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독립운동가
액자프레임
독립유공자 사진
2026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병기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0년

주요공적

조선어연구회를 결성, 일제의 한글 탄압에 맞서 한글문화운동 전개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내산재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병기 / 신명균

이병기 , 1892 ~1968 , 애국장 (1990) 신명균 , (1889) ~1940 , 애국장 (2017)

일제강점기 한글 운동과 조선어학회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한 조선 정부는 개혁 조치로서 ‘공문식(公文式)’을 선포한다. ‘국문을 본(本)으로 삼고 한문을 덧붙이거나 국한문으로 공문을 작성한다’는 공문서 쓰기의 원칙은 조선이 한문 글쓰기로 상징되는 중화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국제 질서로 진입하였음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보물 제2086호)ⓒ독립기념관
조선말 큰사전 원고(보물 제2086호)ⓒ독립기념관

그런데 국문, 즉 한글을 본으로 삼는 어문 생활은 통일된 어문규범을 갖춰야 가능한 것이었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쓰던 한글 표기를 통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907년 7월 정부가 주시경 등 당대의 저명한 어문 연구자들을 모아 국문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공신력 있는 어문규범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국문연구소의 연구위원들은 23차례의 회의 끝에 1909년 12월 어문규범의 기초가 될 최종 연구보고서인「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을 완성해 학부(지금의 교육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국문연구의정안」을 토대로 한 어문규범안을 공식화해야 할 시기에, 대한제국은 한일강제병합으로 식민지가 되었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 만든 최초의 어문규범안도 폐기되었다.

한일강제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조일(朝日)사전인『조선어사전』(1920) 편찬에 나서는 한편, 1912년「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공포하며 한글 쓰기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일본어 상용화 정책을 추진하는 조선총독부가 조선어 규범 정책까지 주도하는 상황에서, 주시경은 대한제국 국문연구소의 형태주의 표기법(뜻을 지닌 언어 단위를 일관되게 같은 형태로 적는 표기법)을 준용한 우리말 사전, 즉『말모이』 편찬에 나섰다. 이는 조선어 교육과 규범화는 조선인이 주도해야 한다는 선언이었지만, 주시경이 1914년 세상을 떠나면서,『말모이』 편찬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1921년 이병기와 신명균을 비롯한 주시경의 제자들은 조선어연구회(이후 조선어학회)를 설립하여 주시경의 뜻을 이었다. 조선어학회는 일본어 상용화 정책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한글을 보급하는 교육 사업을 벌였으며, 주시경의『말모이』를 잇는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전민족적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사전 편찬의 기초 사업으로, 주시경의 한글 표기법을 이어받은「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 사전 올림말 선정의 표준인「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 표기의 기준인「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0)을 완성·공표하였다.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1독회 종료 후 현충사를 참배한 조선어학회 위원들(1935.1.6.)ⓒ한글학회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1독회 종료 후 현충사를 참배한 조선어학회 위원들(1935.1.6.)ⓒ한글학회

조선어학회의 이러한 활동은 실질적으로 국가기관의 어문규범 제정 활동과 같은 것으로,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말과 한글이 국가 공용어와 공용 문자의 위상을 가져야 함을 웅변하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일본어 상용화 정책이 강화되는 국면에서, 독립운동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1936년 표준어 사정안 발표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어학회가 주최하는 모든 집회를 금지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결국 일제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을 일으켜, 조선어학회를 ‘국체(國體) 변혁을 도모한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해 해산하면서, 조선어사전 편찬에 관여한 인사들을 검거·투옥하고 조선어사전 원고를 압수하였다.

이병기의 한글수호운동

이병기(李秉岐, 1892∼1968)는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국문학자이자 시조 시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호는 가람(嘉藍)이다.

