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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도현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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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김도현 , 1852 ~1914 , 독립장 (1962)

1. 전기의병을 일으키다

(1) 의병 봉기의 길을 찾다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이명 도현(燾鉉))은 한말 의병전쟁에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852년 경북 영양군 청초면 소청리(지금의 청기면 상청리)에서 태어났다.

김도현이 의병전쟁에 내디딘 첫 걸음은 1896년 1월(양)에서 비롯하였다. 본래 한말의 의병전쟁은 한 해 앞서 1894년 갑오년에 안동에서 처음 일어났지만,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의병전쟁이 일어난 계기는 일본군과 낭인배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음1895.8.20)과 상투를 강제로 자르는 단발령(음1895.11.15, 이틀 뒤 1896년부터 양력 사용, 1월 1일)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영양이 포함된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유림들이 사태를 논의하고 의병을 일으키자는 격문과 통문을 돌리면서 의견을 모아갔다.

명성황후 시해도 큰 충격이지만, 무엇보다 단발령은 모두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영양지역에도 단발령을 시행한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유생들은 술렁거렸고, 안동부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나섰다는 소식도 알려졌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영양에서도 의병을 조직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니, 여기에 앞장선 인물이 바로 김도현이었다.

그는 사촌동생 김한현(金漢鉉)으로부터 급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영양에서 백성들에게 단발을 강요한다는 것과 안동부에서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나섰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이에 김도현도 의병을 일으키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김도현은 1월 23일(음12.9) 영양읍에서 통문을 돌리고, 이튿날 영양지역의 유력한 유생들과 의병 일으킬 일을 논의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영양 유림은 안동과 예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거사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김도현은 조영기와 그 임무를 맡아 안동으로 갔다.

두 사람은 안동과 예안을 들렀다. 먼저 안동부성 안에 차려진 의병부대인 안동의진(안동의병부대)과 예안읍내에 터를 잡은 선성의진(예안의병부대)을 둘러보았다. 그때 예안군은 안동부와는 다른 행정조직이었고, 의병부대도 따로 조직되었다. 이를 돌아본 뒤 김도현은 영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튿날 열릴 대향회(大鄕會)에서 진영을 설치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날 김도현은 안동의진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동을 탈출했던 안동부 관찰사 김석중이 관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안동부성을 되찾으려고 공격해 온 것인데, 이를 막던 안동의병이 져서 물러난 것이다.

이 소식을 듣던 날은 마침 종조부의 제삿날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격분하여 통문을 돌리고 의병을 조직하고자 나섰다. 그러나 부친의 만류와 이웃마을에 머물던 안동 내앞마을 종손인 김병식(金秉植)의 말을 듣고 일단 중지하였다. 「벽산선생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에 따르면 “김병식을 만나 말 한 마디를 듣고 깨달아 돌아왔다”고 하는데, 아직은 영양 유림들의 자세가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2) 의병을 일으키다

김도현이 거병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던 1896년 2월 13일(음1.1), 그는 안동의진의 소모장 류시연(柳時淵)으로부터 새로운 권유를 받았다. 소모장이란 의병부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사람과 무기, 곡식, 말과 이동수단 등 여러 가지 물자를 모집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주변 지역을 돌면서 안동의진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거두어 공급하던 류시연이 김도현에게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보라고 권한 것이다. 청량산은 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오래된 성곽도 갖추고 있는 곳이니 알맞은 제안이라 여길 만했다. 그래서 2월 16일(음1.4) 아우와 사촌동생, 집안사람 등 19명을 거느리고 청량산으로 갔다. 이것이 그가 의병전쟁에 나서는 본격적인 걸음이었다. 그가 청량산에 도착하던 하루 앞서 마침 예안의 제2차 선성의진이 청량산에서 조직되고 있었다.

