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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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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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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두
이한구
, 1870 ~1907
, 독립장
(1963)
손영각
, 1855 ~1907
, 독립장
(1980)
최산두
, (1888) ~1926
, 애국장
(2017)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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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과 산남의진의 결성
1905년 11월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전국 곳곳에서는 국권을 되찾기 위한 의병운동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경상북도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었다.
산남의진의 결성에는 고종의 측근이었던 정환직(鄭煥直)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환직은 고종의 밀명을 받은 뒤 아들 정용기에게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정용기는 1905년 12월 영천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정진한(鄭鎭漢)·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경고문과 통문(通文)을 각지에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경상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유생, 농민 등이 모여들었다. 1906년 3월 정용기를 대장으로 하는 산남의진이 결성되었다. ‘산남(山南)’은 문경새재(조령) 남쪽, 즉 영남을 뜻하였다.
산남의진의 진용은 의병대장 정용기를 중심으로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진한, 후봉장 서종락(徐鐘洛), 좌익장 정치우(鄭致宇), 우익장 정래의(鄭來儀) 등으로 구성되었다. 처음부터 군사 조직의 형태를 갖춘 비교적 큰 의병부대였다.
산남의진 결성지 충효재(경상북도 영천시 소재)ⓒ독립기념관
산남의진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분도 다양하였다. 지도부에는 유생들이 많았지만 병사층에는 농민을 중심으로 진위대 출신 군인, 포수 등 여러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산남의진은 영천에서 결성되었지만 청송(靑松), 청하(淸河), 영덕(盈德), 영해(寧海) 등 경상도 동북부 지역을 연결하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궁극적으로는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북상하여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영해에서 활동하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와도 연락하며 서로 협력하였다. 산남의진은 지역 의병부대였지만 처음부터 다른 지역 의병부대와의 연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북상 계획은 순탄하지 않았다. 1906년 4월 28일 정용기가 경주진위대의 계략에 빠져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정용기는 중군장 이한구에게 의진의 지휘를 맡기고 경주로 갔다가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었다. 의병대장을 잃은 산남의진을 임시로 통솔한 사람은 중군장 이한구였다.
산남의진을 지킨 중군장 이한구
이한구는 1870년 9월 16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江東面) 양동리(良洞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지평리(芝坪里)로 옮겨 살았다. 본관은 여강(驪江)이며, 자는 한유(漢有), 호는 지포(芝圃) 또는 신성재(新省齋)이다.
정용기와는 선대부터 집안 사이의 교분이 깊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용기·정진한·손영각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한구는 1906년 3월 산남의진이 결성되자 의병부대의 핵심 병력을 지휘하면서 의병대장을 보좌하는 중군장에 선임되었다.
이한구는 정용기가 경주진위대에 체포되자 산남의진을 이끌었다. 그는 산남의진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정용기를 구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신돌석 의진의 도움을 받아 경주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정용기가 이미 대구로 이송된 뒤였기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한구는 남은 의병을 이끌고 청송 주왕산(周王山)으로 이동한 뒤 영덕, 강구(江口), 청하 등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청하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에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말의병 항왜혈전 기념비(경상북도 포항시 소재)ⓒ국가보훈부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압박은 계속 강해졌다. 정용기의 구금이 길어지고, 일본군 병력의 증가, 신돌석 의진과의 연대 어려움 등이 겹치면서 산남의진은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결국 이한구는 1906년 여름 의병들에게 정용기가 돌아오면 다시 일어날 것을 약속하고 산남의진을 일시 해산하였다.
한편, 정환직의 노력으로 정용기가 풀려난 뒤 산남의진은 다시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들어갔다. 1907년 4월 정용기를 의병대장으로 산남의진이 재결성되었고 이한구도 다시 중군장을 맡았다.
재기한 산남의진은 이전보다 조직을 강화하였다. 군인 출신들이 의진에 참여하면서 전투력도 높아졌다. 산남의진은 청하, 청송, 영천, 신성(薪城), 자양(紫陽) 등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7년 7월에는 청하를 공격하였다. 이후 신성에서도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산남의진은 신돌석 의진과 정보를 교환하며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였고, 동해안과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의병 활동을 펼쳤다.
