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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범진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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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이범진 , 1852 ~1911 , 애국장 (1991)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된 후 고종 앞으로 보낸 이범진 선생의 유서에서 -

헤이그 밀사 이위종 열사의 부친

이범진(李範晉, 1852.9.3∼1911.1.26, 러시아력으로 ~ 1911.1.13)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 정치가, 외교관이자 애국지사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무관으로 이름났던 이경하(李景夏, 1811 ~ 1891)의 아들로 1852년 음력 9월 3일 태어났다. 부친 이경하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훈련대장·금위대장·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면서 대원군의 깊은 신임을 받고 군사·경찰권을 장악했던 권세가였다. 뒷날 선생은 풍양 조씨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큰 아들은 이기종(李璣鍾)이며, 둘째 아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했던 이위종(李瑋鍾)이다.

선생은 일제의 국권침탈이 자행되던 1900년대에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전문 외교관으로 활약한 분이다. 이러한 선생이 처음 벼슬길에 나가게 되는 것은 26세 때인 1878년에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으로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면서부터이다. 외교관으로 출국하기 이전 선생은 공조, 호조, 이조, 형조 등 각조 참판, 그리고 궁내부대신, 법부대신, 고등재판소 재판장 등 요로의 중직을 두루 거쳤다. 뿐만 아니라 성천, 순천, 영변 등지의 부사를 맡아 간간이 외직으로 나가기도 했다.

1895년 민왕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민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 후에 사임하였다. 뒤이어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의 주역이 되었다가 거사가 실패하자 중국 상하이로 일시 망명하기도 했다.

이듬해 초에 귀국한 선생은 1896년 2월 아관파천 때 그 주역으로 참여하였다. 국왕을 사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일제의 국권 침탈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국가의 운명을 가까스로 되살리려는 충정의 발로였던 셈이다. 그 결과 김홍집(金弘集) 친일내각을 몰아내고 선생은 새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아관파천 이후 한동안, 일제가 저지른 을미사변에 대한 수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수사를 철저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가담자는 사실상 일본의 군인과 경찰, 낭인배 등이었고, 그 배후에는 주한 일본공사와 일제 당국이 있었다. 객관적 정세로 보아 일제측 관련자를 전원 소환하여 수사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하였고, 도리어 일제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 사건을 의욕적으로 수사하려던 선생은 얼마 뒤 주미공사로 전임되어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몰렸다.

을미사변 배후 철저하게 수사하다 일제의 위협 받던 중, 주미공사로 미국으로 가

선생은 1896년 주미공사가 되어 기울어져가던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구국외교에 투신하였다. 1896년 6월 20일 ‘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7월 고국을 떠나 9월 워싱턴에 도착하게 된다. 미국에 도착하기까지의 그동안 여정을 보면, 선생은 부인, 아들 이위종, 통역관 등과 함께 7월 16일 프랑스 군함 베이아르(Bayard)호를 타고 중국 지부(芝罘)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에서 중국 선박인 연승호(連陞號)로 갈아타고 상해와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한 뒤 9월 9일 워싱턴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후 선생은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1896년 선생은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프랑스·오스트리아까지 3개국 주재공사를 겸임하였다. 하지만, 선생이 미국을 떠나는 것은 1900년 3월 중순경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미국에 체류한 기간은 3년 반 정도 되는 셈이다.

선생이 런던을 경유하여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00년 5월 4일이었다. 이때 이기종·이위종 두 아들과 함께 도착하였다. 한 달 정도 파리에 머문 선생은 6월 12일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Emile Loubet, 재임기간 1899-1906)를 접견하였다. 이후 겸임지인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거쳐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선생은 7월 12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Ⅱ, 재위기간 1894-1917)에게 신임장을 전달하였다. 7월 13일자 러시아 신문에는 그 사실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주불 대한제국공사관]
[주불 대한제국공사관]

7월 12일 금요일, 러시아 황제는 빼쩨르고프 궁전에서 이범진 주러 대한제국 공사의 신임장을 재차 수락하였고, 이범진 공사는 자신의 신임장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영광을 안았으며, 그날 이범진은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 러시아 왕비에게 소개되는 영예도 안게 되었다.