이병기는 한성사범학교 재학 중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조선어문법을 배우면서 주시경의 언어관과 민족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가 내린다”는 주시경의 사상에 감화된 이병기는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말은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마음과 정조가 우리말에 뭉치어 있다”는 신념으로 한글 수호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병기 생가ⓒ독립기념관
이병기 생가ⓒ독립기념관

이병기는 1921년에 일제강점기 한글 운동의 요람이었던 조선어학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 간사로 활동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강습회를 통해 한글을 보급했고, 한글날을 정해 한글의 우수성을 설파하며 민족적 자부심을 일깨웠으며, 한글 쓰기를 규범화하고 효율적으로 교육할 방안을 연구해 이를 조선어 교사들과 공유했다. 이병기는 1930년까지 간사로서 이 활동을 뒷받침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특히 조선어학회는 조선어 교과서의 표기법을 국문연구소에서 채택했던 주시경의 한글 표기법으로 바꾸는 데 전력을 다했는데, 이를 위해 이병기는 1928년 신명균 등과 교과서 표기법의 근본적인 개정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작성해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이 건의는 조선어학회가 조선총독부의 철자법 개량 논의에 참여하여 조선어 규범화의 주도권을 갖는 전환점이 되었다.

조선어학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병기의 활동 영역도 넓어졌다.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이자 편찬위원으로서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철자법 제정위원이자 표준어 사정위원으로서 한글맞춤법과 표준어 등 어문규범의 제정에 기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병기는 한글맞춤법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내고 이를 확산시키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어학회가「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공표하기 전부터, 이에 이견을 가지고 있던 연구자들과의 논쟁이 격화되었고, 이로 인해 맞춤법 제정 후 본격화해야 할 사전 편찬과 한글 보급 운동이 지연되었다. 이를 타개할 길은「한글 마춤법 통일안」에 대한 사회적 지지뿐인 상황에서, 이병기는 ‘조선어학회의 맞춤법 통일안을 준용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배격한다’는 문학인들의 성명을 이끌어냈다. 조선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인들의 1934년 7월 9일 성명은「한글 마춤법 통일안」이 사회적 권위를 얻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해방 후『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이 출간되었을 때, 조선어학회와 조선문학가동맹이 공동으로 사전 편찬 기념회를 열었던 데에서도 문학인들과 조선어학회 사이에서 가교가 되었던 이병기의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병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익산시에서 설립한 가람문학관 전경(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소재)ⓒ국가보훈부
이병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익산시에서 설립한 가람문학관 전경(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소재)ⓒ국가보훈부

1920년대 시조 부흥운동을 이끈 이병기는 시조 시인으로 명망이 높았지만, 그는 ‘말은 인간의 거울이고, 말공부가 없이는 좋은 작품을 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조선어 교육과 연구에 임했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조선어 교육이 날로 위축되는 상황에서, 조선인 누구나 조선어 문법을 알아야 한다는 신념으로,『조선강단』과『대중공론』에「조선문법강화(朝鮮文法講話)」(1929-1930)를,『가톨릭청년』에「조선어강화」(1933-1934)를 연재하였다.

이병기는 스승 주시경의 뜻을 이어받아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말과 한글의 보급과 발전 그리고 연구에 힘을 쏟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우리말에 담긴 우리의 마음과 정조를 주옥같은 시조로 표현했다. 우리 민족의 마음과 정조가 뭉쳐 있는 우리말이 없어지면 거기에서 비롯하는 사상과 문학도 없어진다고 믿은 그였기에, 우리말과 한글의 수호는 이병기에게 선택이 아닌 당위였다.

신명균의 한글수호운동

신명균(申明均, 1889∼1940)은 서울 출신의 국어학자이자 출판인이었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주산(珠汕)이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신명균은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조선어문법을 배우면서 우리말 연구의 뜻을 세웠고, 스승을 도와 조선어강습원 강사로 활동했다. 1921년 이병기, 권덕규, 정렬모 등 주시경의 제자들과 함께 조선어연구회(이후 조선어학회)를 창립했다.

신명균은 조선어 교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말 규범 확립을 위한 연구에 몰두하였고, 관습적 표기인 ‘ㅺ, ㅼ, ㅽ, ㅾ’을 ‘ㄲ, ㄸ, ㅃ, ㅉ’으로 바꿔야 한다는 논리를 제공하는 등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완성하고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1929년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언문철자법 회의에서 주시경의 형태주의 표기 원칙을 일부 관철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신명균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역할이 컸다. 신명균은 1930년부터 본격화한 조선어학회의 맞춤법 제정 사업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제정위원, 수정위원, 정리위원으로 참여했다.

