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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희제

훈격아이콘 훈격: 애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1년

주요공적

항일 의병과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목숨 걸고 기록하다

한말 의병장들과 애국투사들의 독립운동 행적 자료들을 수집하여 염재야록(念齋野錄) 저술

1938년 일제 경찰에 구속되면서 원고 압수당함.

1939년 일제 경찰의 잔혹한 고문과 단발 강요에 자결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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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제

조희제 , 1873 ~1939 , 애국장 (1991)

“훌륭하구나! 염재가 『야록』을 만든 일이여!

한편으로는 천고의 충성스런 넋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여러 역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뒷날 나라를 다스릴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바르게 하고 잇속을 챙기지 않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못난 자를 물리쳐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교훈을 작은 도움뿐이라 하겠는가?”

잊힌 애국지사 조희제와 『염재야록』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애국지사들의 항일활동 행적을 기록한 야사가 많이 편찬되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정교의 『대한계년사』, 황현의 『매천야록』, 송상도의 『기려수필』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야사 외에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과 애국지사들의 행적 등을 기록한 책으로 『염재야록(念齋野錄)』이 있다. 『염재야록』은 전북 임실의 유학자인 염재(念齋) 조희제(趙熙濟)가 을미사변과 한일합방 전후 그리고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항일 운동을 펼치거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한 이들의 행적을 정리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을미사변, 을사늑약, 한일합방 등의 전말과 각종 상소문과 격문·통문 등도 수록되어 있다.

염재야록(念齋野錄
염재야록(念齋野錄

조희제의 삶과 『염재야록』이란 책은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1)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조희제라는 인물이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그다지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 『염재야록』 편찬 사실이 발각돼 임실경찰서에 연행되었을 때 조희제 자신의 글은 물론이고 집안 대대로 간직해왔던 문집마저 모두 압수되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셋째, 후대 연구자들의 관심이 조희제라는 인물과 『염재야록』에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인데, 이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염재 조희제의 가계와 생애

조희제는 본관이 함안이며, 자는 운경(雲卿)이고 호는 염재(念齋)이다. 1873년(고종 10) 12월 10일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寺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참봉 조병용(趙柄鏞)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인 김헌기(金憲基)의 딸이다. 조병용과 안동 김씨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조희제이다.2)

염재 조희제 선생
염재 조희제 선생

조희제의 부친 조병용은 1836년(헌종 2)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나고 학업에 정진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려다가 프랑스 군대가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평소 거리낌 없이 일본을 배척하는 발언을 하여,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주의를 내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 중대한 일에 관계되어 이 때문에 죄를 받게 된다면 이는 내가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했다. 울분을 억누르지 못해 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서, “사내대장부라면 이처럼 어지러운 날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다 죽어야 마땅하다. 뜻한 일을 이루지 못하고 집안에서 죽게 생겼으니, 이 서러움을 어떻게 풀 것인가?” 하고는 1907년 1월 29일에 숨을 거두었다.3)

이처럼 집안 대대로 유학에 종사하며 학문을 닦고 나라에 충성을 다한 가문의 전통은 조희제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부친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학자로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한편으로는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상황을 몸소 느끼며 스스로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염재야록』 편찬이었다.

조희제 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품행이 남달랐다.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형제간에는 우애하며 친인척과는 화목하게 지냈다. 선행을 즐기고 어진 이를 좋아했는데, 이는 타고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찍부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도학과 의리의 요체를 깨달아 가슴에 새기고 적극 실천했다. 어려서부터 비분강개하는 뜻을 늘 마음에 품어왔다. 을미년에 나라가 변고를 겪은 이후, 을미사변의 전말 및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러 어진 분들의 행적을 모아 『염재야록』이라고 이름 하였다.