즉 선생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빼쩨르고프 궁전에서 러시아 황제를 만나 신임장을 전달했으며, 그 자리에는 왕비도 배석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선생이 러시아 황제를 알현했던 빼쩨르고프 궁전은 오늘날 여름궁전으로 불리는 유명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이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주재하던 선생은 일시 영국으로 건너가 대한제국 대표로 1901년 2월에 거행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37-1901)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1901년 3월 12일 그동안 겸임해 오던 프랑스, 오스트리아 공사직에서 해임되고 ‘주차아국특명전권공사(駐箚俄國特命全權公使)’, 곧 주러공사 직에만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7월 10일 프랑스 루베 대통령에게 소환장을 제출하고 루베 부인까지 접견한 뒤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출발하였다. 선생은 그뒤 1904년 2월 4일 독일 주재 공사에 일시 임명되었지만, 같은 달 20일 주러공사에 복귀되었다.

러시아가 대한제국 용암포 조차하려고 하자 반발하다 파면된 주 러시아공사

주러공사 시절 선생은 대한제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 주재 러시아 공사 마튜닌(Nikolai G. Matiunine)이 1901년 2월 압록강 유역의 삼림 벌채권을 3년간 연장하려는 불순한 시도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한 것이다. 그 사업과 관련되어 일체의 권한을 광무황제로부터 위임 받았던 선생은 조국의 이권을 부당하게 침탈하려는 시도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함으로써 국익을 수호하려 하였다. 나아가 이 문제와 관련되어 러시아가 용암포(龍巖浦)를 조차(租借)하려던 시도에 대해서도 강력 반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용암포 조차를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선생은 여기에 반발하여 이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었다가 대리공사 김인석(金仁錫)이 문제의 그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한 뒤에야 다시 복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권수호를 위한 선생의 외교적 노력은,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조인한 직후부터 선생을 본국으로 소환할 것을 대한제국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러일전쟁 개전에 즈음하여 일제는 러·일교섭 단절을 통보하고 주러 일본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일본공사는 전쟁 발발 직후인 2월 10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떠났으며, 주한 러시아공사도 2월 12일자로 공사관 사무를 주한 프랑스공사관에 위임하고 서울을 떠났다. 일제는 곧이어 그동안 체결된 한러조약과 이권 폐기를 공포하고 주러 한국공사관 철폐와 공사로 있던 선생을 소환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주러 공사관 철폐, 주러 공사 소환” 일제의 어떤 요구에도 불응했던 애국 외교관

대한제국의 국권이 유린되던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선생은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Lamsdorff, V.)를 찾아가 광무황제의 칙명이 있기 전까지는 소환에 불응하고 현지에 머물며 공사의 직분을 다할 것임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 직후 선생은 북경 주재 러시아공사로부터 광무황제의 진정한 의중을 담은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그 전보는 주한 프랑스 총영사로부터 온 것으로, 선생을 소환하는 조처는 일제의 강요와 협박에 의한 것이지 결코 광무황제의 본의가 아니며, 황제는 선생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어 1907년 4월에도 선생이 러시아 주재 공사직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란다는 광무황제의 진의를 담은 문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러시아 외무대신에게 통보하였다. 이처럼 선생이 귀국을 완강히 거부하자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요하여 1904년 9월 1일 공사직에서 면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선생의 이러한 애국적 열정과 노력에 감응하여 선생이 계속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동시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사 일행의 임시 체류비가 지급되어 재정문제도 함께 해결되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이후로도 비공식적이지만 한동안 공사 업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정부는 외교관으로서 선생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공사관 유지비로 3개월마다 7,325루블을 지급하였으며, 그 결과 선생은 1904년 2월부터 1905년 12월까지 러시아 정부로부터 체류비를 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 외무대신은 선생의 체류비 지급에 관해 “러시아 정부가 한국 공사에게 체류비를 제공하는 것은 일제의 만행에 의한 지금의 한국 상황을 러시아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 러시아는 자주국가인 대한제국과의 외교관계를 계속 지원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라고 러일전쟁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지극히 우호적 관계로 언급하였다.

