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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위종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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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종

이위종 , (1887) ~미상 , 대통령장 (1962)

어려서부터 부친 이범진(李範晉)을 따라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자란 이위종 선생은 당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사실상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선생은 아버지를 보좌하여 외교관으로서 일했으며,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특사로 파견되었다. 선생은 헤이그에서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고 일제 침략의 실상과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러시아에서 자결한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일제 위협 받는 아버지를 따라 워싱턴으로 간 소년 이위종

이위종(李瑋鍾, 1887 ~ ?) 선생은 188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부친은 이범진(李範晉)이다. 이범진은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주미공사, 주러공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이경하(李景夏)는 대원군 집권 당시에 ‘낙동염라(駱洞閻羅)’라고 불릴 정도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포도대장이었다.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탄압하자 이경하는 정부의 명을 받아 이를 집행하였다. 이위종의 부친과 조부는 국정의 요직에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범진은 서자였지만, 다른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고, 별다른 차별 없이 호방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고종의 집권 당시인 1879년(고종 16)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후 고종과 왕비의 측근 인물로서 정부의 중요한 직임을 두루 역임하게 되는데, 주요한 계기는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 당시 위기에 처한 왕비와 왕자를 안전하게 보호한 공로로 왕과 왕비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

이범진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는 성향이 달라, 매우 반일적인 인물이었다. 한 때 일본 언론에서는 이범진을 “친러파”라고 비방하는 기사와 함께 ‘팔방추부’(八方醜夫, 여러 모로 추한 남자)라고 조롱한 만화까지 나온 적이 있다. 일본이 볼 때 이범진은 조선 내 제1의 기피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범진은 당시 러시아 사정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는 을미사변 직후 경복궁에 감금된 처지이던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요컨대 아관파천의 국내 주역이었다.

이위종이 부친을 따라 해외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아관파천 직후였다. 부친은 영어도 몰랐고, 미국 사정에도 밝지 못했지만 1896년 초여름 미국 워싱턴 공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범진은 아관파천 직후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어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이끌었는데, 일본 측은 그를 더욱 기피하게 되었고, 그의 신변도 따라서 위험해졌지만, 그는 수사의 강도를 늦추지 않았다. 일본이 그를 견제하고, 러시아도 일본과 타협하게 되자, 고종은 그의 안전을 위해 미국 공사로 보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미국 행은 이범진으로서는 일종의 정치적 망명이었다. 그 해 7월 부인 박씨와 작은 아들 위종을 대동하여 인천을 출발할 때까지 이범진은 일본 낭인과 장사패 등으로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린 것으로 드러난다. 이위종은 이런 분위기를 목도하면서 성장했다.

미국, 러시아 옮겨 다니며 3개 서양 언어 숙달한 유일한 조선인

그의 부친이 워싱턴 공사로 있을 때 갑신정변의 주역이던 서광범이 숨을 거뒀다. 한동안 워싱턴에 머물던 민영환 등이 장례식에 참여했지만, 이범진은 서광범이 조선 황실에 대해 ‘반역적인 인물’이라 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헤이그 특사 임명장
헤이그 특사 임명장

이범진은 미국에서 3년여 동안 일하다가 유럽주재 공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후 1900년 러시아 공사로 발령을 받아 떠난다. 그는 여기서 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도 겸임하였다. 이범진은 친러파라 하여 지탄을 받았지만, 오해였다. 그는 대한제국에 봉사한 관료이자 외교관이었다. 이범진이 러시아 주재 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租借) 요구에 대해 대한제국정부가 승인한다는 공문이 그에게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용암포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며 그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았다. 이 일로 그는 파면 당했다. 얼마 뒤 그 공문이 러시아 측에 전달되면서 복직은 되었지만, 그의 그런 행위는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편 이위종은 미국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중등학교를 다녔고, 군사학교도 마쳤다. 그는 당시 영어·러시아어·프랑스어 등 서양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주러시아 공사로 임명되자 뻬쩨르부르그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이 되어 함께 떠났다. 그가 러시아 여성 놀켄 양과 결혼한 것은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05년이다. 그 해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각국 주재 한국 공사관이 폐쇄되고, 일본 측의 종용으로 정부는 각국 주재 한국 외교관의 소환령을 내렸다. 부친은 본국의 소환령에도 불구하고 현지에 체류하면서 비공식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이위종도 러시아에 머물렀다. 일본 측은 고종을 위협하여 그의 귀국을 종용하였지만, 고종의 뜻을 알고 있던 이범진은 끝내 귀국하지 않았다. 그가 귀국하였다면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후일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하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헤이그 회의장 입장 안되자 자신을 대한제국 왕자라고 현지 언론에 소개

이때 일본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자결한 이들이 국내외에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한응이, 국내에서는 민영환·조병세 등이 있었다. 해외에서 소식을 접했을 이범진 공사나 이위종도 참담한 심정은 마찬가지였다. 본국에서 공사관을 유지할 송금도 단절되고, 공식적인 외교관 임무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루하루가 초조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별도의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건이 이위종의 헤이그 평화회의 특사 파견과 역할이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열강의 도움을 받아 보호국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이위종은 고종이 파견한 특사 3인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국내에서 명을 받아 출발한 이는 이준이었고, 헤이그 현지에서 열국을 상대로 직접 활동을 펼친 것은 이위종이었으며, 특사일행의 공식 대표는 이상설이었다. 모두 출중한 인물이었다.

