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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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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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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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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이춘영
, (1868) ~1896
, 독립장
(1963)
최욱영
, 1854 ~1919
, 독립장
(1977)
김도화
, 1825 ~1912
, 애국장
(1990)
이규홍
, 1877 ~1928
, 애국장
(199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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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근대 의병운동의 전개와 역사적 의미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을 중심으로 한 무장집단이 경복궁에 쳐들어와 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국모가 시해당한 충격에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폭발했다. 연이어 일본이 주도한 갑오개혁의 전개 과정에서 단발령이 시행되자 전국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결성되었다. 충청도 유성에서 문석봉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고 이 흐름은 전국 각지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의병부대원들의 모습(F. 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 1908)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이 조약의 불평등성과 국권 상실에 격분한 한국인들은 상소투쟁과 자결 등으로 맞섰다. 나아가 의병 지도자들이 전국에서 순차적으로 봉기하여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다. 1905년 8월 강원도 원주에서 원용팔이 주도한 의병이 봉기했고, 1906년 3월 홍주에서는 충청도의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이 봉기하여 홍주성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6월에는 개항반대 운동과 단발령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유림 최익현이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한편 영남지역에서는 평민 출신 신돌석이 1906년 4월 의병을 조직해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이 밖에도 노응규, 이강년, 고광순 등 다양한 의병부대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이러한 을사늑약 반대 의병운동은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무장투쟁이었으며, 평민 의병장의 등장으로 계급적 기반이 확대된 것이 특징이었다.
을사늑약에 반대한 의병운동의 주력부대들이 대부분 해산한 후 정국은 다시 급변했다. 일본이 1907년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해 내정 간섭은 물론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했기 때문이다. 저항의 도화선은 해산군인들의 전투였다. 해산군인들은 군대해산 과정에서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며 대일항전을 시작했고, 원주진위대를 비롯한 지방의 진위대들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해산군인들은 각 지역의 의병부대에 가담해서 전국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런 흐름에서 1907년 12월에 13도 창의대진소가 결성되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의병운동은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전국적으로 가장 왕성한 항일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일본군경은 이러한 의병운동에 대한 강력한 진압작전을 벌였고 특히, 1909년 9월경에 시작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은 당시까지 강력한 저항을 전개하고 있었던 호남의병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일제의 진압작전으로 인해 항일의병운동은 1910년부터는 전면적인 항일전으로서의 규모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의병장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넘어가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했고, 그 결과 의병운동의 성과는 독립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었다.
2. 이춘영 의병장의 활동
이춘영(李春永, 1868∼1896)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출신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우삼(友三), 호는 괴은(槐隱)이다. 영조 때의 판돈령부사 이기진(李箕鎭)의 5세손으로, 가문은 양평·여주·원주·제천 지역에 걸쳐 넓은 인척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민화(李敏和)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참판 민치문(閔致文)의 딸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곧 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자, 반일정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런 흐름에서 1896년 1월, 이춘영은 강원도 원주 안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나섰다. 이후 이춘영 의병 부대는 강원도 원주와 충청도 제천, 단양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특히 1896년 1월 22일 단양 장회협(長匯峽)에서 친위대와 의병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어 의병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제천의병 전투지인 충주관아(충청북도 충주시 소재)
이후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에 합류하였다. 이춘영은 그 휘하에서 중군장으로 임명되어 주요 전투를 지휘하였다. 주로 군사 작전과 병력 운용을 맡으며 호좌의진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원주와 충주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며 의병 세력을 유지하고, 항일 의지를 확산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1896년 2월, 충주 수안보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는 호좌의진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대표적인 전투로 꼽힌다. 그러나 치열한 교전 중 그는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전장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그의 희생과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올해 2026년은 그의 순국 130주년으로 더 뜻깊은 해로 볼 수 있다.
3. 최욱영의 의병운동 참여와 독립의군부 활동
최욱영의 독립의군부 관련 활동을 보도한 기사 (매일신보, 1915.6.25.)
최욱영(崔旭永, 1854∼1919)은 충청도 제천 출신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송산(松山), 호는 청계(淸溪), 이명은 권태준(權泰俊)이다.