선성의진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조직되었다. 그 가운데 김도현이 청량산에 도착한 때 조직된 것은 제2차 선성의진이었다. 이보다 앞서 처음 그가 예안을 들렀을 때는 1차 의진이 조직된 시기였다. 1차 선성의진은 1896년 1월 25일(음1895.12.11) 대장 이만도(李晩燾)와 부장 이중린(李中麟)이 앞장서서 조직하였지만, 겨우 8일 만에 해산하고 말았다. 안동의진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탈출했던 관찰사 김석중이 경군·일본군과 함께 안동부를 공격하는 바람에 안동의진이 안동부에서 밀려나자, 이에 선성의진마저 영향을 받아 해산한 것이다. 이에 부장이던 이중린이 청량산에서 다시 조직을 추슬러 2월 16일(음1.4) 일어난 것이 제2차 선성의진이었다. 바로 여기에 김도현이 합류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원인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는데, 그 뒤의 흐름은 봉화와 영주 일대를 돌면서 사람과 물자를 확보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렇다면 청량산에서 조직된 의병을 염두에 두고서 세력을 키운 뒤에 다시 선성의진과 합세하거나 공동작전을 펼치는 데 목표를 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1896년 2월 18일(음1.6) 그는 진용을 편성하고, 봉화로 가서 군수를 만나 무기를 요구한 끝에 총과 탄환을 받았다. 그리고서 그는 봉화 내성(乃城)에 이어, 영주를 거쳐 예안으로 갔다. 이는 의병봉기의 사실을 알리면서 무기와 사람을 모으는 길이기도 했다. 그 길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고, 그를 따라나서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옮겨 다닌 열흘도 채 안 되는 날 동안 병력은 수백 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다른 지역의 의병부대와 합치지는 못했지만, 여러 지역을 도는 동안 병력과 물자는 갖추어진 것이다.

그가 거느린 의병부대의 모습은 2월 25일(음1.13) 예안을 출발하여 안동부로 들어선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가 총포로 무장한 수백 명을 이끌고 안동에 도착하여, 이틀 뒤인 2월 27일(음1.15) 영호루 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진법을 훈련한 기록이 그것이다.

2월 29일(음1.17) 김도현은 병력을 이끌고 영양으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영양에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승기를 창의장으로 추대하고 조병기·조영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일월면 주곡(주실마을)의 조승기가 창의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다만 이 의병은 본격적인 전투에 나서기보다는 영양에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선에 머물렀던 ‘시위의병’의 성격이 짙었다. 김도현은 자신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영양의진을 합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논의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진보와 청송 등 주변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의병부대와 통합을 시도하였지만 이마저도 성과가 없었다. 전투력을 기르려면 의병부대를 더 키워야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 호응하는 것이 신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부대와 존재를 다른 의병부대에 합류시키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예안의병의 중군을 맡게 된 일이다. 앞에서도 한 차례 말한 것처럼 예안의 의병부대는 선성의진, 또는 선성진이라 불렸다. 예안의 옛 이름이 선성현이었기 때문이다.

3) 2차 선성의진 중군을 맡아 태봉전투를 치르다

1896년 3월, ‘태봉전투’라는 큰 규모의 전투가 준비되고 있었다. 태봉은 그때 함창군 소속 태봉리이니, 요즘의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가 그곳이다. 일본군이 전신선을 장악하고, 곳곳에 병참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동학농민군을 짓밟은 뒤에는 더욱 강한 병참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병참선이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북상하다가 낙동-태봉-안보-충주를 거쳐 남한강을 따라 서울로 이어져 있었다. 이에 따라 경북 북부지역에는 낙동과 태봉, 안보(수안보 옆)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김도현은 영양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다니며 의병에 필요한 자원을 모아 나가고 있었는데, 예안의 제2차 선성의진으로부터 중군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본래 청량산에서 일어난 이 의병부대를 청량의영(淸凉義營)이라고도 부르는데, 광산 김씨 가문의 김석교가 중군을 맡고 있었다. 그가 3월 20일(음2.7) 포군 50명을 이끌고 안동 풍산으로 가서 안동·풍기·순흥·영천(주)·봉화·호좌의진과 더불어 예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중군 김석교가 갑자기 호좌의진으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생겼다. 제천에서 남하해온 호좌의진이 그를 초빙한 것이다. 이에 그 자리에 알맞은 인물로 추천된 사람이 바로 김도현이었다.