산남의진이 계속 전투를 벌인 이유는 단순히 영남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강릉 방면 북상을 실현하기 위해 길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기와 탄약의 부족, 일본군의 추격 등으로 북상은 계속 지연되었다. 1907년 가을 산남의진은 강릉으로 향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에 들어갔다. 본진은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立巖里, 梅峴)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산남의진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입암전투(立巖戰鬪)가 벌어졌다.
참모장 손영각과 입암전투
손영각은 1855년 4월 9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내숙(迺叔), 호는 낙산(樂山)이며 본관은 월성(月城)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손영각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참모장이 되었다. 참모장은 의병대장을 보좌하여 의진의 작전과 운영에 관여하는 직책이었다.
1906년 산남의진에 참여한 손영각은 의진이 잠시 해산된 뒤에도 의병의 뜻을 꺾지 않았다. 1907년 4월 산남의진이 재결성되자 곧바로 참여하여 참모장 직임을 이어갔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한 후 의병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해산 군인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의병부대의 조직력과 전투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산남의진도 해산 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전투력 측면에서 강화되었다.
산남의진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이어가면서도 강릉 방면으로 북상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용기와 이한구, 손영각 등 지휘부는 북상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는 한편, 일본군의 동태를 주시하였다. 1907년 가을, 산남의진 본진은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매현) 일대에 주둔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면 입암리로 진입했다는 정보가 포착되었다.
정용기는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우재룡(禹在龍)·김일언(金日彦) 등에게 각각 병력을 주어 일본군의 퇴로에 매복하게 한 뒤, 본진이 공격을 개시하면 퇴각하는 일본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의병부대가 이동 중 일본군을 먼저 발견하고 공격을 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일찍 전투가 시작되었다. 총성을 들은 정용기·이한구·손영각 등 본진 지휘부도 급히 입암으로 나아갔다. 어두운 밤에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고, 산남의진은 일본군의 진영을 집중 공격하였다. 한동안 반응이 없자 의병들은 일본군이 퇴각하거나 전멸한 것으로 판단하고 잠시 전열을 가다듬으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매복한 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산남의진이 방심한 틈을 타 일본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으니, 이것이 산남의진 최대 비극인 입암전투이다.
산남의진 전투지(경상북도 포항시 소재)ⓒ국가보훈부
입암전투에서 산남의진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의병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 지휘부가 한꺼번에 전사하였다. 산남의진은 지도부가 사실상 붕괴하는 치명상을 입었으나, 이것이 완전한 종말은 아니었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정환직이 직접 의병대장을 맡아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하고 산남의진을 재건하였다. 이들은 청송 보현산(普賢山)과 영일 북동대산(北東大山) 등을 거점으로 삼아 청하, 흥해(興海), 신녕(新寧) 등지에서 의병전쟁을 이어나갔다.
최산두와 산남의진의 유격전
정환직이 산남의진을 이끌며 의병전쟁을 지속하였지만 그 역시 1907년 12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순국하였다. 정환직이 순국한 뒤에도 산남의진은 사라지지 않았다. 1908년 2월 최세윤(崔世允)이 새로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최세윤 의병장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산남의병을 이끌었다. 이 시기는 일본군의 병력이 크게 늘고 의병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면서 의병부대를 한곳으로 집결시켜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 때였다. 이에 산남의진은 의병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여러 지역에 배치하였다.
의진 본부는 남동대산을 중심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고, 분산된 각 부대는 청송, 영천, 영덕, 흥해, 포항(浦項), 경주, 울산(蔚山), 영양(英陽) 등 여러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각 지역 의병부대는 본부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고 필요한 때에는 상호 협력하였다. 특히, 산남의진은 경상도 동북부 산악지대를 적극 활용하였다. 산악지대는 일본군 대규모 병력의 이동을 제약하고 의병의 은신과 유격전에 매우 유리하였다.
한편, 최산두는 이 무렵 산남의진에 가담하였다. 그는 경상북도 흥해군(興海郡) 서면(西面) 학림동(鶴林洞) 출신으로 산남의진 제3대 의병장 최세윤의 장남이다. 이명으로 최산립(崔山立)이라고 불렸다.
