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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선
오영선
, 1886 ~1939
, 독립장
(1990)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입니다.
우리 중에 큰 병이 무엇무엇 하여도 의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이의 비방, 질시, 시의, 저주의 대부분은 선의로 상대하는 중에서 개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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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을 위해 고국을 등지고 망명하다
오영선(1886 ~ 1939)은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고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두 남동생이 있었다. 호는 석농(石農)이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의 둘째 사위이다.
오영선은 어려서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이때는 안으로 농민들이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봉기하고, 밖으로는 이를 구실로 일본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여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이에 반발한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을 단행하는 등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오영선은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일제가 1907년 8월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면서 무관학교도 사실상 폐지되어 그는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오영선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물리학교(현 도쿄이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유학 생활도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오영선 가족사진(1926년 가을 상해에서)
이동휘가족 (1911년 봄)
유학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오영선은 당시 이동휘가 세운 개성 읍내 사립 보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비밀 결사였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했다. 1909년 그는 이동휘의 초빙을 받아 캐나다 선교회 그리어슨(Robert Grierson) 선교사 세운 함경북도 성진군 협신중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이런 활동을 통해 국권회복에 앞장섰던 ‘이동휘의 교육생’이 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자 이동휘는 그해 말에서 1911년 1월 사이에 ‘이동휘의 교육생’이라고 불렸던 계봉우, 김하석, 정창빈, 장기영 등 30여 명을 기독교 포교를 명분으로 대거 북간도로 망명시켰다.1) 오영선도 이때 북간도로 망명했다.
북간도로 온 오영선은 간민교육회가 1911년 3월 연길현 국자가에 세운 광성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그의 북간도 망명은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을 계승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으로의 발전을 의미했다. 오영선은 민족교육뿐만 아니라 1914년 2월 간도 한인의 자치기관인 간민회 의원에 선출되었고,2) 그해 8월 29일에는 간민회관에서 국치일 행사를 주관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와 단결을 강조하는 등3) 간도 한인의 권익 옹호에도 적극 나섰다.
간민회
오영선은 1914년 연길현에서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의 대전학교(大甸學校, 일명 東林武官學校)로 활동지를 옮겼다. 이 학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인 하마탕으로 피신해 온 이동휘가 이용익의 아들 이종호 등과 의논하여 설립한 무관학교였다. 이동휘는 1913년 9월경 연해주로 가서 그곳의 한인 애국자들과 협의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설립하고 광복전쟁을 계획했는데 이 학교는 대한광복군정부가 계획한 광복전쟁에 필요한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사관학교였다. ‘이동휘의 교육생’인 김립, 장기영 등과 함께 이곳으로 온 오영선은 대전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교장은 이종호였고 남북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무관학교는 설립된 지 1년도 안된 1915년 말경 간도 일본영사관의 압박을 받은 중국 당국이 학교 폐쇄 조치를 내려 문을 닫아야만 했다. 학교를 그만두게 된 학생 가운데 40여 명은 막노동을 하여 돈을 벌어서라도 학교를 유지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러시아인 공장에 노동자로 들어갔다.4) 반면 오영선은 일부 학생들을 이끌고 새로운 군사 양성기지를 찾아 훈춘으로 떠났다.
대전학교 터
대전학교가 폐쇄되자 1917년 1월 이동휘는 훈춘의 대황구(大荒溝)로 가서 반일애국자인 양하구, 김도연 등과 협의하여 북일중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강제 해산된 대전학교의 사관양성 활동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한 것으로 대전학교의 교육이념을 계승, 항일구국 인재를 양성하려던 성격이 짙었다.5) 오영선은 대전학교의 교관에 이어 북일중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그와 함께 온 학생들도 다시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17년 2월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활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17년 6월 러시아 각지의 한인사회 대표자들이 니콜리스크에서 ‘제1차 전 러시아 한인대표자대회’를 열고 러시아 한인사회의 정치적 중심기관으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를 결성했다. 이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함께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러시아 한인들은 독립의 희망을 갖고 1919년 2월 니콜리스크에서 제2차 전로한족회를 열고,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했다. 이와 같이 연해주를 중심으로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항일활동이 활발해지던 1918년 오영선도 남공선, 김립, 장기영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동했다.
