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성구
이성구
, (1897) ~(1934)
, 독립장
(1968)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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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운동에 참여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다
이성구(李成九)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수청면(水淸面) 고읍동(古邑洞)에서 1896년 태어났다. 선생은 독립운동 기간 중에는 이수봉(李秀峰)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선생이 일제에게 붙잡힌 이후 심문과정에서 밝혀진 바로는 이외에도 이동농(李東儂), 또는 김동농(金東儂)이라는 이명도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름이나 출생지 이외에는 현재까지 후손이나 유족 등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부모의 이름, 본관, 정확한 출생년도 등을 알 수 있는 재판기록이나 기타 자료도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어릴 적 고향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한 자료도 확인할 수가 없어 이성구 선생의 의식형성 과정이나 변화과정을 파악하기도 곤란하다.1)
현재까지 확인되는 일부 자료에 따르면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고향인 평북 선천군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시위운동에 참여하면서 선생은 선천읍에 위치해 있던 선천면사무소를 공격해 방화하는 사건을 주도하였다.2) 선생은 이 선천면사무소 공격방화사건으로 1921년 1월에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방화소요죄로 징역 7년 6월의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3)
복역 중 일제의 각종 악랄한 고문 등 가혹행위로 병을 얻은 선생은 1923년 5월 병보석으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일시 석방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을 준비하는 동안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중 누구와, 혹은 어떤 독립운동단체와 연락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나 그 주변의 독립운동가 중 평안북도 선천 출신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이들 중 누군가와 상호 연락이 있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2. 병인의용대의 선봉장으로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다
선생은 1923년 5월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병보석으로 인해 징역형이 일시 집행정지된 것이다. 이 기간 중에 일경의 감시가 소홀해지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신문사에 입사하였다. 독립신문사의 경리주임으로 근무하던 최천호(崔天浩)의 권유가 있어 1923년 9월에 입사한 것이다. 독립신문사에 취직을 권유한 최천호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 1922년 이후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독립신문사에 취직해 식자공으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해 활동하기 위한 방법 등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이 상해에 도착할 즈음의 상해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한민족 최초의 민주공화제정부로서 수립,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항일독립운동을 지도·통할해 나갈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임시정부는 1920년대 초에 들면서 대내외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어 통합 당시의 기대했던 많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복합적인 여러 가지 요인이 발생하였다. 먼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인 베르사유체제에 따른 외교우선주의 독립운동노선의 한계를 절감하였다는 점이다.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중점을 두고 추구한 외교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 국제상황이 독립전쟁보다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외교를 통한 국제적인 독립승인을 우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승전국이었던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관심을 두는 서구열강은 없었으며, 더구나 일제의 온갖 방해공작으로 김규식, 조소앙 등의 외교활동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또한 1921년에 들어 국내와의 인적·물적·재정적 연결통로였던 교통국과 연통제가 일제에 의해 발각된 이후 임시정부는 여러 면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더구나 사회주의 이념의 유입으로 인한 이념적인 갈등과 분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문제 등이 알려지면서 불거진 반이승만 움직임 등이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방법이나 이념 등을 새롭게 모색해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해 보고자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도 1923년 6월경에 이르러 결렬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한인 독립운동 진영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정국 수습에 나섰다. 먼저 분열된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통일과 임시정부의 개조를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과 임시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즈음의 이런 상해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선생은 아마도 쉽게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쉽게 결정하지 않고 주변 정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 상해에 도착한 후 선생은 2년여를 독립신문사에 식자공으로 근무하다가 마침내 1926년 1월 결성된 병인의용대에 참여하였다.
丙寅義勇隊 및 우리모듬團의 內容에 관한 報告의 件
병인의용대는 실추된 임시정부의 권위를 회복하고, 임시정부와 주변의 독립운동단체에 침입해 있는 밀정이나 주구배를 처단하고, 일제의 기관 등을 파괴하여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열투쟁 단체였다. 병인의용대의 창립 취지는 창립선언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본대는 임시정부의 기치하에 철혈주의로 독립운동에 예신자진(銳身自進)하는 의용청년을 묶어 적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적에 부수하는 일체의 이적 행동자를 척결하기 위하여 이를 선언한다. … 본대는 … 전 운동의 대본영인 임시정부의 권위와 정신을 옹호 선양하여, 적의 정치상·경제상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침략정책을 주모(主謀) 행사하는 적의 관리와 제국주의의 주구배인 한간(韓奸)을 습격 암살하는 적극 행동을 취하고, 그 반면에 현저한 독립·자유·대광명·대번화를 환영하려고 한다.
