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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동열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89년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서울현충원(위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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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유동열 , 1879 ~1950 , 대통령장 (1989)

1948년 8월 31일, 이 날 미군정의 군사권이 대한민국 정부로 이양되었다. 미군정 시기에 국방부 역할을 하던 곳은 통위부(統衛府)였다. 통위부가 행사하던 군사권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에게 넘겨준 것이다. 당시 통위부장은 유동열(柳東說), 국방부 장관은 이범석(李範奭)이었다. 유동열은 임시정부에서 참모총장으로 군사정책을 총괄하던 인물이었고, 이범석은 임시정부의 국군인 광복군 참모장 출신이었다. 대한민국의 군사권이 임시정부 참모총장의 손을 거쳐 광복군 출신에게 넘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범석에게 군사권을 이양한 유동열, 그는 영원한 군인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와 항일독립운동 시기,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동안 그는 다양한 삶을 살았다. 그의 발자취는 일본·국내·만주·러시아·중국대륙 곳곳에 남겨져 있고, 이들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에 그가 관여하지 않은 것이 드물었다. 그의 삶 자체가 독립운동사 또는 한국근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중에서도 통위부장을 사퇴하던 그날까지 그가 살아왔던 일관된 삶은 군인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군인으로

유동열(1879.3-1950.10, 호 : 春郊)은 평북 박천군 박천읍 매화리에서 유종식(柳宗植)과 모친 최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숙부가 박천 수비대장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무인 집안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19살 때 사촌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다가, 일본에 있는 성성학교(成城學校)에 입학하였다. 성성학교는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예비학교였고, 이를 계기로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1902년 12월 유동열은 일본육군사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교육기간은 1년이었고, 그는 다음 해 11월 이갑 등과 함께 졸업하였다. 제15기생이었다. 졸업 후 동경 근위(近衛)사단에 견습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군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하였다. 근위사단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그는 근위사단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고, 만주 봉황성까지 진군하였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귀국한 그는 대한제국 군인이 되었다. 1904년 8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도대로 보직을 받았다. 이후 1905년 3월 육군 기병 부위(중위)로 진급하였고, 7개월 만인 10월에는 정위(대위)로 진급하였다. 기병대 대장, 군무국 마정과장 등의 보직을 거쳤다. 1909년 군을 떠날 때 그의 계급은 육군 참령(소령)이었다.

대한제국 군대에는 일본육사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11기생 노백린·김희선·임재덕 등을 비롯하여 15기 동기생인 이갑·김응선 등이 복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일의정서·을사늑약 등 일제가 조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현실을 보면서 비밀리에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노백린·이동휘 등 영관급 장교들을 비롯하여, 유동열·이갑 등이 비밀결사로 효충회를 결성한 것이다. 효충회는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이 양위를 강요받게 되자, 이를 저지시키려 하였다. 군대를 동원하는 한편, 친일파 대신 암살을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갑·임재덕 등이 체포되면서 실행되지 못하였다.

유동열은 효충회에 참여하는 한편, 군인으로 여러 구국운동 단체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평안도·황해도 인사들 중심으로 결성된 서우학회에 평의원을 맡기도 하였고, 당시 대표적 구국운동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하였다. 신민회는 안창호의 주도하에 결성된 비밀결사로, 일제에게 침탈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교육과 실업진흥 등을 통한 국민의 실력양성을 추진하던 단체였다. 그는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서북학회에도 관여하였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유동열은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주목과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09년 일본군의 보고문건에 의하면, ‘귀국 후 여러차례 진급하여 육군참령이 되었으나 융희 3년 군직을 사퇴하고 청년교육이란 이름아래 배일사상을 고취한다’고 하였다. 유동열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해외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 단체인 대한흥학회에 참석하여 학생운동을 격려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1909년 6월 부친의 묘소를 참배하고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만주, 러시아, 중국대륙을 넘나들며

중국으로 망명한 것은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민회에서는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 방략과 근거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유동열은 1910년 4월 안창호·신채호·이동휘·이갑 등 신민회 인사들이 중국 청도에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한 청도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에서 두 가지 주장이 대두되었다.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즉각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주장과 무장투쟁은 시기상조로 보고 이를 위한 준비로 우선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주장이었다.