대한국민의회 한족대표 지명서(1919년)
한편 일본,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은 러시아 혁명을 방해할 목적으로 1918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간섭군을 파견하여 반혁명군인 백위군을 지원했다. 이에 맞서 그동안 이동휘와 오영선 등이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양성한 독립군들도 한인무장부대를 조직하여 러시아 혁명군인 적위군과 연합하여 각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무력 투쟁을 벌였다. 일본군이 점령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한인 마을인 신한촌을 중심으로 반일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온 오영선은 대한국민의회 선전부장 이동휘의 비서로 활동했다. 1918년 8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한민학교 운동장에서는 국치일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날 이동휘의 둘째 딸이자 오영선의 아내인 이의순이 민족 역사에 관한 연설을 하는 등 이날 행사는 기념사 낭독, 남녀 학생들의 애국가 봉창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밤 10시 30분에 끝난 기념회에는 연해주에 사는 한인 1천여 명이 참석했다.6)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제2차 개최 장소
1913년 아버지 이동휘와 함께 북간도로 망명한 이의순은 명동학교 교사를 지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뒤에는 신한촌의 삼일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독립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여 장차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 양성에 힘썼다. 오영선은 아내 이의순과 함께 1919년 8월 29일 박은식이 회장으로 주최한 국치기념회를 여는 데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이날 한민학교에서 열린 기념회에서 오영선은 “하늘에 닿을 만큼 큰 치욕을 국내에서는 모든 형제자매의 흘러내린 붉은 피가 얼마가 되던지 씻어낸다면 우리들 해외에 있는 동포들도 피를 흘려 오늘날의 국치를 씻어내기를 희망한다”며 독립의지와 항일운동에의 헌신을 강조했다. 아내 이의순도 “우리는 여자라고 하지만 대한민족이라면 일반적으로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이상 어찌 안이하게 좌시할 수 있겠는가. 국내에서는 많은 여학생이 피를 흘렸는데 해외에 있는 여자들도 어찌 수수방관하고 집안의 안락을 욕심내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수의 총칼 아래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을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믿는다.” 라고 하며 여성도 남성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자고 호소했다.7)
그러나 일제가 1920년 3월 한인 무장부대가 니항(尼港)에서 러시아 군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을 전멸시킨 사건을 구실로 연해주 지역 한인 무장부대에 대한 전면적 공격을 결정했다. 일본군은 4월 4일과 5일 이틀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 신한촌을 기습 공격하여 한인 주민 300여 명 이상을 체포하고 상당수를 학살했다. 이때 오영선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성(蘇城) 조길밀(鳥吉密)로 피신했다. 5월 무렵 아내 이의순이 피신해 있던 이만 부근 한인 마을로 가서 지내며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오영선은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교육계몽과 무관양성을 위해 노력했고 그가 교육한 많은 학생들이 이후 간도와 연해주에서의 항일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다
오영선은 1920년 연해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장인인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있던 상해로 왔다. 이때 아내 이의순도 상해로 왔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등 그동안 벌인 외교 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열강의 도움을 받아 즉시 독립될 줄 알았던 희망이 좌절되면서 임시정부 안에서는 독립운동의 방법, 임시정부의 비현실적인 조직 등의 문제를 두고 불신과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를 개혁하자는 논의가 한창이었다.
