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공적개요
액자프레임
독립유공자 사진
2013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민화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민화

이민화 , 1898 ~1923 , 독립장 (1963)

1. 충무공 후손으로 태어나다

이민화(1898~1923) 선생은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의 교관으로 있다가 북로군정서로 건너가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종군장교로 청산리전역에 참가하고 북로군정서를 따라 밀산으로 북정한 후 대한독립군단에 참가하였다. 자유시참변을 겪고 고려혁명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만주로 귀환 도중 밀산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들과 전투 중 전사하였던 만주·연해주 일대의 대표적인 무장투쟁가이다.

이민화(李敏華)는 1898년 1월 13일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방현리에서 아버지 이규진(李奎溍)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덕수로 충무공 이순신의 11대 손이 된다. 조상 대대로 아산에 살았던 덕수 이씨라면 어렸을 때부터 이 고장 출신 충무공의 이야기를 무수히 듣고 자랐을 것이고 그의 무훈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13살 되던 해 천안시 풍세면에 사는 창원 유씨와 혼인하고, 가세가 비교적 넉넉했던 처가댁에서 살면서 학문을 닦은 것으로 집안에서는 전하고 있다. 한번은 손위 처남과 몸싸움이 벌어져 입고 있던 저고리가 찢어지자 그 찢어진 저고리를 장대 높이 매달아 처갓집 대문에 높이 세워놓고 ‘사위 대접을 이렇게 하노라’며 사위 대접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니 일찍부터 성정이 불같고, 기상이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민화가 누구를 만나고 어느 경로로 만주로 건너갔는지는 집안에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이민화와 창원 유씨 사이에 낳은 외아들이 1916년생인데 그의 돌이 지날 때 느닷없이 부인과 처가에 만주로 장사하러 간다고 말하며 경비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만주가 개발되기 시작해 장사로 한 몫을 보려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기에 집안에서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망명을 떠나기에 앞서 어머니 김해 김씨에게만 ‘충무공 할아버지의 자손으로서 아무도 왜놈과 싸우는 이가 없으니 내가 그 일을 하겠다’는 말을 넌지시 비쳤다고 전한다.

이민화가 외아들의 돌 무렵 훌훌히 만주로 떠났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이민화에 대한 기록이나 국내에서의 자세한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다. 그저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단편적인 사실들만 전해질 뿐이다.

추측하기로는 아산 출신의 같은 충무공 후손인 이세영(이천민)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가 생각된다. 이세영은 충무공의 12대 손으로 육군무관학교를 나와 친위대에 근무하다가 노일전쟁 후 낙향하고 충남 정산으로 이주하여 홍주의병에 참가하였다. 의병 활동 중 체포되어 황해도 철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는 1913년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는데 통군부 군사부장, 통의부 참모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전후 관계를 살펴볼 때 이세영의 행적과 연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집안 이야기로는 이민화가 만주 소식을 전하는 다른 사람의 인편을 통해 간간히 만주 사정을 보냈다고 하였는데 이 인편이라는 것이 만주지역에서 오는 인편이 아니었나 추측해 볼 수 있다. 한번은 서신을 보냈는데 ‘앞으로 국내에 큰 난리(3.1운동인 듯)가 일어날 것 같으니 밭에 움막을 지어 식구들이 기거하고 후에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인 창원 유씨는 만주로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생전에 이를 두고두고 안타깝게 생각하였다고 했는데 만주로 떠난 몇 년 만에 결국 남편의 전사 통지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2. 북로군정서 장교가 되다