헤이그 특사 사진(1907)
헤이그 특사 사진(1907)

이준은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러 이상설과 합류하였고, 러시아 수도에서는 이위종과 합류하였다. 정사 이상설과 부사 이준이 6월 4일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자 이들은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청원서를 번역했다. 이범진은 러시아 황제에게 요청하여 특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기자들에게 이들이 연설할 기회를 갖도록 이면에서 적극 활동하였다.

이준 등은 독일의 베를린에 도착하여 공고사를 인쇄하고 6월 25일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거기서 장서(長書)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평화회의 장소에 입장할 수가 없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하였으므로 대표를 파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작성한 내용을 일본 외의 40여 개 참가국 위원에게 보냈고, 각국 위원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각국 대표는 모두 이를 거절했다. 네덜란드 측이나 러시아 측도 모두 냉담하였다. 초청장을 보낼 당시와 이때의 상황은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이준의 만국평화회의 참석도(1907)
이준의 만국평화회의 참석도(1907)

러시아는 러일전쟁 종결로 강화조약을 체결할 당시만 해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외교권 장악에 대해 일정한 견제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러·일의 타협이 이루어져 러시아 측은 한국 문제로 더 이상 일본을 견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특사 일행은 그러한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또한 그런 사정을 알게 되었다 해도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을 성토하고 국제회의에 참석할 길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에 능통한 이위종의 역할이 크게 빛을 발하였다. 이위종은 모든 회의와, 기자회견에서 주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이위종은 언론에 대한제국의 왕자로도 소개되었다. 그가 전주 이씨 가문의 출신이었다는 점 외에 무엇보다 현지에서 특사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만부득이한 상황에서 고안해 낸 착상이었다.

이위종의 주장은 이러했다. 일본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승인 없이 행동했다. 일본은 무력을 이용하여 황제와 대신들을 강압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하고 행동했다. 그러므로 을사보호조약은 불법이고 무효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의 각국과의 우호관계가 일본에 의하여 파괴되고, 동아의 평화가 끊임없이 위협되는 것을 관계 열강은 방치할 것인가, 왜 대한제국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인가, 대한제국의 대표는 법의 신, 정의의 신, 평화의 신을 찾아 헤이그에 왔는데, 전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조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이곳에서 세계의 대표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대한제국을 평화회의에서 제외시키는가, 조약이란 위반하기 위해 있는가’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의 침략상을 낱낱이 지적해 각국 대표와 언론인들의 여론을 움직인 연설 ‘코리아의 호소’

공고사
공고사

현지에서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 준 외국인들도 있었다. 윌리엄 스테드와 스투너 여사가 바로 그들이다. 여기에 서울에서 파견된 헐버트도 이들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영국의 언론인 스테드는 유명한 평화주의자로서 이미 1899년의 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스투너 여사는 ‘국제중재재판소’의 창설을 주창한 인물이었고, 여성으로서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었다. 공식적으로 각국 대표는 한국을 지원할 수 없었지만, 한국은 대신에 언론을 통해 호소할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특히 1907년 7월 9일 각국 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초청된 자리에서 선생은 특사를 대표하여 유창한 프랑스어로 ‘코리아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조약이 강제로 체결 당한 경위와 일본의 침략상을 낱낱이 지적하여 폭로, 규탄하면서, 한국민과 황제는 독립을 열망하고 있으니 세계는 한국 독립에 협조해줄 것을 프랑스어로 호소했다. 선생의 연설은 각국 대표와 수행원, 언론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헤이그 신보>에까지 보도되어 일제에 대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한국의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인 스테드가 회장으로 있는 국제협회의 회보에는 연설 전문이 게재되었다. 각국 신문도 매일 한국의 사정을 논하여 한국에 대한 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제 여론은 여론일 뿐이었다. 한국의 현실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대한제국 최후의 외교는 이렇게 종말을 고할 운명이었다. 이때 중대한 사태가 돌발하였다. 나라의 운명에 절망한 이준이 누적된 과로와 울분으로 인해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그의 유해를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가매장하였고, 이들은 영국의 런던을 거쳐 8월 1일 미국으로 가서 활동했다. 그것은 고종이 부여한 사명이기도 했다. 이들은 9월초 다시 헤이그에 돌아와 이준의 장례를 치렀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장 사진
제2회 만국평화회의장 사진

독립운동 위해 재산 기부하고 자결한 부친 따라, 선생은 항일운동에 매진

헤이그 특사의 결과 고종은 끝내 강제 퇴위를 당했다. 일본의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형을 선고했다. 세상을 떠난 이준에게 종신징역형을 선고한 것이 의아하다. 순국 사실을 호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위종은 러시아의 극동 지역인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항일운동에 가담했으며, 1911년 신한촌(新韓村)에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자 이에 참여하는 등 러시아 지역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펼쳤다.