[광무황제(고종)의 친필]
[광무황제(고종)의 친필]

독립운동가가 된 주러 대한제국 특명전권공사

선생은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한·러간 외교활동을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양국 황제 사이에는 선생을 통해 수차에 걸쳐 서신을 교환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전쟁 발발 후 광무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는 1904년 6월 도착했고, 이 서신에 대해 니콜라이 2세는 다음 같은 답신을 보냈다.

저는 폐하에게 예전처럼 대한제국이 러시아에 얼마나 귀중하고 가까운 나라인지, 또한 우리가 폐하께 품고 있는 우정과 진실된 호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임을 대한제국 황제폐하께 확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제국이 겪고 있는 현실을 깊이 공감하면서 머지않아 대한제국의 미래가 더욱 밝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황제는 이어 한·러 양국간에 두터운 정의(情誼)와 친선을 계속 쌓아가기를 희망하고, 나아가 한국의 국권이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 뒤 러일전쟁이 일제의 승리로 귀착되는 상황에서 1905년 9월 14일 선생은 러시아 외무대신에게 광무황제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러시아와 일제의 강화조약 체결이 한국민의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렸으며, 하루 속히 서울에 러시아 공사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어 망국조약인 을사조약이 늑결된 직후, 1905년 11월 26일 니콜라이 2세에게 국권회복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광무황제의 애절한 편지를 비밀리에 받아 러시아 외무부에 전달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황제폐하, 지금 일본의 하야시 공사, 하세가와 한국주차군사령관,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이 대한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인정하는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기 위해 한밤중에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하여 궁궐에 침입했습니다. 저와 대신들은 그들에게 위협을 받았습니다. 일본인들은 무력으로 제 방을 점거하고 황제의 옥새와 외무대신의 국새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작성한 조약문에 일본인 스스로 날인한 후, 그들은 제가 그 조약에 서명하도록 재차 요구하였지만, 저는 처음에 그러하였듯이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다른 국가들도 따를 수 있는 이 음모를 유럽의 열강과 미국이 가만히 지켜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황제폐하께서 이 내용을 유럽 열강 및 미국정부가 검토할 수 있도록 전해 주시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이 다른 열강들과 함께 인류의 문명과 권리를 위해 조치를 취해줄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 서신에는 을사조약을 늑결한 일제의 불법성과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으며, 대한제국의 비극적 운명의 말로를 절감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외교관 시절의 이범진 선생]
[외교관 시절의 이범진 선생]

선생의 구국외교활동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됨으로써 공식적으로는 제한적이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1906년 초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대한제국 공사관이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으나, 당분간 러시아에 계속 체류해 있으라는 광무황제의 밀명으로 인해 선생은 정치적 망명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선생은 추후 대한제국 정부가 상환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러시아 정부에 한국공사관 이전 비용 5,010루블을 요청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선생에게 매달 100루블의 체류비를 지급하자는 람스도르프 외무대신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대한제국 공사관의 전 직원들이 귀국하는데 드는 비용 5,010루블을 한꺼번에 지급하는 대신 선생에게 매달 100루블씩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의 체류금 지급 기간이 1910년 3월로 만기가 되었다. 선생은 연금 지급을 연장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러시아 외무대신은 ‘생계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로 한국공사를 내버려두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과 결부된 문제’였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지불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결국 러시아 정부는 향후 2년간 매달 100루블의 연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을사조약 이후 선생은 기울어가는 국운으로 인해 이처럼 공관이 폐쇄되고 공사직에서 해직당한 상태에서 이역만리 땅에서 극도의 심리적 불안과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선생은 이와 같은 참담한 현실을 의연하게 감내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활동을 마지막까지 펼쳐나갔다. 곧 일제침략을 당한 조국의 현실로 말미암아 선생은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전문 외교관에서 이제 항일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국외교의 길을 생각하며 헤이그 특사의 후견인 역할을 하다