이민화는 1917년 12월 만주로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로 떠난 이민화의 행적 또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가 서로군정서의 교관으로 있었다는 기록과 북로군정서 교관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을 보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는 1913년 만주로 망명한 이세영이 있었기에 이런 연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신흥무관학교는 처음 신흥강습소에서 시작하여 신흥중학-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만주 기타 각 방면에 있어서 활동하고 있던 투사 중 이 학교 출신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어서 일본에서도 이 학교를 질시했다’라고 할 정도로 신흥무관학교는 만주 무장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 학교 졸업생으로 교관이 된 원병상의 수기에도 ‘서간도 어느 기관이나 시베리아 벌판 또는 중원 대륙 어떠한 독립운동 기관에도 간 곳마다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성실과 정열로 용감히 싸웠다’라고 있듯이 이 학교 출신들은 일제를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삼원포에서 시작하여 통화현 합니하, 유하현 고산자로 확대 개편하였는데 이외에도 각지에 분교를 두어 학생을 모집하였다. 학제는 일반 과정인 본과 외에 무관 양성을 위한 속성과를 두었다. 본과는 4년제, 속성과는 3개월 또는 6개월 과정을 두었다. 후일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분교에 초등군사반을 편성하고 3개월간의 일반 훈련과 6개월간의 간부후보 훈련을 실시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훈의 요지는 ‘조국을 되찾고 겨레를 구출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인 생도들의 책임이 중차대하니 인격을 연마하고 군사지식을 배양하여 부과된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군사교육에 치중하여 학과로 보병·기병·포병·치병(輜兵)의 각 병과 교육과 내무령·측도학·육군형법·구급의료·총검술·격검·축성학 등을 가르쳤다. 그 외에도 야외 연병장에서 각개 전투 등 야전 훈련을 통해 실전을 방불할 정도로 엄격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학교 출신 장지락(김산)의 회고에 따르면 신흥무관학교의 훈련 내용은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학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며,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 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 우리는 등에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주의깊게 연구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교육 이외에도 학생들에게 투철한 민족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국어, 국사, 지리 뿐만 아니라 군가 교육도 실시하여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신흥무관학교는 재정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많은 독립운동의 투사들을 배출하였다. 1911년 삼원포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부터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닫고 주력이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배출한 졸업생 수는 3천 5백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주로 무장독립군에 편성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지방에 파견되어 2년간 의무적으로 교편생활을 해야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로군정서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므로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장인 이청천(지청천)은 동시에 서로군정서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따라서 졸업생들의 무장투쟁은 주로 한족회의 군사조직인 서로군정서 의용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권계환, 김동식, 김중한, 김우권, 김철, 김하성, 김학규, 박명진, 백광운, 백기환, 신용관, 오광선, 이덕수, 이병철, 현기전 등이 서로군정서 의용대에서 활동했다. 이민화도 이때 서로군정서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는 설립 초기부터 협조 관계에 있었다. 1920년 5월 29일 서로군정서 대표 헌병대장 성준용과 북로군정서 대표 사령관 김좌진 사이에는 ‘체약문’이 체결되었다. 체약문에는 두 군정서가 상해임시정부를 옹호할 것을 밝히고, 양 기관의 친목은 물론 군사상 일체의 중요 안건은 상호 협의하며 사관의 연성과 무기구입도 상호 부조할 것을 밝혔다.

1919년 8월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었을 때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은 북로군정서의 요청으로 참모장의 요직을 맡았다. 또한 북로군정서 김좌진이 사관연성소를 신설하기 위해 요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라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훈, 오상세, 박영희, 백종렬, 강화린, 최해, 이운강 등을 교관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북로군정서에서 부대의 핵심 직책을 맡았다.

이장녕이 참모장을 맡은 외에 박영희는 사령부 부관 겸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을, 이범석은 연성소 본부 교관과 연성대장을, 김훈은 종군장교와 소대장을, 백종렬은 구대장과 종군장교를, 강화린은 구대장과 중대장 서리를, 오상세는 중대장을, 이운강은 소대장 서리를 맡아 활약하였다. 이들이 훈련시킨 독립군들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되었다. 이민화 또한 북로군정서로 파견되었다. 이민화가 정확히 언제 북로군정서로 파견되었는지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대체로 이들과 같은 시기에 파견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북로군정서에서도 역시 교관을 맡아 사관연성소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로군정서의 정식 명칭은 ‘대한군정서’로 서일 총재가 주도하던 대종교계 중광단을 모체로 하였다. 3.1운동 이후 정의단으로 개편되고, 다시 군정부(軍政府)로 개칭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대한군정부’라는 명칭이 임시정부와 혼동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 하여 ‘대한군정서’로 개명할 것을 권고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대비하여 흔히 북로군정서로 불리게 되었다.