혁명은 길이 있다. 말하자면 흑철(黑鐵)과 적혈(赤血)뿐이고, 다시 제2, 제3이 없다. 암살 파괴는 혁명가의 무상한 무기이며 유일한 수단이다. … 적에게 24사단 병력이 있으므로 우리들도 각각 대항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숫자 비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자가 어찌 혁명가이겠는가.
생각하건대 혁명의 상대방은 언제든지 강대하다. 그 강대한 폭력을 타도 전복시키려면 오직 암살과 파괴뿐이다. 귀하가 과연 혁명가라면 폭탄을 안아라. 칼과 친하라. 의혈(義血)이 가슴에 가득하고 기력이 강장(强壯)한 청년 동지들이여. 오라. 전진하라.(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관련단체Ⅱ), 34~35쪽, 2009.)
이와 같이 병인의용대는 ‘철혈주의’를 표방하고 “일제의 주구 숙청, 반동분자 처단, 적의 주요시설 파괴 및 주요인물처단”을 주요 임무로 강조하였다. ‘철혈’과 ‘흑철’은 총과 칼 등의 무기와 피로 대표되는 의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울러 병인의용대는 ‘전 운동의 대본영인 임시정부의 권위와 정신을 옹호 선양’하여 라고 언급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비밀결사이자 직할단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의미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인 나창헌(羅昌憲)이 병인의용대 대장을 겸임한 것도 이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이는 동대의 대헌(隊憲)에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대헌 제2조는 “본대는 적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임시정부의 신성(神聖)을 보장함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사(秘密社)로 한다.”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권위와 정통성을 파괴하고 위협을 가하는 일체의 세력을 처단하고 파괴할 것을 대헌으로 규정한 것이다.
병인의용대는 정위단(正衛團)을 전신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정위단 역시 병인의용대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결성되었다. 병인의용대는 정위단을 토대로 대원을 더욱 확대하여 기반을 넓혀 결성되었다. 정위단은 1925년 6월 13일 임시정부의 내무차장이던 나창헌과 경무국 참사 강창제 등 8명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에서 결성한 단체로, 경무국의 별동대와도 같은 조직이었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일부 독립운동단체가 활동자금이 궁핍하게 되자, 그 단체의 구성원들이 교민을 협박하여 금품을 강탈하거나 유학생을 납치한 후 부모에게 송금을 요구하는 등의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상해의 한인 교민사회에서 이런 불미스런 일들을 사전에 예방하고 독립운동에 해를 끼치는 ‘불량분자’가 적발되면 엄벌에 처한다는 것이 정위단의 결성목적이었다. 정위단의 단장은 나창헌이 겸임하였고, 강창제와 고준택이 심판원, 박창세·유창준·김정근·박규명·김예진이 수사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8명 중 유창준을 제외한 7명이 모두 병인의용대의 창단 대원으로 참여하였다.
병인의용대는 비밀결사로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때문에 대원의 규모 등을 완전하게 밝히기는 어렵다. 현재까지 각종 기록 등을 토대로 파악된 대원의 수는 약 50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원들은 대다수가 이수봉 선생과 같은 평안북도 출신이었다. 또한 병인의용대 창립대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요원, 내무부 간부, 한국노병회의 이사이거나 회원 출신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 창립대원들은 병인의용대에 참여하기 이전 이미 일제 주구 처단, 일제의 관공서 폭파, 군자금 모금, 폭탄 제조 등의 활동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수봉 역시 상해로 망명하기 전 고향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선천면사무소를 공격해 방화한 죄명으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한 바가 있다. 김예진(金禮鎭)은 의용단 평양지부의 서무부장으로서 1920년 8월 평양폭탄거사 실행에 참여한 후 상해로 망명해 왔으며, 임득산(林得山, 林如松, 林龍日 등의 이명 사용)은 구국모험단 단원으로 폭탄 제조를 담당하였고 이후 광복군총영 대원이 되어 1920년 8월 선천폭탄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 박규명(朴奎明)은 1920년 친일파 태산면장 및 면서기처단거사에 참여하였고, 이영선(李永善, 본명 李德三)은 군자금 운송 도중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다시 붙잡혀 호송 중 탈출하였고, 고준택(高俊澤)은 만주 관전현의 대한청년단연합회 회원으로 1920년 3월 일제의 주구 김명옥(金明玉)을 처단하고 상해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이수봉은 병인의용대에 입단하면서 다음과 같은 서약서를 작성하였다.