유동열은 무장투쟁론을 지지하였다. 이동휘가 주창한 무장투쟁론은 만주 밀산현에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일본과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자금은 이종호가 출연하기로 하고, 유동열·이갑 등이 군사훈련을, 신채호가 교양교육을, 김지간이 토지경영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이들은 9월초 밀산으로 갔다. 그러나 자금을 출자하기로 한 이종호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유동열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북경으로 가 그곳에 망명해 온 인사들을 대상으로 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는 국내로 향했다. 그러나 국내에 들어와 일제 헌병대에 피체되었다. 두 달 만인 1910년 12월에 석방되었지만, 또다시 피체되어 투옥당하였다. 데라우치(寺內)총독암살미수사건이었다. 1911년 8월 유동열은 안태국·양기탁·이승훈 등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2년여 동안 투옥되었다가 1913년 3월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곧바로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유동열은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그는 1915년 3월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이상설·성낙형 등과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신한혁명당은 독일과의 연계를 추진하는 한편, 고종황제를 당수로 추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유동열은 고종황제와의 연락을 위해 성낙형과 서간도로 이동하였고, 성낙형이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고종을 만나지 못한 채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신한혁명당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유동열은 연해주로 갔다. 대한제국 군대 선배인 이동휘가 1918년 3월 하바로브스크에서 조선인정치망명자대회를 개최하자, 이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에는 이동휘·김립·양기탁·이동녕·홍범도·안정근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인사들과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이 참석하였다. 이동휘가 러시아의 볼세비키당과 같은 정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이동녕 등은 러시아 측으로부터는 후원만을 얻자고 제안하여, 두 개 주장으로 나뉘었다. 유동열은 이동휘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이동휘와 함께 1918년 4월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군사부장 겸 군사학교장을 맡았다.

한인사회당의 군사를 담당한 유동열은 무장부대 편성사업을 추진하였다. 우선 하바로브스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만주지역에 있는 독립군과 한인청년들을 데려다 훈련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 홍범도도 의병부대를 데려오기로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홍범도·이범윤 등과 함께 우스리스크 철도 주변에 있는 교포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여 3백명 가까이 확보하였다. 그리고 전일과 함께 1백여 명을 인솔하고 하바로브스크에서 일본군·백위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30여 명이 전사하고, 하바로브스크는 백위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백위군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점차 연해주지역을 장악하게 되면서, 유동열은 한인사회당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이때 유동열은 북간도지역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되어 활동하였던 것 같다. 1919년 4월 한인사회당은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의 산림속에서 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북간도 혼춘에서 조직된 김규면의 신민단과 통합을 이루었다. 이 과정을 조사 보고한 일제의 정보자료에 유동열이 신민단의 수령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국내외 대표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다.

유동열은 3·1운동 직후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특히 군사관계의 주요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가 그를 참모총장으로 선임한 것이다. 1919년 3월 노령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 4월 11일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4월 23일 국내에서 수립을 선포한 한성임시정부에서 모두 그를 참모총장에 선임하였다.

세 곳 임시정부에서 참모총장으로 선임하였지만, 유동열은 어디에도 취임하지 않았다. 이 당시 그는 별도의 정부를 조직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길림군정사라는 것이 그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일제자료에는 유동열이 독판으로 길림군정사를 주재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길림군정사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길림정부로 불리고 있었다.

1919년 9월 세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통합을 이루어 새로운 임시정부로 출범하였다. 세 임시정부에서는 모두 그를 참모총장으로 선임한 바 있었고, 통합정부를 구성하면서도 그를 참모총장에 선임하였다. 당시 대통령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선출되었다. 유동열은 이동휘와 하바로브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여 활동한 적이 있었다. 이동휘도 국무총리에 취임하였고, 그도 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유동열은 1년 반만에 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갔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다가 사퇴하고 떠나기도 하였고, 러시아의 정세도 볼세비키 세력이 장악하는 상황으로 변해 있었다. 1921년 5월 유동열은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고려군정의회를 설립하였다. 총사령관은 소련 적군 제5군단의 카란다시빌리였고, 유동열은 최고려와 함께 군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유시에 있는 사할린의용대와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이를 거부하였고, 고려군정의회 군대가 이들을 무장해제시켰다. 이 과정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독립군들이 사망하거나 체포되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양립된 고려공산당의 알력으로 빚어진 참극이었다.

