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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규모 학생운동으로 민족적 차별 중지, 식민지 교육 철폐 등을 요구한 민족 항일운동

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의 정점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의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1930년 3월까지 전국에서 전개된 학생운동을 뜻하며, 3.1운동 및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구체적으로, 192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나주역에서 조선인·일본인 학생들 사이의 충돌이 발단이 되어 11월 3일 광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 학생들 중심의 조직적 시위로 발전하고, 이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 각지로 확산된 대규모의 장기간 학생운동을 뜻한다. 따라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 할 때 ‘광주의 학생들이 전개한 운동’이 아닌 ‘광주에서 시작된 전국적 학생운동’으로 보는 것이 옳다. 현재 11월 3일이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1919년 3.1운동이라는 각계각층이 망라된 거족적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이후 국내 독립운동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갔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의 구별 없이 참여했던 3.1운동과는 달리 학생·청년이 독립운동에 나서는 비중이 커졌고, 학교라는 합법적 공간에서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교육에 맞서며 동맹휴학의 형태로 일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우발적·즉흥적이 아닌 계획적·조직적인 형태로 학생운동을 발전시켰다. 2026년 100주년을 맞는 6.10만세운동이 대표적 사례이며, 이후 독서회 등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하며 성숙되고 강화된 역량을 바탕으로, 2029년 100주년을 맞는 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의 정점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1920년대 동맹휴학의 전개와 독서회의 조직

1920년대 학생운동의 일반적 형태는 동맹휴학(이하 ‘맹휴’)이었으며, 6.10만세운동을 전후하여 그 성격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전까지 맹휴의 원인은 교장 및 교사의 배척, 교수(敎授) 방법 및 교과 과정의 시정, 학교 시설의 확충, 학교의 승격 등 주로 교내 문제였다. 반면 그 이후에는 노예교육 철폐, 조선역사의 교수, 교내에서의 조선어 사용, 학생회의 자치 허용, 언론집회의 자유 보장 등이 원인으로 등장한다. 즉 6.10만세운동 이전의 맹휴가 식민교육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이후는 식민교육은 물론 식민통치 자체에 대한 투쟁과 저항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사상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대해 일제는 맹휴의 증가 원인을 “민족의식 및 좌경사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광주고보의 경우 1923·1924·1927·1928년 맹휴가 이어졌는데 이는 전국의 관·공립학교 중 최다였다. 이밖에 공립학교인 광주농업학교(이하 ‘농업학교’)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여고보’), 사립학교인 숭일학교, 초등교육기관인 광주공립보통학교와 광주사립보통학교에서도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성진회 조직 기념ⓒ독립기념관
성진회 조직 기념ⓒ독립기념관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 학생 9명과 농업학교 학생 7명이 사회과학연구를 위한 비밀조직인 성진회를 결성했다. 일제는 그 목적을 “일본제국의 통치권을 배척하고 조선을 독립시키며 또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제 사회의 실현”으로 파악했는데, 주목할 만한 활동 없이 1927년 2~3월에 해산되었다.

하지만 1927년 11월 성진회 출신 농업학교 학생들이 사회과학연구를 위한 비밀결사인 독서회를 조직했고, 광주고보에서는 1928년 10월, 전남사범학교(이하 ‘사범학교’)에서는 1929년 3월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소비조합 창립을 계획하는 등 교류를 지속했다. 1928년 11월 광주여고보에도 흔히 ‘소녀회’로 알려진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이처럼 1929년 11월 이전에 광주의 중등교육기관인 광주고보·광주여고보·농업학교·사범학교 모두에 비밀결사인 독서회가 조직되었으며, 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급속한 전개와 전국적인 확대를 견인했다.