북로군정서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김좌진을 영입하면서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단체로 성장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조직체계는 본부 격인 총재부와 군사조직인 사령부로 구성되어 있다. 총본부격인 총재부는 길림성 왕청현 춘명향 유수천(덕원리)에 있었으며, 군사령부는 왕청현 춘명향 서대파(십리평)에 소재하고 있었다.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

총 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서무부장 임도준

재무부장 계화

참모부장 이장녕

사령관 김좌진 (사관연성소장 겸임)

사관연성소는 덕원리 명동학교를 모체로 1920년 3월 왕청현 십리평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북로군정서의 당면과제 중 하나인 정예군인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이 연성소의 생도는 대체로 대종교 청년 신도와 덕원리 명동학교에서 옮겨온 학생들이었다. 개교 당시 생도수는 6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그 뒤 입학생도가 계속 늘어나 1920년 9월 제1회로 298명의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사관연성소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1920.7.1)

사관연성소 소장 김좌진(사령관 겸임)

교수부장 나중소(참모부장 겸임)

교관 이범석

학도단장 박영희(사령부 부관 겸임)

제1학도대장 최준영

제1구대장 한건원

제2구대장 김훈

제3구대장 강화린

제2학도대장 오상세

제1구대장 오상세(겸임)

제2구대장 이민화

제3구대장 백종열

사관생도들의 교육과 훈련은 교수부장을 겸한 나중소가 중심이 되어 실시하였다. 이민화는 제2학도대 제2구대장으로 임명되어 생도를 통솔하면서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들의 교육과정은 교관들이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신흥무관학교 교과과정과 유사했을 것이다.

김좌진 사령관의 비서였던 이정(李禎)의 『진중일기』에 따르면 1920년 9월 9일 제1회 사관연성소의 졸업식이 열리고 298명의 사관이 배출되었다. 9월 12일에는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하고 대대장에 김사직, 중대장에는 8월 20일 북로군정서에 도착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의 김규식·홍충희·김찬수와 제2학도대장 서리 겸 제1구대장인 오상세를 임명하였다. 또한 소대장에는 경비대장 이교성·허활과 1회 졸업생 10명을 임명하였다.

한편 졸업생 298명 가운데 80여 명은 소위로 임명 배치되었고, 나머지 200여 명을 중심으로 교성대(敎成隊)가 조직되었는데 이 때 이민화는 김훈·남익·이탁과 함께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

대 장 나중소

부 관 최준형

중대장 이범석

소대장 이민화 김훈 남익 이탁

大韓軍政署報告
大韓軍政署報告

교성대의 주요 간부는 사관연성소의 교관들이었으며, 교성대원은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엘리트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교성대는 북로군정서에서 가장 강력한 엘리트 군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교성대가 10월 청산리전역을 앞두고 연성대로 개편되어 대장에는 이범석, 소대장에는 이민화·김훈·이교성·한건원으로 개편되었다.

북로군정서의 최대 과제는 무장투쟁이었다. 따라서 무기의 구입을 중요시하여 총재인 서일이 직접 노령에 가서 무기의 구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0년 7월 북로군정서는 군총 약 1,300정, 탄약은 군총 1정에 300발 내외,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기타 수류탄 다수를 보유하는 만주지역 최대의 무장단체가 되었다. 북로군정서가 이처럼 많은 무기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서일 총재의 각별한 의지와 동포들의 헌신적인 군자금 납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청산리전역에 참가하다

봉오동전투의 패전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작전’을 세우고 중국측에게 일본군이 간도에 출병하여 직접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만주군벌 장작림은 이에 굴복하여 연길 주둔 보병제1단장 맹부덕을 책임자로 하여 한국 독립군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 관헌의 간부 중에는 한국인들과 친분이 두텁고 한국인 독립운동에 대한 동정자가 상당수 있어 독립군과 중국군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도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거행한 당일, 즉 1920년 9월 9일 왕청현 서대파를 떠나 왕청현 대감자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낮이면 마을에 주둔하고 밤이면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이 직접 간도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북로군정서는 향후 대책을 협의하고 대감자를 떠나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로 이동하였다.