[헤이그 밀사에 대한 고종의 임명장]
[헤이그 밀사에 대한 고종의 임명장]

을사조약 이후 선생이 벌인 활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하나가 1906년 헤이그 특사를 후원한 것이다. 광무황제는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구국외교를 결행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 등 세 특사를 밀파하여 열강을 상대로 구국외교를 벌이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이들이 사행(使行)할 때 그 충실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헤이그 사행과 관련되어 선생의 활동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904년 선생이 러시아 외무대신으로부터 대한제국이 평화회의에 초청될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광무황제는 선생을 장차 있을 평화회의 수석대표로서 임명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선생은 그뒤 1905년 10월 러시아 외무대신으로부터 평화회의 초청장을 정식으로 받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치는 포츠머드 강화조약 이후 일제의 대한제국 국권침탈을 견제하기 위한 대일정책의 기조 위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아무튼 대한제국이 평화회의 초청 대상국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선생은 장차 있을 헤이그 사행을 진작부터 준비해왔다.

세 특사 가운데 이준은 1906년 4월 20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하였다. 두 사람은 다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6월 4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에서 그들은 선생과 만나게 되었다. 헤이그 사행에 필요한 문건을 작성하고 현지활동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범진 선생의 아들 이위종 열사
이범진 선생의 아들 이위종 열사

선생은 그들을 맞이한 뒤 러시아 외무대신을 면담하고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광무황제의 친서를 전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러시아 외무대신과 황제는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면담과 알현을 회피하였다. 1906년에 들어와 러일협약 교섭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던 관계로 러시아의 대한정책 기조가 부정적 방향으로 선회하였으며, 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에게도 ‘한국 특사들이 협조를 요청해오면 정중히 거절할 것’이라는 훈령을 내려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선생은 광무황제의 친서를 전달하지 못하고 외무부에 이를 접수만 시켜 놓았다. 애절한 호소로 이루어진 광무황제의 이 친서는 현재 러시아 대외정책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

헤이그 사행과 관련되어 러시아의 원조와 협조를 구하려는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특사들과 협의하여 평화회의에 제출할 문건인 ‘공고사(控告詞)’를 불어로 작성해 인쇄하였다. 선언서의 성격으로 된 이 문건은 일제침략의 실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열강이 지지해줄 것을 호소한 것으로, 헤이그 사행과 관련되어 가장 핵심 되는 문서라 할 수 있다.

백방의 노력도 냉혹한 외교 무대에선 시든 풀잎처럼 사그라들고

선생은 또한 외국어에 능통한 아들 이위종을 사행의 일원으로 삼아 두 특사와 동반케 하였다. 특히 영어,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이위종은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뒤 한국의 입장과 처지를 폭로하는 활동을 벌일 때 그 주역이 되었다. 특히 사행 목적을 밝힌 공식 문서인 ‘공고사’가 헤이그 현지 언론에 소개되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또 각국의 기자단이 모인 자리에서 그가 행한 ‘한국의 호소’라는 강연의 내용이 여러 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익을 우선시하는 국제관계의 냉혹한 현실에서 특사들이 백방의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헤이그 사행은 그 본래의 목적에 비추어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사행의 일원인 이준이 분사순국(憤死殉國)한 것도 이와 같이 냉혹한 외교무대의 실상과 참담한 민족적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연해주에서 힘을 길러 함경도를 되찾고, 서울까지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공사관 폐쇄 이후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헤이그 사행도 이처럼 특기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이 주목한 것은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왕성하게 일어나던 조국독립운동이었다.