본인이 금차 병인의용대에 대원으로서 허입(許入)되온바 금후로는 본대 헌칙(憲則) 및 제규율을 절대 준수하여 단순한 정신으로 왜적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는 폭력운동에 전심전력하며 전도(前途)에 여하한 험고(險苦)와 환경의 변동이 있더라도 차지(次志)를 영영 불변할 것을 자에 서약함(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606쪽)
이상과 같이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와 그 주변의 독립운동단체에 침투해 활동하고 있는 밀정이나 주구배를 처단하거나, 국내와 중국 등에서 식민통치를 시행하고 있는 일제의 각종 식민통치기관에 대한 파괴 공작을 실행하였다.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활동은 일제의 주요 기관 파괴나 국내에서의 의거 외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일제의 밀정이나 주구배, 일제 기관원 처단 등 크게 두 방면으로 전개되었다.
일제 식민통치기관에 대한 파괴공작 중 대표적인 의열활동은 이수봉 등이 실행에 옮긴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 폭파의거였다.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은 상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세력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반드시 파괴해야 할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통치 기관이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 중 붙잡혀 일본총영사관에서 모진 학대와 고문 등 가혹행위를 받았고, 그 안에서 모진 고문 끝에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총영사관을 통해 국내로 강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던 것이다.
병인의용대는 이런 이유와 또한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려다 붙잡혀 일본총영사관 유치장에 수감 중인 병인의용대원 장진원(張鎭元, 이명 張英煥)과 최병선(崔炳善) 두 대원의 배후에 강력한 의열투쟁을 실천할 비밀결사가 있다는 점을 일제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일본총영사관에 대한 폭파의거를 결행한 것이었다.
병인의용대에 참여한 이수봉은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 파괴의거 활동에 두 번이나 참여하였다. 병인의용대의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대한 파괴 활동은 총 세 차례 시도되었으며, 대표적인 의열활동이었다.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대한 제1차 폭파의거는 1926년 4월 8일에 실행되었다. 이수봉은 김광선(金光善)·김창근(金昌根) 두 명의 대원과 함께 4월 8일 오후 7시 반에 택시를 이용하여 일본영사관 후면도로를 달리도록 하면서 창문을 열고 일본영사관원이 거주하는 관사에 폭탄 2개를 던졌다. 그 중 한 개가 폭발하면서 관사 건물의 유리창이 대파되고 건물 벽이 부분 파손되었다.
이수봉은 1926년 말에 또다시 일본영사관 폭파를 위한 직접 실행에 나섰다. 병인의용대에서 추진한 제3차 폭탄거사였다. 대원 이지선(李枝善)이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을 강창제·김창근 등의 대원과 함께 일본영사관으로 투척하였다. 이수봉이 투척한 폭탄은 일본총영사관의 창고에 떨어져 창고는 크게 파괴되었으며 일경 2명도 중상을 입은 의거이었다.
또한 1926년 9월 5일 한낮에도 일본총영사관을 파괴하려는 의거를 결행하였다. 제2차 폭탄거사인 이 의거는 병인의용대장 나창헌이 직접 제작한 고성능 시한폭탄을 중국인 인력거꾼을 시켜 영사관 안으로 들여 보내 폭파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중국 인력거꾼이 일본영사관을 잘못 알아 듣고 영사관 정문에서 경비에게 장소를 확인하느라고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리 맞추어 놓은 시간에 폭탄이 터져 영사관을 폭파하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폭탄이 인력거 안에서 터지면서 그 위력으로 파편이 널리 날아가 부상자가 여러 명 발생하였다. 일본영사관에서는 범인을 찾기 위해 프랑스조계 공무국에게까지 협조공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조계 공무국에서 시간을 끌며 나창헌이 탈출할 여유를 주어 나창헌은 항주로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병인의용대의 3차례에 걸친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 폭탄의거에 일본영사관에서는 두려움이 커져서, 경비 강화는 물론 영사관 외곽에 가로등의 증설을 요구하는 공문을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등 대책강구에 몰두하였다. 상해총영사는 1926년 9월 15일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보에서, ‘당관(상해총영사관)에서도 충분히 경계하기로 하고 우선 경찰보조원 1명을 증원하여 감옥 감시를 엄하게 하고, 정문을 폐쇄하여 출입구를 후문 1개소로 하며, 출입구에 문번(門番) 말고도 순사 2명을 항상 두어 출입하는 자를 감시하게 하고, 또 수시로 영사관의 외곽을 순시하게 하고 … 영사관의 바깥 도로에 가로등 2개를 증설해 줄 것을 요구했음’이라고5) 적은 것을 보더라도 일본영사관에서 병인의용대의 폭탄의거에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지, 또 계속될지도 모를 폭탄의거를 방지하기에 부심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병인의용대는 상해에서만 의거를 실행한 것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의거를 결행할 것을 계획하고 진행하였다. 1926년 4월 순종, 즉 융희황제가 서거하여 6월 10일 국장을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병인의용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내로 대원을 파견하여 일제의 중요기관을 파괴하거나 고위관리나 요인을 처단하는 의거를 결행하여 3·1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항일봉기를 촉발시키고자 계획했던 것이다. 국내에서의 대규모 거사를 결행하기 위한 대원으로 고준택·김적용(金積龍)·이덕삼·김광선 4명이 선발되었다. 이들 선발대원들은 6월 1일 폭탄 2개와 권총 4자루를 숨겨 격문 수천 매와 함께 휴대하고 중국인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영국 기선 순천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였다.
