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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의준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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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준

이의준 , (1893) ~1929 , 독립장 (1968)

우리는 국토 광복과 민족 자유를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공체(公體)에 임의 공헌한 것이다. 더구나 불공대천의 세수(世讎) 왜적을 격퇴하기 위하여 적신(赤身)을 군계(軍界)에 자헌하고 내외지에서 악전고투로 6개 성상을 지냈다. (중략) 시대의 요구와 사업의 진보로 단독적이거나 국부적인 것을 통일화하는 것이 계단(階段)과 원칙임을 간파한 우리 군인은 다만 원리와 원칙을 따라 국부적 사회의 지휘하에서 활동함을 초월하여 전 민족의 최고 기관이요 세계 열방이 묵인하는 우리의 임시정부 기치하로 모이려 한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군무부 호령하에서 수적(讎敵)을 격퇴하기로 맹약하였다. 우리의 임시정부는 전 민족의 대동 통일적인 최고기관이다. 이럼으로 대한의 군민(軍民)된 우리는 마땅히 전 민족의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공고케 하는 것이 의무와 본분이다.

- 1924년 5월 선생이 속한 대한통의부 의용군 중대에서 발표한 선언 중에서 (『독립신문』 1924. 5. 31)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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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계는 1924년 벽두부터 아연 긴장하였고, 국민대표회의의 실패로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독립운동계는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1924년 1월 김지섭(金祉燮) 의거와 그 해 5월 이의준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 독립군의 사이토(齋藤實) 총독 암살 기도 사건 때문이었다. 의열단원인 김지섭은 1923년 9월 관동대진재 당시 재일 한인동포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응징하고자 일제 침략의 아성인 명치신궁에 투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김지섭은 일본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1924년 1월 5일 명치신궁의 니주바시(二重橋) 한복판에 폭탄을 던져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 의거 5개월 뒤인 1924년 5월 19일에는 이의준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 독립군 결사대가 압록강을 따라 국경을 순시 중이던 사이토 총독을 기습, 공격하는 쾌거를 이룸으로써 독립운동계에 일대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 같은 저격 작전을 주도한 선생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재판기록에 나타나는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선생의 본적은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 밀산면(密山面) 송주동(松奏洞)이고, 태어난 해는 1893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선생은 만주에서 대한통의부와 참의부에 소속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할 때 이병준(李秉俊)·한권웅(韓權雄) 등의 이명(異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總督狙擊犯犯行顚末(一) 齋藤總督을 狽擊한 參議府員 李義俊 金昌均 豫審終結, 압록강 하류에서 총독탄 배를 저격, 경호대와 오래동안 총화밧군 사건
總督狙擊犯犯行顚末(一) 齋藤總督을 狽擊한 參議府員 李義俊 金昌均 豫審終結, 압록강 하류에서 총독탄 배를 저격, 경호대와 오래동안 총화밧군 사건

특히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 당시 재판장이 선생을 부르자, “언권의 자유를 주지 않으면 공술을 거절한다고 강경히 주장하던 육척 장신에 검은 얼굴의 선생이 나서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앉은 방청석에서는 삼국지에서 본 장비(張飛)와 같다고 속삭였다”고 하는 기사가 선생에 대한 인상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로 볼 때 선생은 매우 건장한 체격에 의지가 굳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무골이요 불요불굴의 독립군 용사로 생각된다.

선생은 1923년 1월 향리인 평북 위원군과 압록강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던 중국 만주의 집안현으로 망명한 뒤, 유수림자(楡樹林子) 두도구(頭道溝)에 근거지를 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義勇軍) 제1중대에 투신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 독립군은 1920년 10월 경신참변과 이듬해 6월 자유시참변으로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자유시참변 직후 북만으로 돌아온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밀산과 영안현을 중심으로, 구춘선(具春先)이 이끄는 대한국민회 계통의 병력은 돈화와 액목현을 중심으로, 신민단·광복단·한민단 등의 병력도 각기 영고탑·목단강·동녕현 등지를 중심으로 1921년 말까지 진영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들 독립군단들은 이미 많은 전력의 손실을 입어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따라서 북만지역에 산재하여 포진하고 있던 각 독립군단은 1922년 8월 통합운동을 일으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남만지역의 여러 독립군단들도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장백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대한독립군비단·흥업단·광복단 일부 병력은 1921년 말 통합하여 대한국민단을 결성하였다.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광한단 등도 1922년 봄 환인현에 남만통일회를 결성하고 각 군단들을 통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대한통군부는 다시 같은 해 8월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여 통합에 참가하지 않은 독립운동 단체와 군단들을 가입시킴으로써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 개편될 수 있었다. 이로써 경신참변 이후 흩어졌던 재만 독립군 진영은 일단 정비되었다. 이들 통합군단은 조직체제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한인동포의 자치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확고한 항일 무장투쟁 기반을 조성해 갔다.

