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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2026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선경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2012년

주요공적

숙명여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 참여

구국민단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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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경 / 조화벽 / 김향화

이선경 , 1902 ~1921 , 애국장 (2012) 조화벽 , 1895 ~1975 , 애족장 (1990) 김향화 , 1897 ~미상 , 대통령표창 (2009)

1. 3.1운동, 백두에서 한라까지 울린 만세소리

1919년 새해 벽두 덕수궁에서 고종이 승하했다. 그는 근대화와 외세의 침략 속에 줄다리기를 타며 예순여섯 해를 살았다. 고종의 마지막은 평온하지 못했다. 일제에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번졌다. ‘고종 독살설’은 일제의 무단적 식민통치로 움츠러든 한국인들의 항일심을 솟구치게 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중 선포되었던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세계대전의 사후처리를 위해 열리고 있던 파리강화회의는 한국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었다.

2월 1일 설날 전후로 천도교계에서는 만세운동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조소앙 등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월 8일에는 도쿄(東京)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선언서」를 낭독했다. ‘2.8 독립선언’이었다. ‘2.8 독립선언서’는 일본 주재 각국 공사와 국회, 조선총독부 등에 발송되었다. 낭독 직후 60여 명이 체포되는 가운데 김마리아가 「2.8 독립선언서」를 숨겨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 민족대표 33명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2월 27일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이종일의 책임 아래 독립선언서 약 2만 1,000매가 인쇄되었다. 2월 28일부터 독립선언서가 천도교 지역교구와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전국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기미독립선언서ⓒ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미독립선언서ⓒ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전국으로 배포되는 가운데 서울, 평양, 선천, 안주, 원산 등 10여 개의 도시에서 만세소리가 울려퍼졌다. 직후 조선총독부는 만세운동을 ‘시가지의 단순한 시위’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3월 3일 개성, 3월 4일 수원, 3월 6일 인천 등 경기도를 비롯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계획, 전개되었다. 이렇듯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한복판에 이선경, 조화벽, 김향화가 있었다.

2. 이선경, 비밀 구국운동에 투신하다

1902년 5월 경기도 수원면 산루리(현재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 살고 있는 이학구(李學九)는 둘째 딸을 얻었다. 부모는 딸을 이애기(李愛基)라 불렀다. 이선경(李善卿)이라는 이름은 1916년에 개명한 것이다. 이후 수원공립보통학교(현재 수원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18년 4월 상경해서 사립 숙명여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숙명여학교 2학년 재학 당시 3.1운동이 일어났다. 3월 1일 서울, 평양 등 전국 10여 개의 도시에서 천도교계 교구와 기독교계 학생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각 도시 중심지의 대로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서울에서는 보름 가까이 만세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곳에 이선경이 있었다. 3월 5일 아침 8시경 남대문역 앞에서 각급 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시민들도 합류했다. 수천 명의 군중은 일제 경찰의 저지를 뚫고 남대문시장, 조선은행, 종로 보신각 등으로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대한문 앞에 대기 중이던 일제 경찰은 군중을 향해 돌격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수백 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이선경도 동지 학생들과 체포되었다.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15일간 구류되었다가 3월 20일 ‘무죄’로 방면되었다. 이후 9월 1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덕수궁 대한문 앞의 3.1운동 모습ⓒ독립기념관
덕수궁 대한문 앞의 3.1운동 모습ⓒ독립기념관

1920년 6월 경성여고보 3학년 재학 중 비밀결사인 구국민단(救國民團) 조직에 참여했다. 수원 서호(西湖) 근처에서 수원 삼일여학교 교사 차인재(車仁載)의 소개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최문순(崔文順), 휘문고등보통학교 박선태(朴善泰) 등을 만났다. 이들에게 독립운동 동참을 권유받고 구국민단에 가담해 구제부장으로 활동했다. 구국민단 총장은 박선태, 교제부장은 차인재, 재무부장은 최문순이 맡았다. 이들은 ‘첫째 독립 국가 조직, 둘째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유족 구조’를 목적으로, 7월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수원 읍내의 삼일여학교에서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했다. 이때 이선경은 『대한민보(大韓民報)』 등 항일신문 배포를 담당하기로 했다. 또한 기회를 보아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에 이바지할 것을 맹세했다. 이를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이 필요했다. 8월 9일 이선경은 상하이로 가기 위해 수원을 출발했지만 서울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강도 높은 심문과 지독한 고문은 해를 넘기도록 계속되었다. 1921년 4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이른바 ‘제령(制令) 제7호’를 위반한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수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갖은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 해 4월 21일, 이선경은 풀려난 지 9일 만에 수원에서 순국했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조화벽, 개성에서 양양으로 만세운동을 잇다

