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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자명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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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명

유자명 , 1894 ~1985 , 애국장 (1991)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까지도 혁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민중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다는 구실 하에 실제로는 민중과 혁명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시키려는 자가 있는 것이다.”

- 선생이 중국 국민혁명 주도세력을 비판한 내용 중에서 -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에 공감하다

유자명(柳子明, 1894.1.13(음) ~ 1985.4.17) 선생은 1894년 음력 1월 13일 충주군 이안면(利安面) 삼주리(三洲里: 현재의 영평리 이류면)에서, 부친 유종근(柳種根)과 모친 이씨(李綺魯) 사이의 삼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흥갑(興甲), 학생 때 이름은 흥식(興湜)이었다. ‘자명’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호는 우근(友槿)이었고, 우생(友生)이란 별명도 사용하였다.

선생은 1910년 11월 이난영(李蘭永)과 혼인하였다. 슬하에 기용·기형 형제를 두었고, 인광을 비롯한 10명의 손주를 두었다. 1911년 충주공립보통학교(현재의 충주교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정학원(硏精學院)을 거쳐 1912년 수원농림학교(水原農林學校)에 입학하였다. 1916년 졸업 후 충주간이농업학교(현재의 충주농업고등학교) 교원으로 취직하여, 보통학교 4학년 농업과 담임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충주경찰서에 탐지됨에 따라, 보통학교 동창 황인성(黃仁性)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피신하였다.

선생은 1919년 6월 신의주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여운형(呂運亨, 1886 ~ 1947)의 소개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비서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다. 이 시기 선생은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 ~ 1936)의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에 관한 역사>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 받아, 이후 신채호 를 존경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한 혁명가의 회억(回憶)]·[러시아 문학의 현실과 이상] 등을 읽으면서 아나키즘(Anarchism)에도 공감하였다. 그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당면한 한국사회는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이 우선적이라 생각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한 헌신과 국제주의자로서의 면모

1922년 4월경 선생은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신채호·이회영(李會榮, 1867 ~ 1932) 등과 교유하다가, 그해 겨울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톈진(天津)으로 갔다. 이곳에서 선생은 의열단의 김원봉(金元鳳, 1898 ~ 1958)·이종암(李鍾岩, 1896 ~ 1930)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선생은 [의열단간사(義烈團簡史)]를 저술하여 의열단의 정체성 확보에 일조하는 한편, 통신연락 및 선전활동을 주관하였다.

이 시기 선생의 의열단 활동에 대해, 김성숙(金星淑, 1898 ~ 1969)은 “김원봉은 앞에 내세운 사람이고 실제 일을 한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회고하였다. 정화암(鄭華岩, 1896 ~ 1981)도 이 무렵 의열단에서 발표한 문건은 대부분 선생이 작성한 것이라고 증언함으로써, 선생의 역할과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지적하였다.

선생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인민을 탄압·학살하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는 일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일제 침략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의 폭파는 곧 반일 애국행동”이라는 논리로,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정당화하였다.

선생은 의열단원의 진보적인 사고 형태를 아나키즘적인 것으로 이끌었다. 이는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통해 그 일단이 드러난다. 1922년 겨울 김원봉은 북경의 신채호를 방문, 의열단의 행동강령 및 투쟁목표를 성문화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원봉의 신채호 방문은 선생의 조언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선생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집필도 도왔다.

1924년 1월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이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김원봉이 광둥성(廣東省)에서 의열단원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및 중산대학(中山大學) 입학을 모색하던 무렵에는, 선생이 의열단의 의열투쟁을 주도하였다. 1925년 3월의 일제밀정 김달하(金達河) 처단과 1926년 12월의 나석주의거(羅錫疇義擧)는 모두 선생의 지도하에 결행된 것이었다.