- 「念齋公熙濟」, 『咸安趙氏世譜』(癸卯譜)

조희제는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는데, 회문산 산세를 활용해 숨어 활동하는 의병뿐만 아니라 임실·순창·남원 등지에서 활약하는 의병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의병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그 때문에 일본 경찰의 감시도 삼엄했다고 한다. 이처럼 조희제는 의병활동을 직접 도왔을 뿐만 아니라, 가산을 털어 옥고를 치르는 애국지사들의 뒷바라지도 하였다.4)

조희제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염재야록』 편찬이라고 하겠다. 평생 『염재야록』의 편찬을 위해 모든 정력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윤문 작업을 마치고, 평소 교류하던 주위 사람들에게 부탁해 『염재야록』의 편찬을 일단락 지었는데, 김영한이 교정을 보고 최병심이 서문을 썼으며 이병은이 발문을 지었다.5)

1938년 11월 조희제가 『염재야록』을 편찬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편찬을 주도했던 조희제는 물론 최병심·이병은·김영한도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심문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다. 특히 조희제는 혹독한 고문을 당해 거의 목숨이 끊어질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와 몸조리를 하고 있는데 상투를 자르라고 다그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그의 나이 60세 되던 해였다.

구금을 당해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맞아 쇠한 몰골의 늙은 몸이 고슴도치와 거북이처럼 오그라들었다. 다른 이들은 그 혹독함을 견디기 어려웠는데, 오직 조희제 님만은 눈밭의 푸른 솔처럼 분기탱천하며 늠름한 모습이었다. 평소 쌓은 배포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열흘 남짓 옥고를 치르면서 억울한 심정이 더욱 깊어져 결국 병이 되어 목숨이 거의 끊어질 뻔했다. 집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는데, 상투를 자르라고 다시 다그쳤다. 어느 날 마음속으로 문득 깨달아 말하기를, “상투를 잘라 목숨을 늘리는 짓을 나는 하지 않겠다. 옛 사람들도 어찌하여 그리하지 않았던가? 우리 도리로는 그러한 치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의리를 지키다가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했다. 큰일 작은일 가릴 것 없이 집안일을 하나하나 정리한 뒤에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때는 11월 19일 밤이었다. 부고가 전해지자 원근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 「염재공희제」, 『함안조씨세보』(계묘보)

조희제 선생 비문(대전현충원)
조희제 선생 비문(대전현충원)
조희제 선생 비문(대전현충원)
조희제 선생 비문(대전현충원)

조희제는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에 태어나 항일의식이 투철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일제에 맞서 목숨을 끊은 송병선과 항일투쟁에 나섰던 기우만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남모르게 의병활동을 돕는 한편, 항일투쟁 활동과 애국지사들의 삶을 역사에 남기려 『염재야록』 편찬에 일생을 바치다가 결국 그 때문에 목숨을 끊게 되었다. 그는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가 남긴 소중한 기록들은 후세에 길이 전해져 역사의 교훈이 되었다.

항일활동 역사서 『염재야록』의 편찬

조희제는 위험을 감수하고 수십 년에 걸쳐, 독립투사들의 항일사적과 애국지사들의 충절 기록을 수집하여 『염재야록』을 편찬했다. 조희제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면서까지 『염재야록』을 집필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물론 무엇보다 본인의 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임실이라는 지역 상황과 집안 분위기 그리고 스승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조희제는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寺洞]에서 살았는데, 전라북도 동부산간지대에 자리한 임실은 구한말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 중의 하나였다. 을사조약 이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창 지역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이후에는 이석용과 전기홍 등 임실 출신 의병장들이 장성의 기삼연과 연합하며 임실 지역을 무대로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펼쳤다.6) 특히 무장투쟁을 펼쳐 일제에 큰 타격을 입힌 이석용은 조희제와 이웃한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출신으로,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창·임실 등지에서 활약했다.7) 이처럼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 되어가는 격변기에, 일제에 대한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의 한 가운데에서 조희제는 평생을 보냈다. 이러한 지역적 조건이 조희제에게 의병의 역사와 일제에 맞선 인사들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석용 의병장(대구감옥)
이석용 의병장(대구감옥)