3월 26일(음2.13) 김도현은 중군이 되고, 선봉장 이인화, 전방장 이중언, 그리고 군사 300명을 이끌고 예안을 떠나 산양으로 향했다. 이날 의병 연합부대는 문경 산양에 집결하였다. 그곳에서 7개 의병부대 대표들이 모여 회맹 의식을 가졌다. 백마를 잡아 피를 마시거나 입술에 바르며 동맹을 서약하고 승리를 기원하였다. 이들은 ‘역적의 무리가 되지 말 것, 중화제도를 바꾸지 말 것, 적을 보면 진격할 것’ 등 다섯 가지 약속을 맹약문에 담아 선언하였다. 이어서 예천군수 류인형이 의병부대를 진압하러 온 관군 편을 들었다는 죄목을 들어 처형하여 의병들의 기세를 드높였다.

[선성의진 간부]

대 장 : 이중린 중군장 : 김도현

선봉장 : 이인화 전방장 : 이중언

참 모 : 이빈호·이중엽 종 사 : 이장규

김도현은 이 무렵부터 선성의진의 중군장으로서 전투의 맨 앞으로 나섰다. 연합의진은 길을 떠나 각각 위치를 정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예천의진은 벌현(筏峴)으로 가서 진을 치고, 안동의진은 상주 덕통역(德通驛)으로 가서 부대를 머물렀으며, 호좌의진은 함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김도현이 이끌던 선성의진은 영천(주)·순흥의진과 함께 문경시 영순면 포내리에 머물렀다.

이튿날인 3월 29일(음2.16) 아침 일찍부터 태봉공격이 펼쳐졌다. 맨 앞에 김도현이 이끄는 선성의진이 나서고, 풍기·순흥·영천(주)의진이 뒤를 따랐다. 안동의진이 먼저 왼쪽 산 위로 올라가 일본군 진지를 향해 천보총을 쏘고 일본군 1명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 10여 명이 백사장으로 나와 총을 쏘는 바람에 의병들은 잠깐 동안 7~8명이 전사하고 20명 넘게 부상을 입었다. 김도현은 선성의진을 제방까지 달려가 거기에 몸을 숨기고 공격하였다. 작은 제방을 사이에 두고 사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의병 연합부대의 진군과 일본군과의 전투, 한 병사의 부상에 따른 의병들의 동요, 그런 가운데서도 김도현의 동생 동현이 관군을 5명이나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태봉전투에서 7읍 연합의병부대는 처음 경험한 것이라 보기 힘들 만큼 격정적인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경험이 없고 무기도 열악하며 조직력도 부족했다. 넘치는 의기만으로는 전투를 이길 수 없어서 급하게 뒤로 밀려났다.

급하게 빠져나와보니 김도현을 따르던 인물은 ‘친졸’ 15~16명뿐이었다. 친졸이란 자신이 친히 돌보는 형제와 가족, 하인 등이었다. 그런데 산양에 도착할 무렵에는 남은 병사가 3~4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적었으니, 상황이 얼마나 급했던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도현은 용궁으로 피했다가 3월 31일(음2.18) 예안으로 돌아왔다.

김도현은 예안에 도착하자마자 중군직을 사퇴하고자 했다. 그러나 4월 1일(음2.19) 안동의진에서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군사 5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가 안동부로 들어서기 전에 오천(외내) 후조당에서 밤을 보낼 때 안동부가 방화되어 불타는 바람에 하늘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았다. 일본군이 안동의병을 추적하다가 안동 서쪽 입구인 송현을 거쳐 안기동에 도착하여 불을 지르는 바람에 안동부에서 1천 호 넘게 불타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바로 그 불길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북쪽 멀리서 김도현이 바라본 것이다.

김도현은 안동으로 가던 군대를 예안으로 되돌렸다. 곧 밀어닥칠 일본군과 관군을 막아내기 위해 선성산에 성을 고쳐 쌓았다. 그런데 태봉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뒤로 선성의진 내부에서 갈등이 이어지자, 그는 사면장을 세 번이나 거듭 올렸고, 마침내 사면이 되자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4) 강릉의진과 연합작전을 펼치다

김도현이 영양 본집으로 돌아온 뒤 새로운 투쟁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의진에서 소모사 이호성을 보내 그를 초청하였다. 이에 김도현은 의병 60여 명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향했다. 민용호는 강원도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9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를 마련하고 활발하게 전투를 펼치다가 원산으로 진격하다가 실패한 뒤로는 강릉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병력을 모으기 위해 곳곳으로 사람과 격문을 보냈다. 여기에 김도현이 자리를 떨치고 나선 것이다.