上海에 本部를 둔 高麗共産黨首領 柳東說等 上海假政府를 訪問, 가정부를 후원코자협의
上海에 本部를 둔 高麗共産黨首領 柳東說等 上海假政府를 訪問, 가정부를 후원코자협의

유동열은 고려군정의회를 중심으로 독립군 세력들을 통합하고, 이를 기반으로 무장투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이후 그는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겨 독립군을 결집하려고 하였다. 청도회의 때 밀산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던 꿈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길림·밀산·액목현을 돌아다니며 활동하였는데, 일제는 이러한 그의 활동을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선전을 벌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고려공산당을 배경으로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이후 그의 행적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1922년 8월 서간도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이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을 때, 군정위원으로 선임된 사실이 확인된다. 그리고 그해 10월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어, 1924년 4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유동열은 상해에 가지 않고 서간도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혁명당,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

1920년대 중반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 큰 바람이 일어났다. 유일당운동이었다. 국내외 독립운동자들이 대동단결하여 민족의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상해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만주에서도 일어났고, 만주의 대표적 단체인 참의부·정의부·신민부를 통합하자는 소위 3부 통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3부통합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이 운동으로 인해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양대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유동열은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다. 3부 통합운동이 결렬되면서, 1929년 4월 정의부 주도하에 참의부와 신민부의 일부 세력이 통일을 이루어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유동열은 국민부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부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일종의 행정부였고, 그해 12월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당군으로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유동열은 최동오·현익철 등과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한 후 유동열은 상해로 이동하였고, 이후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였다.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면서 조선혁명당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임시정부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최동오와 함께 상해로 왔다. 이때 상해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여러 정당 및 단체들이 통일을 이루자는 취지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유동열은 통일동맹의 취지에 적극 찬동하는 한편, 중국과도 공동전선을 이루고자 중국측 인사들과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고 그 군사부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국무위원으로 선임하였다.

통일동맹에는 모두 5개 정당 및 단체가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이 조직한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이 주도하고 있던 의열단을 비롯하여 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이었다. 이들은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각 단체를 해체하고 통일을 이루어 새로운 단일당을 결성하자는 데 합의를 이루었다. 그리고 1935년 7월 이들 5개 정당 및 단체가 각각 해소선언을 발표하고, 새로운 통일전선체로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다.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를 대체할 독립운동 기구로 결성된 것이었다. 통일과정에서 임시정부 해체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유동열은 김규식·조소앙·최동오·양기탁 등과 이를 사직하고 이에 참가하였다. 독립운동전선에서 일고 있던 통일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유동열은 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와 더불어 군사부장을 겸하였다.

그러나 통일전선체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은 그것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였다. 이념적 차이로 민족주의 계열이 탈당하기도 하였고, 의열단의 당권 장악과 김원봉의 전횡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탈당한 것이다. 두 달여만인 1935년 9월 조소앙·홍진 등이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유동열은 이청천과 함께 당내에서 김원봉 계열과 대립하며 그의 전횡을 막고자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청천·최동오·김학규 등과 탈당하였다. 이들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인사들이었다. 유동열은 1937년 4월 이들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임시정부의 참모총장