대감자에서 청산리까지 이동에는 30여 일이 소요되었다. 대감자를 떠난 북로군정서 군대는 사령관 김좌진의 지휘하에 의란구, 연집강, 동불사 북구, 차조구를 거쳐 삼도구로 들어갔다. 대감자에서 전투를 수행할 군대와 총재부의 간부들이 헤어졌다. 북로군정서 군대는 청산리로 향했고, 총재 서일 등 간부들은 대감자를 떠나 삼림지대를 통과하여 북만을 거쳐 노령으로 향하였다.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가 상해 임시정부에 보고한 전투상황보고서에 따르면 청산리전역에 참가한 북로군정서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사령관 부관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

김훈

백종열

한건원

대대장 서리 홍충희

대대 부관 김옥현

제1중대장 서리 강화린

제1소대장 신희경

제2소대장 강승경

제2중대장 홍충희(겸임)

제1소대장 채춘

제2소대장 김명하

제3중대장 김찬수

제1소대장 이익구

제2소대장 정면수

제4중대장 오상세

제1소대장 김동섭

제2소대장 이운강

기관총대

제1소대장 김덕선

제2소대장 최인걸

청산리전역에서 이민화는 김훈·백종열·한건원과 함께 종군장교로 참여하면서 전투의 일선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

청산리전역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에 걸쳐 청산리 일대의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완루구·어랑촌·고동하곡 등지에서 북간도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이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을 상대로 치루었던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를 총칭한다.

백운평전투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 동지대(東支隊)는 10월 17일 산전(山田) 연대에게 10월 20일 청산리 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토벌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김좌진 부대는 10월 20일 산전 연대가 청산리계곡으로 들어오자 백운평 일대의 직소택(直沼澤)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매복권 내로 유인한 후 섬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연성대를 지휘한 이범석의 회고록 『우둥불』에는 당시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관훈련소 졸업생을 기간요원으로 하여 거기에 보병 3분의 1과 박격포, 기관총을 보강한 제2제대를 조직하여 이를 나의 지휘 하에 두어 우리 뒤를 추격하는 적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황혼이 되어 제2제대는 공지 부근에 도착하였다. 밤에는 백운평 남방 푸른숲 속에 노영하면서 전초진지를 포진하였다. 우리는 즉시 식량을 준비하고 부대를 둘로 나누었다. 비교적 훈련 정도가 낮은 보병 3분의 2와 비전투원으로 제1제대를 조직하여 이를 총지휘 김좌진 장군 예하에 두었다. 그리고 이들을 전장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여 필요없는 희생자를 내지 않도록 하였다.

9월 10일(양력 10월 21일) 새벽 5시. 제1제대에 배속된 보병대는 나의 제2제대 후방 8백 미터 거리에서 쓰팡띵즈(四方頂子) 기슭에 공치(控置)돼 있었다. 일선 사관훈련생들은 삼림 공지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배치되었다. 우측지구의 1개 중대는 이민화가, 좌측지구의 1개 중대는 한근원이 지휘하기로 하였다. 정면 2개 중대는 김훈으로 우중대를, 이교성으로 좌중대를 지휘케 하고 나는 정면에서 전국(全局)을 살폈다.

독립군이 매복한 계곡은 청산리 골짜기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는 백운평이라 부르는 공지가 있어 청산리계곡을 통과하는 단 하나의 오솔길이 그 공지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독립군이 매복한 지형은 공지를 바로 내려다보는 깎아지른 절벽 위였다. 그 가운데 이민화 부대가 매복한 우측지구는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 부대가 매복한 정면 우측은 경사가 90도나 되는 절벽이었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 안천(安川) 소좌가 인솔하는 1개 중대의 전위부대는 독립군 매복 사실을 전혀 짐작도 못하고 백운평을 지나 독립군 매복지점으로 들어왔다. 일본군 척후병이 매복지점 10여 보 앞까지 접근하자 공격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매복했던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약 30분의 집중사격에 안천의 전위중대는 손쓸 틈도 없이 전멸하였다. 뒤따라온 일본군 주력부대는 당황하고 놀라서 미처 응전하지도 못하고 혼란상태에 빠져 기관총과 산포(山砲)를 난사하였다. 이들은 중무기를 앞세워 돌격을 시도했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엄폐사격을 하는 독립군의 집중사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끝내 백운평에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본영을 향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2~3백 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며 대승을 거두었다. 독립군은 참패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이도구 방면으로 즉시 이동하여 밤을 새워 갑산촌으로 행군하였다. 이도구 북쪽 천보산 방면에서 안도현으로 돌아 청산리로 침입해 오는 일본군 별동기병연대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천수평전투