두만강을 연한 연해주는 1860년대 이래 대규모 한인사회가 형성되고 을사조약 늑결 이후 민족 지도자들이 대거 망명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새로운 무대로 각광받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1910년 경술국치 전후까지 연해주로 집결한 민족운동가는 그 계통이 다양하다.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를 지낸 이범윤(李範允)을 필두로 국내에서 의병전쟁을 주도하던 유인석(柳麟錫)·홍범도(洪範圖) 등 의병 계열을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장지연(張志淵) 등 언론 계몽운동가, 그리고 미주에서 건너온 이상설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물들인 최재형(崔才亨)·김학만(金學萬) 등과 힘을 합하여 연해주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해주는 국망을 전후한 시기에 국내외에서 펼쳐지던 다양한 계열의 민족운동 노선이 합류하는 거대한 호수가 되었으며, 나아가 이는 곧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연해주 한인사회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이 지역 한인사회의 동향과 관련되어 선생이 가장 먼저 착안한 것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한인신문의 간행이었다. 헤이그 특사 의거 이후 선생은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한인신문이 발간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신문사를 세우고 국권회복에 공고한 사상을 가진 장지연을 초빙하여 일본의 통감정치를 공격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의 구축에 힘써야 한다.”고 한인신문 발간을 역설하였다. 이에 연해주 최초의 한인신문인 해조신문(海朝新聞)이 1908년 2월 창간되자, 편지를 보내 신문 간행을 축하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며 재정적인 후원도 아끼지 않아 금화 50원을 출연하였다. 이 신문은 1908년 2월 26일 창간되어 같은 해 5월 26일 폐간될 때까지 3개월 동안 총 75호가 간행되었다. 이후 한인신문은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신문 등으로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가며 연해주 한인사회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 선생은 연해주 의병의 편성과 활동을 위해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연해주 가운데서도 특히 연추(현 크라스키노)를 중심으로 한 남우수리지방에서는 항일의병세력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연해주 의병의 최고 지도자는 최재형과 이범윤이었으며, 유인석·홍범도·안중근 등이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08년 전후 연해주 의병의 규모는 3-4천명에 이르렀다.

선생은 러일전쟁 후 연해주로 망명하여 항일의병을 규합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간도관리사 이범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전주 이씨 집안의 아우이기도 한 이범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생은 “연해주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 일거에 함경도를 점령하고, 길게 몰아쳐 서울에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항일무장투쟁을 독려하였고, 나아가 러시아 관헌이 항상 우리를 후원하고 있으므로 선생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고 이범윤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국내로 진공할 것임을 역설하였다. 선생이 의병에 거는 무한한 기대와 희망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들 이위종은 러시아 놀켄 남작과 함께 연해주 한인사회 방문

1908년 봄 연해주에서 최재형과 이범윤 등이 의병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편성할 때 선생은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위종은 장인 시베리아 토볼주 총독인 놀캔 남작과 함께 연해주로 내려왔다. 이때 선생은 거금 1만 루블을 군자금으로 보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러시아 국경지대 관리는 다음과 같이 이들의 동향을 상부에 보고하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전 주러 한국공사의 아들이 왔다. 블라디미르 세르게비치 리(이위종)라고 한다. 그는 남작 놀켄(토볼주 총독이었던 것으로 여겨짐)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그의 장인과 함께 왔다.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 위한 대표단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이위종이 그의 장인 놀캔 남작과 함께 연해주를 찾게 되자, 현지 한인사회는 이에 크게 고무되었으며, 러시아 관리들도 그 동향을 예의주시하였다. 같은 시기에 남우수리 국경수비위원이 연해주 군무지사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이위종 일행이 연해주 한인사회에 출현함으로써 “앞으로 동쪽과 북쪽의 변경지대,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의 삼림지대에서 유혈 참극이 더욱 왕성하게 전개되리라는 것을 추측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하여 향후 의병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질 것으로 확단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이위종이 중심이 되어 동의회가 편성될 수 있었고, 그는 회장이 되어 이 의병단체를 이끈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동의회 의병은 1908년 7월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회령·경성(鏡城) 등 관북지방 내륙 깊숙이 진출하면서 일시 성세를 떨치기도 했다.

