였다. 사장 최남선, 편집국장 진학문, 논설반 안재홍과 주종건, 정치부장 안재홍, 경제부장 김철수, 사회부장 염상섭, 지방부장 김정진, 학예조사부장 진학문, 정리부장 최원식, 공무부장 최일의 진용으로 편집국을 꾸렸다. 김원벽은 서무국의 경리부장을 맡았다.

시대일보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달리 1면을 정치면 대신에 사회면으로 꾸몄다. 1면에 일칼럼인 시평(時評)을 두고 미국 만화를 실었다. 편집에서 신선한 감각을 선보였지만 문제는 자본이었다. 창간 주역인 최남선과 진학문에겐 신문 경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이 없었다. 창간 당시 시대일보는 자본금 40만원을 모집할 계획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대일보 경영에 관한 건
시대일보 경영에 관한 건

운영자금에 쪼달리던 최남선은 창간 두 달 만에 신문 발행권을 보천교에 넘기는 계약을 맺었다. 『동명』 발행 때 졌던 최남선의 빚을 보천교가 갚아주고, 별도로 최남선과 진학문에게 1만원씩 준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사교(邪敎)로 여기던 보천교의 시대일보 인수 소식이 들리자 신문사내는 물론이고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사우회는 모든 계약의 무효화를 요구했고, 6월 25일에 사회유지 40여 명도 진상조사위원을 선정하였다.

하지만 보천교는 7월 9일자로 총독부에 발행인 명의변경 신청을 해버렸다. 이 때문에 보천교를 성토하는 여론이 들끓고 보천교성토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후 보천교와 사우회의 타협으로 9월 3일부터 신문을 속간했지만 경영은 안정되지 않았다. 분규는 여전했다. 이 와중에 김원벽도 시대일보를 떠났다. 1925년 소년주보(少年週報) 발행이 김원벽의 마지막 언론활동이었다. 이 기간 동안 김원벽은 장티푸스로 죽을 고생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병으로 인해 쇄골을 수술하여 오른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나마 해주 출신의 신여성 강고명(姜高明)과 결혼한 것이 위안이었다.

귀향과 선운동우회

연이은 언론활동 실패 탓인지 김원벽은 고향인 황해도로 귀향하였다. 1923년 12월에 열린 황해도민대회처럼 경성에서 활동할 때도 고향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에 정착한 김원벽은 1927년에 봉산청년회 혁신과 사리원차지인조합(借地人組合)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무엇보다 열심이었던 일은 생계를 위해 운영한 운송점과 선운동우회 활동이었다.

1927년 1월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승인운송점개정규칙초안」을 발표했다. 골자는 한 역에서 취급하는 화물 수량 아울러 납입금의 50% 이상을 점유하는 업소를 승인 운송점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보통 일역일점주의라 불렀다. 하나의 철도역에 하나의 화물 운송점만 두고 이 역 모두를 중앙에서 관리하도록 만드는 정책이었다. 이렇게 될 경우 아무래도 자본금이 많은 운송점이 주도권을 쥘 게 뻔한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인 운송점은 일본인보다 자본과 경영방식이 상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에 조선인 운송점이 입게 될 타격도 불을 보듯 했다. 그래서 조선인 운송점들의 조직체인 선운동우회가 철도국의 이 정책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일역이점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선운동우회의 전국위원회, 25일 오후2시에 위원회 열고 철저한 합동반대운동
일역이점제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한 선운동우회의 전국위원회, 25일 오후2시에 위원회 열고 철저한 합동반대운동

1927년 2월에 결정된 선운동우회의 입장은 일역일점주의의 반대였다. 그 대안으로 일역이점주의를 제시하였다. 한 역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운송점을 하나씩 두자는, 달리 말해서 민족별로 하나씩 배분하자는 입장이었다. 철도국의 일역일점주의가 종단합동이라면 일역이점주의는 횡단합동이었다. 김원벽은 사리원의 환사(丸沙)운송점 전무로서 1927년 7월에 선운동우회 횡단합동 실행위원 및 교섭위원을 맡아서 활약했다.

1928년 선운동우회에서 상무이사로 활동하던 김원벽은 4월 2일부터 발진티푸스로 치료를 받던 중 9일 오후 여섯시에 별세하였다. 장례는 선운동우회장으로 4월 11일 치러졌다.

金元璧氏 長逝, 그 부인은 단지까지해
金元璧氏 長逝, 그 부인은 단지까지해

정부는 김원벽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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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도현철 편, 2017, 『진리와 그 주변 Ⅱ - 서산 정석해 자료집』, 사월의책

ㆍ박형우, 2016, 『연세대학교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공존

ㆍ전택부, 1978,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정음사

ㆍ박종린, 2014, 「1920년대 초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新生活』」, 『史林』 49, 수선사학회

ㆍ이광린, 1986, 「구한말 평양의 대성학교」, 『동아연구』 10호,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ㆍ이용민, 2014, 「학생YMCA 운동의 거두 김원벽(1894 ~ 1928)」, 서울YMCA 엮음, 『YMCA 인물 콘서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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