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독립운동가
액자프레임
독립유공자 사진
2012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석용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합동묘역

묘소명 : 소충사 28의사합동묘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석용

이석용 , 1877 ~1914 , 독립장 (1962)

임금과 부모의 은혜와 의리 하늘과 같아

만 번 죽어도 그 공을 갚을 길 없네.

태어나던 날 아침 장부의 뜻 저버려 부끄러워도

편안히 감옥 가운데 홀로 있다네.

- 대구 감옥에서 생일날 쓰다 -

충(忠)과 의(義)를 중시한 선비

이석용(李錫庸, 1878 ~ 1914)은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본관은 전주였다. 그의 부모 봉선(鳳善)과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한동안 자식이 없었다. 이에 봉선은 상서(尙書)를 애독하고 산천에 열심히 기도했는데, 어느 날 번개가 왼발을 때리는 태몽을 꾼 후 부인 임씨가 임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석용은 1878년 음력 11월 29일 갑술일(甲戌日)에 태어났다. 태어난 날의 간지에 의해 그는 어려서 갑술이라 불렸고, 그 후 손아래 누이 2명과 함께 3대 독자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어른들을 좇아 옛사람들이 충의(忠義)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들을 즐겨 들었다. 부친이 골패로 소일하던 어느 날 그가, ‘아버지가 잡기를 하면 자식은 어찌하란 말입니까?’라고 말하자, 그날 이후로 그의 부친은 죽을 때까지 잡기를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를 통해 그가 어릴 때부터 비범했을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언행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석용은 8세에 비로소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한 번 읽으면 대부분 암송할 정도로 영특하였다. 그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열심히 공부하여 뛰어난 기량과 문장을 자랑하였다. 한편, 1894년 봄 고부(古阜)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일대를 휩쓸었다. 동학농민군을 이끄는 김개남은 전라좌도의 중심지 남원을 점령한 다음 여세를 몰아 그의 향리인 임실의 삼봉마을까지 쳐들어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민군을 두려워하여 피난했으나, 그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 ‘소요를 일으킬 뿐 ‘동병(動兵)’, 즉 군사 행동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평하였다. 그해 겨울 그는 부친의 지시로 겸재(謙齋) 김관술(金觀述)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였다. 바로 앞서 그는 스승인 김관술의 딸인 부녕 김씨(扶寧金氏)와 혼인하였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더욱 어수선한 소용돌이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음력 8월에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져서 일본이 삭발을 강요한다고 전해졌다. 이에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서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불공대천의 원수라고 비분강개하였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겸재가 측은한 마음만으로는 군부의 위급함을 구할 수 없으므로 학문 연마에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말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경향 각지를 순회하며 고명한 학자들을 만나 학문과 시세를 논하였는데, 특히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연재 송병선(宋秉璿)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01년 면암이 그에게 현재 가장 큰 의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벽파개화(劈破開化)’ 네 글자라고 답하였다. 또한 1902년 연재를 만나 창의(倡義)와 사상(私喪) 중에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할 때는 창의가 우선이라는 연재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

이로써 그는 의병을 일으킬 이론적 근거를 정립한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연재는 그에게 정재(靜齋)라는 호를 지어줌으로써 그를 제자처럼 인식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높은 학문과 식견을 가진 거유(巨儒)들과의 담론을 통해 충의를 우선시하는 출처관(出處觀)과 시국관을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호남창의동맹비
호남창의동맹비

마이산에 울려 퍼진 의병의 함성

기삼연(奇參衍, 1851 ~ 1908)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전라남도 후기의병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면 전라북도에서의 그러한 역할은 이석용이 담당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1906년 봄부터 의병 봉기가 본격화되었는데,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태인 의병이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당시 태인 의병에 가담하려던 이석용은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태인 의병이 약 열흘만에 해산하여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한 이른바 12의사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설욕할 결심을 굳혔다.