하지만, 미리 이들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총영사관 경찰이 황포탄 하류에서 검문 검색함으로써 병인의용대원 4명이 전원 검거되었다. 일본 경찰은 이들 4인에 대해서 혹독한 고문을 행하였다. 병인의용대 결성 이후 행해진 각종 의거에 대해서 추궁하고 심문한 것이다. 일본 경찰의 고문과 추궁에 굴욕감을 느낀 이덕삼은 6월 7일 새벽에 유치장에서 자결하였고, 남은 3인의 대원은 재판을 거쳐 무기 및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6)
병인의용대는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독립운동단체 주변에서 활동하면서 각종 정보를 캐내거나 독립운동가들을 이탈시키는 공작을 하던 일제의 밀정이나 주구배 등에 대한 처단도 결행하였다. 가장 먼저 처단대상으로 지목된 일제의 밀정은 박제건(朴濟乾)이었다. 박제건은 일본 외무성의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1925년 4월 밀정 임무를 띠고 상해로 파견된 자로 최동윤(崔東潤), 또는 박남제(朴南濟)라는 이명을 사용하는 자였다. 박제건은 상해 일본총영사관에 파견되어 있던 조선총독부 통역관 미전만(尾田滿) 경시의 정보원이자 주구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의 독립운동자들에게 자신은 ‘모험가’, 즉 의열투쟁가인즉 무기 구입에 필요한 자금 조달도 파괴행동도 자신이 직접 해낼 터이니 동지를 모아서 모험단체를 조직하자고 부추겨 환심을 사는 등, “기괴간교한 언동으로 독립운동 진영의 내정을 밀탐하고 이간 분규를 모획”하는 행동을 계속 해온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에 탐지되었으며,7) 더구나 동경의 신한건설당 당원과 한중협회 회원에 관한 많은 정보를 일본총영사관에 넘겨 신한건설당 당원과 한중협회 회원 다수가 일경에게 붙잡힌 일도 있어 반드시 처치해야 할 대상이었다.8)
병인의용대 대장 나창헌은 1926년 1월 29일 인성학교에서 소집된 대원총회에서 박제건을 처단대상 1호로 결의한 후, 31일에 최병선(崔炳善)·김광신(金光信)·장영환(張英煥)·박인(朴仁) 등 4명을 실행대원으로 선발하고 임무를 맡겼다. 그리고 이들 4명의 실행대원이 처단에 실패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제2의 실행대원을 대기시키는 등 치밀하게 박제건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해 놓았다. 마침내 2월 1일 최병선 등 4명의 실행대원은 박제건의 은신처로 생각되는 홍구의 내산판사처(內山辦事處), 즉 한인 귀순 공작 사무소를 찾아가 박제건의 부재 여부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박제건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가 주로 다니는 동선을 추적하던 중 마침내 북강서로(北江西路)의 야채시장에서 발견하고 처단하는 데 성공하였다.9)
같은 해 4월 16일에는 이덕삼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원인 내굴직사(內堀直司)를 처단하려고 공동조계에 위치한 일본음식점 승전관으로 유인하였다. 그러나 내굴의 얼굴을 모른 상태에서 같은 시간대에 동일 장소에 나타난 산성환(山城丸)이라는 배의 선원인 송본천차랑(松本踐次郞)을 내굴로 오인하고 처단하였다. 내굴의 처단에 실패한 이덕삼은 총소리를 듣고 출동한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여 다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여러 명의 일경을 사살한 후 현장을 탈출해 본대로 귀환하였다.
