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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도창의군의 탄생 배경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우리 민족은 의병을 조직하여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박은식은, “의병이란 민군(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마다 즉각 의로써 분기하여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중략)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이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의병이 오로지 의(義)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 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1905년 이후 전국에 걸쳐 확산되었다. 전국의 크고 작은 강과 산, 너른 들판과 마을마다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는 의병의 총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 정규군도 아닌 의병이 왜 일제의 침략을 막아야 했을까.
일제는 20세기 벽두부터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정치·경제·군사적 침탈을 자행했다.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자주 국가의 상징인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1907년 일제의 국권 침탈을 세계에 호소하려 했던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정미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1주일 후 약 1만명 남짓의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듯 정치·군사적 침략을 자행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장으로 삼아 대한제국의 주권과 국토를 유린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켜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또한 전국의 주요 항구와 도시의 번화가, 비옥한 농토와 어장, 산림 등 경제적으로 유망한 자원을 약탈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생존권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국민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에 투신하였다. 이 의병이 망국의 위기에 처한 국가와 식민지 노예로 전락할 민족을 구하기 위해 불굴의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하지만 의병은 전국 각지에서 분산되어 일제 군경과 싸웠기 때문에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체포되거나 전사한 의병이 계속 늘어났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의병 지도자들은 힘을 하나로 모아 일제의 핵심 거점을 단숨에 공략하는 전략을 모색하였다.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각각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이인영과 허위 등의 주도로 전국적인 연합의진이 편성되었으니,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그것이다. 이를 계기로 집결한 의병을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라 한다. 13도창의군의 총대장에 추대된 이인영은 허위를 군사장으로 삼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통감부를 타도하기 위한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2. 관동창의군을 기반으로 13도창의군 조직
1907년 후반 수많은 의병부대가 일제 군경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을 하나의 의병부대로 조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때 일제가 강제로 단행한 군대해산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서울의 대한제국 시위대(侍衛隊)는 해산에 반대하며 숭례문 부근에서 공방전을 벌이다 중과부적 및 탄환의 부족으로 지방에서 활동 중인 의병에 합류하였다. 또한 수원을 비롯한 8개 도시에 주둔한 진위대 8개 대대의 해산군인 상당수도 인근에서 활동 중인 의병에 가담하였다.
당시 일제는 ‘해산 당시 폭동을 일으키지 않은 자까지도 해산 후 폭도가 되어 한국 각지를 교란하여 일본인의 피해가 심하고 수 년 사이에 한국의 지방은 모두 이 해산병의 폭도화에 의해 위험지역으로 변했다.’라고 판단하는 등,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여 대규모로 활동했음을 인정하였다.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군대해산은 의병항쟁의 전국적 확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해산군인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전국의 상당수 의진들이 지휘부를 개편하고 전략과 전술을 새롭게 정비하여 항일투쟁을 강화했다. 특히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도(道)와 산천(山川)을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상략) 황해도 의병은 장단 의병장 김수민과 연락하고, 김수민은 철원 의병장 전 참위 김규식과 연통하고, 김규식은 적성 마전 의병장 허위와 상통하고, 허위는 지평 가평 등지 의병장 이인영과 통섭하고, 이인영은 제천 등지의 이강년과 원주 등지 의장 민긍호로 상통하며 같이 모의한다 하고 (하략)
-대한매일신보<국문판> 1907. 11. 28.「지방소식」(현대문으로 수정)
위 신문기사를 통해 평안·황해·경기·강원·충북 등 중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허위·이인영·이강년·민긍호 등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합전선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국 각지의 의진을 하나로 통일하자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러면 전국적 연합의진은 누가 처음으로 제기한 것일까. 아마도 이은찬과 이구채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강원도 원주를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1907년 음력 7월 하순 이들은 경북 문경에 은거 중인 이인영을 찾아가 자신들의 구상을 피력하였다. 이인영은 경기도 여주의 이름난 양반 유생이었다. 그는 1896년 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이 주도하는 제천의진에 합류하였다. 고종의 해산 명령에 불복한 유인석이 만주로 이동하자, 그는 문경 산중에 은거하며 정세를 관망 중이었다. 이구채는 당시 이인영 의진의 종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인영과는 잘 아는 사이였으며, 이은찬 역시 이인영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이인영은 고심 끝에 두 사람의 제안을 수용한 후 원주로 이동하였다. 그는 원주에 의병원수부(義兵元帥府)를 설치하고 관동창의대장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인영은 강원도를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을 사방에 보냈다. 그의 글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경기도 일대에 널리 알려진 유학자였고, 1896년 봄 의병으로 신망을 얻은 데다 이은찬과 이구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황제의 밀칙(密勅)을 받았다고 알려진 점도 작용한 것 같다.