백운평전투에서 승전한 김좌진 부대는 약 80리의 강행군을 진행하여 10월 22일 새벽 2시경 봉밀구 갑산촌에 도착하였다. 동포들이 제공하는 차조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을 때 마을 주민들로부터 인근 천수평 마을에 일본군 기병대가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김좌진 부대는 곧바로 강행군을 계속하여 새벽 4시경 천수평 남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도전(島田) 중대장의 지휘 하에 있던 기병중대 120기로서 독립군이 아직도 100리 밖 청산리 부근에 있다고 착각했음인지 소수의 기병 순찰만 세워 놓고 병력을 촌락 안에 모아 놓았으며 토성 안에 말을 매어 놓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북로군정서 연성대는 김훈 중대에게 북쪽 산을 타고 넘어 마록구를 점령해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민화 중대에게는 천수평 남방 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한편 이범석은 한근원·이교성의 2개 중대를 이끌고 천수평 북쪽 냇물 한복판을 전진하여 냇물 언덕의 사각(死角)을 끼고 천수평 동쪽에 이르러 정면공격을 결행하였다.

김좌진 부대는 5시 30분경 전투준비를 완료하고 일제히 공격하였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일본군은 독립군의 기습에 허둥대다가 4명의 탈출한 기마병 외에는 전원이 몰살당했다. 이것이 김좌진 부대가 단독으로 수행한 2번째 전투인 천수평전투이다.

어랑촌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천수평전투에서 일본군 기병중대를 섬멸한 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다음 전투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유는 천수평에서 도주한 4명의 일본군 기병이 어랑촌에 설치한 그들의 기병연대 사령부에 사태를 보고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일본군 대부대의 공격이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먼저 어랑촌 서남단의 고지를 올라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뒤이어 일본군이 도착했으나 고지는 이미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선점한 후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고지 밑에서 고지 위에 있는 독립군을 공격하게 되었고, 독립군은 고지 위에서 일본군을 내려다보며 싸우게 되었다.

일본군 동지대의 주력부대는 어랑촌 일대에 진을 치고 이 부근의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의 병력은 무려 5천여 명이나 되었다. 반면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그동안의 전사자·실종자·낙오자로 말미암아 600명을 채 되지 않았다.

어랑촌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이 전력을 투입한 대격전이었다. 김좌진 부대는 비록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있었으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당시 일본군의 병력은 보병·기병·포병을 포함하여 1천여 명에 달했다. 김좌진 부대는 이틀간의 연속적인 두 차례의 치열한 전투와 강행군으로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전투에 가세하면서 전황이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 연대 병력에 포위되어 혈전을 벌이고 있다는 통보를 받고 이를 지원하러 달려온 것이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해가 기울 때까지 그칠 줄 몰랐다. 독립군 병사들은 하루 종일 굶었기 때문에 부근 촌락의 동포들이 주먹밥을 지어 가지고 왔다. 독립군 병사들은 밥 먹을 틈도 내지 못하여 동포들이 전투 중에 있는 병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병사들의 입에 주먹밥을 넣어 주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동포들의 성원에 독립군들은 한층 더 사기가 충천하여 더욱 용감하게 응전하였다. 북로군정서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스스로 자기 몸에 기관총을 묶고 몰려 올라오는 일본군을 집중 사격하여 패주시킨 후 기관총 탄환이 떨어지자 장렬하게 전사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어랑촌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기병 연대장 가납(加納) 대좌를 비롯하여 다수의 전상자가 나왔다. 북로군정서 사령부는 일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1천 600명으로 발표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본영사관의 비밀보고에도 이 전투에서 가납 연대장을 비롯하여 대대장 1명, 소대장 9명, 하사 이하 병사의 사상자가 800명에 이른다는 보고를 하였다고 전한다. 독립군측도 피해가 컸다. 이범석의 회고록인 『우둥불』에는 북로군정서군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100여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은 그들의 모든 보고서마다 독립군을 패퇴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만은 간접적으로 시인할 정도였다.