개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조화벽은 개성에 있던 호수돈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895년 10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상왕도리에서 감리교 전도사였던 조영순(趙英珣)과 전미흠(全美欽)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부모의 독실한 신앙생활 아래 자랐으며, 기독교계인 원산의 성경학교와 루씨여학교(일명 원산여학교)를 졸업하고 호수돈여학교에 진학해 공부하던 중이었다.

1919년 2월 28일 오화영(吳華英) 등 기독교계 목사들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개성에 전달되었다. 남감리교 북부예배당 지하실 석탄저장소에 숨겨져 있던 독립선언서를 호수돈여고보 부속유치원 교사였던 권애라(權愛羅)와 호수돈여고보 기숙사에 거주 중이었던 예수교 전도사 어윤희(魚允姬), 신관빈(申寬彬) 등이 호수돈여고보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곧장 학생 17명은 만세운동 실행을 결의하고 학생들을 규합해 갔다. 80여명의 학생들이 독립선언서에 연달아 이름을 쓰고 동참을 서약했다.

3월 1일 아침 호수돈여고보 학생들은 식당에서 기도를 마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하지만 교장의 제지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일제 기마부대가 학교 정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3월 3일 아침 조화벽은 학교 동기들과 함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헌병대 앞에서 보란 듯 태극기를 흔들며 소리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가 되자 송도고등보통학교 등 개성 읍내 중등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봇물처럼 몰려들며 합류했다. 1,000~2,000명의 군중은 읍내 일대를 행진하며 ‘독립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이 헌병대 운동장으로 연행되자 이를 보고 분노한 만세군중들이 헌병대 정문을 밀치고 들어와 거세게 항의했다. 헌병대는 학생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기숙사에 갇혔다. 3월 5일 만세운동 저지를 위해 휴교명령이 내려지면서 학생들은 귀향해야만 했다.

3월 말 조화벽도 본가인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빈손은 아니었다. 그의 버선 속에는 독립선언서가 있었다. 기차를 타고 원산을 거쳐 속초 대포항에 도착했을 때 일제 경찰에 다른 소지품을 압수당했지만 독립선언서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 조화벽은 독립선언서를 감리교회 청년부원이자 면사무소 급사로 있던 김필선(金弼善)에게 전달했다. 김필선은 동창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조화벽이 전달한 독립선언서가 양양 3.1운동을 견인한 것이다.

임천리 최인식(崔寅植) 등과 뜻을 합해 준비 중이었던 만세운동은 4월 3일 저녁 양양군수 이동혁(李東赫)의 급습으로 22명이 체포되고 370여 매의 태극기를 압수당하는 등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피신했던 김필선, 김재구, 최인식 등 주도자들은 만세운동 실행에 박차를 가했다. 이튿날인 4월 4일 아침 양양 읍내로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조화벽도 양양읍 장터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만세군중은 전날 연행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제 경찰에 맞섰다. 군중의 강한 저항에 일제 경찰은 총을 발포하며 무력을 행사했고 이로 인해 권병연(權炳淵) 등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명학교 여학생들과 조화벽(앞줄 가운데)ⓒ독립기념관
정명학교 여학생들과 조화벽(앞줄 가운데)ⓒ독립기념관

4월 중순 조화벽은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양구로 피신했다.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잦아들자 개성으로 돌아가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고 공주 영명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공주에서 영명학교 교사 황인식(黃仁植)이 돌보고 있던 유우석(柳愚錫)·유관순(柳寬順)의 두 동생 관복(寬福)·관석(寬錫)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1923년경 유우석과 혼인해 1925년 첫 아들을 낳으며 혼인신고를 했다. 그는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두 시동생 관복·관석, 세 아들 제충(濟忠)·제덕(濟德)·제인(濟仁)을 양육했다.