이인영은 서울에 있는 각국 영사관과 <대한매일신보>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킨 목적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1908년 3월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신문인 The San Francisco Call Bulletin에 게재된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대한관동창의장((大韓關東倡義將) 이인영’의 「격고재외국동포문(檄告在外國同胞文)」이 보도된 것이다. 이 신문은 한국의 의병항쟁을 ‘성전(聖戰, Holy War)’이라 표현하였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적인 일본인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교활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모든 일본인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국과 야만적인 일본군을 모조리 죽이는 데 힘을 다해야 한다.
광무 11년 9월 25일
- 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영(「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영 등이 발포(發布)한 격문에 관한 건」, 1908. 4. 5.)
이인영은 격문을 통해 의병을 일으킨 목적을 간명하지만 감동적인 내용으로 전 세계에 전달하였다. 해외 동포의 지원을 촉구하고, 세계의 여론을 한국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이인영이 국제적 안목을 갖추었음이 드러난다.
1907년 11월 당시 이인영이 이끄는 관동창의군의 조직은 아래와 같다.
관동창의군의 편제
이인영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3개 의병부대를 관동창의군이란 단일 조직으로 통합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강원도 출신으로 원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이었다. 그 가운데 원주진위대 특무정교로서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가 대표적이다.
이 무렵 경기도에도 여러 의병부대가 활동 중이었다. 그 중심인물은 단연 허위였다. 그는 경북 선산 출신의 유명한 유학자였다.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자행하자 의병을 일으킨 바 있었다. 그 후 일제의 국권침탈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40대의 늦은 나이에 관직에 입문하였다. 1900년대 중반 이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등 고위 관료의 반열에 올랐다.
관동창의부의 주요 지휘부가 기록된 「폭도에 관한 편책」
이후 일제의 주권침탈에 분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배일(排日) 언론활동과 황무지 개간 및 일진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조약 늑결 소식을 전해 듣고 망국 위기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가산을 정리하여 경기도로 떠났다.
당시 그는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라는 비밀 조칙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일본은 임진년 이래로 한국인의 적이 되어 수십년 전부터 각지에 침입 횡행하니, 일인과 혼거(混居)하면 한국 인민이 멸망에 이를 것인 고로 인민을 구제하고자 의병을 모집하오니 전곡과 물품을 힘에 맞춰 기부하라”는 격문을 사방에 보냈다. 허위는 13도 국민과 각국 영사관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대한매일신보>에도 격문을 게재하여, 의병항쟁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07년 9월 그는 경기도에서 활동 중인 김규식, 연기우 등 여러 의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에 나섰다.
한편, 이인영의 관동창의군은 경기도 지평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16개 의진 약 8천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그는, “용병(用兵)의 요결은 고독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데 있은즉, 각 도 의병을 통일하여 둑을 무너뜨리는 기세(潰堤之勢)를 이루어 근기(近畿) 지방으로 쳐들어가면 천하는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인영 등은 지평에서 두 달 동안 의진을 정비한 후 양주로 이동하였다. 이때 경기도에서 활동하던 허위를 비롯한 여러 의병부대도 양주로 집결하였다. 총 48개 의진, 약 1만 명으로 규모가 증가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 2천 명, 이인영의 관동창의군 1천 명 등 강원도 의병이 약 6천 명, 경기도의 허위 의병부대 2천 명, 충청도의 이강년 의병부대 5백 명, 황해도의 권중희 의병부대 5백 명, 평안도 방인관 의병부대 80명, 함경도의 정봉준 의병부대 80명, 전라도의 문태수 의병부대 100명 등 총 1만명이었다. 이 가운데 해산군인이 3천명으로, 의병의 핵심 전력을 구성했다.
이인영은 허위 등과 함께 연합의진의 명칭을 13도창의대진소로 정했으며, 그는 13도창의대진소의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의진의 의병을 통괄하여 13도창의군이라 한다. 그는 지휘부와 상의하여 각 도별로 의진의 명칭을 정하고, 의병장을 임명하였다.