김동삼·고할신·오동진 등이 주도하여 이끌어 간 대한통의부는 중앙조직의 행정부서와 사법기관인 사판소 및 입법기관인 중앙의회를 설치하여 준국가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그리고 남만의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는 한인동포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지방조직까지 설치하였다. 또 그 아래 5개 중대와 유격대 및 헌병대 등 7개 부대로 편제된 의용군(義勇軍)을 조직하고, 이를 분산 배치하여 효율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펼쳐 나갔다.

선생은 이 같은 통의부 의용군에 참여하여 채찬(蔡燦, 일명 白狂雲)이 중대장으로 있던 제1중대에 소속되었고, 이어 제2소대장으로 선임된 것 같다.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 제2소대장으로 선임된 선생은 곧바로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하였고, 그것은 1923년 6월 6일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이 날 선생은 김정욱(金貞旭) 등 4명의 소대원들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하여 독립군자금 모집 활동에 나섰다. 그러다가 평북 강계군(江界郡) 어포면(漁雹面) 풍룡동(豊龍洞) 골짜기에서 평북경찰부 수색대와 맞닥뜨려 교전하는 바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엿새가 지난 6월 12일의 국내 진공작전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날 선생은 송선호(宋善鎬) 등 3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평북 위원군 봉회면(鳳回面) 노동령(蘆洞嶺) 부근에서 우편 배달부를 공격하여 강계군 고산령(高山嶺)우편국에서 위원우편국으로 이송하는 각종 서류와 소포 등 우편물을 노획하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1천 5백원의 현금도 들어 있었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군자금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선생의 국내 진공작전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같은 해 7월 초순 전용규(田龍奎) 등 3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다시 평북 위원군 대덕면(大德面)에 들어가 장기섭(張基涉)의 집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여 귀환하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보름이 지난 그 해 8월 20일에도 선생은 국내 진공작전을 벌였다. 이 날 선생은 이화주(李化周) 등 일곱 명의 소대원을 이끌고 평북 강계군 풍청동(豊淸洞)에 들어가 경찰관 임시파출소를 공격하여 일경을 사살한 뒤, 파출소와 부근 일본인 민가를 소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선생이 참여하여 활동하던 대한통의부는 이 시기 시련을 맞이하고 있었다. 통의부 성립 당시 통합을 주도한 인물들은 남만지역의 한인 무장세력을 총체적으로 통일시킨다는 목적 아래 각자의 이념과 노선은 무시하였다. 그런데 통합 후 조직을 이끌어 가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통의부 지도층의 대부분은 공화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의병 출신으로 대한독립단 간부를 역임하다 가담한 전덕원(全德元)을 비롯한 일부 세력은 복벽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들 복벽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시간이 가면서 공화주의 계열의 인사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의군부(義軍府)라는 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분리하고 말았다. 이후 의군부는 통의부와 잦은 마찰과 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때문에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채찬을 비롯한 제2중대장 최석순(崔錫淳)·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등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미 분열된 두 군단 간에는 대립과 투쟁이 발생하여 다시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채찬 등 의용군 중대장들은 전 독립군 세력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1923년 12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이전의 광복군사령부를 계승한 군정부의 수립을 요청하여 승인 받았다. 이에 따라 이들은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모든 독립군단이 통합해야 한다는 원칙을 표명하면서 1924년 초반 임시정부 직속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조직하였다.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를 주축으로 이뤄진 참의부는 집안현 화전자(花甸子)에 본부를 두고, 재만 한인의 자치활동보다 적극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실천하는 데 힘썼다. 특히 임시정부의 직속 부대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긍지와 자부심이 매우 컸다. 그리하여 이들은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수괴인 조선총독에 대한 저격,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다. 더욱이 이 시기 조선 총독 사이토는 1924년 6월 제국의회의 개최를 앞두고, 식민지 통치체제의 안정을 대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한층 확고히 할 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압록강을 따라 국경을 순시할 계획을 공개적으로 표명해 놓고 있었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는 사이토 일행에 대한 공격, 암살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그 중책을 맡은 것이 제1중대 제2소대장인 선생이었다. 선생은 참의부의 참의장 겸 제1중대장 채찬의 명령을 받아 제3소대장 장창헌(張昌憲)와 김창균(金昌均)·현성희(玄成熙)·이명근(李明根)·김여하(金麗河)·전창극(田昌極)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런 다음 1924년 5월 19일 웅비호(雄飛號)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내려가며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일행을 평북 위원군 마시탄(馬嘶灘)의 대안에서 급습하였다.