조화벽은 일상과 가정을 돌보면서, 동시에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원산여자기독청년회, 원산 해원상구회에 참여하였다. 아울러 공주 영명학교는 물론, 서울 배화여학교, 원산 진성여학교, 양양 정명학교 등에서 열성적으로 후진을 양성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4. 김향화, 수원 기생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다

수원에서는 김향화가 기생조합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김향화는 기명(妓名)으로, 행화(杏花)로 불리기도 했다. 본명은 김순이(金順伊)였다. 1897년 7월 서울에서 김인영(金仁永)과 홍금봉(洪今鳳)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으나 일찍 수원으로 이사했다.

15세가 되었을 무렵 궁핍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홀아비 정도성(鄭道成)에게 시집을 갔으나, 3년 후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생활은 더욱 막막해졌다. 생계 방편을 찾아야 했다. 결국 가족 부양을 위해 기적(妓籍)에 ‘향화(香花)’라는 이름을 올렸다. 그는 검무, 승무, 궁중무용 등 각종 전통 춤뿐만 아니라 가사, 시조, 경성잡가 등 각종 소리에도 출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8년 발행된 『조선미인보감』에 실려 ‘수원기생의 꽃’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엿새 뒤인 1월 27일 수원 기생 20여 명을 데리고 상경했다. 이들은 소복을 입고 짚신을 신은 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통곡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도 3월 4일부터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수원에서는 만세운동이 정보 누설로 인해 계속 좌절되고 있었다. 드디어 3월 25일 수원읍내를 시작으로 송산면 사강리를 비롯해 수원군 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김향화는 선배 기생 서도홍(徐桃紅)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수원기생조합 기생들에게 은밀히 연락하며 동지들을 규합해 갔다. 30여 명이 동참했고 뜻을 모아 3월 29일을 거사일로 결의했다.

그 날은 일제 경찰의 강압 아래, 수치심과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는 정기 성병검사가 자혜병원에서 실시되는 날이었다. 자혜병원은 주요 기관이 밀집한 수원 읍내에 있었기 때문에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일제 경찰의 의심을 피하며 읍내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원 기생 만세운동 공판을 보도한 매일신보의 기사(1919.6.20.)
수원 기생 만세운동 공판을 보도한 매일신보의 기사(1919.6.20.)

3월 29일 김향화와 동지들은 이미 제작해 둔 태극기를 숨기고 자혜병원을 향해 나아갔다. 병원 앞에 다다른 30여 명의 기생들은 태극기를 높이 치켜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곧장 병원을 나와 수원경찰서 앞으로 향했다. 군중이 모여들었다. 상인, 노동자, 기독교인 등 300여 명이 넘는 군중이 읍내 각지에서 만세를 고창했다.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고 관공서를 파괴하는 등 강렬하게 시위했다. 일제 경찰은 18명을 체포했다.

이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도 체포되었다. 2개월 동안 고강도의 심문을 당하고 기소되었다.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김향화는 개성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권애라와 함께 같은 감방에서 옥고를 치르며 권애라에게 ‘개성 남봉가’, ‘평양 수심가’와 같은 타령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는 10월 27일 가석방으로 서대문감옥을 나왔으나, 일제의 감시로 더이상 기생을 할 수 없었다. 생계유지조차 곤란했기에, 1934년 김우순(金祐純)으로 개명하고 이듬해 서울로 이사했다. 하지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5. 만세운동을 견인해 낸 여성들

일제강점기 여성은 피식민인에 대한 일제의 핍박을 견디면서, 동시에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국권(國權)을 잃어버린 ‘조국’ 앞에 민족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여성들이 있었다.

3.1운동 태극기ⓒ안성 3.1운동 기념관
3.1운동 태극기ⓒ안성 3.1운동 기념관

이선경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비밀결사에 참여해 구국활동에 헌신하였다. 조화벽은 개성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양양 만세운동을 이끌어냈다. 수원에서는 김향화가 멸시와 천대를 받던 기생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획·주도했다.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위생’을 앞세운 일제의 비인간적이며 폭압적인 통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3.1운동 당시 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학생들과 기독교계 여성들은 만세운동 계획과 준비과정에서 독립선언서 전달, 태극기 제작, 동지 규합 등을 담당해 만세운동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참여주체를 확대하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와 역량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민족차별적 식민교육에 저항했고, 농민ㆍ노동자들은 수탈적 노동 요구에 강경 대응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비밀결사가 활발히 조직되었으며, 독립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청년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로 나아가 독립군이 되었다.

이렇듯 1919년 봄 한라에서 백두까지 울려 퍼진 만세소리는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 최전선에 이선경, 조화벽, 김향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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