유자명 선생은 1924년 1월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립되고, 중국 국민혁명이 시작되자, 크게 기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선생은 “북벌(北伐)을 시작한 뒤로 혁명군(革命軍)이 일사천리의 기세로 장강(長江) 이북까지 승승장구하고, 강남 각지에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휘날리며, 도처에서 민중이 환호하게 된 것은 북벌군의 ‘황포정신(黃埔精神)’을 발휘한” 결과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1927년 4월 12일 장제스(蔣介石)는 상하이에서 국민당 내의 좌파 세력과 공산당 세력을 제거하는 정변(政變)을 일으키고, 남경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를 수립하였다. 당시 김원봉과 함께 광저우(廣州)에 머물던 선생은 “맑게 개었던 하늘에 돌연히 검은 구름이 감돌고, 천지가 암흑으로 변하는 것을 본 나는 비통한 감정을” 품었다고 하였다. 또 “어제 날의 동지가 오늘은 원수로 변하고, 어제 날의 혁명자가 오늘은 반혁명자로 되었다”며, 국공합작의 파국과 중국 국민혁명의 동족상잔을 안타까워하였다.

이후 선생은 우한(武漢)으로 이동하였는데, 1927년 여름 우한에는 선생과 김원봉·이검운(李檢雲)·권준(權晙)·안재환(安載煥) 등의 의열단원 및 진보적 인물들이 집결해 있었다. 선생은 중국·인도·한국의 반제국주의·반일본 민족운동가들이 결성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김규식(金奎植)·이검운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이어서 난창봉기(南昌蜂起)와 광저우봉기(廣州蜂起)의 피바람을 피해 난징(南京)으로 옮긴 다음에는, 중일전쟁 때까지 난징·상하이·취앤저우(泉州) 등지를 무대로 중국의 ‘이상촌(理想村) 건설활동’에 몰두하였다.

유자명과 가족사진
유자명과 가족사진

1929년 선생은 중국인 친구 위앤샤오시앤(袁紹先)의 요청으로 한복염열사기념농장(韓復炎烈士紀念農場)에서 농업생산을 지도하였고, 1930년에는 천판위(陳範豫)의 요청으로 푸졘성(福建省) 취앤저우의 여명고중(黎明高中)에서 생물학을 가르치는 한편, 취앤저우 지방의 열대식물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는 중국의 유명한 교육자인 쾅후성(匡互生)이 설립한 상하이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농업과 일본어를 가르쳤으며, 이후에도 동류실험농장·복건원예시험장·광시성(廣西省)의 영조농장(靈棗農場) 등지에서 농업 기술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원예작물에 대해 연구하였다.

1930년 1월 입달학원에서 근무할 때, 선생은 유기석(柳基石)·정해리(鄭海理)·안공근(安恭根)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다. 선생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장 겸 대외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31년 11월 중순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간부 왕야차오(王亞樵)와 화쥔스(華均實)의 제안으로 결성된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에도 참가하였다.

1934년 봄 선생은 쾅후성의 친구이자 국민혁명군 후종난(胡宗南)부대 참모장인 장싱보(張性伯)로부터 난징 근교 청룡산(靑龍山)에 있는 제일농장(第一農場) 관리를 요청받고, 입달학원 고중(高中) 과정의 농촌청년과 3학년생 5명을 데리고 1년여 동안 제일농장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때 청룡산에서 훈련 중이던 의열단이 운영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입교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1935년 입달학원을 떠나 국민당 정부 건설위원회(國民黨政府建設委員會)의 동류실험농장(東流實驗農場)으로 가서 원예를 지도하였다.