항일의식이 강했던 집안 분위기나 스승 역시 『염재야록』 집필의 한 요인이 되었다. 조희제의 부친 조병용은 투철한 항일의식을 갖고 있었다. 스승 송병선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했다. 기우만은 을미사변 이후 의병활동을 펼치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조희제는 항일의식이 강했던 아버지를 보며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을 배양하게 되었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항일활동을 펼친 두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항일의 방안을 실천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병심은 1934년에 지은 『염재야록』 서문에서 집필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불행히도 지난 날 역적이 임금을 속이고 적을 집안까지 끌어들여 온 나라를 원수에게 넘겨주었다. 오백 년을 이어온 종묘와 사직을 망하게 하고, 우리 이천 만 동포를 노예 신세로 만들었다. 마침내 사천년 역사의 신성한 나라와 정결한 삼천리 강토를, 하루아침에 오랑캐가 날뛰는 마당으로 바꾸어버렸다. 벗 조희제와 몇몇이 이러한 상황을 개탄하였다. 이에 을미년(1895) 이후로 나라가 겪었던 변란 및 여태까지 있었던 여러분들이 보여준 충성과 의리에 관련된 행적을 모아 책을 편찬해, 『야록(野錄)』이라고 이름 지었다.

- 최병심, 「念齋野錄序」, 영인본 『염재야록』, 21쪽; 최병심, 『欽齋集』 권11, 「序」

조희제도 스스로 쓴 서문에서 집필 동기를 밝히며, 세상에 널리 명성을 떨치고 그 행적이 역사에 잘 기록된 인사보다는 초야에 묻힌 선비들의 충절 사실을 위주로 기록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초야에 묻힌 하찮은 벼슬아치나 선비의 경우, 의리를 앞세워 적을 공격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전혀 아니었는데도, 그들의 행적은 역사책에 숱하게 빠져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대체로 예나 지금이나 뜻있는 선비들이 눈물을 금치 못하고 있다.

- 조희제, 「野錄小序」, 영인본 『염재야록』, 23쪽

조희제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역사에 남기기 위해 『염재야록』을 편찬하려 하면서, 기존에 편찬된 역사서의 장단점을 비교했다. 다른 지역에서 이러한 성격의 책을 편찬하고 있는 현황도 비교적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과 박은식의 『한국통사』 등을 입수하여 그 내용을 검토했고, 또한 『기려수필』의 저자 송상도처럼 다른 지역에서 항일사적을 모아 책으로 엮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8)

임실군 덕치면 회문산 자락에서 『염재야록』을 편찬했지만, 기존 역사서를 비교 검토하고 여타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염재야록』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은 조희제는 수십 년에 걸쳐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항일투쟁 사실을 모았다. 또한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이 재판을 받는 과정을 방청하며 기록하기도 했다.9) 『염재야록』 편찬은 조희제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과정에는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마침내 1931년 건(乾)·곤(坤) 두 책으로 이루어진 『염재야록』 초고가 완성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야사를 쓰는 이들을 격려하려 한다. 또한 서툴고 부족함을 잊고 일찍이 박기재 님, 홍진표 군과 함께 이 일에 종사했다. 다만 고종 때 을미년 이후 초야에서 절개와 의리를 세운 여러분의 사적을 모아 두 책으로 저술했다. 이 책은 모두 간결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깊이가 없이 소략하며, 단아하고 절실하지 못해 촌스럽고 속되기만 하여 완벽하게 훌륭한 책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뒷날 선행을 좋아하는 자가 세상에 나와, 이를 잘 다듬어 그 뜻이 잘 드러나게 한다면, 만에 하나라도 취할 것이 있을 것이다. 신미년(1931) 12월 일 파산(巴山) 조희제 씀.

