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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갑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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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

이갑 , 1877 ~1917 , 독립장 (1962)

이갑 선생은 독립운동계의 풍운아로 일컬어진다. 대한제국군 고위직 장교였던 그는 일본식 군대 근대화를 꿈꾸었으나 오히려 조국이 식민지가 되어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했다. 민족 교육기관들을 자비로 설립하고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들을 세우려는 희망을 실천했다.

민씨 가문 세도가의 횡포에 농토 20만평과 부친을 잃고 복수의 일념으로 일본 육사 입학

이갑(李甲, 1877. 6.22 ~ 1917.3.2) 선생은 1877년 6월 22일(음력 5월 12일)에 평안남도 숙천군 서해면 사산리(肅川郡 西海面 蛇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본명은 휘선(彙璿), 호는 추정(秋汀)이다. 이갑은 일본 유학시절 군인을 지망할 당시에 개명한 이름이다.

부친 이응호(李膺灝)의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고향 사산리는 구릉지대로 이루어졌지만 농토가 풍부한 곳으로 그 지방 유지였던 부친은 교육열이 높았고 이갑은 유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갑의 부친은 고루한 유림이었지만 모친은 숙천군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입교해 첫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갑의 형 휘림(彙琳, 이윤옥으로 개명)은 고향에서 교회를 직접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유림적 전통의식과 함께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한 이갑이 상경하여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회의 청년운동에 참석하게 됨은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이갑은 1888년(고종 25) 무자 식년시에 식년진사 3등으로 급제하였다.

이갑의 영민함을 평소 흐뭇해하던 부친은 아들이 11세 때에 1874년생 15세라고 나이를 속여서 응시하도록 하였는데, 이갑은 식년진사에 급제하였다. 어린 나이에 진사에 급제했다고 하는 집안의 경사는 이로 인해 후일 커다란 시련으로 돌아왔다. 민씨 일족으로 세도가였던 민영휘가 평안감사로 부임해왔다. 재직 중에 축재에 열을 올리던 민영휘는 이갑의 부친이 아들의 나이를 속여 과거에 급제했다는 이유를 들어 감영에 끌고 와 악형을 가하고 40경(耕, 1경 5천평, 약 20만평)에 이르는 농토를 빼앗아버렸다. 이갑의 부친은 이 일이 있는 후 고문으로 육신이 병들고 홧병마저 들어 작고하고 말았다.

집안의 몰락과 부친의 죽음으로 이갑은 수년간 집안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복수의 일념으로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랑하였다. 서울로 상경해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자강의식과 함께 정치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그 해 10월에 사비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세이조(成城) 학교에서 입학하여 1901년 12월 4일에 졸업한 후 1902년 4월 13일 일본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후보생으로 군무를 익혔다. 그리고 그 해 12월 1일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15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그의 군문 입문은 군인이 되어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는 일념보다는 군인으로 출세하여 민영휘에게 빼앗긴 재산을 찾고 집안을 일으키고자 하는 결의가 더 강하였다. 1903년 11월 30일에 일본 육사를 졸업해 일본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 견습사관으로 배속되어 복무하고 일본 육사 동기인 유동열 등과 함께 러일전쟁에 종군하여 평양, 만주 등지에서 근대 전투를 경험하게 되면서 이갑은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에 종전한 이갑은 육군보병 참위로 임명되었고 8월 2일에 국내로 돌아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학도대로 보임되었다. 이어 9월 29일에는 육군무관학교의 예비과정인 육군유년학교 학도대로 이속되어 초등 군인교육을 담당하였다.

독립협회 등에 가입하고 일제에 절망감 느꼈으나, 일본을 근대화 모델로 착각하고 훈장도 받아

이 당시만 해도 이갑은 일본은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어줄 훌륭한 모델이며 파트너라고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러일전쟁 직후 점차 강대해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느끼면서 동시에 한국의 주권이 이에 반비례해 간다는 현실에 직면하였고 일본 육사 출신인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다는 위기의식과 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울 원동에 자리한 이갑의 집은 여러 지사들이 시세를 관망하고 구국의 방안을 논의하는 사랑방이 되었다.