오영선은 1920년 2월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의 활동을 보좌했다. 이동휘는 자신이 주장한 정부개혁방안이 대통령 이승만과 노동국총판 안창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21년 1월 국무총리를 그만두고 상해를 떠났다. 이에 따라 2월 오영선도 국무원 비서장에서 면직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1921.1.1., 둘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국무원 비서장 오영선)
임시의정원 태극기
정부개혁 문제를 두고 갈등과 분열이 더욱 심해지자 1921년 2월 초 박은식, 김창숙, 원세훈, 왕삼덕, 안병찬 등 상해의 주요 독립운동가 14명은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선언하고 국민대표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내분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을 더욱 힘 있게 벌이기 위해 “전 국민의 의사에 의한 통일적 강고한 정부”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최량 방침”을 수립하자고 주장했다.8)
이 선언을 계기로 상해 정국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두고 이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입장이 대립했다. 대통령 이승만을 옹호하는 인사들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정부파괴운동’이라고 하며 극구 반대했다. 반면에 임시정부를 유지하되 정부를 현실 조건에 맞게 개혁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기관을 건설하자는 창조파가 합세하여 국민대표회 소집을 적극 지지했다.
이렇게 국민대표회 소집론을 두고 찬반이 엇갈리는 가운데 오영선은 1922년 1월 1일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그는 새 해를 맞이하여 동지들에게 지금까지의 구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7가지 각오를 제시했다. 첫째가 공과 사의 구분, 둘째가 책임감, 셋째가 개인 욕망의 억제, 넷째가 감정이 아닌 이성, 다섯째가 동지의 결점과 단점을 지적하지 않기, 여섯째가 경거망동 금지, 마지막 일곱째가 동지를 선의로 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우리는 독립운동자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9) 이 같은 각오는 상해로 온 이후 그가 보고 겪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그는 동지들에 대한 믿음과 이에 바탕을 둔 화합만이 임시정부를 강화하는 빠른 길이라고 확신하고 7가지 각오를 밝혔던 것이다.
<신년의 신각오>(독립신문 1922.1.1.)
1922년 2월 열린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가 최대 쟁점이 되었다. 국민대표회 소집을 지지하는 의원들은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통해 국민대표회 소집을 공식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매번 정부옹호파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오영선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위한 최종 방안으로 조상섭 등과 함께 6월 5일 대통령 및 각원불신임안을 제출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1922년 3월 군무총장 노백린 1인을 제외하고는 국무총리 이하 각원들이 모두 사직한 상태였다. 오영선은 임시정부의 내분 사태를 수습하지 않은 채 1921년 5월 무책임하게 도망가듯 미국으로 가버린 이승만 대통령에게 “내정불통일”, “외교의 실패”, “조각 불이행”이라는 책임을 물어 대통령불신임안을 제출했다.10) 6월 17일 회의에서 오영선 등이 제안한 대통령불신임안과 국민대표회 찬성안이 반대파가 퇴장한 가운데 최종 표결에 부쳐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시의정원의 대통령불신임안 결정은 불법이라고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며 강하게 저항했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불신임안을 실행하면 결과적으로 두 개의 정부가 있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고, 이 때문에 오히려 혼란만 더욱 키울 우려가 있었다. 이에 오영선은 다른 국민대표회 지지파 의원들과 함께 7월 4일 항의의 뜻으로 의원직을 사직했다. 이로써 임시의정원을 통해 국민대표회를 성사시키려던 노력도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국민대표회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없던 일이 될 위기를 맞자 오영선은 국민대표회 소집을 주장하던 지지파와 정부옹호파를 중재하여 마침내 국민대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1919년)
1923년 1월에서 6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이를 통해 임시정부의 잘못된 점을 개선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자는 창조파 그리고 국민대표회를 반대하며 임시정부의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정부옹호파가 대립했다. 개조파인 오영선은 창조파의 주장이 서로의 의견 차이를 해결하지 않고 결국 두 개의 정부를 낳는 꼴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개조파가 반대하는데도 1923년 6월 3일 창조파가 자신들만으로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한’, 연호를 ‘건국기원’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자, 그날 오영선은 개조파 56명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탈퇴하고 3.1운동의 결정체인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건설한 창조파의 결정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11) 이로써 근 6개월에 걸친 국민대표회는 서로 불신만 남긴 채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외곽단체 활동을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상해 교민단이 프랑스영사에게 보낸 편지
오영선은 상해로 온 뒤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과 국무원으로 활동하는 외에도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대한교민단은 임시정부의 외곽단체 가운데 최대 조직이었다. 교민단은 상해 지역의 임시정부의 지방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지원 기관으로서 기능을 했다. 오영선은 상해에 온 뒤 교민단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인 의사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1월에는 교민단 의사회 학무위원에 선임되어 그해 12월까지 상해 교민의 자제교육을 담당했던 인성학교의 유지와 발전에 노력했다.