이민화는 이러한 청산리전역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첫 전투였던 백운평전투에서 이민화 부대는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에 매복한 후 일본군을 공격하여 패퇴시켰고, 뒤이은 천수평전투에서는 천수평 남방 고지를 선점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어랑촌전투는 어느 전투보다 치열했다. 이민화 부대는 천수평 북방고지로 이동하여 주요 거점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포탄이 터지는 폭풍으로 김좌진 장군의 군모가 벗어졌고, 이범석 대장의 군도는 포탄 파편에 두 동강이 났다.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민화는 가랑잎을 덮은 채 매복하고 있다가 왜놈이 눈앞에 나타나야 총개머리판으로 일격을 가하곤 했다는 일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민화의 열혈적 성격의 단면과 대담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4. 대한독립군단 결성과 자유시참변

청산리전역에서 승리한 독립군 부대들은 10월 26일부터 본격적으로 이도구 부근에서 안도현으로 분산하여 철수작전을 전개하였다. 안도현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 작전지역의 범위 밖이었으나, 서쪽으로부터 중국군과 합동한 관동군 부대가 다가오고 있어 양 방향으로 협공당할 위험성이 있었으므로 독립군 부대들은 북쪽의 밀산으로 이동하여 재집결하기로 하고 대장정을 시작하여 1920년 12월 말경에 밀산에 도착하였다.

독립군의 북정(北征) 집결지가 된 밀산은 1910년 전후부터 민족운동자들이 국외 독립운동기지의 하나로 경영하기 시작한 곳이었지만 많은 독립군을 장기간 수용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독립군들은 러시아 연해주로 월경(越境)하기로 결정했다.

연해주는 간도지역 못지않게 1910년 전후부터 국외 항일운동의 중추기지로 터전을 닦아 오던 곳이었고, 적어도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더욱이 당시는 볼세비키혁명이 시작된 직후로 이들은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후원하겠다고 크게 선전하던 때였다. 이에 따라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장기 항전을 다짐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갈 것을 결정한 뒤 하나의 독립군단을 결성하기 위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여단급 조직으로 3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1개 대대는 3개 중대로, 1개 중대는 3개 소대로 각각 구성되었는데, 소대원은 27명이며 총병력은 3천 500여 명에 달하였다. 주요 조직은 다음과 같다.

총 재 서일

부총재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총사령 김규식

참모총장 이장녕

여단장 지청천

중대장 김창환 조동식 윤경천 오광선

이와 같은 대한독립군단 조직에 합류한 중요 군단을 보면 서일을 총재로 한 북로군정서,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구춘선이 회장인 대한국민의회 국민군, 이명순이 지도하는 훈춘한민회, 김성배가 지도하는 대한신민회, 최진동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 이범윤을 총재로 추대한 대한의군부, 김국초가 지도하는 혈성단, 김중건이 지도하는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이었다. 따라서 대한독립군단의 주력부대는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 그리고 지청천이 이끄는 서로군정서군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 초 일제의 연해주 침략군인 포조군(浦潮軍)의 경계망을 뚫고 러시아 이만으로 향했다.

혹한의 겨울에 국경을 넘어 이만에 도착한 대한독립군단은 도착과 함께 무기구입에 노력하였다. 부대가 이만에 도착하였을 때는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가운데 동복을 착용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독립군은 군자금이 모이면 우선 무기구입에 충당하였으므로 피복이나 식량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이만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출병하였던 체코부대나 슬라브군대가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장총을 싼값으로 팔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무기구입 활동에 힘쓰는 한편 노령에 있던 항일 민족운동자들과 함께 치따의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극동공화국 정부는 노령에서 철병하기로 한 일본군이 이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 독립군 부대가 이만에 집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대한독립군단을 자유시(알렉쎄예프, 현재의 스바보드니시)로 이동시키려 하였다. 자유시에는 노령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이만 군대·다반 군대·독립단 군대·니항 군대·자유대대·사할린 부대 등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던 대한총군부 군대·대한군민군 등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들은 만주 독립군 부대와 노령의 한인부대가 자유시에서 통합하여 대대적인 항일 무장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독립운동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극동공화국 입장에서는 대한독립군단이 무장을 해제하고 자유시로 이동하기를 요구했다. 그 속사정은 극동공화국 정부측과 독립군단 사이에 공식적 군사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이 독립군단의 무장 사실을 알게 되면 일본군을 다시 이만지역으로 투입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극동공화국 정부측에서는 일단 무장을 해제한 후 자유시에서 신무기로 무장을 갖추어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독립군단 지도부는 회의를 열어 홍범도·지청천·김혁 등은 자유시로 이동하여 신무기로 무장을 갖추고 만주·노령지역 무장부대의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반면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 지도부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다시 만주로 나갈 것을 결정하였다.

