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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은찬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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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

이은찬 , (1878) ~1909 , 대통령장 (1962)

一枝李樹作爲船 오얏나무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어

欲濟蒼生泊海邊 창생을 구제하고자 해변에 띄웠는데

寸功未就身先溺 작은 공도 못 이루고 몸이 먼저 물에 빠졌으니

誰算東洋樂萬年 누가 동양의 만년 평화를 기약하리오.

- 선생이 남긴 옥중시(1909. 6)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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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들어와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했던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나아가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차관(次官)정치를 자행함으로써 대한제국정부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해산시켜 한국 민족의 자위력을 말살하여 갔다. 러일전쟁 이후 본격화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작업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었다.

이 같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5천년 역사를 지닌 민족이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우리 민족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대항하였다. 이 때의 의병전쟁은 1894년 갑오왜란 이후의 전기 의병전쟁, 1905년 [을사조약] 이후의 중기 의병전쟁과는 양상이 판이하게 달랐다.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일본군의 의병 탄압에 맞서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유격전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기 의병전쟁과 중기 의병전쟁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던 대다수 유림세력을 서서히 탈락시켜 가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도 경기 북부에서 최대의 연합의병을 이끌고 활약한 유생 출신의 의병장이 바로 이은찬 선생이었다.

선생은 1878년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부흥사면(富興寺面)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명으로는 은찬(殷贊)·언찬(諺讚)·헌찬(憲讚) 등이 있다. 아쉽게도 선생의 성장과정이나 학통은 알 수 없다. 다만 선생의 활동 무대와 의병 동지들을 고려할 때 화서(華西)학통의 인물로 여겨질 따름이다.

맨 처음 선생이 거의한 시기는 명성황후 시해 직후인 1896년이었다. 1896년 음력 2월 선생은 국모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이기찬(李起燦)·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선생은 각지에 의병 모집 격문을 발송하고, 금릉(金陵)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한 뒤 대구 진격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관군의 공격을 받고 조동호와 함께 사로잡혀 전기 의병전쟁에서는 크게 활약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다시 거의한 것은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후기 의병전쟁 시기였다. 선생은 그해 9월 이구채(李球采, 일명 九載)와 함께 해산군인 80여 명을 포함한 500여 명의 의병을 불러모아 원주에서 거의하였다. 이후 선생은 경북 문경에 은거하고 있던 경기도 여주 출신의 유생 이인영(李麟榮)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관동창의대(關東倡義隊)를 결성하고, 자신은 중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연천에서 재기한 허위(許蔿) 의병부대가 원주에 이르자 선생은 그와 함께 전국의병연합체 결성을 적극 추진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대(十三道倡義隊)’ 결성이 모두 선생의 지략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군의 장령(將領) 임명도 모두 선생이 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선생의 주도로 그해 11월 각 도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여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편성하였으며, 동시에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1907년 12월부터 두 달여 동안 13도창의군은 서울 근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동대문 밖 10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창의대장 이인영이 친상을 당하여 귀향하고, 또 의병부대 상호간의 유기적인 협조 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1908년 2월 임진강 유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여기서 선생은 허위를 중심으로 조인환(曺仁煥)·왕회종(王會鍾)·김진묵(金溱黙) 의병부대와 김수민(金秀敏)·박종한(朴宗漢) 의병부대를 규합하여 ‘임진강연합의병(臨津江聯合義兵)’을 다시 결성하였다. 이들 연합의병은 그해 4월 21일 전국에 의병봉기를 호소하는 통문을 발송하였으며, 5월에는 통감부 폐지·외교권 반환 등 30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재차 서울 진격 작전을 추진하여 갔다.

이를 계기로 경기 북부에서 의병전쟁이 격화되자 일제는 일본군 수비대·헌병대·경찰대 등을 동원하여 임진강 연합의병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임진강 연합의병부대를 이끌던 허위가 그해 6월 11일 피체되고, 선생의 의병부대에서도 임운명(林雲明) 등 120명의 의병이 일본군 수비대에 투항하는 등 내부적 동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임진강 연합의병부대는 분리분산하여 각기 소부대 단위의 유격전을 펼쳐 가며 일제에 맞섰다. 선생 또한 의진을 정비한 뒤 경기북부 연합의병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선생은 그해 10월 김귀손을 선봉장, 윤인순을 우군장, 정용대를 좌군장, 이계복을 군량장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경기북부 연합의병 원수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원수부(元帥府) 중군대장(中軍大將) 이 은 찬(李 殷 瓚)

원수부(元帥府) 선봉장(先鋒將) 김 귀 손(金 貴 孫)

원수부(元帥府) 우군장(右軍將) 윤 인 순(尹 仁 淳)