- 조희제, 「野錄小序」, 영인본 『염재야록』, 23-24쪽

조희제는 1931년에 초고를 완성한 다음 1934년에 각각 최병심과 이병은에게 서문과 발문을 부탁하고, 서울에 사는 김영한에게 교정을 의뢰하여 『염재야록』 편찬 작업을 마무리했다.10) 조희제와 이병은·최병심은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서 평소에도 서로 교류하고 있었으며, 특히 조희제와 최병심은 사돈사이였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최병심과 이병은은 위험을 감수하고 서문과 발문을 쓰게 되었다. 전주에 살던 이병은이 조희제의 부탁을 받고 발문을 쓰면서 보낸 편지를 보면, 그 당시 긴박한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이병은은 조희제가 비밀을 유지하며 『염재야록』을 집필해왔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사실이 밖으로 새나갈까 매우 염려하였다. 특히 이 답장을 불태워버리라는 당부로 끝을 맺는 대목에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엿볼 수 있다.11) 그러나 이병은의 우려대로 1938년 겨울 『염재야록』 편찬 사실이 발각되어, 조희제를 비롯한 최병심·이병은·김영한은 임실경찰서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을 당한 뒤 집으로 돌아온 조희제는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덕촌수록(悳村隨錄)
덕촌수록(悳村隨錄)

이병은의 걱정을 예견이나 했듯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조희제는 나름의 대책을 마련하였다. 『염재야록』 원고를 권6으로 완성해 건(乾)·곤(坤) 두 책으로 편집했는데, 책의 표지에는 『덕촌수록(悳村隨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촌’은 조희제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키는데, 이는 ‘덕치, 곧 덕촌에서 그때그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뜻으로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1질은 책상 위에 두고, 1질은 궤짝에 넣어 마루 밑 땅을 파서 묻어두었다고 한다.

조희제의 손자뻘이며 제자인 조현수는 조희제의 이웃에 살며, 『염재야록』 편찬 작업을 도왔다.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 연행되었으며, 조희제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 자결한 뒤에는 초상과 장례를 도맡아 치렀다. 그리고 해방된 이후에는 마루 밑에 있던 『덕촌수록』 초고본을 꺼내, 이를 바탕으로 다시 편집하여 『염재야록』이라는 표지를 붙여 건·곤 두 책으로 간행했다.

조희제는 『염재야록』을 편찬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또한 이 책이 세상에 널리 읽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병은이 발문에서 “훌륭하구나! 염재가 『야록』을 만든 일이여! 한편으로는 천고의 충성스런 넋을 달래고 한편으로는 여러 역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뒷날 나라를 다스릴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바르게 하고 잇속을 챙기지 않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못난 자를 물리쳐 잘못된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교훈을 작은 도움뿐이라 하겠는가?”라고 평했듯이,12) 조희제가 편찬한 『염재야록』은 후세 역사의 귀감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염재야록』의 체제와 내용

『염재야록』은 권6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머리에 최병심의 서문과 조희제의 서문 그리고 끝부분에 이병은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1은 을미사변과 1895·1896년의 의병활동, 권2는 을사늑약의 전말과 을사늑약에 반대해 자결한 이들의 행적, 권3은 1906·1907년의 의병활동, 권4는 한일합방의 전말과 합방 후에 일제에 맞서 절개를 지킨 분들의 행적, 권5와 권6은 절의문(節義文)이 실려 있다. 그리고 책 끝에 ‘구한말 절개를 지킨 여러분의 행적 가운데 수록하지 못한 이들의 표[韓末節義諸公事行未摭者表]’, ‘절개와 의리를 지킨 이들이 지은 글 가운데 아직 수록하지 못한 글의 표[節義人所製文字未摭者表]’가 실려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을미년, 을사년, 병오·정미년, 경술년으로 구분하고 거주지역과 명단을 기록했다. 후자의 경우는 그 목록만 기재하고 있다.

『염재야록』의 수록 인물에 대한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면 대부분 전우, 기우만, 송병선의 문인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여타 지역에 비해서 호남지역의 인사를 많이 수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조희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라가 망한 날에 이르러 절개와 의리를 지킨 행적이 가장 왕성하게 펼쳐진 지역으로는 호남을 으뜸으로 칭하며, 기호 지방과 영남 지방이 그 다음이다. 그렇다면 호남지역은 또한 어찌하여 이처럼 선비가 많은가? 우리 역대 임금님들께서 5백 년 동안 예절과 의리를 앞세워 길러주신 공로를 이를 통해 살펴볼 수가 있다.

