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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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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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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범
문석준
, 1894 ~1944
, 애국장
(2017)
성기석
, 1920 ~1990
, 애족장
(1990)
홍익범
, 1897 ~1944
, 애족장
(1990)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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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언론 통제 속에서 전쟁의 실상을 전한 단파방송
20세기 전반 제국주의 열강들은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대립하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연합국과 파시즘 세력 간 전쟁의 승패는 식민지의 독립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일제가 일으킨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일제 식민통치하 한국인의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하였다.
1940년 8월, 일제의 언론 통제에 의해 한국인이 발간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당했다. 일제가 신문을 폐간시키고 전쟁의 승패를 감출수록 한국인들에게는 전쟁의 실제 상황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절실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전쟁의 추이와 군사 기밀에 관한 정보를 ‘말을 통해’ 서로 공유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유언비어(流言蜚語)’로 단속하였다.
‘유언비어’를 통해 전해진 일제의 패전과 패망에 관한 정보와 기대감은 한국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이른바 ‘불온 언동’을 막기 위해 외국에서 방송되는 단파방송을 차단하려 하였다. 단파(短波)는 먼 곳까지 도달할 수 있기에 장거리 방송에 유용했고, 단파수신기를 통해 청취할 수 있었다. 일제는 정보를 차단하고자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직후 외국인 선교사들이 소지하고 있던 단파수신기마저 압수하였다. 이 때문에 방송국 기계를 활용할 수 있는 방송국 근무자나, 단파수신기를 몰래 조립한 수신기 제작자만이 단파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다.
전시체제기 국제정세와 전쟁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중국과 미국에서 송출한 단파방송을 통해 국내에 전파되었다. 사람들은 비밀리에 충칭 중앙광파전대(中央廣播電臺)의 한국어 방송과 미국에서 제작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의 한국어 방송을 들었다. 이 방송을 통해 일제의 언론 통제 때문에 알 수 없었던 해외의 독립운동과 일본군의 전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나아가 이러한 정보들은 비밀리에 ‘말을 통해’ 국내 한국인에게 전파되었다.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독립기념관
중국으로부터의 단파방송은 1939년 3월 시작되었고, 1940년부터 식민지 조선에도 전해졌다. 목요일 1회로 시작한 방송은 점차 주 3회로 늘어났다.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번갈아 직접 방송에 등장했으며, 대한애국부인회의 간부들도 매주 1회씩 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들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상황과 세계정세를 알리고 애국심을 호소하였다.
미국으로부터의 단파방송은 진주만 습격 이후인 1942년 8월부터 시작되었다. 방송 책임자는 에드윈 웨이드 쿤스(E. W. Koons)로, 그는 선교사 출신으로 경신학교 교장직을 역임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강요받자 교장직을 사퇴하고 1942년 5월 말 미국으로 추방당한 인물이었다. 한국어 방송 아나운서는 당시 재미 유학생 중에서 선발되었고, 이승만도 방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문석준 : 미국의 소리 전달과 확산에 기여한 역사학자
문석준은 함경남도 함주 출신이다. 함흥공립보통학교를 나와 1912년 4월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15년 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부터 1923년 1월까지 약 8년간 고향인 함흥의 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4월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고 1928년 3월 졸업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동경유학생학우회 편집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고, 방학 등을 이용하여 국내로 들어와 수시로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3월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서울의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1931년 8월까지 근무하였다. 1933년 2월 조선일보사에 들어갔다. 조선일보사 근무를 전후하여 한국의 역사를 서술한 『조선역사』와 『조선역사연구』를 집필하였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송출한 베서니 중계소의 모습ⓒ국립 미국의 소리 박물관
그는 단파방송의 내용을 통해 해외 독립운동의 동향을 알게 되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홍익범이 방송 관계자를 통해 확보한 단파방송의 내용이 문석준에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미국의 소리’에서 방송한 ‘미국이 승리하고 조선이 곧 독립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문석준은 전해 들은 정보를 혼자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주위의 동료와 지인들에게도 알렸다.
1943년 4월 중순 함흥에서 한설야(韓雪野)에게 “미국에서의 방송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이승만 일파가 미국 정부의 원조를 받아 조선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승만이 그 대통령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이번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돌아가면 반드시 독립은 실현될 것이므로 한반도의 동포들은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전쟁이 장기화되면 물자가 풍부한 미국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그때 방송의 내용처럼 독립은 실현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같은 달 같은 내용을 이증림(李增林) 등에게도 전달하였다.
결국 위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단파방송 수신과 확산 경위에 대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1943년 10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전시(戰時)에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造言飛語)’를 하였다는 이유로, 이른바 「육군형법」 및 「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44년 1월 21일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출옥 이튿날인 1월 22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끝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석준의 공훈을 기려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성기석 : 단파수신기의 제작 및 전황 정보의 전파자
성기석은 1920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1940년 경성중앙방송국에 기술직으로 근무할 때 몰래 단파수신기를 제작하였다. 당시 단파수신기는 민간인에게 판매되지 않았고 심지어 수거의 대상이었다. 그는 일부 부속품을 직접 만들고 수신기를 제작하여 베를린, 런던, 로마 등 해외에서 송출된 단파방송을 듣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중앙방송국의 모습ⓒ수원광교박물관
1941년 봄 새벽 4시 30분 성기석은 자신이 제작한 수신기를 통해 중국 충칭에서 보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어 단파방송을 청취하였다. 전황과 국제정세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약상을 소개한 김규식(金奎植)의 방송이었다. 매주 목요일 새벽에 진행된 방송을 듣고 그 내용을 부친과 친구에게 전했다.