김도현은 평해·울진·삼척을 거쳐 6월(음4월 하순) 강릉에 도착하였다. 민용호는 김도현을 선봉장으로 임명하였고, 군사들에게는 당포(唐布)를 주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였다. 바로 이어서 김도현은 서울에서 온 관군과 대공산성에서 전투를 펼쳤다. 그러나 화력이 우세한 관군에 밀릴 수밖에 없어 구산역(九山驛)으로 밀려났고, 아우 김동현(金東鉉)을 비롯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도현은 진영을 다시 정비하고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보현산성(普賢山城)에서 전투를 벌였고, 삼척으로 이동한 뒤 다시 5월 31일(음4.19) 대전투를 벌였다. 이때 강릉의진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대 장 : 민용호 선봉장 : 김도현

수성장 : 민동식 유진장 : 김헌경

중 군 : 최중봉·강우서·이영찬·전치운·신무섭

삼척전투에서 선봉장 김도현은 수성장 민동식과 함께 성 안에 매복하고, 유진장 김헌경은 죽서루(竹西樓) 동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민용호는 최중봉을 비롯한 주역들과 함께 삼척 뒤편의 삼봉산(三峰山) 위에 구덩이를 파서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관군을 기다렸다. 새벽부터 시작된 관군의 공격을 맞받아치면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화력이 부족하던 의병은 끝내 오십천 강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의병이든 관군이든 모두 병력 손실이 컸다. 그래서 김도현도 민용호와 나뉘어, 겨우 10명 남짓 병력을 거느리고 영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5) 해산기의 유격항전

6월 10일 무렵 김도현은 영양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삼척에서 흩어져 돌아온 의병을 모아보니 10명을 겨우 넘길 정도였으니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고향마을 뒤편에 있는 검각산성에 본진을 두고 다시 의병을 모으려고 통문을 돌렸다. 그리고 동생 동현을 청송 덕천에 보내 거병을 촉구하고 스스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의병을 모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비보가 날아들었다. 6월 16일(음5.6) 관군이 소청에 진입했다는 급보를 들은 것이다. 그는 소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본진은 관군에 의해 무너진 뒤였다. 이에 김도현은 검각산성의 책보(柵堡)를 수리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서 주변 지역을 돌면서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는 사이에 6월 22일(음5.12) 입암전투와 소청전투를 펼쳤지만, 패하고 말았다. 무기가 시원찮은 형편이라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입암전투가 펼쳐지던 그 날 그의 지휘 아래 움직이던 정성첨(鄭聖瞻)을 비롯한 30명 정도 의병이 이웃 사부고개에서 일본군에 맞서다가 크게 패하는 일이 벌어졌다.

7월 13일(음6.3) 김도현은 영해읍으로 나아갔다. 이때 김하락 의진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일어나 남한산성에서 활동했던 김하락이 의진을 이끌고 남하한 뒤에 의성과 경주를 거치면서 전투를 거듭 펼치다가 마침내 7월 2일 영덕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김하락 의진은 신운석(申運錫)이 지휘하던 영덕의진과 힘을 합쳐 7월 13~14일에 걸쳐 영덕읍내 오십천에 있던 남천쑤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펼친 것이다. 이 전투에서 김하락은 탄환 2발을 맞아 중상을 입자, 오십천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그 시신은 오십천이 동해로 흘러드는 강구에서 수습되었다.