중일전쟁기 독립운동과 한·중 국제연대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1942년 10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1942년 10월 25일)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한인들은 이를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의 ‘호기(好機)’로 판단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승전이 한국의 독립을 담보해 줄 것으로 믿었다. 한인 독립운동진영에서는 중국 측에 대해 항일투쟁의 성과 및 혁명역량 등을 선전하며, 한·중 합작의 항일투쟁을 역설하였다. 같은 시기 국민당정부 측에서도 중일전쟁의 확대와 장기화에 대비하여 한인들의 항일투쟁 역량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한인진영 내부에서는 협동과 단결의 통일운동이 시도되었고, 새로운 협동전선의 조직을 추진한 결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의 중간·좌파 민족주의자 그룹은 12월 초순 한커우(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창립하였다. 같은 시기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재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의 우파 민족주의자 그룹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선생은 자신이 쓴 조선민족전선연맹 창립선언문에서 “조선혁명(朝鮮革命)은 민족혁명(民族革命)이고, 그 전선은 ‘계급전선(階級戰線)’이나 ‘인민전선(人民戰線)’이 아닐 뿐 아니라, 프랑스나 스페인의 이른바 ‘국민전선(國民戰線)’과도 엄격히 구별되는 … 민족전선(民族戰線)”임을 천명하고, 한·중연합을 통한 항일투쟁역량의 집중, 국제적 반일세력과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전선연맹의 최고기구는 이사회였는데, 김원봉이 자금과 지휘를 맡았고, 선생(선전부)과 한빈(韓斌, 정치부)·이춘암(李春岩, 경제부) 등이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40년 3월 선생은 중국인 아내 유칙충(劉則忠)과 득로(得櫓, 1939년생, 북경과학기술대학 재료물리학과 교수 정년퇴임)·전휘(展輝, 1942년생, 호남대학 건축학과 교수 정년퇴임) 두 아이를 데리고, 선중조우(沈仲九) 등 중국인 친구들이 있는 푸젠성(福建省)으로 갔다. 그곳에서 선생은 푸젠성 정부 농업개진처(農業改進處)의 원예시험장 원예과 주임으로 근무하였다.

1941년 12월 선생은 충칭(重慶)의 복단대학(復旦大學) 교수 마종롱(馬宗融)으로부터, 회교구국협회(回敎救國協會)에서 농업기술원을 양성하기 위해 궤이린(桂林)의 산지를 개간하여 영조농장(靈棗農場)을 만들려 하는데, 이를 지도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궤이린으로 갔다. 이후 충칭을 무대로 전개된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이다. 선생은 1942년 10월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을 위한 약헌수개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는 등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가을 푸젠성정부의 초청으로, 유자명 선생은 가족을 데리고 다시 푸젠성 영안(永安)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국민당정부 비서장 청싱링(程星齡)이 강락신촌(康樂新村)을 각지에 개설하여 복안현(福安縣) 계병농장(溪柄農場)을 ‘제2촌’으로 삼고, 선생을 그 준비처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당시의 주민들은 선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누구도 유 선생이 화를 내거나 한 마디라도 큰소리 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염(焱)’이라는 이름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일찍이 유 선생의 방문을 두드리며 ‘할아버지, 할아버지’(당시 유 선생의 머리는 이미 전체가 은실과 같아서, 아이들은 습관적으로 그를 그렇게 불렀다)하고 부르면, 그는 문을 열고 어린아이를 안고 들어가 요람에 뉘였다. ‘할아버지 흔들어 주세요’ 하고 재촉하면, 유 선생은 ‘허허’ 웃으며 흔들어 주었다. 그는 언제나 아이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또 사람들은 그의 부인 유칙충(劉則忠)을 ‘사모님’이라고 불렀고, 아이들은 그녀를 ‘큰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광동인으로 유 선생과 함께 동분서주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아주 민첩하고 꼼꼼하게 일하였다. 그녀와 유 선생은 모두 순박하게 손님들을 맞이하였는데, 오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찾아오면 친히 향기롭고 달콤한 케이크를 만들어 대접하였다.

선생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늘 성실하였으며, 인도주의 정신으로 중국을 사랑하였고, 선생 또한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선생이 어려웠을 때 선생과 교류했던 청싱링은 “그는 중국 인민의 가장 친밀한 벗이었다.”, “유자명 선생의 숭고한 애국주의 정신과 국제주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들이 배워야 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일제 패망 후 원예학 연구와 망향의 세월

선생의 친필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 수록된 <나의 90탄신을 지난 뒤에>(1983)
선생의 친필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 수록된 <나의 90탄신을 지난 뒤에>(1983)

1945년 8월 선생은 복안현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였다. 선생은 그때의 심정을 “나는 비록 동포들과 한자리에서 해방의 기쁨을 나누지 못하였지만, 서울에서, 나의 고향에서 해방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릴 나의 동지들, 나의 동포 형제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웠다.”고 회고하였다.