상해 대한교민단 조례
대한교민단과 함께 대표적인 임시정부의 주요 외곽단체 가운데 하나가 대한적십자회였다. 대한적십자회는 1922년 2월 23일 상해 총본부 사무실에서 총회를 열고 오영선을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적십자회 회비 모금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회장 손정도가 1925년 선교와 이상촌 건설을 위해 길림성으로 간 뒤 후임 회장이 되어 대한적십자회를 이끌었다.
1922년 10월에는 김구와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한국노병회에도 참여했다. 노병회는 그 취지서에서 ‘정신만으로는 독립 사업을 성취하기 어렵고 사업의 실제 성취에는 공구(工具)가 필요한데, 대한독립의 공구는 무력이오, 무력의 공구는 군인과 군비’라고 했듯이12) 별다른 소득 없이 좌절감만 안겨 준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에 대한 반성이 조직 결성의 배경이 되었다. 노병회는 10년간 1만 명 이상의 군인양성과 100만 원 이상의 독립군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구체적 목표였다. 하지만 오영선은 1924년 6월 15일 노병회 제18회 정기총회에서 2년 이상 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원 자격을 상실했다.13)
한편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임시정부에 대한 실망이 높아지면서 그동안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인구세, 애국헌금 등의 독립자금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정부 청사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경제 사정이 어려웠다. 1927년의 경우 정부의 1년 재정 규모가 정부 수립 초기에 비해 1/1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오영선은 임시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안창호 등과 함께 정부를 경제적으로 후원할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7월 15일 안창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의 활동으로 현상유지에 급급했던 임시정부의 재정이 일정하게 나아지기도 했다.
정국쇄신과 민족유일당운동에 나서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오영선은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오영선 등이 구상한 정부개혁 방안은 해외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인 남북만주를 중시하여 정의부를 중심으로 하고 참의·신민부 및 기타 유력한 독립운동 기관과 연립하여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임시정부의 현상유지만을 고집하며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현실과 맞지 않는 헌법을 개정해야 했다.
1924년 12월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조직되고 오영선은 임시의정원에서 법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오영선은 박은식 내각과 함께 본격적인 정국쇄신운동에 나섰다.
박은식 내각은 1925년 3월 10일 먼저 임시정부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이승만이 설치한 구미위원부를 폐지했다. 개조파가 다수를 차지한 임시의정원에서도 3월 23일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25일 박은식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어 4월 7일에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임기 3년의 국무령제로 개정한 개정헌법을 공포했다.
정국쇄신을 위한 헌법이 개정되자 법무총장 오영선은 내무총장 이유필과 함께 1925년 4월 간도로 갔다. 그의 임무는 정의·신민·참의 3부에 임시헌법 개정의 취지를 설명하고 이들을 임시정부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오영선과 이유필은 먼저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가서 정의부의 중앙간부 등을 만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14) 그 결과 1925년 7월 7일 열린 제14회 임시의정원에서 정의부의 이상룡을 첫 국무령으로 선출하고 정의·참의·신민 3부의 주요 인물로 국무원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국무원 참여를 거부하여 정부 조직에 실패했다.
