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독립운동가
액자프레임
독립유공자 사진
2010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염온동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77년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염온동

염온동 , 1898 ~1946 , 독립장 (1977)

염온동(廉溫東, 1898 ~ 1946)은 1898년 5월 1일 강원도 금화군 읍내리 485번지에서 부친 염문우(廉文雨)와 모친 손문(孫文) 사이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는 추정(秋汀)이며,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군무부 총무과장 겸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활동하였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상하이로 건너가 큰 뜻을 펼쳐

황성신문 1910년 3월 27일자에 따르면 선생은 금화군의 공립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제1회 졸업생이었다. 졸업 후 선생은 서울로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에 재학하면서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인물들과 접촉하며 국내의 비밀결사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과정에서 1910년 대한제국 강제병탄 이후 자행된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맞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1919년 금화지역 3.1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른 후 선생은 1921년 4월 28일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해 외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하였다. 당시 상하이로 망명한 많은 한인들은 외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이들의 수입은 일반 근로자들에 비해 높은 편이어서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선생은 취직을 하여 생활을 영위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이후 중국 상하이에는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망명한 많은 한인들이 집결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독립운동가들이거나 신흥도시로 성장한 상하이에서 장사를 통해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려는 부류, 또는 유학생들로서 출신 성분이 매우 다양하였다. 또한 상하이에 모인 한인들은 극히 일부의 자영업자를 제외하고는 중국인이나 외국인들의 회사 등에 고용되어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선생은 상하이의 전차회사에 취직하여 생활하면서 프랑스조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독립운동단체와 교류하였고, 상하이에 도착한 지 2년 만인 1923년 제11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강원도 출신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은 임시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고 모색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된 해였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 상하이·만주·베이징·노령·미주 등에 산재한 단체와 그 대표 등이 모여 무려 6개월간 계속되었다.

임시의정원으로 활동, 임시정부의 경제적 후원에 앞장서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의 활동을 1년 여 만에 끝냈다. 1924년 2월에 개회된 제12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의원 사직원을 제출한 것이다. 선생의 사직원은 3월 12일에 열린 전체회의에서 찬성 6, 반대 0표로 가결되었다. 무슨 이유로 사직원을 제출하였는지 그 이유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선생이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직한 이후 2년 여간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선생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은 1926년 7월에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에서 계속되었다. 경제후원회는 1926년 7월 임시정부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강원도 출신의 의원으로 선출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강원도 출신의 의원으로 선출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임시정부는 그 결과를 수습하고 독자적인 활로를 모색하기 위하여 임시정부 체재개편과 임시헌법 개정, 초대 대통령 이승만 탄핵 등을 추진하였다.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은식은 대통령 중심의 임시헌법을 개정하여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으나 내각 구성에 실패하고 서간도로 돌아갔고 후임에 양기탁이 선출되었으나 그 역시 취임을 거부하였다. 오랜 진통 끝에 홍진이 국무령에 취임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재정 상황은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의 임대료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무렵 미주에서 도산 안창호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가지고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송병조∙한진교 등은 안창호를 초빙하여 임시정부 존립을 위한 각 단체의 통일을 목적으로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7월 8일 모임을 개최하였다. 안창호는 이 날의 모임에서 ‘우리 혁명운동과 임시정부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는데, 요지는 임시정부는 반드시 필요한 기관이며 모든 한인은 경제적 원조로 임시정부의 존재를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날 안창호의 연설로 임시정부의 존립 목적을 위한 구체적인 기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15인의 설립준비위원을 선출하였다. 선생은 안창호∙조상섭∙엄항섭∙최창식∙박창세∙송병조 등과 함께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이들 15명의 준비위원들과 함께 7월 9일과 15일 두 차례의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여 경제후원회 회칙 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7월 19일 밤 삼일당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경제후원회 회칙이 통과되었고, 선생은 이유필∙임필은과 함께 회계검사원으로 선출되었다. 경제후원회의 목적은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것이었고, 선생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1926년 12월에 중국돈 대양(大洋) 5원을 임시정부 재무부에 애국금으로 납부하였다.