김도현은 남천쑤전투 직후 발길을 돌려 영양으로 돌아섰다. 김도현은 안동의진과 김하락 의진의 잔여 병력과 힘을 합쳐 영양에 주둔하던 관군을 공격하려다가 의견이 맞지 않자 청송 덕천으로 향했다가, 7월 20일 무렵에는 청송을 한 바퀴 돌아 영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한 달 동안 김도현은 의병을 이끌고 영양과 청량산, 예안지역을 떠돌면서 일본군과 관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또 맞섰다. 더러는 이웃 의병부대와 연합할 길을 찾기도 했지만, 9월 중순을 넘어서자 대부분의 의병부대가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대세가 꺾인 것이다. 예안에서 일어난 선성의진은 9월 20일(음8.14) 해산하고, 안동의진도 9월 25일 대장 김도화가 물러나면서 끝을 맺었다.

마침내 김도현 의병부대만 남았다. 전기의병에서 그가 최후까지 버틴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는 군사를 시켜 총 113자루를 숨기고 해산을 준비하면서 영양 곳곳을 돌아다녔다. 10월 초 선유어사(宣諭御使)의 글을 받은 뒤인 10월 11일(음9.5), 그는 마침내 해산을 작정하였다. “여러 진 군사들이 모두 해산했으니 나만 홀로 군사를 유지할 수 없은즉 깊은 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자”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10월 15일(음9.9) 중양절, 그는 따르던 포졸 10여 명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마침내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것이 바로 전기의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 상소투쟁 펼치고 의병격문 띄우다

전기의병의 마지막을 장식한 뒤, 김도현은 고향에서 학문에 힘쓰며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시대적 상황은 그를 조용하게 살도록 놓아두질 않았다. 영양이란 지역 자체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나뉘는 틈 속에 들어 있는지라, 활빈당을 비롯한 영학당이나 화적들이 넘나들고 있었다. 민심이 흐트러지고 사회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경상북도 관찰사 이헌영은 김도현에게 5읍도집강이란 자리를 맡겼다. 영양·청송·진보·영덕·영해 등 다섯 고을의 화적을 토벌해 달라는 것이 그 주문이었다. 실제로 그가 5읍도집강으로서 화적 토벌에 얼마만큼 나섰는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일단 영양에 터를 잡고 사회 안정에 기여했으리라 짐작은 할 수 있겠다.

金道鉉戢盜統首差定帖
金道鉉戢盜統首差定帖
金道鉉彰績帖
金道鉉彰績帖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온 나라 유림들이 들고 일어나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5적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담은 상소를 올리고, 각국 공사관에도 그 뜻을 알리고 나섰다. 김도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서울로 가서 조약이 무효라는 것과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담아 상소를 올리고, 각국 공사관에 「포고서양각국문布告西洋各國文」이라는 포고문을 보냈다.

김도현이 여러 나라 공사관에 보낸 「포고서양각국문」은 만국공법에 맞추어 일제의 전횡을 막는 데 도와 달라는 뜻을 담았다. 일제가 강제로 맺었다는 ‘박제순-하야시 강제합의(을사늑약)’가 무효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만국공법을 엄하게 적용해 달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상소투쟁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온 나라에서 유림들이 광무황제가 머물던 덕수궁으로 몰려들어 상소를 올리고 대성통곡을 거듭했지만, 일제의 간교하고도 집요한 침략정책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서울에서 자정순국을 선택하는 유림들이 나타났다. 김도현도 상소투쟁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자정순국의 길을 선택하려고 했다. 이때 주실마을 조병희가 만류하는 바람에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다. 죽음보다 먼저 다시 한 번 투쟁의 깃발을 올릴 각오를 다지면서 돌아온 길이었다. 그는 도산서원에 들러 의병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거사에 나섰다. 1906년 1월 21일, 그는 5읍도집강으로 활동할 때 함께 움직이던 포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를 근간으로 삼아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틀 뒤인 23일 그는 영양읍내 시장에 방을 붙이고 면마다 통문을 돌려 1월 27일 의병에 함께 참가하라고 촉구하였다. 마침내 그날을 맞아 그는 포군 50~60명을 축으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김도현은 의병을 이끌고 영양군 관아를 찾아갔다. 그는 영양군수 이범철(李範喆)에게 자신이 상소투쟁을 펼치려고 서울을 다녀온 이야기를 끄집어 내면서, 그곳에서 죽으려 했지만 그렇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면서 그 정황을 말했다. 그러면서 김도현은 “지금 도둑신하 무리들이 권력을 희롱하여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병사를 일으켜 분함을 갚고자 하노라”고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자 영양군수 이범철은 설득하여 해산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안동에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바로 이어서 14일자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는 이범철 군수의 요청에 따라 안동에서 진위대와 일본군이 몰려들어 김도현의 가족 6~7명을 묶고 집 부근 동네에서 소 20여 마리와 재물 등을 약탈하였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영양군수 이범철은 김도현이 5읍도집강으로 있을 때 결납전(結納錢)을 거두어 의병의 군비로 쓰고자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려 들면서, 안동진위대를 보내 오히려 약탈한 것이다. 다만 신문에 따라서는 진위대만이 아니라 일본군을 지목한 기록도 있어서 두 병력 모두 동원된 것이라 짐작되기도 한다. ≪황성신문≫(1906.4.12)에는 명주 31필, 소 10마리, 돈 270냥, 안경 2개, 가락지 1개, 붓 10개, 양총 10자루, 조총 20자루 등을 빼앗고, 김도현의 친척인 김서현(金瑞鉉) 등 4명이 두들겨 맞아 생명이 위태롭다고, 관찰서리 겸 대구군수 김정한의 보고를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그러므로 김도현의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고향인 소청동 일대가 안동진위대의 약탈과 폭력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참혹한 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도 붙잡혀 혹독한 날을 보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는 바람에 이범철 군수의 탐학 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났고,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때문에 김도현이 붙잡혀 고생한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金道鉉密勅
金道鉉密勅