“조국의 국권침탈은 저에게 목숨을 보전할 어떤 명분도 앗아갔습니다.”

이범진씨의 죽음과 세상 사람들의 평론, 생명을 충성으로 버리고 재산을 의리로 씀
이범진씨의 죽음과 세상 사람들의 평론, 생명을 충성으로 버리고 재산을 의리로 씀

을사조약 이후 선생은 기울어가는 조국의 국운을 부여잡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칩거해 있던 선생은 피폐한 조국의 운명과 더불어 심신의 고통이 가중되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급기야 선생은 1910년 8월 경술국치라는 비극적 역사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맞았다. 그동안 주러공사로의 역할과 의무가 완전히 차단된 가운데 극도의 외로움과 공포 속에서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고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선생은 조국이 멸망된 데 대해 고통을 받으며 훼손된 조국의 명예를 회복할 방도가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자결순국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곧 선생은 경술국치로 인한 극도의 수치심과 비극적 역사 앞에 절감하는 책임감으로 말미암아 순국을 결행하였다.

[이범진 선생의 순국지(사진)]
[이범진 선생의 순국지(사진)]

자결에 앞서 선생은 남은 유산을 미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자금으로 분급하였다. 유산 분급 대상과 액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체로 보아 미주 국민회에 5천 루블, 미주 무관학교에 1천 루블, 미주 신문사에 1천 5백 루블, 하와이 한인사회에 1천 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청년회에 2천 루블 정도로 분급한 것 같다. 그 가운데 연해주로 분급된 유산의 일부는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민족주의 교육기관으로 한민학교(韓民學校)가 건립될 때 그 자금으로 제공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자결에 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유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분급하였던 것이다.

[이범진 선생의 순국지(약도)]
[이범진 선생의 순국지(약도)]

1911년 1월 26일(러시아력 1월 13일), 평소대로 일찍 일어난 선생은 11시까지 서재에서 지낸 뒤 정오 무렵 자결하였다. 천장의 램프 갈고리에 혁대를 걸어 목을 맨 상태에서 세 발의 권총을 쏘았던 것이다. 향년 59세를 일기로 순국하는 비극적 상황이었다.

선생은 순국에 앞서 몇 통의 유서를 남겼다. 광무황제와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하여 평소 친분이 있던 노바야 제레브냐 지구 경찰서장인 쿠즈네초프 대령 앞으로도 유서를 남겼다. 쿠즈네초프 경찰서장에게 남긴 유서에서 선생은 “서장님! 지금 한국에서의 상황들, 국권침탈은 저에게 목숨을 보전할 어떠한 희망과 가능성도 앗아갔습니다. 적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기에 저는 진정 자결을 결심합니다.”라고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해 자결하는 것으로 그 동기를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그리고, 선생이 일생 동안 한결같이 충성을 다했던 대한제국의 상징적 인물인 광무황제 앞으로 남겨둔 유서는 다음과 같다.

한국, 서울, 덕수궁

황제폐하께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이 유서에는 조국이 멸망한 참담한 현실에서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무한책임을 자임한 선생의 의식세계의 단면이 잘 드러나 있다. 이를 일러 다리요카 우크라이나 신문(1월 30일자)은 ‘슬픈 한국 역사의 비극적 결말’이라고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자결 후 선생의 시신은 페트로파블롭스키 시립병원에 안치되었다가, 그곳에서 영결식을 갖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북방 외곽에 있는 우스펜스크 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 북방묘지에 있는 이범진 공사의 순국비
상트 페테르부르그 북방묘지에 있는 이범진 공사의 순국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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