이 밖에도 1926년 2월과 4월 사이에 일본의 밀정으로 추정되는 4명을 처단하였다. 2월 중순에 인삼장사를 하는 김모, 3월 3일에는 염익지(廉益智)를, 3월 14일에는 박모를, 4월 16일에는 독립신문사 기자인 이수봉(李秀鳳)을 각각 교살, 또는 총살하였다. 이들 중 염익지와 독립신문사 기자 이수봉은 일본영사관 경시인 내굴직사의 밀정이었으며, 나머지 김모와 박모도 일본영사관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자들이었다.10)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병인의용대는 결성 첫 해인 1926년 상당한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는 별다른 활동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상해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내부 상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27년부터 상해, 북경 등 중국 관내에서 민족유일당결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그와 관련한 유일당 결성 방법론과 좌우 양 진영의 대오정비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모되었고,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정상태가 극히 열악한 상황에서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 전개에 조직적인 지원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1926년 결성 이후 결행된 일제 밀정이나 주구배 처단, 상해 일본총영사관 등 주요 관공서 폭파의거, 국내와의 의거 연계 추진 등으로 일제는 병인의용대원의 수색과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많은 수의 대원들이 의거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는 의거를 결행하는 과정에서 일경에게 붙잡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의거를 실행할 대원의 수가 부족해진 것도 병인의용대의 의거 결행이 감소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였다.
3.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상해한문≫의 기자로 활동하다
이수봉은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 폭파의거를 결행 후 일제의 병인의용대에 대한 조사와 검거 등이 강화되자, 계속적인 의열투쟁을 잠시 접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 후원하는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1929년 1월에 한국노병회에 특별회원으로 가입한 것이다. 한국노병회는 김구·이유필·여운형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관계자들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주창하여 1922년 10월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결성 이후 즉 1922년 이후 향후 10년 이내에 1만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목적한 노병과 전쟁비용이 모아지면, 일제에게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개시할 것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또한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치에 도달하기 이전이라도 임시정부에서 일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개전하면 이에 참여하여 출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즉 한국노병회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독립전쟁 준비방략에 따라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였다.
이수봉은 이 한국노병회의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였다. 한국노병회의 회원은 특별회원과 통상회원으로 구분된다. 이들 특별회원과 통상회원은 입회 절차와 그 입회 자격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만큼 한국노병회에서는 이들 회원의 선발과 입회에 까다로운 절차를 두었다. 특별회원은 나이가 40세 이하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청장년들이다. 이에 비해 통상회원은 40세 이상으로 군인이 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체력과 신체조건을 갖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준을 40세로 규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입회 절차와 자격 또한 달리 적용되었다. 통상회원의 경우 회원 1인 이상의 소개로 입회금과 함께 입회청원서를 제출하여 이사회의 결의로 입회여부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특별회원은 이보다 더욱 엄격하였다. 회원 1인 이상의 소개로 입회금과 이력서, 서약서를 입회청원서와 함께 제출하고 이사장 포함, 이사 2인 이상이 참석한 자리에서 면접과 문답식을 거행한 후에 이사회의 결의로 입회 여부가 결정되었다. 특히 특별회원은 1) 6개월 이상의 군사훈련을 받을 의무, 2) 한 가지 이상의 노공기술을 수득할 의무, 3) 한국노병회에서 군대를 편성할 때 그 병역에 복무할 의무, 4) 자신의 경과상황을 본부(한국노병회 - 필자 주)에 통보할 의무 등 4가지 의무사항을 반드시 준수해야 하였다.11)
이수봉이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직책을 역임했는지, 어떤 역할이나 활동을 전개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병인의용대에서의 활동을 토대로 회원 모집이나 전쟁비용 조성에 노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수봉은 1930년 6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초정당이었던 한국독립당(상해)에도 참여하였다. 상해 한국독립당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된 중국 관내지역에서의 민족유일당결성운동이 좌익진영의 일방적인 탈퇴로 결렬된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와 조소앙, 이동녕 등 민족주의 진영 28명이 1930년 1월 25일에 상해의 마당로 보경리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에서 결성한 독립운동 정당이었다.