원수부(元帥府) 좌군장(左軍將) 정 용 대(鄭 容 大)

원수부(元帥府) 군량장(軍糧將) 이 계 복(李 啓 福)

참 모(參 謀) 윤 대 구(尹 大 邱) 등

부 장(部 將) 강 기 동(姜 基 東) 등

부 관(副 官) 장 수 봉(張 守 奉) 등

이들 경기북부 연합의병은 일본군의 탄압을 피하면서 효과적인 공격력을 발휘하기 위한 전략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것은 유기적인 연락 체계를 지닌 채 각기 독립부대로 활동하다가 때때로 대규모 연합작전을 펼치는 방식이었다. 아울러 선생은 동절기를 맞이하여 무엇보다도 산악전투에 필요한 의복·식량 무기 등의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1908년 10월과 11월 두 달간에 걸쳐 포천·영평 일대에서 군자금과 군량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때에도 선생은 반드시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후일 갚도록 함으로써 민심 확보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에 대해 일본군에서조차,

“(이은찬은) 국가적 지상(志想)을 갖고 항상 정의를 표방하여 민심을 수람하였다. 시사(時事)에 탁(托)하여 정의를 운위(云爲)함으로써 민의(民意)를 영합할 뿐 아니라 군자양식(軍資粮食)의 징발도 직접 세민(細民)으로부터 주구(誅求)하는 행동을 피하고 각 면장 등에게 통지하여 징집시켰다. 또 음식물 기타 구입 물품의 대금도 부하를 경계하여 모두 그 지불을 게을리하지 않고, 혹은 군표(軍票) 등 유사의 징표로써 미곡에 대신하고 후일 그 대금의 지불을 약속함으로써 되도록 인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의 폭도(의병)는 물론 지방의 인민도 그 덕을 감사하고, 이(이은찬)를 부르기를 대장 또는 각하의 칭호로 하고, 완미(頑迷)한 사인(士人)은 기뻐 그를 영접하고 그 행동을 비밀로 할 뿐 아니라 보초가 되어 주위를 경계하고 혹은 밀정이 되어 관헌 행동을 통고함이 오히려 당연히 진력해야 할 의무로 오해하여 그 행동을 후원하니 여하히 이(이은찬)가 민심을 농락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 할 정도로 선생 의병부대는 일반민중과 유지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선생의 경기북부 연합의병부대는 그 해 12월부터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 선생의 지휘 아래 연합의병부대는 12월 2일 포천군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수비대·헌병대·경찰대의 병력과 배치 등을 탐문한 뒤, 다음날 포천헌병분견소로 격문을 보내고 가평으로 이동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포천현병분견소로 격문을 보낸 것은 포천지역의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를 섬멸하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포천헌병분견소는 격문을 받고, 곧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로 구성된 합동 토벌대를 출동시켰다. 이들은 이튿날인 12월 4일 오후에서야 선생의 연합의병부대가 가평군 상면 서파동에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추격하여 왔다.

의장소식
의장소식

이 때 선생은 일본군의 추격 상황을 파악하고 서파동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후방과 좌우 산기슭에 의병부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매복시켜 놓고 있었다. 드디어 일본군 토벌대가 계곡을 따라 난 도로를 통해 매복 위치까지 접근하자 선생의 연합의병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우수한 무기의 일본군이나 유리한 위치에서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며 공격하는 선생의 의병부대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 의병부대는 2시간 반 가량의 가평 서파동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선생의 연합의병부대에 대해 “대오(隊伍)를 정제(整齊)하고 내습하여 일일이 (이은찬의) 동령지휘(動令指揮)에 따라 사격하는데 그 행동이 엄정하고 모(侮)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일찍이 저들(이은찬 의병부대)에 주목하고 그 토벌에 밤낮 고심하고 있으나 변환출몰 하면서 공격하고 사라짐은 놀랄 만큼 신속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가평 서파동전투 후 양주군 별래면으로 이동한 선생의 연합의병부대는 12월19일 20일에 걸쳐 퇴계원헌병분견소 헌병들과 교전하고, 다시 포천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도 선생은 의병부대를 둘로 나눠 서로 엄호하며 공격하고 후퇴하게 하였는데, 용의주도함은 일본군도 놀랄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이에 일본군은 정예의 용산수비대와 경성헌병대의 병력을 급파하고, 포천지역에 경비 전화를 가설하여 선생의 연합의병부대의 습격에 신속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다음해인 1909년 1월 4일 선생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2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포천지역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봇대를 쓰러뜨린 뒤, 포천헌병분견소와 수비대를 기습하고 양주로 이동하였다. 1월 7일에도 선생의 연합의병부대는 양주헌병분견소를 기습하면서, 다른 부대로 하여금 동두천헌병분견소를 공격하게 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경기·강원·황해 지방에 걸쳐 가장 성망이 높고, 또 오래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선생의 연합의병부대를 목표로 본격적인 탄압 작전을 감행하여 왔다. 특히 강원도 금성수비대장이 지휘하는 100여 명의 일본군이 탄압 작전을 전담하면서 선생의 연합의병부대를 추격하였다. 이와 함께 1월 14일자로 포천헌병분견소와 양주헌병분견소의 병력을 증원하고, 1월 16일 포천군 관아에 보병 제13연대의 일부 병력을 주둔시켜 선생의 활동 근거지에 대한 경비를 한층 강화하였다.