그리하여 1906년 가을부터 1년 동안 그는 거사 준비에 동분서주했고, 1907년 8월 하순 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부친은 그에게 “네가 본시 큰 뜻이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오늘 어찌 억지로 말리겠느냐. 마땅히 모든 것을 조심해서 조상에게 욕이 되지 않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거사로 가족들이 일본 군경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우려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피신시키고, 가산을 정리해서 만일에 대비하였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임실군 상이암(上耳菴)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무기를 조달하는 한편, 사방에 격문을 전하여 의병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무기를 수습하여 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침내 1907년 음력 9월 12일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석용은 의진의 명칭을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라 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용암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용암

그는 마이산 용암(龍巖) 위에 단을 설치하여 거의를 알리는 제사를 주관하며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불렀다. 격중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을바람 소슬하니

영웅이 때를 만남이라

장사가 없을 소냐

구름같이 모여든다.

어화 우리 장사들아

격중가를 불러 보세

한양성중 바라보니

원수놈이 왜놈이요

원수놈이 간신이라

삼천리 우리 강산

오백년 우리 종사 어찌할까

아마도 의병을 일으켜서

왜놈을 쫓아내고

간신을 타살하여

우리 임금 봉안하고

우리 백성 보전하여

삼각산이 숫돌 되고

한강수 띠 되도록

즐기고 놀아보세

우리 대한 만만세

- [대한의장 호남창의록(大韓義將 湖南倡義錄)] 권 3, <창의일기>, 84쪽.

이 노래는 의병을 규합하고 격분시키기 위한 국한문 혼용체의 가사이다. 당시 마이산 용암에는 1천여 명이 운집했다고 하는데, 다음의 기록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음 9월) 12일 경자. 군중을 수대로 거느리고 마이산 남쪽 기슭 용암 위에 올라 나무를 베어 단을 만들고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질서가 정연하여 진용이 엄하고 씩씩했다. 사방에서 장정을 보내와 봉우리마다 파수를 보는데, 집결한 사람이 1천여 명이었다. 중군장 김운서(金雲瑞)가 총포를 수집해 왔으니 그 정의(情誼)가 감심(感心)할 만하다. 사람들 말이, ‘왜병이 종일 엿보기만 하고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 <정재 이석용 창의일록>, [독립운동사자료집] 2, 516쪽.

이들은 창의동맹단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주위 산봉우리마다 파수를 세우고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는데, 인근의 주민들과 장정 등 1천여 명이 집결하여 성세를 이루자 일본군조차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날 이석용은 ‘우리의 동맹 일체는 국가와 군부(君父)의 만세(萬歲)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이며, 충성은 공(公)이고 효도는 사(私)이니 만약 두 마음을 품으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 맹세하였다. 이로써 이석용이 이끄는 호남창의소(창의동맹단)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이다.

고난의 항일 투쟁

이석용은 의병 조직을 결성한 지 하루만인 음력 9월 13일 진안읍 공격에 나섰다. 당시의 상황은 아래의 인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진안읍을 도륙하기 위해 우화정(羽化亭)에 진을 치고 총을 우레와 같이 터뜨리니 왜적이 방금 밥을 먹다가 문득 놀라 몸을 피해 산으로 달아나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외치며 쫓아가서 격전을 벌여 굴구원차랑(堀口源次郞)이 총에 맞아 팔이 부러진 채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복장, 양총, 일본 옥편, 이등(伊藤)이 지급한 직첩, 돈, 지물(紙物) 등을 노획하였는데 거의 20여 짐이나 되었다. 무거워서 옮겨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절반이나 불태웠다. 왜가 고을 원님을 쫓아낸 후 1년 동안 명령을 내린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가죽 끈이 수천 건이나 되었다. 나는 읍민들을 불러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원수들이 장차 이것으로 당신의 부모와 처자를 묶어 갈 것이다’ 하니, 군중들이 모두 놀라 다투어 불에 넣었다. 또 우편취급소를 부수고 통역의 집에 있는 일본 상품을 불사르고, 전선 100여 발을 절단하였다. 일진회를 불러 타일러 스스로 그 깃발을 없애게 하였다.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양민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털끝 만한 물건도 침노치 못하게 했다. 그리고 격문을 만들어 사방에 전달하니 듣고서 감동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정재 이석용 창의일록>, 516-517쪽.