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연해주와 만주 지역의 항일 의병 운동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사람은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고 있던 이위종과 이범윤이라 하였다. 이범윤과 이위종, 최재형 등은 이범진 공사가 지원금으로 제공한 만 루블을 전해 받았다. 독립운동의 자금이었던 것이다. 당시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경찰부장은 상부로부터 이위종의 행동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기도 하였다. 다른 독립군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이위종 등의 독립운동은 일본의 항의에 직면한 러시아 측에 의해 시시로 견제를 받았다.

헤이그 이후 이위종의 행적은 잘 밝혀지지 않았다. 다행히 수년 전 이위종과 그의 부친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일부가 소개되었다. 러시아에서 이위종의 행적과 대한제국 러시아 공관의 최후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특사로 파견되어 돌아온 이위종은 그 후 러시아제국 사관학교를 졸업, 제1차 세계대전에까지 참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압력으로 러시아의 한국 공사관으로는 본국의 재정적 지원이 끊겼다고 한다. 그 상태에서도 이범진은 일제의 소환명령에 불복한 채 6년여 동안 공사관을 유지했지만, 공사관은 끝내 1911년 폐쇄되었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 공사관은 이범진 공사가 러시아 측으로부터 받은 연금으로 명맥을 유지했고, 뻬쩨르부르그에서 여권발급 등 영사업무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범진은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으며, 1909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의 계동학교·세동학교·신동학교를 통합한 한민학교를 설립할 때 거액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0년 대한제국이 국치를 당하자 차분히 대응 방안을 모색하다가 우리 국민에게는 항일정신을 심어주고 일본에게는 충격을 주기 위해 마침내 유언을 남기고 자신이 머물던 아파트에서 자결하였다. 자결하기 직전 그는 자신이 지녔던 자금 대부분인 수만 루블을 국내와 미주의 국민회, 무관학교, 하와이 한인, 블라디보스톡 청년회와 신문사 등에 기증했고, 자신의 장례비로 일부를 남겼다고 한다.

만국평화회의 참석 배치도(1907)
만국평화회의 참석 배치도(1907)

이범진은 고종황제와 후손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겼는데, 유서 내용은 "나라를 잃은 자는 머물 곳도 없고, 편히 쉴 땅도 없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위종과 부친 이범진의 삶은 이들의 국권 회복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고 뼈에 사무쳤는가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져 가는 절망적 상황에서 이국에서라도 뿌리를 내리려 했던 그들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자결을 두고 그런 ‘의식 행위’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 각국인들은 논란이 분분하였지만, 결국 ‘그의 행위는 적(일본)에 대항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었다고 보도하였다. 그의 유해는 아들 이위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뻬쩨르부르그의 교외 우스펜스키의 묘지에 안치되었다. 2002년 그의 묘역에서는 한국에서 방문한 사절단과 러시아 현지의 한국 대사관과 러시아 측의 협조로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 제막과 함께 추도식이 행해졌다.

이위종보다 열세 살이 많은 형 기종(璣鍾)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이기종은 동생에 뒤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프랑스·러시아 공사관에서 부친을 보좌하며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모친과 함께 귀국한 바 있다. 그는 그 후 고종의 신임을 받으며, 포공국장(砲工局長),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의 헤이그 특사 사건 직후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였으며, 결국은 객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위종의 헤이그 특사 활동 이후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 측 자료에 의해 이위종의 말년에 관해 약간의 행적이 유추되고 있기는 하다. 즉 ‘이위청(?)이라는 붉은 군대의 사령관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아직은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위종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보기 드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가 러시아 여성과 결혼한 최초의 한국 외교관이었다는 사실도 그 하나다. 그러나 그는 결혼 이후 한국이 직면한 어려운 현실과 대한제국의 국권상실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외교관의 임무수행과 함께 독립운동가로서 여러 지역을 오가며 활동해야 했다. 자연히 그의 아내와 가정은 많은 희생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시아가 혁명의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면서 이위종의 가정은 더욱 희생이 컸다. 한국과 러시아가 직면한 역사의 격랑이 두 사람의 가정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앗아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위종은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자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수호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이자 국제인이었다는 점이다. 이위종과 그의 부친은 외교관의 직임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보여주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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