13도창의대진소의 편제
13도창의군의 주 병력은 강원도를 기반으로 하는 이인영과 민긍호가 이끄는 관동창의군과 경기·황해도를 무대로 활동하는 허위가 이끄는 의병부대였다. 충북과 경북에서 주로 활동하던 이강년 의병부대가 이들을 뒷받침하였다.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인 연합의병부대임을 표방하여 활동한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3.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1907년 11월 전국의 의병들이 이인영의 격문에 호응하여 경기도 지평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지평 일대 여러 곳에 주둔하며 군수품과 군자금을 조달하며 전열을 정비하였다. 지평에는 모이는 의병들이 8천 명에 이르렀으므로 일제도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13도창의군 역시 군사적 요충지에 20∼30명씩 보초를 세우고서 일본군의 기습에 대비하였다. 일제는 원주수비대를 비롯한 서울의 중대 병력 등 수백 명을 투입하여 이들을 공격하였다.
의병과 일본군은 지평군 삼산리에서 11월 7일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수십 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그 중 삼산전투에서는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 지평의 마전에서도 의병 1천여 명과 일제 군경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경기도 지평에 주둔한 13도창의군의 활동을 보도한 기사(황성신문, 1907년 11월 11일자)
13도창의군은 3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전술을 익히는 등 역량을 강화하였다. 특히 이인영이 이끄는 관동창의군은 원주-제천-양근-지평을 거쳐 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전투력 향상은 물론 병력의 보강과 군수품 확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08년 1월 이인영과 허위 등이 이끄는 48개 의진, 1만여 명의 13도창의군은 장사진(長蛇陣)을 이루었다. 이들은 일제의 통감부를 공격목표로 삼아 서울진공작전을 펼치기 위해 진격하였다. 13도창의군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통감부를 점령하여 일제 당국과 외교적 담판을 벌여 조약을 파기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인 ‘오적칠간(五賊七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즉 을사5적과 정미7적을 처단한 후 의병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부의 구성을 목표한 것이다. 이인영은 이미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영사관에는 일본의 불의(不義)를 성토하는 한편, 의병을 국제법상 전쟁단체로 인정하고 성원해달라는 통문을 보낸 바 있었다. 요컨대, 서울진공작전의 목표는 일제 통감부 타격, 일제와 맺은 조약의 파기, 친일정부의 축출, 의병주도의 신정부 수립이었다. 특히, 열강의 지원을 받아 일제 통감부와 담판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3도창의군의 총대장 이인영은 군사장 허위의 선발대 300명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서울진공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군사장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같이 준비하여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었다. 이에 모든 의진에 전령하여 일제히 진군을 재촉해서 동대문 외곽으로 나아가니 대군(大軍)은 장사(長蛇)의 세(勢)로 천천히 진격하게 하고 씨가 3백 명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진을 치고서 전군의 집결을 기다려 일거에 경성을 공격해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전군의 래집(來集)은 시기를 어기고 일본군이 졸지에 공격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後援)이 이르지 않아 퇴진(退陣)하고 말았다.
-「의병총대장 이인영씨의 약사(속)」(<대한매일신보> 1909. 7. 30.)
군사장 허위의 선발대는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고, 13도창의군의 본진은 장사진을 형성하여 나아갔다. 그런데 군사장 허위의 선발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 탄환 부족과 후속부대의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부득이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허위 의진의 핵심 인물인 김규식과 연기우가 탄환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이때가 1월 중순 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인영의 본진 약 2천 명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하여 통감부 공격을 눈앞에 두었다. 하지만 음력 12월 25일(1908.1.28) 이인영은 부친이 사망했다는 궂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대대로 유학을 존숭해온 그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귀향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을 13도창의군에 알리는 한편, 군사장 허위에게 후사(後事)를 위임한다는 통문을 보낸 후 귀향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진공작전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고, 사방에서 달려온 의병들은 본래의 활동 지역으로 돌아갈지를 고민해야 했다.