북로군정서 내부에서도 무장해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박두희(박영희)는 무장해제를 수용했고, 김좌진·나중소·이범석은 반대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군대는 박두희가 떠맡아 지휘하게 되었다. 북로군정서의 김좌진·나중소·이범석 등은 무장해제에 반대하여 1921년 5월 제야강을 건너 만주로 넘어가 자유시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대한독립군단 장병들은 무기를 일단 극동공화국 정부에 맡기고 열차편을 이용하여 1921년 3월 초 이만을 출발, 3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만주 독립군과 노령의 빨치산부대는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편성하였다. 지휘부는 홍범도·안무·서일·조성환·지청천·이용·채영·최진동·오하묵·김규식·김경천·강국모·이계 등 15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렇게 만주 독립군과 노령 빨치산부대가 통합되어 총인원 3천여 명의 대한의용군 무장부대가 편성되었다. 그리하여 대한의용군은 자유시 부근 마사노프로 이주하여 부대를 편제하고 군사훈련을 개시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 출신과 기타 사관학교 출신자들이 교관이 되어 각 대대, 중대로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지청천은 독립군 부대의 연대장 겸 총교관으로 대한의용군 3천여 명에 대한 일체의 군사교육과 훈련을 총괄하였고, 한운용·이용·채영 등이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지휘부는 의용군을 정규부대로 편제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노령의 무장부대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관계가 조성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였다.

한인 독립군 부대의 자유시 집결은 자유대대와 니항군대 간의 정면대결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에는 복잡한 정치적인 배경이 있다.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를 봉대했고, 니항군대는 상해 임시정부를 봉대했다. 대한국민의회는 당시 오하묵·최고려 등의 이르쿠츠크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시베리아에서 상해 임시정부를 대표하고 있던 인물은 이동휘 계열의 박애·이용 등 상해파였다. 이 양자는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를 자파 세력하에 두려고 자유대대와 니항군대(후에 사할린의용대로 개칭) 간의 군권투쟁에 개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시참변으로 비화되었다.

대한의용군이 조직된 이후 1921년 5월 18일 고려혁명군정의회가 결성되었다.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쉬빌리, 군정위원에 유동렬·최고려가 임명되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는 6월 초 자유시로 이동하여 대한의용군의 통합에 나섰으나, 대한의용군측은 이에 반발하였다. 결국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강제적인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극동공화국 제2군단 제29연대 소속의 장갑차·대포·기관총들로 무장한 1만여 명의 병력으로 6월 28일 무장해제를 감행함으로써 자유시참변이 시작되었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당시 양측에 소속된 군대를 보면, 마사노프에 주둔한 대한의용군 휘하에는 사할린 의용대·다반 군대·이만 군대·독립단 군대·총군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자유시의 고려혁명군정의회측에는 자유대대·합동민족군대·홍범도의 독립군·안무의 국민회 군대가 있었다.

자유시참변으로 불리는 유혈충돌의 결과 희생자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피해자측의 기록을 보면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이나 되는 대참사였다. 포로 917명 가운데 장교와 간부급 지휘관 84명은 중범자라 하여 이르쿠츠크 군형무소로 이송되어 특별수용되었고 대부분의 병사는 탄광과 벌목장에 노역병으로 보내졌다.

자유시참변을 전후하여 이민화가 어느 쪽에 가담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민화가 김규식의 고려혁명군에 참가하였던 것으로 보아 김규식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5. 밀산에서 산화하다

자유시의 참극으로 수많은 인명을 잃은 독립군 가운데 일부는 소련 적군에 협력하거나 포로가 되어 그 곳에 억류되었다. 한편 나머지는 병력을 수습하여 북만으로 탈출하였다. 따라서 1921년 8월 이후 북만지역에는 또다시 독립군 세력이 형성되었다. 즉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은 밀산과 영안현, 구춘선이 이끄는 국민회 계통의 병력은 돈화와 액목현, 그리고 신민회·광복단·한민단 등의 독립군도 각각 영고탑·목단강·동녕현 등을 중심으로 진용을 갖추어 나갔다.