그럼에도 선생의 연합의병부대는 1월 15일 밤 300여 명 병력으로 포천군 내촌면 내리와 가산면을 기습·공격하고 양주로 다시 빠졌다. 양주에서 김봉수(金鳳洙) 의병장과 그동안 소모된 군자금 및 군량미를 보충하면서 10일간의 전투준비 기간을 가졌다. 1월 25일에는 170여 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여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본군 정찰대 및 경찰대와 교전함으로써 전투를 재개하여 갔다. 그리고 1월 26일·28일에도 선생은 연합의병부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 연천군 적성면과 양주군 광적면에서 다시 일본 헌병대와 경찰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후 선생은 일본군의 탄압에 대비, 연합의병부대를 분리분산시켜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윤인순 의병장은 양주·파주 방면으로, 정용대 의병장은 영평·가평 방면으로 산개해 각기 부대를 이끌고 투쟁하도록 한 것이다. 선생도 직계부대를 이끌고 1월 30일 포천 송우리를 거쳐 2월 3일 일동에 도착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영평헌병분견소는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뒤 추격 작전을 폈으나, 2월 4일 포천군 이동면 중진리에서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패주하였다. 2월 5일에도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동면 노곡리의 솔밭에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쫓아온 영평헌병분견소와 포천헌병분견소 합동토벌대를 기습공격하여 퇴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같은 전투를 앞두고 선생은 2월 3·4일 포천군 일동면과 이동면에서,

“금일 폐하는 혹한임에도 또 통감에게 속아 행행(行幸)하니 참으로 송구하기 짝이 없다. 통감은 일본인 흉한(兇漢)으로 하여금 폐하를 시해시켜 대한제국을 망하게 할 계획인 고로 우리 의병은 일본인을 모두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를 당하여 우리 국민은 다함께 의병이 되어 경성에 진격하여 통감을 위시한 일본 군대 및 경찰관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은 우리 국민을 가혹하게 학대할 뿐만 아니라 통감은 외람되게도 우리 폐하를 좌우한다. 실로 분함을 이길 수 없다. 이 때에 결사대를 조직하여 통감의 저택에 폭발탄을 투입, 살해하고자 한다.”

고 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결사대를 조직한 뒤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을 위시한 일제 침략자를 처단하고자 하는 선생은 의병전쟁과 함께 의열투쟁을 병행함으로써 항일 투쟁의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였다. 유감스럽게도 선생의 이러한 의도는 일본군과 계속된 전투로 실행되지는 못하고 말았다.

情報 [暴徒首領 李殷贊에 대한 楊州·砥平·麻田·積城地方民의 歡待 件]
情報 [暴徒首領 李殷贊에 대한 楊州·砥平·麻田·積城地方民의 歡待 件]

이처럼 선생의 경기북부 연합의병부대는 1908년 12월부터 약 3개월간 포천·가평·양주 등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줄기찬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2월 상순에 이르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연일 계속된 전투로 탄약이 결핍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여 전투인력이 감소된 때문이었다. 이에 선생은 연합의병부대를 분리분산시켜 전열을 정비하게 하였다. 선생은 포천·영평 방면에서, 윤인순과 김교성 의병장은 양주·영평 방면에서 분리 활동하면서 전력보충기간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 기간에 선생은 군자금과 병력 조달 방안을 구상하였다. 먼저 선생은 군자금 조달 방안으로 우편물 탈취 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은 재무서에 납부된 세금이 우편물과 함께 서울로 우송될 때 도중에서 습격하여 탈취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각 면·동장에게 “세금은 모두 우리 의병에게 납부하라. 만약 불응할 때는 살해할 것이다”라는 격문을 배포하면서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2월 13일 포천군 이동면 연곡리에서 선생은,

“황제 폐하는 내달 15일경 이 지방을 통과, 원산으로 행행(行幸)한다는 소문이 있다. 과연 사실이라면 우리는 연도에서 기다려 의병의 곤란한 상태와 일본인을 배척할 것을 상주하지 않을 수 없다. 고로 다수의 의병을 모집할 필요가 있다. 국민이 모두 같은 뜻으로 찬동하여 우리의 목적이 달성되기를 희망한다.”