일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특히, 13도창의군의 핵심전력인 민긍호 의병부대를 격파하기 위해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민긍호 의병장이 전사하였다. 즉, 1908년 2월 말 민긍호는 일본 군경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 체포되었는데, 그 부하들이 의병장을 탈환하기 위해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이 도주를 시도했다는 핑계로 민긍호를 총살한 것이다. 의병장을 잃은 의병들은 다른 의병부대로 옮겨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허위는 제2차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는 임진강 유역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조인환, 권준, 왕회종 등의 의병장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13도창의군을 재정비하였다. 의병의 모집과 군사훈련, 무기와 화약의 조달, 군표(軍票)의 발행을 통한 군수물자의 확보, 엄격한 군율을 통한 민폐 금지, 국내외 정세 파악 등에 주력한 것이다. 또한 일제의 재정 확보를 위한 세금 및 미곡 반출 금지 활동을 펼침으로써 주민의 생존권 보호에도 앞장섰다.
1908년 4월, 그는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 등의 의병장 연명으로 의병의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을 13도에 발송하였다. 이인영으로부터 위임받은 13도창의군 의병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제2차 서울진공작전이 있으리라는 소식에 일제는 서울에 2개 연대 병력을 증파하여 의병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서울 외곽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으나, 제2차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13도창의군의 전투역량이 대규모 일본군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활동 중인 수많은 의병부대 역시 일제의 강화된 방어선을 뚫고 서울로 집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의병의 심각한 피해를 우려한 허위는 제2차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할 수 없었다.
같은 해 5월 허위는 고종의 복위와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철폐 등을 명시한 30개 조항의 요구서를 통감부에 제출하고, 언론사에도 전달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3도창의군이 통감부와 담판을 벌일 때 제시하려는 요구사항이었을 것이다. 통감부와 담판하기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그는 13도창의군의 요구사항을 통감부에 전달하는 한편, 자신들의 목표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얼마 후인 6월에 경기도 영평에서 체포되어 서울의 헌병사령부로 이송되었다. 그 후 평리원을 거쳐 경성공소원에서 심리를 거부한 끝에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고위 관료 출신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의병장의 의로운 순국이었다.
4. 13도창의군의 계승과 의의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은 당시 의병의 목표와 염원을 결행한 연합의진의 눈부신 성과이다. 이에 일제는 13도창의군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민긍호 의병장은 전사했으며, 허위 의병장은 집요한 회유를 물리치고 의병항쟁을 계속하다가 1908년 6월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강년 의병장도 같은 해 7월에 체포되어 순국했으며, 이은찬 의병장도 1909년 3월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상중(喪中)에 있던 이인영 총대장 역시 일제 군경의 집요한 추적 끝에 1909년 6월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처럼 13도창의군의 핵심 지도부는 1908∼1909년 사이에 항일투쟁과 암중모색 중에 모두 순국하였다.
13도창의군이 시도한 전국적 연합의진과 서울진공작전은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먼저 13도창의군은 최초로 편성된 전국적 연합의진이었다. 당시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는 대체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개별적 의병항쟁이 일제의 군사력을 분산시킨다는 장점도 컸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국권을 완전히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전략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전국 연합을 시도하였다는 점이 큰 의미를 지닌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들은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밀한 연락체계를 구축하거나 연계하여 일제 군경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연합전선의 구축이나 의진 간 연계 전략은 후기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음으로 서울진공작전의 목표가 통감부와 외교적 담판을 위한 군사활동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실제로 13도창의군은 일제의 국권침탈을 국제적인 분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각국 영사관에 일본의 불법성을 성토하는 통문을 보내어 일본과 체결한 조약의 국제법상 불법임을 호소하였다. 일본의 군사적 침략의 야만성과,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의병들의 활약상을 전 세계에 알렸던 것이다.
항일의병 13도창의군 탑(서울특별시 중랑구 소재)
그리고 허위가 통감부에 제시한 30개 요구사항은 의병들의 인식이 근대적으로 전환해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이 전국적 연합의진을 편성해서 서울진공작전을 결행한 것은 의병항쟁의 인식 발전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병항쟁이 1908년에 가장 치열하게 전개됨으로써 일제의 식민화를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나아가 13도창의군은 1910년 6월 연해주의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결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13도의군은 13도창의군의 염원이 담겼음을 알 수 있다. 1896년 봄 유인석은 이인영과 함께 제천의병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그 후 유인석은 독립운동 근거지를 해외에 구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인영이 주도한 13도창의군의 활동과 그후 체포되어 순국한 전말을 들었을 것이다. 유인석은 이인영의 못다한 꿈을 해외에서 계승하기 위해 13도의군을 조직한 것으로 추측된다. 국내에서 조직된 13도창의군의 정신이 해외의 13도의군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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