1929년 10월 30일의 나주역 사건

양동주, 『광주학생독립운동사』, 1956
양동주, 『광주학생독립운동사』, 1956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의 조·일 학생간 충돌부터 11월 광주·목포·나주에서의 맹휴·시위까지를 1단계, 12월 서울 학생들의 맹휴·시위를 2단계, 1930년 1~3월 전국적 맹휴·시위를 3단계로 구분한다. 즉 그 서막을 장식한 것이 1929년 10월 30일 이른바 ‘나주역 사건’이다. 그날 오후 광주역에서 출발하여 나주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내린 광주중학교(이하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고보 조선인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고 희롱했으며, 이에 격분한 광주고보 학생이 일본인 학생과 시비가 붙어 양측 학생들의 난투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1956년 발간된 양동주의 『광주학생독립운동사』에서 ‘댕기머리’가 처음 언급되었고,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가 1960년 기고한 「광주학생사건 여학도 투쟁기」(『동아일보』 1960.11.3.)에서 다시 거론되었으며, 사건 당사자의 1969년 회고인 「독립시위로 번진 한일학생 충돌」(『신동아』 1969.9) 이후 정설로 굳어졌다.

다만 정말로 ‘댕기머리’ 희롱이 있었는지, 그것이 아닌 다른 형태의 일본인 학생들의 시비 혹은 그로 인한 갈등이 있었는지는 세부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나주역 사건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촉발시킨 점은 분명하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

나주역 사건의 여파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튿날인 10월 31일 통학열차에서 다시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중학 학생들이 충돌을 빚었으며, 11월 1일 광주역에서 양측 학생들이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이처럼 광주고보 학생들의 불만과 분노는 최고조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3일, 이 날은 일요일이자 메이지[明治] 일왕 생일인 명치절이었고, 전라남도 누에고치 생산[産繭] 6만석 돌파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음력으로 개천절이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가뜩이나 일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터에, 민족의 축일인 개천절 대신 일왕의 생일과 일제의 수탈을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에 등교를 해야만 했다.

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시경 수기옥정 우편소 앞에서 광주중학 학생들과 시비가 붙어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 경위 역시 자료 및 연구에 따라 달리 나와 정확한 진상 파악이 어려운데, 수세에 몰린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역 방면으로 달아난 점은 분명하다. 조선인 학생들이 이들을 뒤쫒았고, 광주역 앞에서 대규모의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경찰과 교사들은 물론 소방조까지 출동하여 겨우 사태를 무마시켰고, 광주고보로 돌아온 학생들은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곤봉·장작·배트 등을 들고 가두시위에 나섰으며, 광주여고보·농업학교·사범학교 학생들도 동참하여 교가와 운동가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학생들이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거나 치료를 받았다.

학생 충돌로 물 끓듯 하는 광주(동아일보 1929년 11월 5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학생 충돌로 물 끓듯 하는 광주(동아일보 1929년 11월 5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광주고보 당국은 11월 4일부터 3일간 휴교령을 내렸고, 경찰은 조선인 학생들을 검속하여 조사했으며, 조선인들의 집회를 일체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12일 다시 가두시위에 나섰고, 농업학교 학생들도 합류했으며, 광주여고보·사범학교 학생들도 동참하려 했으나 정문이 폐쇄되어 무산되었다.

이날 학생들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생대중아 궐기하자!」와 일반을 대상으로 한 「조선민중아 궐기하자!」라는 격문을 제작하여 살포했는데, 식민교육은 비판하면서도 식민통치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은 아직 담기지 않았다. 11월 12일까지 경찰은 학생 72명을 검거하여 62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11월 목포와 나주에서의 학생시위

11월 19일 조·일 학생 공학인 목포공립상업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이 동조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살포된 격문에는 일제 식민통치와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 치안유지법 폐지 요구, 제국주의 전쟁 반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특히 11월 12일 광주의 학생시위 때보다 사회주의적 성향이 짙고 식민교육뿐 아니라 식민통치 자체를 부정한 점이 주목된다.

이날 시위로 학생 32명과 신간회 목포지회 간부 및 청년동맹원 10여명이 경찰에 검속되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11월 22일 다시 가두시위에 나섰고, 학생 4명이 검거되었다.