軍事委員會 委員 選任
軍事委員會 委員 選任

유동열은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 계기는 중일전쟁이었다. 1937년 7월 중·일 간에 전면적인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에서는 전시체제에 대한 대비와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7월 15일 국무회의에서 유동열·이청천·이복원·현익철·김학규·안공근 등을 위원으로 선임하여 군사위원회를 설치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 운영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군사인재들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동열은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군사위원회에서는 우선 군대를 편성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 골자는 속성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최단 기간 내에 초급 장교 2백명을 양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1개 연대의 군대를 편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예산도 책정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임시정부가 있던 항주를 점령하게 되면서 임정은 피난길에 올랐다. 이후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진강·장사·광주·유주·기강 등지로 피난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이로써 군대편성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임시정부는 1939년 기강에서 행정부서를 정비하면서 참모부를 증설하였다. 군무부는 군사행정을 담당키로 하고, 군사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할 기구로 참모부를 설치한 것이다. 참모부는 내무·외무·군무·법무·재무부와 더불어 정부의 한 부서였다. 그리고 유동열을 참모부장에 선임하였다.

유동열은 임정의 군사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임정의 군사정책은 “일제와 직접적 독립전쟁을 개시하여 광복을 완성한다”는 전제하에, 군사양성과 독립전쟁 수행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를 위한 3개년 계획을 세웠다. 3년 동안 장교 1천 2백명, 기본무장군 10만명, 유격대원 35만명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적 자원은 만주와 노령에서, 재정은 미주동포들을 대상으로 마련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군사정책은 광복군 창설로 실현되었다. 1940년 중경에 정착하면서 임정은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였다. 군사특파단을 서안에 파견하여 일본군 점령지역인 화북지역의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미주교포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 정부에 광복군 창설에 대한 협조와 지원을 교섭하였다. 이러한 준비작업을 거쳐 그해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성립식을 거행,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유동열은 광복군 창설 후 참모총장으로 통수부의 막료가 되었다.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은 일본육사 26기로 그의 후배였다. 임정은 광복군 창설 후 유동열을 참모총장에 임명하였고, 통수부를 설치하였다. 통수부는 임정 주석(김구)과 참모총장(유동열)·군무부장(조성환)·내무부장(조완구)으로 구성되었고,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하는 기구였다. 이로써 유동열은 참모총장이자 통수부의 막료로서 임정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주관하였다.

통위부장으로 국군의 기틀을 마련

光復軍도 不遠 환국, 참모총장 柳東說 장군 談
光復軍도 不遠 환국, 참모총장 柳東說 장군 談

유동열은 일제가 패망한 후 임정 요인들과 함께 1945년 11월 23일 환국하였다. 그는 조선혁명당·민족혁명당·한국독립당·신한민주당 등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치인을 자처하지도 않았다. 귀국성명에서 “정치에 대한 것은 나는 모른다”고 하였고, “나는 군인이다. 정치에는 일체 불간섭이다”라며, 자신은 군인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군인의 길을 걸어갔다. 해방 후 국내에서 광복군을 기반으로 하여 국군을 창설하려는 시도가 여러 방면으로 추진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오광선 등이 중심이 된 유동열은 그 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광복군 본대가 귀국하면, 이를 기반으로 국군을 창설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사설군사단체를 불법화하면서, 이는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였다.

유동열은 미군정이 통위부장을 제의하자 수락하였다. 통위부는 미군정이 설립한 국방사령부의 이름을 바꾼 것으로 국방부와 같은 것이었다. 일부에서 ‘미국의 용병대장’, ‘미국의 앞잡이가 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그는 “내가 들어가 실질적인 광복군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내 인생을 바칠 사업은 이것 뿐이다”라며 1946년 9월 통위부장을 맡았다.

軍政廳統衛部長에 柳東說氏를 任命
軍政廳統衛部長에 柳東說氏를 任命

유동열은 통위부장으로 국방군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가 생각한 병력은 10만명이었다. 독립국가로서 국내치안과 외국에 대한 방어력,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10만명의 국방군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의 조직과 병력을 확대시켜 나갔고, 5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방부 장관 이범석에게 군사권을 넘겨 주었고,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가 각각 대한민국 육군과 해군이 되었다.

유동열은 일본의 성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군인·독립군·광복군을 거쳐 해방 후 통위부장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기초를 마련하기까지 50여 년을 군인으로 살았다. 일평생을 군인으로 살아간 영원한 군인이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그는 그해 10월 18일 평안북도 회천의 어느 농가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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