첫 번째 출진하여 진안읍 공격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자 이석용 의진의 명성이 전라북도 지방에 곧바로 퍼졌다. 이들이 용담의 심원사(深源寺)를 거쳐 숭암사(崇巖寺)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인근에서 활동 중인 김동신(金東臣) 의병부대가 합진(合陣)을 요청해왔다. 이에 두 의진은 용담 대벌평(大筏坪)에서 만나 합진을 논의하였으나 의진의 군사 지휘권 문제로 갈등을 일으켰다. 이석용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유격 전술로 대응하자고 주장한 반면, 김동신은 대규모의 의병 부대로 운용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결국 합진 여부를 놓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이석용 의진은 크게 패하였다. 당시 등 선봉장 박만화(朴萬華)가 전사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석용 자신도 겨우 목숨을 건졌다.

결국 두 의진은 결별하게 되었으며, 이석용은 잔여 병력을 수습하며 함양과 운봉, 인월 등 지리산 자락을 전전하였다. 당시 이석용 의진은 겨우 군사 20여 명과 총기 10여 정, 창 4자루가 전부였다. 이석용 의진은 좀처럼 초창기의 세를 회복하지 못한 채 지리산과 같은 깊은 산중의 사찰과 제각에서 주둔하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장수는 수저 없이 밥을 먹고 군사는 겹옷 아닌 홑옷을 입었네”라고 표현하였다.

전라북도 임실군의 소충사(昭忠祠)
전라북도 임실군의 소충사(昭忠祠)

1907년 음력 11월 중순 그는 다시 의병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의진을 재정비하였다. 이후 그는 투쟁 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전투 능력이 있는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구득 및 성능 향상에 노력하였다. 아마도 이무렵 이석용이 발표한 <의진약속(義陣約束)> 14개 조 가운데 2개 항이 무기의 성능 개선과 연관된 점만 보더라도 그가 전투력 향상에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즉, 그는 궁장(弓匠), 공장(工匠), 총장(銃匠) 등 한 가지 기술이나 능력을 가진 자를 고루 선발하여 활용할 것과 우리의 무기는 낡고 위력이 약하니 왜인들의 무기를 빼앗거나 개량하여 사용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성능을 향상시킨 화승총을 개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석용은 의진의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의진약속>과 <의령10조(義令十條), 1908년 음력 정월 12일>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의진약속>에서는 일본 세력 구축, 일본 상품 배격, 인물 본위 모병, 무기 제조 기술자 영입, 푸른색 군복 착용, 간략한 군례(軍禮),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세력 처단, 엄격한 군율 적용, 민폐 근절 등을 내세웠다. <의령10조>에서는 근왕사(勤王事), 정명분(正名分), 안민심(安民心), 족군용(足軍用), 출기계(出器械), 정공상(定功賞) 등을 내걸었다. 특히, 그는 일본 군경을 죽이거나 체포한 의병에게는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강력한 의병 부대를 만들기 위한 그의 의지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석용은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재개하였다. 이들은 친일 활동을 일삼는 일진회원을 처단했으며, 공전영수원 등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나 세무서 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의병의 동향을 보고하는 자위단 활동을 금지시키고, 가짜 의병 및 탐학을 일삼는 관리 그리고 의병 배반자들도 징치(懲治)의 대상으로 삼았다.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은 부호가의 자발적인 협조를 통해 해결하거나 일본 군경으로부터 빼앗은 노획품, 그리고 면장이나 공전영수원 등이 거두어들인 세금을 빼앗아 충당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납세 거부 투쟁을 병행하였다. 특히 이석용은 자신들을 후원한 내역을 기록한 <불망록(弗忘錄)>을 남기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자료는 1908년 음력 9월부터 1913년 음력 7월까지 후원 받은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후원자의 이름과 거주지, 금액, 물품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석용 의진의 의병 투쟁은 1909년에 들면서 더욱 어려움에 처해졌다. 항전이 길어짐에 따라 의병의 전력이 크게 약화된 데다 일제 군경의 탄압이 갈수록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귀순을 권유하며 회유하는 한편, 이들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토벌대를 집중적으로 편성하여 압박을 가했다. 심지어 일본 군경은 이석용의 누이를 불법으로 구금·협박하며 이석용의 거처를 파악하려 하였다.