청년동맹에서 활동, 한인독립운동진영의 통합을 위해 노력

중국 관내에서는 1920년대 중반에 민족유일당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1926년 10월 유일당 결성을 위한 목적으로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가 조직된 이후 1927년 9월까지 상하이(上海)∙광주(廣州)∙남경(南京)∙무한(武漢)에서 각지의 촉성회가 결성되어 대독립당 조직을 위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이들 각지의 촉성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북경촉성회에서 상하이촉성회에 중국 관내 각지의 촉성회 연합을 위한 연석회의를 제의한 이래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1927년 11월에 상하이 민국로에서 각지 촉성회 대표의 연합회의인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 연합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연합회의 전위가 될 목적으로 1927년 12월에는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임시의정원의 회의록
임시의정원의 회의록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은 ‘청년회의 진보 발전을 기하는 데 있어 청년회의 연맹을 필요로 하여’ 결성된 북경∙상하이∙광주∙남경∙무한의 5개 지역 한인청년회의 연합체였다. 선생은 1927년 12월 5일에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의 22명 중앙집행위원의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중앙집행위원 22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회는 본부를 상하이에 두고 각지의 청년회를 지부로 개편하였는데, 선생은 엄항섭, 김기진 등 10명과 함께 상하이지부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선생은 청년동맹회나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에서 활동하며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한인독립운동진영의 통합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1년 12월 24일에 개회된 제23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선생은 강원도 출신의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이후 제28회 임시의정원 의회(1935년 11월 2일)에서 해임될 때까지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의정원 회의 기록을 정리하는 기록업무를 담당하였다. 이 기간에 선생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떤 발언을 하였는지, 혹은 어떤 법안을 제안하였는지 관련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선생이 또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시기는 임시정부가 가장 어렵던 시기이었다. 김구가 주도한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결행된 이후 상하이의 프랑스조계에서 13년 동안 머물던 임시정부와 요인들은 일제의 집요한 수색과 검거를 피해 각자 안전한 장소로 피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 한인독립운동 진영을 대표하는 정당과 단체들이 항일역량 강화와 독립 쟁취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좌우합작의 형태로 출발한 민족연합전선의 성격을 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이 전개되었다.

선생은 이 시기, 즉 1932년부터 임시의정원 의원 자격이 해임될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이면서 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한 한국혁명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혁명당은 1932년 1월에 남경에서 결성되었다. 한국혁명당의 결성과정이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국혁명당은 신익희가 중심이 되어 중국의 각 기관에 복무하고 있는 한인들과 상하이 한국독립당에 불만을 가진 인사들로 세력을 결집하여 결성한 정당이었다. 선생은 성주식∙연병호 등과 함께 주요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이 중국에 망명하여 줄곧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남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상하이가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와 검거에 피신한 장소가 남경이었을 것이며, 또한 상하이에서 같이 활동하던 몇몇 동지들과 함께 남경으로 피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혁명당에서 주요 당원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한국혁명당이 중국 관내로 이동해 온 만주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1934년 2월 신한독립당을 결성하게 되면서 신한독립당에서 활동하였다.

상하이의 전경
상하이의 전경

한국혁명당과 만주 한국독립당이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양당이 모두 군사노선을 지향하고 있어 독립운동 노선 상의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또 하나는 현실적인 이유이었다. 중국 관내로 이동해 온 만주 한국독립당으로서는 새로운 활동기반을 마련하는 데 한국혁명당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며, 한국혁명당 역시 세력기반이나 독립운동 역량이 취약했기 때문에 세력 확대나 독립운동 역량 강화라는 측면에서 만주 한국독립당과의 합당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한독립당의 결성은 비록 일부 독립운동 세력간의 통일이었지만,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과 만주 세력이 통일을 이룬 최초의 성과이었다.