이수봉이 상해 한국독립당에 참여할 당시 상해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민족연합전선운동, 또는 민족유일당결성운동이 결렬된 상황이었다. 즉, 1926년부터 본격화된 중국 관내지역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마침내 1927년 11월부터 북경·남경·광주·무한·상해 등 각 지역 촉성회의 연합체로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동 연합회는 좌우 양 진영의 합작과 전선통일을 통한 민족유일당, 즉 민족대당의 결성을 최종 목적으로 하여 결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촉성회연합회의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는 노력은 1928년 접어들면서 상해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가장 커다란 요인은 민족유일당운동의 핵심 축인 좌익진영 내부에서 재중한인청년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좌익진영 내의 두 세력 간에 발생한 대립과 갈등이었다. 또한 좌우 양 진영 간에 민족유일당 결성 목적과 방법의 차이가 심각하였다는 점도 민족유일당운동이 결렬된 이유 중의 하나이었다. 여기에 1928년 발표된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의 영향도 있었다. 코민테른에서 「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문서에서,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무산자 혁명운동이나 노동운동의 독자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족독립운동의 우유부단성을 폭로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민족주의 진영과의 결별을 지시한 것이었다. 이 12월테제를 조선공산당 재건세력 등 좌익진영에서 수용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의 결성에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좌우 양 진영이 좌우연합을 통한 민족유일당 결성이라는 대전제는 동일한 목표였지만, 우익진영에서는 ‘전민일치의 민주주의 중앙집권적 대독립당의 결성’을 주장한 반면에 좌익진영에서는 ‘ 노농대중에 기초한 혁명적 통일전선’ 내지는 ‘전투적 협동전선’의 결성을 주장함으로써 좌우 양 진영 간에는 민족유일당의 최종 결정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좌익진영 내부의 알력과 대립, 특히 1929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국제주의 대 반국제주의’의 대립구도가 형성되면서 코민테른의 지도적 지위를 절대시하고 그 권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풍조가 결국 좌우익 연합전선의 결렬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29년 10월 좌익진영이 상해촉성회를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좌익진영만의 새로운 결정체로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진영의 안창호·이동녕·조소앙·김구 등 민족주의자 28명은 민족주의 진영의 쇄신과 국외독립운동 진영의 전선통일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1930년 1월 25일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게 되었다.12)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임시정부를 지지, 옹호하는 기초정당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자 결성한 정당이었다. 이들 28명은 거의가 임시정부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수봉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일심동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해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결성 초기 상해 한국독립당은 철저한 비밀조직체였다. 따라서 이수봉이 상해 한국독립당에서 무슨 역할을 하였고 활동을 했는지 역시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수봉은 1933년 1월 상해 한국독립당의 이사로 선출되었다. 상해 한국독립당은 1933년 1월 조직체제를 크게 개편하였다. 1932년 4월 29일의 윤봉길의사 홍구공원의거 직후 일제의 상해지역 내 한인독립운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수색이 진행되어 주요 인사들은 항주·가흥·남경 등 각자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소앙과 박창세 등은 항주로 피신하였고, 김구는 중국국민당정부의 특별한 보호 속에서 극비리에 가흥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상해 한국독립당의 조직을 점검하고 향후의 활동방향을 논의, 재정비하기 위한 차원에서 간부직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 이수봉은 박창세, 최석순 등과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대한교민단의 간부들이었다. 이수봉은 1932년 8월 말 현재로 대한교민단의 간사로, 또한 대한교민단의 산하단체로 상해지역 한인사회의 안녕과 질서유지를 담당하는 의경대의 대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이수봉은 이와 같이 병인의용대에 가입하여 상해주재 일본총영사관 폭파의거를 결행한 이후 한국노병회, 대한교민단, 의경대, 상해 한국독립당에도 가입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기간 중에 주목할 점은 이수봉이 상해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인 ≪상해한문(上海韓聞)≫의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수봉이 국내에서 상해로 망명 직후 독립신문사의 식자공으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상해한문(上海韓聞)≫은 주간신문 형태로 간행되었으며, 1932년 1월 4일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정확한 국내·외 소식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발행되었다. 이수봉은 박창세와 함께 ≪상해한문(上海韓聞)≫사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박창세는 병인의용대와 한국노병회, 상해 한국독립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였다.