성기석의 단파방송 청취는 영어 뉴스와 해설을 듣던 방송국 관계자 이이덕(李二德)과 연결되었다. 이이덕은 미국에 유학하여 전자공학을 전공한 인물로, 잠시 귀국하였다가 미일 관계가 나빠지자 국내에 체류하면서 방송국에서 일하게 된 인물이었다. 성기석은 자신이 청취한 사실을 이이덕과 공유하였으며, 이이덕은 성기석을 통해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처음 알게 되었다. 성기석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 외에 2대의 단파방송 수신기를 따로 제작해서 이이덕 등에게 제공하였다.
성기석은 1942년 8월 개성방송소로 전근하면서, 당시 개성방송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이덕과 재회하였다. 이곳에서 미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어 방송을 통하여 연합군의 승전과 광복군의 활동 등 국제정세를 수시로 청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부친을 통하여 이인(李仁), 조병옥(趙炳玉) 등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12월 27일 일제 경찰에게 단파방송 수신 사실이 발각되어 경성 및 개성방송국 직원들과 함께 붙잡혔다.
라디오 수신에 사용된 조선방송협회 보급형 3호 수신기ⓒ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일제는 수신기를 제작하고 중국과 미국으로부터의 방송 내용을 청취하고 전파한 성기석의 활동에 주목하였다. 성기석은 사건의 핵심 관계자로 지목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194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무선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예정일을 40일 정도 남긴 16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성기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익범 : 단파방송 정보를 다양한 민족운동세력에게 전한 제공자
홍익범은 1897년 3월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났다. 1918년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1924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6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1931년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외교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업에 매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카고동지회 회장으로서 민족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귀국 후 1933년 10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1940년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특히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국제관계와 정치·외교 등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였다. 동아일보가 폐간된 후에는 에드윈 웨이드 쿤스를 통해 전쟁의 전황 및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러나 1942년 5월 일제가 쿤스를 추방하자, 해외 정보 입수 경로가 단절되고 말았다.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방송국 터ⓒ독립기념관
홍익범은 정확한 국외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해외로부터의 단파방송을 청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경성중앙방송국 편성과 직원을 동지로 포섭하여 해외 단파방송의 내용을 다시 입수할 수 있었다. 직원을 통해 청취된 ‘미국의 소리’와 중국 충칭 방송의 내용은 먼저 송남헌(宋南憲)에게 전해졌고, 뒤이어 홍익범을 거쳐 마침내 국내 민족운동가들에게 전달되었다.
홍익범은 단파방송을 통해 얻은 정보를 크게 세 계열의 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첫째, 1942년 7월부터 1943년 3월까지 『동아일보』 관계자들에게 전쟁 정세와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전하였다. 둘째, 민족주의 계열의 송진우(宋鎭禹), 김병로(金炳魯), 이인(李仁) 등에게도 정보를 제공하였다. 송진우는 이를 바탕으로 1944년 안재홍과 함께 일제의 패전을 전망하며 독립을 준비하였다. 셋째, 사회주의 계열과 중도파 인사들에게도 관련 소식이 전해졌다. 홍익범은 1942년 8월부터 12월까지 여러 차례 다방면으로 전쟁 상황과 이승만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였으며, 이는 다시 문석준 등에게 확산되었다.
결국 홍익범은 1943년 3월 말경 송남헌 등 150여 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던 홍익범은 일제로부터 집중적인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다. 그는 1943년 11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육군형법」 및 「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홍익범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단파방송 수신을 통한 독립 전망의 확산과 전파
단파방송의 수신과 전파 활동은 전시체제기 동안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42년 말에 단파방송을 청취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났다. 탄압의 발단은 1942년 12월 방송국에 근무하던 성기석과 이이덕이 단파방송을 청취한 사실이 발각된 것이었다. 방송 관계자 약 150명과 민간인 180명 등 35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들 가운데 약 75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중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이 17명이다. 규모에서 드러나듯, ‘단파방송 수신사건’은 전시체제기 ‘조선어학회 사건’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사건이었다.
단파방송 수신사건 관련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43.10.11.)
당시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 등 혼란한 국제정세 속에서, 일제는 단파방송 수신과 정보의 확산을 두려워하였다. 일제는 곳곳에 “날조된 유언비어에 속지 말 것이며,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자는 엄벌에 처함”이라는 「경고문」 벽보를 붙였다. 실제로 단파방송 수신자는 체포된 후 ‘사상범’으로 간주되었고, 문석준, 성기석, 홍익범은 일제로부터 집중적인 심문과 고문을 당하였다. 이들은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지만, 문석준, 홍익범은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전해진 단파방송은 당시 식민통치 하의 한국 사회에 중요한 정보 제공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엇보다도 단파방송은 독립운동과 연합군의 승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정보는 ‘말을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단파방송 수신사건’이 있었던 1942~43년은 전황에 관한 정확한 예측과 전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1942년 1월 일본은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했고, 2월에는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 한편 1943년 지구 반대편의 유럽에서는 독일이 러시아 스탈린그라드에 공격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렇듯 미래가 불확실한 세계대전의 전황 속에서, 단파방송을 통해 전해진 일제의 패망 가능성과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국내 비밀독립운동단체의 결성 및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할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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