1930년 중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 추진하던 전선통일운동, 유일당 결성에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신한독립당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전선통일운동에 의열단, 한국독립당(상하이)과 함께 세력을 나란히 하여 1935년 7월 민족유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을 결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상하이 한국독립당에서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문제로 대두된 임시정부 폐지에 반대하여 김구 등의 세력이 이탈하였지만, 민족혁명당은 좌우연합전선운동의 결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및 군사편찬위원회 간사로 활약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상하이를 떠나 항주∙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 중국 관내를 8년여 동안 이동하다 마침내 1940년 5월 중국국민당의 임시수도인 충칭에 정착하게 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한 뒤 중국 관내지역을 이동하면서 흐트러진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 대일항전태세를 강화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먼저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하기 직전 한국국민당∙재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우익 진영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우익 진영 3당의 통합으로 결성된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기반을 확대, 강화하는 동시에 체제정비도 병행했다. 먼저 임시정부가 항일독립운동의 최고기구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부의 국무위원 수를 7명에서 11명으로 확대하고,임시의정원 의원 정수도 35명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직할 무장부대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개헌을 통해 임시정부를 단일지도체제로 바꾸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한 이후 강화된 임시정부(정)∙한국독립당(당)∙한국광복군(군)의 3위일체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8년여 기간 동안 이동하면서 흐트러진 임시정부의 혼란을 극복하고 항일독립운동의 최고 중추기관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임시정부 공보 제 81호.
임시정부 공보 제 81호.

1940년 10월 임시정부의 지도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개정하고 주석에 김구를 선출하여 단일지도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민족혁명당 등 임시정부 반대세력을 임시정부로 흡수, 마침내 제34차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반대세력이 임시의정원으로 통합되어 좌우연합 의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생도 임시정부에 다시 참여하였고 한국광복군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이 1935년 11월 2일 연 2주간 계속하여 임시의정원 회의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자연 해임된 지 약 9년여 만의 일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에서 선생의 공식적인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임시정부 공보 제81호다. 1944년 6월 6일자로 발행된 공보에 ‘(대한민국 26년 6월) 5일 국무회의에서 군무부장의 천보에 의하여 염온동을 군무부 총무과 과장으로 선임하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임시의정원 의회 관련 기록에서 1935년 11월 2일자로 임시의정원 의원 해임한 기록 이후 처음 확인되는 공식기록이다. 이어서 임시정부 공보 제82호(1944년 9월 10일 발행)에 선생이 ‘군무부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인준되다’라는 기사가 있다.

선생을 군무부 총무과장으로 천거한 사람은 군무부장이었다. 1944년 4월의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수를 14명으로 확대하여 김구가 주석에, 김규식이 부주석에 당선되었고, 이어서 이시영 등 14명이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무위원 중 김원봉은 같은 해 5월 8일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군무부장에 선임되었고, 그의 천거에 의해서 선생은 군무부 총무과장에 선임된 것이다. 선생을 천거한 김원봉과는 아마도 민족혁명당의 결성 직후에 서로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34년 일제의 정보문서에 선생은 민족혁명당 당원임이 확인됐고, 1935년 3월에 낙양으로 가서 낙양지부의 책임자로 활동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과정에서 민족혁명당의 최고 책임자였던 김원봉과 어떤 교류가 있었을 것이며, 또한 중국 낙양의 항공기술자로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한국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선생은 군무부의 총무과장으로서, 그리고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였다.

조국의 독립 못보고, 충칭에서 숨을 거두다

선생은 이처럼 일제의 패망이 확정된 직후에 임시정부의 환국에 따른 제반문제를 논의하는 임시정부의 마지막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도 독립운동자가 가야 할 정도를 언급하였다. 선생은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1946년 1월 이역만리 낯선 중국대륙 충칭에서 광복된 조국을 그리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77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와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이달의 독립운동가 목록 > 염온동(관리번호:8225)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
이전달 다음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