신명균의 활동은 우리말 연구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우리말과 한글을 널리 보급하는 일과 한글 서적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일에 소명 의식을 가지고 신소년사와 중앙인서관을 경영하는 한편,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조선교육협회를 설립해 노동야학이나 농민학원 등에 교과서를 편찬해 주거나 형편이 어려운 고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신명균은 조선어 연구와 청소년 교육을 위한 잡지로『한글』,『신소년』 등을, 우리의 한글 문화 유산을 집대성한 기획물로『한글역대선』(1933),『조선문학전집』(1936-1937) 등을, 노동자·농민·부녀자들을 위한 순한글 신문으로『서울시보』(1934)를 발간하였다.

특히 신명균이 조선교육협회에서 펴낸『노동독본』(1928)은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노동자 교육 교재로 널리 활용되었다.『동아일보』(1929.2.1.)에는 이 책에 대한 독자의 독후감이 실렸고,『중외일보』(1929.11.15)는 사설(「노동독본」과 계몽운동)을 통해 이 책의 역할과 공헌을 평가했으며, 소설가 이광수는 “이 3권만 배우고 나면 족히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조선어문과 동시에 상식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도록 용의주도하게 편찬”(「근독이삼 近讀二三」,『동아일보』, 1929.12.14.)한 점에 주목했다. 한 권의 책에 대한 평가이지만, 이를 통해 신명균이 조선어 교육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동아일보』(1930.9.6.)는 신명균을 잡지와 교단에서 우리말 보급에 힘쓴 조선어문 공로자로 선정해 특별히 소개하였다.

신명균의 사진과 활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2년 11월 11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신명균의 사진과 활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2년 11월 11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이처럼 민족과 민중을 위한 활동에 몰두했던 신명균이었기에 그는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창간했던 잡지『신소년』은 카프문학 계열의 아동문학 잡지인『별나라』와 함께 검열로 인한 제재를 가장 많이 받았고 결국 1934년에 폐간되었다. 뒤이어『서울시보』가 1935년 1월 5일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 이후 전시동원체제가 본격화되면서, 민족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더 거세졌고 조선교육협회는 1938년 4월 강제 해산되었다. 또한 일제는 조선인에게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조선어 말살 정책을 노골화하였다, 급기야 조선어학회마저 ‘국민총력 조선어학회 연맹’으로 명칭을 바꾸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것이 우리말 규범 사업과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완결하기 위한 조선어학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알았음에도, 신명균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1940년 11월 20일 자결로써 저항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글수호운동의 역사적 의미

조선어학회가 주도했던 일제강점기 한글 운동은 한일강제병합으로 단절되었던 대한제국의 어문 규범화 사업을 잇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따라서 조선어사전 편찬, 맞춤법과 표준어 제정 등의 제정과 이를 보급하는 과정은 근대 국가의 국가 공용어 정립 과정 그 자체였다.

그러나 국가 공용어의 규범은 국가의 권위를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일본어가 유일한 국어였던 식민치하의 현실에서,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한글 운동을 용납하지 않는 막다른 상황에서, 신명균은 이에 저항해 자결했고, 이병기는 한글 운동을 이끌던 동지들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투옥되었다.

조선어학회 회관 터(서울특별시 종로구 소재)ⓒ국가보훈부
조선어학회 회관 터(서울특별시 종로구 소재)ⓒ국가보훈부

해방을 맞고 나서야 조선어학회는 비로소 국어의 규범을 제시하고 국어 교육을 설계하는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가 일제강점기에 온갖 난관을 뚫고 완성한 어문규범안과 이를 토대로 편찬한 사전은 해방 후 국어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 중, 해방되자마자 곧바로 고유의 말과 문자로 국어 생활의 기준을 제시하며 국민 교육을 실시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이룬 한글수호운동의 성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일제강점기 한글수호운동은 독립 국가 건설을 준비했던 문화독립운동이었다.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와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이달의 독립운동가 목록 > 이병기(관리번호:1481)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
이전달 다음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