이수봉은 이 시기에 대한교민단의 의경대 소속으로 상해 거주 한인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일제 경찰이나 밀정의 동향을 파악하여 처단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입장에서 ≪상해한문(上海韓聞)≫의 기자직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수봉은 ≪상해한문(上海韓聞)≫의 기자직을 수행하는 기간에 1932년 10월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서 순국하자,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그의 순국을 애도하는 글을 실어 배포하기도 하였다.13)
4. 친일파 유인발을 처단하다
이수봉은 상해 한국독립당의 이사로서 또한 기관지 ≪상해한문≫의 기자로 활동하던 중이던 1933년 8월 31일에 상해한인친우회(上海韓人親友會) 위원장 유인발(柳寅發)을 처단하였다. 같은 날 오전 6시 상해지역에서 친일단체로 활동하던 유인발을 중국가에 위치한 그의 자택으로 찾아가 권총으로 처단한 것이다. 권총은 좌측 팔목을 관통해 좌측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러나 총소리에 놀란 유인발의 부인과 주변 사람들이 몰려와 사망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고 몸을 피신하였다. 병원으로 급히 옮긴 유인발은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 친일파 유인발을 처단하는 데에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이후 상해한인친우회의 간부들은 거주지를 수시로 옮기는 등 두려움에 떨었다고 일본측 정보문서에는 보고되어 있다. 병인의용대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등의 활동으로 상해지역에서 암약하던 친일 밀정이나 친일세력들이 처단되자 일경은 이를 방지하고 밀정이나 친일파를 처단한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5. 피체, 그리고 일제의 부당한 재판
이수봉은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일제의 상해지역 한인독립운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수색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를 떠날 각자 안전한 장소로 피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해에 남아 의열활동을 전개할 기회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친일단체 상해한인친우회 위원장 유인발을 처단하는 의거를 결행하였다. 비록 유인발을 처단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지만,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의거 이후 아직도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의열투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의거였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되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집중적인 단속과 검거, 수색으로 인해 결국 이수봉도 붙잡히게 되었다. 1933년 10월 12일 프랑스조계 하비로(霞飛路) 406호 려반로 입구에 위치한 백제약국 앞에서 일경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일경에 붙잡힌 이수봉은 10월 25일을 전후해 일본영사관으로 인도되었다. 일본영사관으로 이수봉이 인도되는 데에 약 2주간이라는 시일이 걸렸다. 중국이 프랑스 공무국에 이수봉의 국적이 중국인데 일본으로 이수봉을 인도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항의하였기 때문이다.
上海事件 李秀峯 新義州로 護送 二十일 경성환으로 인천입항 國籍問題 일으킨 人物//嚴重한 警戒裏 新義州에 到着
그러나 이수봉의 국적이 평북 선천군으로 최종 조사되자 일본총영사관에서는 이수봉을 인도받아 1933년 12월 신의주로 이송하여 재판하기 위해 국내로 호송하였다. 1933년 12월 14일 상해를 출발한 경안환(慶安丸) 편으로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12월 19일 차갑고 매서운 바닷바람이 부는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인천경찰서의 차디찬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수봉은 다음 날 서울로 이송되었고, 21일 오전 8시 서울을 출발 신의주로 향하는 기차에 실려 같은 날 오후 8시 45분 신의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일제는 이수봉을 인천에서 신의주로 이송하는 동안 평안북도 경찰서 소속 3명의 경찰로 하여금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1933년 12월 21일 평안북도 경찰서로 이송된 이수봉은 일경의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1933년 8월의 상해한인친우회 유인발처단미수의거가 확인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조사를 받은 이수봉은 1934년 1월 29일 상해친우회 위원장 유인발처단미수사건과 치안유지법위반 등의 혐의로 각종 서류와 함께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신의주 검사국의 곡전(谷田) 검사는 2월 1일 제령위반·치안유지법 위반·불경·살인·살인미수 등의 죄명으로 신의주지방법원으로 회부하였다.
이수봉에 대한 첫 공판은 1934년 3월 5일 열렸다. 일제는 상기 죄명으로 징역 7년을 선고하였고, 3월 16일 오전 10시 신의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일제는 이수봉에게 구형과 같은 7년을 언도하였다. 일제의 국지(菊地) 재판장이 판결문을 다 읽고난 후 이수봉 의사는 큰 소리로 웃으며 일제의 재판을 비웃었다고 한다.