마침 광무황제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칙, 곧 비밀 명령을 보내왔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그로서는 다시 의병을 일으킬만한 여유가 없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상황인데다가 관군과 일본군이 그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갈 길을 생각했다. 스스로 거병할 만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키라고 설득하고 요구하는 격문을 지어 보냈다. 이것이 바로 1906년 가을에 삼남지역 각 군에 보낸 「의격고삼남각군문(擬檄告三南各郡文)」이다. 간신과 일본 도적이 나라를 한 순간에 뒤집어엎어 숨통을 조이는 형편임을 말하고, 오로지 의리정신에 바탕을 두고 모두가 적을 타도하는 데 나서자는 것이 격문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는 역신이야말로 일본 도적과 같다고 보고, 농기구라도 들고 도적을 몰아내는 데 참가하자고 주장하였다.

3. 영흥학교 세워 계몽운동 펼치다

그는 다시 갈 길을 가늠해 보았다. 가까운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신돌석 의병을 비롯하여 여러 조직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쉽게 동참하기 어려웠다. 그럴 무렵 안동에서 큰 변화가 나타났다. 퇴계학맥의 본산인 안동에서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신식교육을 펼친다는 혁명적인 새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동 임하면 천전(내앞마을)에서 1907년 문을 연 협동학교(協東學校)였다. 퇴계문화권에서 최초로 문을 연 신식교육기관이자 중등학교였다. 20대 청년유림들이 처음으로 서양의 지리와 역사·사상·과학·수학 등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1909년에 들어서는 계몽운동 조직인 대한협회의 안동지회가 결성되고 공화주의, 정당 훈련 등을 담은 계몽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김도현도 위정척사적인 사고에서 점차 계몽운동으로 나아가는 변화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 결실이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세우고 운영한 것이다.

영흥학교는 1909년 5월말 영양읍내에 설립된 신교육기관이자 계몽운동의 거점이었다. 김도현은 교육회장을 맡아 군수 윤필오의 도움을 받아 기본금을 적립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학습에 힘쓰도록 힘을 기울였다. 그 뒤 이 학교는 같은 해 11월 1일 영양군 객사를 수리하여 교사(校舍)로 사용하였고, 학부의 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이때 김도현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고민도 떠올려 볼 수 있다. 더 이상의 무력 항전은 불가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그가 계몽교육으로 활동방향을 빠르게 돌려 영흥학교를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나선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영흥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친일적인 영양군수 윤필오와 일본군 헌병대장의 후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적인 한계를 고민하지 않았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변절한 것은 아니다. 그가 스승 이만도와의 만남과 그의 최후 선택이 그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준다.