1905년 4월 4일에는 전범개정(典範改正)위원에 임명되고 7월에 6품 조경단수개시별단(肇慶壇修改時別單,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묘소)에 올랐으나 바로 동월에 일본 시찰을 떠나 8월 1일 일본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에 보임되었다. 당시 한국군을 회유하려 한 일본의 대한정책에 의해 이갑은 일본훈장 서보장(瑞寶章)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9월에 한국으로 돌아와 군부에 복귀, 10월 10일에 육군보병 정위(正尉)로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무관학교 학도대(學徒隊) 중대장에 보임되었다. 12월 5일에는 군부 부관(軍部 副官)에 임명되었다.

을사늑약 후 왜소해진 민영휘에게 가문의 보복을 실행, 빼앗긴 농토 등에 대해 변상 받아

이갑은 을사늑약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민영휘에게 복수할 때가 왔음을 절감하고 육혈포( 六穴砲)를 품고 단신으로 민영휘의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옛날 그가 빼앗은 40경 토지와 그간 10여 년 간 추수하여 먹은 돈을 전부 내놓을 것을 압박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민영휘는 중국 상하이로 도망가 이를 피해보고자 했으나 이갑은 상하이까지 쫒아가 그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이갑은 1. 수탈해 갔던 토지를 무조건 반환할 것 2. 수탈 후 오늘날까지의 수확 곡물 전부를 대금으로 환산하여 지불할 것 3. 이 대금에 대한 오늘날까지의 이자에 이자까지 계산해서 지불할 것 4.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속죄의 뜻으로 학교 등의 사회사업을 할 것 등의 약속을 받아내었고 마침내 농토를 도로 찾고 3만원의 돈까지 변상 받아 내었다.

민영휘로부터 변상 받은 재산으로 서북학회 키우고 오성학교·협성학교 등을 건립

그러나 일제가 11월 17일 을사늑약을 한국 정부에 강요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국권을 유린하고 정작 일제의 횡포를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자 이갑은 내심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6년 1월 23일 정 3품 풍양비각수립시별단(豐壤碑閣豎立時別單)에 올랐으며 6월 12일 육군보병 참령(參領)에 임명되었다. 참령 이갑의 가슴 속에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애국심이 끓어올랐다. 비밀리에 상동청년회의 애국지사들과 소통하며 국권회복의 기회를 엿보며 애국계몽운동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1906년 일본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가 설립되고 <태극학보(太極學報)>가 발간되자 이를 축하하며 50원을 의연하고 태극학보 창간을 축하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한편 10월 26일 박은식·정운복·김윤오·김명준·유동열·김달하 등 평안도·황해도 출신 인물들과 함께 서우학회를 창립하여 구국교육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이 학회는 같은 해에 이동휘 등 함경도 출신 인물들이 설립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1908년 초에 서북학회(西北學會)로 출범하였다. 이갑은 민영휘에게 돌려받은 재산으로 서북학회 조직을 확산하고 오성학교(五星學校)를 건립하였으며 후일 협성학교 건축 비용을 대기도 하였다.

고종 퇴위 반대투쟁 하면서 구금돼. “일본식 군대 근대화 안되고 국외에서 전쟁해야 광복” 결론

1910년대 활동 당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선생(앉은 이)의 모습
1910년대 활동 당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선생(앉은 이)의 모습

이갑은 도산 안창호가 주도하여 결성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다른 군인 출신 애국지사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7년 6월 7일 이갑이 군부 교육국(敎育局)에 교무과장에 보임되었을 무렵 헤이그에 특사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했던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자 이갑은 더 이상 일제의 횡포를 묵과할 수 없었다. 이에 군대 내에서 어담(魚潭) 등 군인출신 인물들과 함께 황제 폐위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7월 21일 이갑은 면관(免官)당하고 군인으로서 정치사회의 일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징계당하고 구금되었다.