李秀峯(一名 成九)에게 七年을 言渡 上海領館爆彈犯, 信友會會長鄭寅達도 殺害未遂[肖]
이수봉 의사는 이후 1921년 평양복심법원에서 언도받은 징역 7년 6월 중 병보석으로 형집행 정지된 나머지 5년형을 집행하고, 이어서 1939년 4월 18일부터 7년형이 집행되었다.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 있는 「신분장지문원지」에 의하면 선생은 1940년 9월 24일까지는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선생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이수봉 의사의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다양한 활동과 업적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주석
1) 현재까지 이성구 선생의 상해로의 망명 이전인 고향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확인된 것은 『독립유공자공훈록』5(국가보훈처, 1988)와 상해에서 일경에게 피체 후 심문과정에서 밝혀진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나 『조선중앙일보』의 부분적인 보도기사 뿐이다. 일제의 재판기록이나 심문조서도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2) 『騎驢隨筆』(宋相燾 著)에 金禮鎭의 활동을 언급한 부분에서, 이수봉에 대한 설명이 일부 보인다. “李秀善은 일찍이 예진(김예진-필자 주)등과 더불어 병인의용대를 조직하고 함께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심히 분하고 한탄하여 다시 거사를 생각하여 융희황제의 인산일이 6월 10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에 몰래 들어가 大事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동지 李秀峰, 高俊善, 金磧龍 등과 더불어 총탄을 소지하고 상해를 출발해 吳沿灣에 이르러 日本水上署에 붙잡혀 즉시 일본영사관에 구인되어 취조를 받았다. 수봉은 日本郵船會社 船員 宋本을 일본외무성 촉탁인으로 잘못 알고 처단하였다. 이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니 丙寅(1926년) 6월 16일 밤이다. 수봉은 평북 철산군 서촌면에 거주하며 유서에서 자신의 시신은 동생 李德用에게 보내 줄 것을 청하였고, 덕용은 상해 불조계에 있다고 하였다.” 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여기서 언급한 이수봉은 본명인 이성구인 이수봉이 아니라 이덕용의 형인 이덕삼(李德三, 李英全)이며, 高俊善은 高俊澤의 오류이며, 金磧龍은 金碩龍의 오류이다.(조범래,「병인의용대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3) 『동아일보』나 『조선중앙일보』의 기사에는 징역 10년을 언도받은 것으로 보도되어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확인한 이성구의 「신분장지문원지」(1940년 9월 24일 작성)에는 징역 7년 6월을 언도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 1923년 9월 선생이 상해에 도착해 최천호의 권유로 독립신문사에 취직해 근무한 이후 1926년 병인의용대에 참여하기까지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런 기록은 일제의 공판기록이나 심문조서 등이 확인되면 재구성이 가능할 것이나 현재까지 확인되는 각종 자료에 따른 추정이다.5) 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1976, 606~60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7, 1976, 612~613쪽.
6) 『동아일보』, 1926년 6월 4일, 「폭약을 휴대한 청년 4명 피착」;『동아일보』, 1926년 6월 9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 유치장에서 結頸 자살」;『동아일보』, 1926년 6월 19일, 「경찰의 고문에 최후까지 대항」; 『시대일보』, 1926년 6월 20일, 「상해 日領館에서 죽은 이는 병인의용 이덕삼,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조선 안으로 오려다가 잡혀 죽어」; 국사편찬위원회,『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2(관련단체Ⅱ), 2009, 54~57쪽.7)『독립신문』, 1925년 11월 1일, 「경무국방문기」; 김영범,『의열투쟁 Ⅰ-1920년대』(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독립기념관, 2009, 230쪽.8) 조범래,「병인의용대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7, 독립기념관, 1993, 365쪽.9) 조범래,「병인의용대연구」, 365쪽.; 김영범, 『의열투쟁 Ⅰ-1920년대』(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30쪽.
10) 조범래,「병인의용대연구」, 365~366쪽.11) 김희곤,「한국노병회의 결성과 독립전쟁준비방략」,『중국 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지식산업사, 1995, 200~222쪽.12) 조범래, 『한국독립당연구(1930~1945)』, 선인, 2011, 42~88쪽.
13) 조범래,『한국독립당연구(1930~1945)』, 95~99쪽. 302~307쪽.
참고문헌
ㆍ상해판 『독립신문』,『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ㆍ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8.
ㆍ국사편찬위원회, 『기려수필』, 탐구당, 1985.
ㆍ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5권), 1988.
ㆍ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 자료집』11권(의열투쟁사 자료집), 1984.
ㆍ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7권, 1984.
ㆍ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1976.
ㆍ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임정Ⅲ), 1983.
ㆍ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2(임정Ⅱ), 1983.
ㆍ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1』(관련단체 Ⅰ), 2009.
ㆍ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관련단체 Ⅱ), 2009.
ㆍ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한국독립당 Ⅰ), 2009.
ㆍ김희곤, 『중국 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지식산업사,1995.
ㆍ김영범,『의열투쟁Ⅰ-1920년대』(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6), 독립기념관, 2009.
ㆍ조범래, 「병인의용대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7, 독립기념관, 1993.
ㆍ조범래, 『한국독립당연구(1930~1945)』, 도서출판 선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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