4. 동해 바다를 밟고 들어가 순국하다

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겨레의 저항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의병전쟁은 그 역사의 앞머리를 장식하였고, 계몽운동이 바로 뒤를 따라 나왔다. 이럴 때 유림들이 선택한 길은 이에 대응할 세 가지, 곧 처변삼사(處變三事)로 줄여서 표현되었으니, 거의소청(擧義掃淸)·거지수구(去之守舊)·치명수지(致命遂志, 혹은 ‘致命自靖’)가 그것이다.

첫째 길은 침략 세력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침략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척사론을 지켜 나가던 유림들이 앞서갔고, 점차 군인과 포수·농민들이 뒤를 따라 주역으로 성장했다. 둘째 길은 유교의 도통(道統)을 지키고, 그것을 보존하는 것이다. 본거지를 떠나 산 속이나 섬으로 옮겨, 오로지 도통을 이어가는 데만 목표를 둔다. 계룡산으로 들어가거나 외딴 섬에 터를 잡은 선비들이 그들이다. 셋째 길은 오랑캐가 지배하는 틀, 도덕, 가치체계 속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랑캐의 규범이 강요되는 세계를 인정할 수 없으니, 죽음으로 항쟁하는 길이다.

김도현이 선택한 길은 단연 첫 번째의 ‘거의소청’이었다. 의병을 일으켜 사투를 벌인 것이다. 그러다가 바꾼 노선이 계몽운동이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는 여전히 전통 유림의 성향이 남아 있었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진 직후 스승 이만도(李晩燾)와의 만남에서 그러한 정황이 확인된다.

이만도는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 사람이다. 일찍이 예안에서 선성의진을 조직하여 의병장을 지낸 인물이자, 1905년에는 을사오적을 목 베라고 상소투쟁을 펼쳤을 뿐 아니라, 1910년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정순국의 길을 택한 사람이다. 김도현은 1896년 예안의 선성의진의 중군장으로 활약하면서 이만도와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이만도는 1910년 9월 음식을 끊고 자결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가 자정순국(自靖殉國)을 선택한 명분은 황제와 의리 지키기, 나라와 의리 지키기, 겨레와 의리 지키기였다. 이만도는 단식 기간 동안 찾아온 친구들과는 인생을 담론했고 제자들에게는 경학을 강의하며, 집안 아랫사람들에게는 살아가는 바른 길을 가르쳤다.

김도현도 이 자리에서 살아갈 바른 길과 방법을 뼈저리게 배웠다. 단식을 말리러 갔던 길에서 그가 본 것은 목숨을 건 스승의 저항의지요 바른 길을 택하여 나아가는 곧은 자세였다. 이에 김도현은 스승에게 자신도 순국의 길을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스승은 “자네는 어른이 살아 계시지 않은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도현은 ‘뒷날’ 따라 가겠다고 말씀을 올렸다. 스승이 앞서고 제자는 뒷날 그 뒤를 따르겠다는 다짐이었다. 이만도는 10월 15일 순국하였다. 바로 그날 집안 조카 이중언이 다시 단식을 시작하여 27일 만에 순국하고, 가까운 곳에서 이현섭·이면주·류도발·권용하·김택진 등이 장엄한 대열을 이어갔다.

그 대열을 지켜보는 김도현은 먼저 가신 스승에게 제문을 올리고 때를 기다렸다. 그렇다고 그냥 기다리는 날은 아니었다. 영흥학교를 꾸려가는 일에 매달린 것이다. 그러다가 1914년 음력 7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상을 치른 그는 이제 스승을 따라 갈 날짜를 짚어 보며, 최후의 방법도 고민해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길을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도해순국(蹈海殉國)이 그것이다.

