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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종훈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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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이종훈 , 1856 ~1930 , 대통령장 (1962)

3.1독립선언문에 서명하였던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자였던 선생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북접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이후 손병희 선생의 천도교 창건 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고려혁명당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동학농민전쟁에서 북접 지도자로 활약하다

이종훈(李鍾勳, 1856.3.2 ~ 1931.5.2) 선생은 1856년 3월 2일 경기도 광주 실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동학에 입도한 것은 25살 되던 해인 1883년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학 지도자로서의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 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한다.

선생은 2차 봉기 때 경기도 광주 출신의 북접 지도자의 일원으로 손천민, 박인호 등과 함께 활약을 펼쳤다. 경기, 충청, 강원을 망라한 20여개가 넘는 포를 지휘했으며, 논산에서 남접 지도자 전봉준과 합류, 남북접 연합군을 만들어 동학군의 대본영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남북접 연합군은 이후 병영군과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지도자들은 이후 피신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선생 역시 손병희와 함께 충청도를 배회하며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한편 1897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피신 생활을 계속하던 최시형은 그 해 12월에 손병희에게 북접대도주의 도통을 전수하였고 이에 따라 손병희가 제3대 동학교주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민족 독립을 염원하며 3.1 독립 선언에 뛰어 들다

선생은 천도교 창건 당시부터 중앙총부의 고위 간부로 활약했다. 그리고 이후 191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종사장에 이어 도사실 최고직인 장로에 임명되었다. 명실상부한 천도교단의 최고 어른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1919년 천도교는 조직적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는데,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대표 중 천도교인은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은 천도교를 이끄는 핵심간부들로 모두 동학농민전쟁, 갑진개화운동, 대한협회 혹은 일본 유학생 단체의 간부로 활약한 정치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손병희는 천도교 기관의 총대표로, 권병덕은 천도교중앙총부 대표로, 최린은 보성학교 대표로, 이종일은 천도교월보사 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홍병기와 도사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등이 서명에 참여했다.

건국공로훈장
건국공로훈장
선생의 사진
선생의 사진

중앙교단의 장로였던 선생 역시 2월 25일 권동진과 오세창을 만나 그 자리에서 독립 선언 참가 제의를 받고 수락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선생이 최고령자였다. 3.1독립선언 이후 체포된 선생은 재판정에서 그는 판사가 “조선 독립에 대해 크게 갈망하고 있으며 한일병합에 극렬히 반대하였냐”고 묻자, “조선 민족으로 어찌 그 마음이 없겠소”라며 당당히 응수했고, “독립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선 민족이 자유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독립하려고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선생은 2년형을 선고 받았고 1921년 11월 4일에 출옥했다. 선생은 출옥 직후 천도교의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 1921년 12월호에 ‘복당강시(福堂降詩)’라는 장문의 한시를 실어 송구영신의 뜻을 빌어 자신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선생의 판결문
선생의 판결문

천도교 혁신파를 후원하며 민족 운동에 가담하다

한편 1920년대 초반 문화운동과 계급운동의 여파로 사회전반에 민주주의, 특히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는 시대풍조가 확산되면서 천도교 내에서도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독재에서 중의로’, ‘차별에서 평등으로’의 방향 전환을 촉구하는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혁신운동의 중심에는 최시형의 장남인 최동희가 있었다. 최동희는 ‘시대의 요구와 정의의 공론’이라는 취지를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지지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1921년부터 천도교의 제도와 인사에서 본격적인 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이에 선생은 천도교 내 혁신파를 지지하며 1926년 고려혁명당에서 활동하게 된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4월 5일 중국 길림에서 만주의 정의부 계열과 국내의 천도교 혁신파, 형평사가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선구격인 통일전선체였다. 고려혁명당이 국내외 조직의 연합, 합작을 통해 지향한 것은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 연대를 모색하는 민족유일당이었다. 천도교 혁신파의 영수였던 최동희가 바로 고려혁명당의 창당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고려혁명당에 참여한 혁신파는 최동희가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정치조직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간부들이었다. 선생은 고려혁명당의 고문을 맡아 활동하였다. 하지만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 사건이 터져 혁신파 간부 대부분이 투옥되고 최동희마저 1927년 1월 상해에서 폐병으로 사망함으로써 고려혁명당 내에서 혁신파의 위상은 완전히 무력화되고 말았다.

국립현충원에 위치한 선생의 묘
국립현충원에 위치한 선생의 묘

선생은 출옥 후에도 천도교 원로로서 교단 내의 역할을 수행하며 혁신파를 도왔으며 1931년 5월 2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에서는 선생의 죽음을 알리며 아래와 같은 기사를 실었다.

천도교의 장로로 또한 종법사 고문을 역임한 정암 이종훈씨는 금 2일 오전 3시 40분 향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 기미년 민족운동에 참가하였던 33인 중의 최고령자로 그는 본래 성정이 강직하여 한번 굳게 정한 뜻이라면 변한 일이 없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1년 5월 3일 자

한편 선생의 맏아들 이관영(손병희의 맏사위이자 소파 방정환의 큰 동서)은 일본 유학 중 경술국치 소식에 의분하여 귀국,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고 피신한 후 의병대장이 되어 일본군과 항전하다 용문산에서 25세 나이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손자 이태운 역시 보성전문 재학 시 3.1운동에 가담하였고, 증손자 이동성은 6.25와 월남전에 참여하였다. 현재 고손자 이재봉(현 육군 중령)과 그의 딸 이에스더(육군 하사)가 이를 이어 6대째 나라지킴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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