일제의 압박이 갈수록 커지자,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은 1908년 음력 12월 하순 순창의 모처에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일제는 수비대와 헌병대, 경찰뿐만 아니라 일진회와 자위단 등 친일 단체까지 동원하여 이석용 등을 체포하기 위해 수시로 진압 작전을 전개하거나, 변장대 및 밀정 등을 투입하여 그를 추적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이석용 의진은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909년 봄 이석용 의진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대개 우리 의병들은 위에서 권장하는 상이 없고 밖으로는 조그만 지원도 전혀 없는 데다, 훈련과 병기가 불리하여 쇠약하기 그지없고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군사일 따름이다. 더욱이 혈전 3년간 적을 격파하여 천하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그런데 호남의 모든 땅에 풍운이 크게 일어나 말발굽 소리와 전장터에 흘린 피가 넘쳐날 정도였다. 해와 달은 빛이 없고 귀신의 통곡 소리에도 수심이 어렸다. 나부끼는 깃발은 갈가리 찢기고 보잘 것 없는 무기조차 부러져서 장사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선생(이석용; 필자주)은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고하고 신의 힘이 다했으니 다음에 재기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의병을 해산하고 산간에 숨었는데, 이때가 1909년 음력 3월이었다.

- <행장>, 앞의 책, 63쪽.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석용은 3년에 걸친 의병 활동을 접고 후일을 기약하며 눈물을 머금고 의병을 해산한 후 자신도 잠복하였다. 그때가 1909년 음력 3월이었다.

불굴의 와신상담과 순국

소충사 전경
소충사 전경
28 의사들의 합동묘소
28 의사들의 합동묘소

1910년 8월, 나라를 잃은 처지였지만 그는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같은 해 음력 11월, 이석용은 전투 중 사망한 의병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거나 애도하는 글을 지어 추모하는 활동을 전개하며 결의를 다졌다. 그가 의병 장졸들을 의장 – 의사 – 의졸 – 의동- 의승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음 이채롭다. 아마도 신분과 의진 상의 직책, 연령 등을 고려하여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최덕일이 어떻게 순국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908년 음력 3월 포군장 최덕일은 임실 대운리(岱雲里) 운현(雲峴)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할복 자결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석용 의진 또한 16명이나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석용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한번도 어려운데 두 번을 찌르다니

보배로운 핏자국 붉다 못해 파랗구려

그대의 대의는 천상의 저 별과 같이 드높으니

그대 이름 어찌 남녘 고을에만 가득하랴

- <최선봉덕일만(崔先鋒德逸挽)>, [정재선생문집] 권 1, 8쪽

의령단 설치 운동을 통해 점차 무력감에서 벗어난 그는 1911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1912년 겨울 조국의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의 항일 지사들과 연계한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른바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이 그것이다. 이 비밀결사는 명단만 소개되어 있을 뿐이어서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아마도 이석용은 밀맹단을 중심으로 을사5적과 정미7적의 처단,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의 방화, 그리고 중국 망명을 추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군자금 후원을 약속했던 친구의 배반으로 그는 한인 순사에 의해 1913년 음력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의 판결문
선생의 판결문

한편, 그는 방화상해(放火傷害)·모살(謀殺)·강도 및 강도상인(强盜及强盜傷人)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매우 당당한 자세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에 대해 일본인 고등법원 판사는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대한의 지사로서 위로는 황실의 일을 애통하고, 광무 11년 정미 8월에 의병을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일으켜 다음해 8월까지 전투에 종사하였으나 횡폭을 금하고 부호를 타일러서 추호도 범한 바가 없었으며, 무신년 9월 이후 기유년 3월에 이르러 진퇴할 길이 없어 부득이 무리를 해산하고 몸을 깊은 산중에 감추고 우연히 고향 땅으로 왔을 때에 체포된 몸이 되어 지금 살인, 방화, 강도죄의 악명이 씌어져서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은 원통한 일이다.