고 하여 지방 인민의 의병 참여를 촉구하면서 병력을 충원하여 갔다. 이와 함께 선생은 헌병보조원과 순사까지 의병으로 만들려는 포섭 공작을 폈다. 그것은 이들을 통해 군사정보를 획득하고 무기를 확보하며, 나아가 일본군의 동요까지 야기하려는 고도의 심리 전술이었다.

이 결과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9년 1월보다 100여 명이 증가한 250명, 윤인순 의병부대는 30여 명 늘어난 103명 규모로 확대되었고, 조달된 군자금으로 무장도 강화할 수 있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2월 20일 포천 가산면 용단동에서 일본군 수비대 순사대와 교전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재개하여 갔다. 그리고 이전에 분리하였던 정용대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을 개시하면서 2월 25일 양주군 광적면에 잠입하였다. 이 때 일본인 미즈노(水野) 순사대가 선생의 연합의병부대가 주둔한 것을 탐지하고 하다(烟) 순사대와 합동으로 추격하여 왔다.

선생의 연합의병부대는 광적면·백석면·주내면 경계의 도락산 고지에 100여 명의 의병을 배치하고, 산기슭 솔밭 사이에 정예의 의병용사 40여 명을 매복시켜 협공 채비를 차렸다. 그런 다음 일본인 합동순사대가 매복 위치로 접근하자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유리한 고지에서 선생의 의병부대는 정확한 조준사격을 가하고, 때때로 위협적 대포를 발사하며 일본인 합동순사대를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곧이어 선생의 연합의병부대는 다시 윤인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무장대오를 확대편성한 뒤 양주 두일리에 잠시 머물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양주경찰서 소속 정찰대는 2월 27일 즉시 양주헌병분견소에 연락하여 합동으로 추격하여 왔다. 이를 피해 이동하던 중 선생의 의병부대는 광적면 덕도리에서 고양헌병분견소 헌병들과 맞닥뜨려 교전하게 되었다. 이 때 양주헌병대와 경찰대까지 도착하여 합세함에 따라 선생의 의병부대는 포천군과 인접한 주내면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덕도리전투 직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양주군 주내면으로 이동, 원잠리에 잠복하고 있었다. 3월 1일 이 정보를 입수한 양주경찰서는 헌병분견소와 합동으로 선생의 의병부대를 추격하여 왔다. 이들은 3월 2일 회천면 귀율리로 이동하여 잠복하여 있던 선생의 의병부대를 발견하고 기습 공세를 폈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부대는 탄약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응전하지도 못하고 포천 방면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였던 일본군은 군·경 합동토벌대를 편성하여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포천과 양주로 옮겨 다니며 이들의 수색 작전을 피해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힘썼다. 하지만 3월 4일 포천군 무림리에서, 3월 6일 양주군 현암리에서 이들의 공격을 받고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여 이들 전투를 끝으로 선생의 의병부대는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의장피착
의장피착

이후 선생은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친일 밀정 박노천·신좌균 등은 과거 선생의 동지였던 조수연을 보내 군자금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선생을 서울로 유인하였다. 이들의 함정에 빠진 선생은 3월 31일 박노천·신좌균을 만나기 위해 용산역으로 갔다가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경들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선생은 피체 후에도 의병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내가 너희(일본인)들과 싸우기를 대소 40여 차례 하였으며 너희 병정 470여 명을 참살하였으니 빨리 죽여라. 나의 거의는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니, 오늘에 이르러 어찌 자신의 영욕을 생각하랴.”

의장사형
의장사형

재판정에서 선생은 이렇게 거의가 한국의 독립 보존은 물론 동양 평화를 위한 것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1909년 5월 10일 선생은 일제가 사법권을 행사하던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선생은,

一枝李樹作爲船 오얏나무 가지 하나로 배를 만들어

欲濟蒼生泊海邊 창생을 건지고자 해변에 띄웠는데

寸功未就身先溺 조그마한 공도 이루지 못하고 몸이 먼저 빠졌으니

誰算東洋樂萬年 누가 동양의 만년 평화를 기약하리오.

라고 하는 옥중시를 남긴 뒤, 6월 27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이 남긴 옥중시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선비로서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된 애통함이 절절이 사무쳐 있다. 나아가 거기에는 민족 독립과 동양 평화를 바라는 선생의 염원과 민족애, 그리고 인류 평화 의지도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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