1907년 8월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자 민긍호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했고 영월·횡성·제천·단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이강년 의진에 합류해 군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충주·제천·단양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의병부대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이후 1908년 귀향하여 권태준(權泰俊)으로 개명한 후 은신생활을 지속했다.
1910년 8월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자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에 합류하였다. 원주와 안동, 제천 일대에서 군자금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1915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결국 1919년 8월 1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김도화의 의병운동과 상소투쟁
김도화가 저술한 『주암산수기』 ⓒ독립기념관
김도화(金道和, 1825∼1912)는 경상도 안동 출신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이다. 1825년 9월 6일 안동군 일직면 구마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약수(金若洙), 어머니는 진양 정씨(晉陽 鄭氏)이다. 퇴계 학맥을 계승하던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1896년 1월부터 의병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안동 의병장이던 권세연이 물러난 뒤 후임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리고 격문을 발표하여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후 경상도 영주·예안·봉화·의성·청송 등지로 활동 범위를 넓히며 의병을 모집하였고, 서상렬 의진과 연계하여 일본군에 대응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지역 유생과 주민들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을 정비하며 의병운동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는 「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라는 상소를 통해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밝히고 국권 보전을 주장하였다. 이후에도 국정 상황이 악화되자 국권 회복을 요구하는 상소문과 격문을 계속 작성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이를 비판하는 「청물합방소(請勿合邦疏)」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통감부와 각국공사관에 격문을 전달하였다. 아울러 집 대문에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는 현판을 붙여 강제병합을 비판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1912년 8월 7일에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5. 이규홍(李圭弘)의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으로의 계승
의병장 오하 이규홍 기념비(전라북도 익산시 소재)
이규홍(李圭弘, 1877∼1928)은 전라도 익산 출신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이다. 1877년 6월 8일 전라북도 익산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지낸 이기영(李琪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히며 성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체결에 분노하였고,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의병 결성을 준비하였다. 1906년 6월에 의병 수십 명을 모집하여 전주로 떠났지만, 순창에서 의병이 패배하고 태인에서 거병한 최익현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해산시켰다.
이후 1907년에 박이환(朴駬桓)과 문형모(文亨謨) 등과 함께 의병 약 200명을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고산, 진안, 장수, 용담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고산 가금리 전투와 진산·금산 일대 전투 등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압박이 심해지고, 의병의 전력도 약화되어 1908년 4월 부대를 해산하고 은신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활동을 재개한 것은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직후인 1912년에 임병찬이 주도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1914년경 조직이 와해되면서 독립의군부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1918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1920년에는 김좌진이 추진한 군관학교 설립에 3,0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군 양성에도 힘을 보탰다.
1920년대 초에는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와 고문을 겪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의병 활동의 경과를 기록한 『오하일기(梧下日記)』를 남겨 당시 무장 독립운동의 실상을 전하였다.
이규홍의 활동은 의병운동에서 독립의군부 참여, 임시정부 지원, 군자금 모집에 이르기까지 무장 독립운동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이어간 사례로 평가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6. 한국 근대 의병운동의 역사적 의미
을미사변과 단발령, 을사늑약, 군대 해산으로 이어진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전개된 의병운동은 유생층을 중심으로 민중이 결합한 전민족적 저항이었다.
이춘영은 1896년 시점에서 원주, 제천, 단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단양 장회협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유인석의 호좌의진에 합류해 중군장으로 주요 작전을 지휘하며 원주와 충주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이후 유인석이 이끈 호좌의병에 참여해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김도화는 안동의병을 이끌며 영남 지역 유림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는 무장 활동과 함께‘창의진정소’와 격문을 통해 을미사변과 단발령,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상소로 제기하였다. 이후에도 안동과 경상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지원했으며, 통감부와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보내 일본의 한국강제병합을 외교적으로 공론화시키고자 하였다.
최욱영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민긍호·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제천·단양·충주 일대에서 전투와 조직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후 독립의군부에 합류하여 군자금 모집과 무기 확보에 힘썼고, 체포 이후에도 옥중에서 활동을 이어가다 순국하였다.
이규홍 역시 을사조약 직후 의병을 결성한 바 있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항일전투에 참여하였다.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합 이후에는 임병찬이 주도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했고, 독립의군부가 해산 되자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군관학교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의병장들의 다양한 활동은 의병운동과 독립의군부,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항일운동의 연속성과 발전상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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