1978년 심극추(沈克秋)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은 “일본이 투항할 때 중경의 동포들과 함께 귀국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음을 가슴 아파하였다. 일제 패망 시, 선생은 푸젠성에 있었기 때문에 귀국 노선을 찾을 수 없었고, 부득불 동지들과 함께 타이완(臺灣)으로 떠났던 것이다.

1946년부터 1950년 6월까지 유자명 선생은 대만성 농림처 기술실 주임·합작농장관리소 주임 등으로 근무하면서 대만의 농업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농업건설과 합작농장의 사명>([대만일보(臺灣日報)]), <합작농장과 농업합작의 여러 가지 형식>([대만농림(臺灣農林)])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타이완 체류 시절 선생은 대북한국영사관 총영사 민석린(閔石麟, 민필호)과 자주 접촉을 가졌고, 1950년 1월 정화암과 함께 귀국 신청을 하였다. 하지만 원적이 ‘난징(南京)’으로 되어있는 관계로, 반년 후에야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선생의 귀국을 가로막은 것은 한국전쟁(韓國戰爭)이었다. 전쟁으로 귀국이 미뤄진 선생은 조국과 고향을 가슴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고, 천신만고 끝에 후난성 부성장으로 있던 청싱링의 도움으로 창사(長沙)로 가서, 호남농학원 교수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선생은 농학자로서 다방면에서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선생의 ‘벼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세계농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1972년 선생은 농학부와 원예학부 교수들을 거느리고 창사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에서 출토한 벼의 종자를 고증하는 한편, 중국 벼 재배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호남농학원에서 포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유자명 사진
호남농학원에서 포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유자명 사진

선생은 또한 저명한 원예전문가였다. 1940년에는 <항일전쟁과 원예>란 글을 발표한 바 있었고, <중국의 장미와 세계의 장미>([중국원예학보(中國園藝學報)], 1964)에서는 중국 장미의 유럽 전파, 중국 장미와 유럽 장미의 교잡 과정 등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또한 선생은 중국의 남방은 포도를 재배할 수 없다는 견해를 극복하고자 심혈을 기울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선생이 재배한 포도는 베이징박람회에서 호평을 받았고, 우수한 품종으로 뽑혔다. 선생의 연구성과에 따라 포도 생산이 중국 남방의 여러 지역에 보급되었고, 특히 후난성 지역에서는 대단위 재배를 시작하여 경제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하였다. 1977년 10월 심극추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은 “3.1운동 그 해에 나라를 떠나서 이젠 60년이 됩니다. 집이 남조선에 있기에 줄곧 고향에 편지를 못해 봅니다. 만일에 남북이 민족 대단결 회의를 열게 되면 나도 돌아가서 참가하고 싶습니다.”라고 적었다. 선생의 딸 유득로의 회상에 의하면, 선생은 명절이 되면 술을 한잔 마시고 혼자서 '아리랑'을 조용히 불렀다고 한다.

1983년 2월 25일 선생의 90세 생일날 호남농학원에서 성대한 축하잔치가 열렸으며, 후난성의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는 호남성 인민정부 부성장·제5기 인민대의원·호남성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이 참석했으며, 선생의 생사지교(生死之交: 생사를 같이하는 벗)인 청싱링은 “유자명의 숭고한 애국주의 정신과 국제주의 정신은 영원토록 우리의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라고 선생에 대해 칭송하였다.