11월 27일 나주에서는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신간회 나주지회 청년들의 지도를 받아 거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였고, 16명이 검거되었다.

12월 서울과 지방에서의 학생시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이름없는 별들’의 한 장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다룬 영화 ‘이름없는 별들’의 한 장면

서울에서는 11월 30일부터 중등학교 대표들이 접촉하며 시위를 준비했고, 12월 2~3일 격문이 살포되었다. 그리고 12월 5~8일 중등학교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으며, 9일 대규모 연합시위에 나섰다. 이에 놀란 일제는 경찰 2,000여 명 등을 동원하여 1,200여 명의 학생들을 검속했다. 그럼에도 10~16일 중등학교 학생들이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으며, 12일 경성의학전문학교·법학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 전문학교 학생들도 동참했다. 지방에서는 개성·동래·원산·춘천·평양·함흥 등지에서 학생시위가 이어졌다.

1930년 1~3월 서울과 지방에서의 학생시위와 해외로의 확산

1930년 1월 9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인 광주에서는 광주고보·광주여고보·농업학교 학생들이 시험 때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는‘백지동맹’으로 학교 당국과 맞섰고,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1월 27일 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광주학생독립운동 명예졸업대장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광주학생독립운동 명예졸업대장

서울에서는 1월 10일~2월 20일에 걸쳐 시위가 이어졌는데, 1월 15~17일에 집중되었다. 최소 26개교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며, 중등학교가 가장 지속적인 활동을 벌였고, 그 중 13개교가 여학교였다. 전체적으로는 17일 이후 소강 상태에 들어갔는데, 이는 주도층이 검거되고 일제의 경계망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경기도 5개교, 강원도 7개교, 충청남도 13개교, 충청북도 9개교, 전라남도 18개교, 전라북도 16개교, 경상남도 28개교, 경상북도 7개교, 평안남도 39개교, 평안북도 15개교, 함경남도 22개교, 함경북도 27개교, 황해도 9개교 등에서의 학생시위가 확인되는데, 실제로는 더 많은 학교가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소식이 해외 한인사회에 알려지자 이들도 국내의 상황을 주시하며 동조 시위에 나서는 등 동참했다. 중국 관내에서는 상해·북경·천진, 만주에서는 간도·길림·봉천·하얼빈, 일본에서는 동경,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미주에서는 하와이, 그리고 쿠바에서 그 같은 사례가 확인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규모와 역사적 의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와 학생의 수에 대해서는 파악이 쉽지 않으며, 자료나 연구에 따라 달리 나온다. 일제측 자료에는 149개교 또는 194개교에서 54,000명이 참여했다고 나오며, 근래 조사나 연구에서는 320개교나 250개교로 집계되기도 한다. 최근 연구에서는 보통학교 100개교, 실업학교 36개교, 각종학교 45개교, 고등보통학교 38개교, 보습학교 16개교, 전문학교 8개교, 시범학교 1개교, 기타 6개교 등 250개교로 집계되었다.

피해자 규모는 일제측 자료에 따르면 퇴학 526명, 유시퇴학 49명, 무기정학 2,330명 등 2,900여 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리고 1929년에 2,399명이 구속되어 675명이 송치되고 이들 중 213명이 기소되어 103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930년에는 3,095명이 구속되어 872명이 송치되고 281명이 기소되어 97명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과시한 것은 물론, 일부 분열되어 있던 해외 한인사회가 단합하고 민족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동기를 부여했다. 또 1930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현지 민족운동가들을 고무시켰다.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상당수가 1930년대 청년운동·농민운동·노동운동 등에 투신하여 민족운동을 지속했다.

따라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30년대 민족운동을 촉진하는 계기이자 그것을 수행하는 인적 자원이 양성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0년대에서 193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일어난 민족운동 발전의 전환점이자 분수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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