이들은 남북만주를 연결하는 교통 요지인 돈화·액목·안도현을 거점으로 특파대를 파견하여 북만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군 낙오병들을 모으고 남만의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했다. 노령에서 돌아올 때 하나의 세력으로 뭉치지 못하고 각자 나뉘어 돌아온 이들은 한인이 다수 살고 있는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으므로 서로 연락이 두절한 상태였다. 따라서 각 독립군단에서는 자기들 소속의 독립군 병사들을 모으기 위해 사방으로 연락병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독립군들은 본래의 소속 군단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일부는 새로운 주둔지에 계속 남아서 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한편 자유시참변으로 한인독립군 부대의 조직이 와해된 후 김규식은 추풍지역에서 솔밭관 한족공산당군이 개편된 고려혁명군의 사령관으로 활약하였다. 고려혁명군은 1922년 10월 연해주 백위파 잔당을 마지막으로 몰아내는 최후전쟁에 참전하였다.

1922년 11월 20일 당시 고려혁명군 총사령부는 2개 대대와 1개 특설대대로 편제되었고 병력은 677명이었다. 무기로는 장총 627정, 단총 15정, 기관총 1대와 수만 발의 탄약을 보유하고 있었다. 총사령부의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총사령 김규식

군정위원장 최호림

사령부관 강남일

제1대대장 최준형

기병대장 이범석

기관총대장 나만규

치중대장 이철

무기부장 서용욱

경무부장 정통

경리부장 최춘선

위생부장 박성철

시베리아 내전에서 러시아빨치산·적군과 협력하여 백위파·일본군 등 연합군과 싸웠던 고려혁명군은 1922년 11월 일본군이 철수하자 곧바로 무장해제라는 배신을 당했다. 총사령관 김규식은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무기를 휴대하고 중국령으로 이동하였다.

자유시참변 이후 이민화의 행적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그의 공훈록에 고려혁명군의 장교였다는 점에 따라 추정해 보면 김규식·이범석과 같이 활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공훈록의 기록대로라면 그는 1923년 9월 13일 노령에서 북만주로 귀환 도중 밀산에서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 토비(土匪)와 교전 중 전사했다고 하였다. 그는 끝내 1924년 3월부터 재편되는 북로군정서 출신들의 재건 통합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채 북만 땅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민화 선생의 무장투쟁은 시종일관 일본군과 맞서는 전쟁터에서 실현되었다. 청산리전역이라는 만주 무장투쟁사 최대의 격전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중·소 국경 지대인 밀산, 노령의 이만과 자유시를 전전하면서 한 번도 무장투쟁의 투지를 놓지 않고 일제와 싸우다가 끝내는 북만주 땅에서 산화한 무장투쟁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선생께서는 무장투쟁사에 대한 위상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소략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이번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기회로 선생의 행적에 대한 자료의 발굴과 정리가 보다 진척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자료

ㆍ≪독립신문≫

ㆍ김정명, 『조선독립운동』 (2,3), 원서방, 1967

ㆍ김재승, 『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들』, 혜안, 2002

ㆍ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4), 1987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4,5), 1968

ㆍ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4), 1988

ㆍ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5

ㆍ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 4), 청계연구소, 1986

ㆍ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5), 1975

ㆍ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자료집』(10), 1976

ㆍ박 훤,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 일조각, 1991

ㆍ박영석, 『재만한인독립운동사연구』, 일조각, 1988

ㆍ서굉일·동암 편저, 『간도사신논』 (하), 우리들의 편지사, 1993

ㆍ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ㆍ신재홍, 『독립전쟁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1991

ㆍ윤병석 외,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집문당, 1997

ㆍ윤병석, 『독립군사』, 지식산업사, 1990

ㆍ이범석, 『우둥불』, 사상사, 1971

ㆍ지복영,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문학과지성사, 1995

ㆍ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민족문화사), 1985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ㆍ박 환, 「신민부」, 『한민족독립운동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88

ㆍ채영국, 「3. 1운동 이후 서간도지역 독립군단 연구 -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단. 광복군총영을 중심으로」, 『윤병석교수화갑기념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990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이달의 독립운동가 명단 > 이민화(관리번호:5381)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
이전달 다음달
맨 위로 이동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