중국 중앙국제방송국에서 이 사실을 뉴스로 방송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후손들이 방송국에 선생의 연락처를 문의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선생은 한국의 후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선생은 집에서 안절부절하며, 한국에 가야겠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1977년 선생은 심극추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조국을 사랑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사랑합니다. 우리 집의 네 식구 중에서 나 혼자 국제우호인사이고, 자식들과 외손자는 모두 중국 인민입니다.”라고 하였듯이, 그는 끝내 중국 국적을 갖지 않고 ‘조선인’으로 살았다. 선생은 1985년 4월 17일 호남성 창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중국의 대문호 바진(巴金)과 함께 찍은 사진
중국의 대문호 바진(巴金)과 함께 찍은 사진

선생에게는 중국인 지기(知己)가 많았다. 저명한 교육자 쾅후성(匡互生)·마종롱(馬宗融)·천판위(陳範豫) 등과 정치가 청싱링(程星齡)·선중조우(沈仲九), 작가 바진(巴金)·뤄스미(羅世彌), 제자 수통(粟同)·리류화(李毓華)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바진과 선생은 60여 년 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둘은 늘 서로의 속마음을 얘기하였고, 서로를 보살피며 지냈다. 심용철(沈容澈, 심용해의 동생)은 “유자명과 바진의 교류가 비교적 많았던 시기는 1930년부터 1935년 사이였다. 그 무렵 자명은 난샹(南翔) 입달학원 농촌교육과에 있었고, 마종롱·뤄스미와 교사 숙소에서 함께 지냈다. 바진 역시 마종롱과 뤄스미의 친구로, 늘 상하이에서 입달에 왔다. 자명과 바진은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많았다.”라고 회고하였다.

바진은 그의 작품 [난징에서 상하이로 돌아오며(從南京回上海)](1932)에서, “난징 부자묘의 어느 찻집에서 점심 겸 뭘 조금 먹었다. 모인 사람은 다섯이었는데, 상해전쟁의 앞날에 대한 얘기에 이르자, 나와 한국인 친구는 격렬하게 논쟁을 시작하였다. 이 논쟁은 나로 하여금 주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고 적었고, [민부도상(民富渡上)](1938)에서도 선생을 묘사하여, “내가 작은 배에 나는 듯이 올라탔을 때, 우연히 옆에 정박해 있는 목선의 남색 중국옷을 입은 중년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내 친구와 몹시 닮았다. … 그는 지금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 목선에는 여러 명의 한국인 남녀의 그림자가 보였다. … 나는 몸을 흔들거리며 작은 배에 서서,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것 같았다. 중년부인 한 사람이 대나무 의자에서 일어나며, 깜작 놀라며 ‘바진!’하고 외쳤다. 그녀는 그 친구의 아내였다.”고 적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인 친구는 선생을 가리킨다. 또 [불에 관하여(關於火)](1980)에서는 아래와 같이 선생을 회고하였다.

“이 친구는 성이 유(柳)이고, 원예가이고 수십 년 이래 여러 학교와 농장에서 일하고, 중국을 위하여 많은 원예가를 길렀다. 그는 당시 한국인 유망객(流亡客) 가운데에서도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내가 상하이나 궤이린·충칭·타이베이에 있을 때, 늘 그와 만났다. 지금도(1980년 1월 당시) 연락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호남농학원(湖南農學院)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때때로 사람을 시켜 나에게 호남의 명산물을 보내준다.

나는 40 수년 전 그가 일본인의 추격이 엄하여 상하이에 오면 언제나 마종롱의 집에 은거하였는데, (이러한 불안한 생활을 하는 것이) 여러 달 지남에 따라, 그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하얗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집의 주부가 나중에 단편소설 [생인처(生人妻)]를 발표한 작가 뤄수(羅淑)이다. 항전초기 뤄수가 병으로 죽어, 우리들이 궤이린과 충칭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함께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였다. 나는 그가 몇 번이나 머리를 숙여 눈물을 닦는 것을 보았다.

친구 유는 이미 80세를 넘겼지만, 그는 아직 창사(長沙)에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의 은발 머리가 태양 아래에서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것을 보는 것 같다.”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는 유자명 사진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는 유자명 사진

1983년 선생은 선생의 자서전인 [나의 회억]에서 “지금까지 나와 바진 사이의 통신연계는 그칠 사이가 없었다.”라고 적었다. 그런가 하면 바진은 늘 선생을 형님으로 모셨다. 선생은 자신의 한문 회고록을 바진에게 보내 수정을 부탁했으며, 바진은 열심히 읽고 수정의견을 제시하였다. 선생이 타계하자 바진은 즉각 조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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