이 사이 상해에서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에 노력했던 박은식이 1925년 11월 1일, 전 민족의 통일을 요구하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7세로 서거했다. 박은식 내각에서 법무총장을 지냈던 오영선은 장례위원이 되어 빈소를 지키며 그가 남긴 대동단결의 유언을 되새겼다.
상해 시내
1926년 들면서 중국 관내에서는 박은식이 남긴 대동단결의 유언이 계기가 되어 민족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화된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고 대동단결하여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인 대독립당 즉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이 급속히 번져 갔다. 이 운동은 중국의 국민당처럼 민족유일당이 임시정부의 상위에서 전투적 독립운동을 벌인다는 이른바 ‘이당치국론(以黨治國論)’이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오영선은 1926년 5월 한인독립운동자들은 과거 운동의 실패를 시정하고 장래의 완벽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상섭, 최창식, 이유필 등과 함께 안공근을 회장으로 하는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6년 12월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진회가 결성되었고 오영선도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베이징(北京), 광둥(廣東), 우한(武漢), 난징(南京) 등지에서도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한 촉성회가 잇달아 결성되었다.
한편 이상룡에 이어 국무령이 된 홍진이 촉진회 발기를 위해 국무령을 사퇴한 뒤 김구가 국무령이 되었다. 오영선은 김구의 추천으로 국무원 군무장에 임명되었다. 김구 국무령체제의 임무는 민족유일당을 뒷받침하기 위한 헌법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헌법 개정에 착수하여 1927년 3월 5일 ‘신임시약헌’을 공포했다. 이 약헌 제2조 단서 조항에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는 최고 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라는 규정을 두어 ‘이당치국’을 헌법에 명시했다.
오영선은 1927년 8월 김구가 헌법개정의 임무를 다하고 국무령에서 물러나고 이어서 이동녕이 국무령이 되었다. 오영선은 다시 국무원 외무장에 임명되었고 1928년 4월에는 군무장으로 활약하며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민족유일당운동은 1927년 4월 장개석이 일으킨 ‘반공쿠데타’ 이후 급격히 바뀐 중국 정세와 함께 끝내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지 못하여 1929년 10월 상해촉성회가 해산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막을 내렸다. 오영선은 한편으로는 국무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1930년 9월 국무원을 사임했다.15) 오영선은 1931년 11월 6일 개최된 제23회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병 때문에 회의 참석이 불가능하여 의원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오영선은 상해에서 병으로 요양하다가 1939년 3월 10일 사망했다.
오영선 가족사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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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2, 1965, 545쪽.
2) 「朝憲機 제131호 墾民會 開會에 관한 건」(1914.02.0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 (http://www.history.go.kr).
3) 「朝憲機 제622호 豆滿江方面 中國領 狀況彙報」(1914.09.1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 (http://www.history.go.kr).
4) 「金알렉산드리아傳」, 『獨立新聞』, 1920년 4월 20일.
5) 강석훈, 「내가 다닌 북일중학교」, 『間島史新論』 상권, 1993, 214 ~ 215쪽.
6) 국사편찬위원회, 『재외동포사 총서 7 :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상), 2008.
7) 「機密 제95호 鮮人에 관한 건」(1919.09.0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http://www.history.go.kr).
8) 국회도서관,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編), 1976, 276 ~ 277쪽.
9) 「新年의 新覺悟」, 『獨立新聞』, 1922년 1월 1일.
10) 「會議 第五十五日(六月十二日)」, 『獨立新聞』, 1922년 7월 22일.
11) 『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
12) 독립기념관, 『韓國老兵會會憲, 附會則及趣旨書』.
13) 『朝鮮民族運動年鑑』, 1924년 6월 5일.
14) 「機密 第50號 不逞鮮人 行動에 關한 件」(1925.05.2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1 (http://www.history.go.kr).
15) 국회도서관 편,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編), 1976, 6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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