최산두는 산남의진에서 주로 군자금 및 군수물자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산남의진은 일본군의 지속적인 탄압 작전으로 무기와 탄약, 식량이 크게 부족한 상태였기에, 최산두는 이를 시급히 해결하고자 하였다.
제4차 산남의진 결성지인 거동사(경상북도 영천시 소재)ⓒ독립기념관
그리하여 1908년 음력 3월 19일 흥해군 신광면(神光面) 우각동(牛角洞)에서 군수금을 모집하였다. 4월에는 신광면 천상리(川上里)에서 군자금을 마련하였으며, 5월에도 우각동과 죽동(竹洞) 등지에서 군수물자 모집활동을 이어갔다. 6월에는 청하군 죽장면 감곡동(甘谷洞)과 석양동(夕陽洞)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최산두는 이처럼 군수물자 모집 활동을 이어가던 중 일제 헌병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모진 심문을 받은 후 재판에 넘겨진 그는 1908년 9월 30일 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로부터 이른바 ‘폭도죄’로 종신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직후 시행된 대사령으로 풀려났다. 출옥 후 고향에서 생활하던 최산두는 1926년 5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산남의진이 남긴 의병전쟁의 의미
산남의진은 1906년부터 1908년까지 여러 차례 조직을 정비하며 의병전쟁을 이어간 의병부대였다. 처음에는 을사늑약의 체결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봉기하였다. 이후 정용기의 체포, 입암전투에서의 지휘부 전사, 정환직의 순국이라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그때마다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 의병전쟁을 지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한구와 손영각은 산남의진의 창의 및 재기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용기가 체포되었을 때 이한구는 산남의진을 대신 이끌었고, 손영각은 참모장으로서 정용기를 보좌하며 산남의진의 작전과 운영에 참여하였다. 두 사람은 1907년 9월 입암전투에서 정용기와 함께 순국하였다.
그러나 산남의진의 의병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환직이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의병전쟁을 이어갔고, 그가 순국한 뒤에는 최세윤이 제3대 의병대장으로 나섰다. 최산두는 이러한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군자금과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활동을 펼쳤다.
산남의진의 활동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지역적 한계를 넘어 다른 의병부대와의 연대를 적극 추진하였다는 사실이다. 산남의진은 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돌석 의진과 연락하며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였다. 또한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하여 관동 지역과 합류한 뒤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북상 계획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과 무기·탄약 부족으로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산남의진의 관동 북상 계획은 이후 전국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추진한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과 맥을 같이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산남의진은 전술 면에서도 유연한 변화를 보였다. 초기에는 비교적 대규모 병력을 결집하여 정면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일본군의 병력이 증강되고 탄압이 가혹해진 1908년에는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여 산악지대를 활용한 유격전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의병들이 군사적 상황에 맞추어 전술과 조직을 능동적으로 변혁하며 의병전쟁을 이어갔음을 입증한다. 산남의진에는 유생뿐 아니라 농민·해산 군인·포수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특히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에는 해산 군인들이 참여하여 병사들의 훈련과 실전 전투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아울러 산남의진에는 이전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다시 참여하였다. 이는 1896년 을미의병,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이 완전히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인적·사상적으로 연결되어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한구·손영각·최산두의 활동 시기는 서로 달랐다. 이한구와 손영각은 산남의진이 창의하고 재기하는 초기·중기 과정에서 활동하였고, 최산두는 앞선 지도부가 순국한 후에도 지속된 산남의진의 항쟁에 참여하였다. 세 사람의 활동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독립운동사적 흐름으로 연결된다. 국권이 침탈당하는 위기 속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동료가 순국한 뒤에도 다시 조직을 수습하며, 일제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새로운 전술로 맞섰던 것이 바로 산남의진의 역사였다.
산남의진의 의병전쟁은 국권 회복 운동이 어느 한 사람이나 특정 세대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앞선 이가 쓰러지면 다음 이가 그 뜻을 이어받았고, 각 지역과 다양한 신분이 연대하면서 항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이한구·손영각·최산두를 비롯한 산남의진 의병들이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역사를 이어간 이들의 연대의식와 숭고한 책임 의식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산남의진의 의병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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