선생이 거느린 결사대는 마시탄의 중국측 대안인 집안현(輯安縣) 사랑곡(四狼谷) 팔합목(八合目)에 잠복하고 있다가 사이토 일행을 향하여 집중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던 호위선 비조환(飛鳥丸)의 경비병들과 수행원들은 대항 사격을 가해 왔다. 그리하여 쌍방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이 틈을 이용하여 사이토 일행을 태운 웅비호가 쏜살같이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조선 총독 암살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국경 지방에 대한 일제의 경비가 강화되었고, 독립군 부대에 대한 탄압 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선생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국내 진공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같은 해 7월 16일 평북 강계군 곡하면(曲河面) 쌍부동(雙富洞)으로 진입한 뒤, 일제의 통신시설을 파괴하고자 신의주와 강계를 잇는 전선을 절단하고 전신주 다섯 개를 잘라 넘어뜨렸다. 그리고 같은 군 어운동(漁雲面)에서도 전신주 네 개를 넘어뜨려 버렸다. 이렇게 하여 일제의 통신을 두절시킨 뒤, 신용섭(申龍燮) 등 여섯 명의 소대원을 거느리고 강계군 공서면(公西面) 두흥동(斗興洞)의 계인계(桂仁桂)와 인근 염진희(廉珍熙) 집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며칠 뒤 다시 강계군 시중면(時中面) 시천동(時川洞)의 김찬원(金燦元) 집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갹출하는 등 지속적인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친일 밀정 처단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이 해 6월 평북 강계군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어운면 동부동(東部洞)에서 밀정 노릇을 하던 자를 잡아다가 장갑골에서 총살, 처단함으로써 부일 친일배들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1925년 6월 19일에는 24명의 소대원을 거느리고 강계군 창곡산(倉谷山)에서 강계경찰서의 수색대를 습격하여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 같이 만주지역에서 선생을 비롯한 참의부 및 기타 독립군 부대에 의한 항일 무장투쟁이 고조되어 조선 총독 암살, 저격 사건까지 발생하자 일제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였다. 그것은 결국 1925년 6월 11월 중국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 : 한인 취체에 관한 쌍방 협정)」으로 가시화 되었다. 삼시협정의 주요 내용은,

①재만 한인의 호구를 조사·편성하여 서로 보증케 하고 연대 책임을 부담시킬 것

②중국 관헌은 재만 한인이 무기를 휴대하거나 한국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할 것

③불령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그 무장을 해제할 것

④재만 한인이 소유한 총기·화약은 수시로 엄중 수색하여 몰수할 것

⑤불령선인 단체의 수령을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 인도할 것

⑥중·일 양국 관헌은 불령선인 취체(取締)의 실황을 상호 통보할 것

⑦중·일 양국 관헌은 마음대로 월경하지 말 것

⑧종전의 현안은 쌍방 성의를 가지고 해결할 것

등 8개 조항이며, 이의 시행규정으로는 12개 조항의 「한인 취제 시행세칙」이 있었다. 이 같은 삼시협정의 발효에 따라 만주지역에서의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 되어 갔다. 이제부터 독립군들은 일제만이 아니라 중국 관헌의 감시망까지 피해야 하는 이중의 짐을 지고 다니게 된 것이다. 선생 또한 이 같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1926년 말 만주에서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일제 경찰에 인계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북 만포(滿浦)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1927년 10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總督狙擊犯 覆審에도 死刑, 평양복심에서 판결언도, 李義俊 金昌均 兩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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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때 선생은 재판장이 개정을 알리기도 전에 앞에 나아가 “어떤 일이든지 변명할 시간과 기타 공술의 자유를 충분히 주지 않으면 일절 진술하지 않겠다”고 일갈하였으니, 선생의 기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후 선생은 신의주지방법원을 거쳐 1928년 11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는데, 이 때에도 선생은 “이미 각오한 바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독립군 용사로서의 불굴의 의지와 기개를 잃지 않았다.

독립군 용사로서 이 같은 당당함을 간직한 채, 선생은 1929년 1월 25일 일제의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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