1914년 12월 18일(음11.2) 손자 여래(礪來)에게 남긴 유시에서 노중련(魯仲連)의 ‘도해(蹈海)’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노중련은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높은 절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는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방문했다가 진(秦)의 공격으로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런데 진의 공격에 기가 죽은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이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을 제왕으로 인정하여 타협하려 들자, 그는 “무도(無道)한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나는 동해로 걸어 들어가 죽을 뿐이다.”라면서 반대하였다. 그의 절의와 지혜는 조나라로 하여금 진의 공격에 맞서게 만들었다. 그 뒤로 ‘도해’라는 말은 절의를 말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렇다고 노중련이 도해순국한 것은 아니다.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결의를 말했던 고사의 용어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김도현은 노중련의 절의와 결단을 생각하며, 동해를 자신이 떠날 마지막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 이튿날 김도현은 오랜 친구이자 의병전쟁의 후원자였던 청기면 청기리의 김병식을 찾아가 노중련의 도해 고사를 말하고, 스스로 갈 곳이 동해라고 밝혔다. 동해 바다로 가는 길은 청기면 상청리 집을 나서서 동쪽으로 난 곡령 고개를 넘어 영양읍내로 향하고, 태백산맥을 넘어 영해를 거쳐 바다로 이어진다. 김도현은 그 길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앞서 그는 부친의 빈소에서 곡을 하고, 여덟 살 난 증손자 기팔을 불러 “글을 부지런히 읽어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그는 가파른 곡령을 넘어 영양읍을 들렀다가 동쪽으로 나아갔다. 12월 20일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울령 고개 아랫동네 양구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어느 사이에 기미를 알아챈 손자 여래가 따라 왔고, 뒤를 이어 아들 영헌, 조카 영걸, 팔촌 동생 태현 등도 다다랐다. 김도현은 자신의 길을 간곡히 말리는 자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임을 말한 뒤, 바르고 올곧은 삶을 살도록 당부했다.

21일 일행은 울령에 올라섰다. 멀리 동해를 바라보며, 죽어서 무궁한 우리나라를 세우겠다는 시를 읊었다. 이윽고 발걸음은 창수면 소재지인 신기리에 다다랐다. 고려시대 나옹선사가 출가하면서 소나무 지팡이를 꽂은 것이 반송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그곳, 객점인 반송점(盤松店)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서 22일 새벽에 동포들에게 알리는 유서를 썼다. 그 글이 바로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인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두 나서서 왜노와 싸워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 그가 광복을 맹세하고, 죽어 왜적을 멸망시키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마치 신라의 문무대왕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가 선택한 날이 동짓날(12월 23일, 음11.7)이라는 사실도 밝혔다.

그날 영해를 가로질러 관어대(觀魚臺) 앞바다 대진에 도착했다. 찬 공기가 엄습하는 석양이었다. 바닷가에 우뚝 자리를 잡은 산수암(汕水巖)에 올라 유시를 지어, 장손 여래와 삼종제(8촌 동생) 태현에게 큰 소리로 읽으라고 일렀다.

我生五百末 조선왕조 오백 년 끝자락에 태어나

赤血滿腔腸 붉은 피 온 간장에 엉키었구나

中間十九載 중년의 의병 투쟁 19년에

鬚髮老秋霜 모발만 늙어 서리 끼었는데

國亡淚未已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親歿心更傷 어버이 여의니 마음도 아프구나

萬里欲觀海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七日當復陽 이레 날이 마침 동지로구나

獨立故山碧 홀로 외롭게 서니 옛 산만 푸르고

百計無一方 아무리 헤아려도 방책이 없네

白白千丈水 희고 흰 저 천길 물속이

足吾一身藏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 하여라

그리고 이튿날이 바로 동짓날이니,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을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맞추었다. 새벽 찬 바람을 맞으며 산수암 바위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기다렸다. 시각은 진시(辰時), 겨울날 아침 8시 무렵이다. 차디찬 바람이 몸을 휘감고 발아래 바다는 무겁게 일렁이는 동짓날 동해바다의 이른 아침이었다. 바로 그곳 산수암 바위 위를 떠난 그는 암초를 밟고 미끄러지며 바다와 해를 향해 들어갔다. 그리고서 그는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도해순국(蹈海殉國)’!

4년 앞서 스승 이만도 앞에서 다짐했던 그의 뜻이 이처럼 뒷날 장엄하고도 장엄한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겨레 사랑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올곧은 뜻은 차디찬 바다처럼.

碧山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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