- <이석용 고등법원 판결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933쪽.

위의 내용을 보면 일제의 고등법원 판사조차 그를 매우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판결문에는 이석용의 11가지 범죄 사실이 적시되어 있는데, 일본 군경과 전투한 내용은 전혀 없이 친일파의 처단과 그 가옥의 방화, 군자금 모금 등이 집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는 일제가 그를 의병장이 아닌 파렴치한 잡범으로 호도한 저의가 반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의병장 이석용
의병장 이석용

이석용에 대한 재판은 1914년 2월 5일 시작하여 같은 달 7일 1심 사형선고가 있었다. 같은 해 음력 2월 그는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복심법원 재판을 받아 3월 6일 원심대로 기각되었으며, 서울의 고등법원 역시 4월 16일자로 상고를 기각하였다.

그는 크게 10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그 중에 중요한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4서3경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많이 읽었다는 것, 빈한한 선비이므로 재산이 없다는 것, 일본인을 배척하고 한국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 호남창의대장으로서 약 300명을 지휘했다는 것, 의병 활동에 대한 사실 여부, [창의록]과 [불망록] 저술의 목적 등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과 5역7적을 죽이지 못한 점과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를 불사르지 못한 점이 유감이라고 최후진술을 하였다. 재판장이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되겠냐고 질문하자, 그는 “차라리 대한의 닭이나 개가 될지언정 너희 원수의 나라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고 당당히 답변하였다.

사형이 확정된 후 이석용은 15세의 아들과 최후 면회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아들 부부와 2명의 누이 앞으로 쓴 최후 유서를 아들에게 전달하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무 슬퍼하지 말지어다. (중략) 밭을 가는 여가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여 가문의 명성을 이음이 네 아비의 소원”이라 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원영은 14세에 남원 출신의 의병장 고광수(高光秀)의 딸과 혼인한 10대 소년이었다.

[창의록]과 [불망록]을 남긴 이유에 대해서는 [창의록]은 자신의 충분(忠憤)을 담아 일본에 보내려는 것이었고, [불망록]은 거의 이후 후원을 받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 보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1914년 4월 28일(음 4. 4) 교수형으로 순국했으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참고문헌

ㆍ[大韓義將 湖南倡義錄], 1961

ㆍ[靜齋先生文集], 1961.

ㆍ宋相燾, [騎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 1971.

ㆍ趙熙濟, [念齋野錄], 1950 ; 1990

ㆍ[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李錫庸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ㆍ[한말의병전쟁자료집--暴徒檄文], 선인, 2000.

ㆍ[진중일지] 2-3, 토지주택박물관, 2010.

ㆍ[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ㆍ崔根茂, <義兵大將 李錫庸에 관한 연구--1907-1908 兩年間의 義兵抗爭을 中心으로>, [全州敎大 論文集] 21, 1985.

ㆍ최근무, <李錫庸의 思想에 關한 硏究>, 위의 책 22, 1986.

ㆍ윤병석, [한말 의병장 열전], 독립기념관, 1991.

ㆍ[전북인물지] 상, 전북애향운동본부, 1983.

ㆍ[전북의병사] 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2.

ㆍ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ㆍ윤선자, <임실지역과 한말 항일의병>, [역사학연구] 30, 2007.

ㆍ변주승, <염재 조희제와 [염재야록]>, [국학연구] 15, 2009.

ㆍ홍영기,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ㆍ[만 번 죽어도 변치 않는 마음], 순천대 박물관, 2009.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와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이달의 독립운동가 목록 > 이석용(관리번호:4760)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
이전달 다음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