- 영인본 『염재야록』, 113쪽

광주감옥의 의병장들의 모습
광주감옥의 의병장들의 모습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인 1908년과 1909년 두해 동안 전투 회수로 보나 참가인원으로 보나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은 전국에서 가장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13) 의병활동과 항일운동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호남, 그 중에서도 중심지의 하나인 임실에 살았던 조희제는 호남지역의 애국지사와 우국지사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여 남기고자 했다. 특히 조희제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송병선과 기우만의 제자로서 간재 전우의 문인 등을 위주로 항일인사들의 행적을 수록했다. 이들 인물들의 행적을 크게 나누어보면 의병을 일으켜 적극적으로 항쟁한 유형, 울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형, 그리고 은사금 거부·호적입적 거부·납세 거부 등 일제 식민지통치에 나름대로 저항하면서 세상을 떠나 은둔한 유형 등이 있다. 조희제는 이처럼 『염재야록』을 편찬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국권을 상실한 뒤에도 일제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며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이들을 역사에 길이 남기려 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ㆍ『念齋野錄』(石印本).

ㆍ『念齋野錄』(影印本).

ㆍ崔秉心, 『欽齋集』.

ㆍ李炳殷, 『顧齋集』.

ㆍ『任實郡誌』(임실군지 편찬위원회, 1997).

ㆍ『咸安趙氏世譜』(己丑譜).

ㆍ『咸安趙氏世譜』(癸卯譜).

ㆍ「靑耕趙公墓碣銘」.

ㆍ「念齋趙熙濟先生碑文」.

ㆍ박성수, 「염재야록 해제」, 영인본 『염재야록』(금강서원, 1990).

ㆍ강길원, 「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 『원광사학』 2(1982).

ㆍ홍순권, 「을사조약 이후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전과 의병장들의 성격」, 『한국학보』 57(1989).

ㆍ변주승, 「염재 조희제와 ≪염재야록≫」, 『국학연구』 15.(2009).

주석

1) 조희제와 『염재야록』에 대해서는 영인본 『염재야록』에 간략한 해제가 실려 있다(박성수,「염재야록 해제」, 영인본 『염재야록』, 금강서원, 1990, 4-9쪽). 논문으로는 변주승,「염재 조희제와 ≪염재야록≫」, 『국학연구』 제15집(2009)이 참조된다. 본고는 이 논문을 참조하여 작성했다.

2) 조희제의 가계와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咸安趙氏世譜』(己丑譜)가 참조된다.

3) 조병용에 대한 사실은「靑耕趙公墓碣銘」(奇宇萬 지음)에 자세히 보인다. 이 비석은 전북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에 있다.

4) 『任實郡誌』, 임실군지 편찬위원회, 1997, 1584-1585쪽.

5) 「염재공희제」, 『함안조씨세보』(계묘보).

6) 1906년부터 1910년까지 호남지역 의병장 284명의 거주지, 출신, 직업, 근거지 및 활동지역, 집단규모 등을 정리한 표에 따르면, 임실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병장은 강재천, 최유흥, 이석용, 양윤숙, 이남규, 강사과, 김봉근, 정성현, 정성운, 정성립, 김경삼, 양치원, 윤학동, 이성룡, 김노성, 김동구, 박경락 등이다. 이외에 임실과 인접한 순창, 장성, 진안 등지에서도 많은 의병장들이 활동했다(홍순권,「을사조약 이후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전과 의병장들의 성격」, 『한국학보』 57, 1989, 부표 ‘호남지역 의병장 일람표’, 139-157쪽).

7) 강길원,「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 『원광사학』 2, 1982, 73-75쪽.

8) 영인본 『염재야록』 24쪽.

9) 「念齋趙熙濟先生碑文」(李鉉淙 지음). 이 비석은 전북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에 있다.

10) 『함안조씨세보』(계묘보).

11) 이병은, ‘答趙雲卿’, 『顧齋集』 권11, 「書」.

12) 영인본 『염재야록』, 230쪽; 이병은, ‘題念齋野錄後’, 『顧齋集』 권4, 「題跋」.

13) 홍순권, 앞의 논문,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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