일제는 이어 1907년 8월 1일 마침내 명목뿐인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군권까지 장악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일본에서 육사 교육을 받은 한국군을 회유하고자 이갑을 무죄방면하였다. 이갑은 8월 25일에 풀려났고 징계에서도 풀려나 1907년 9월 3일 군부에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일제는 이들 군인들을 회유하여 통감통치의 안전판으로 구축하고자 그를 친일파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갑은 군부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일본 육사 출신의 군인이었던 유동열, 김희선, 노백린 등과 함께 일본이 불법적으로 해산한 대한제국의 군대를 다시 부활시키고 말겠다는 강고한 결심을 하였다.

국권 상실 이전 자신들은 일본에서 근대 선진의 사관교육을 받고 일본 군대의 근대화와 강병의 힘을 배워 조국의 군대를 근대화하겠다고 했던 포부가 무너지고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자 이갑은 고심하였다. 이갑과 신민회 회원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현실을 직시하였다. 신민회는 독립운동의 기지를 국외에 마련하고 청년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 중국군관학교에서 사관훈련을 받게 하고 혹은 국외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군대를 부활하여 일본과 전쟁을 하여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908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장인환 의거가 일어났을 때, 신한민보에는 <양의사합전(兩義士合傳)>이라고 제목을 붙인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 기사는 하와이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문에도 연재되었고 재외 동포사회에서는 전명운, 장인환 의사를 돕고자 하는 의연금 모금운동도 전개되었다. 국내에서는 이갑과 유동열, 양기탁 등이 <양의사합전(兩義士合傳)>을 비밀리에 산포하면서 의연금 모집에 나서 전명운·장인환 의사에게 의연금을 송부하였다. 당시 모금운동은 국내를 비롯해 일본, 미국, 하와이, 멕시코,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총 8568원, 11전의 의연금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모금운동은 단순히 돈을 모으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후일 의열투쟁의 정신을 고취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 배후로 지목되어 잔혹한 고문 받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의거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갑과 신민회 인사들을 배후인물로 지적하고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갑과 안창호를 비롯한 신민회 동지들은 이토 히로부미 살해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용산 헌병대로 끌려가 엄중한 취조를 당하였다. 이들이 안중근 의거의 배후 인물로 지목받은 것은 안중근이 공립신문(共立新聞)을 러시아에 공급하는 일을 맡았고, 유진률·정재관·이강·정순만·유덕순·윤일병 등이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살해를 모의했다는 증거를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이갑은 피체되어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받고 3개월만인 12월경에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갑이 예상했듯이 이제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신민회는 1910년 3월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일제와의 ‘독립전쟁의 전략’을 채택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고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과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설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국내에는 서울 전덕기, 평양 안태국, 평북 이승훈, 황해도 김구가 남아 독립군기지개척사업을 지원하고, 국외에는 각 인물들이 각각의 지역을 맡아 기지개척의 초석을 마련하고자 결의하였다. 즉 미주에는 안창호, 연해주 이동녕, 북간도 이동휘, 서간도 이회영·이시영·최석하, 중국 베이징에 조성환, 그리고 이갑은 러시아의 당시 수도인 페테르스부르그에 근거하여 각각의 지역에서 기지개척사업을 담당하기로 한 것이다. 이갑이 러시아를 택한 것은 러일전쟁을 전쟁터에서 경험했기에 후일 제2의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의 승리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신민회의 ‘독립전쟁의 전략’에 따라 항일 독립 기지 개척을 위해 국내 탈출, 러시아로 망명

신민회에서는 국외로 나가 길림지역에 토지를 구입해 계획적으로 이주민을 모집하여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먼저 한인촌을 건설해야 한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토지를 개간, 경영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꾀하고 자치행정을 실현하고 학교와 교회 등 문화시설을 설치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창설하여 장기적 독립전쟁의 방략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미 미주 동포들의 주식으로 북만주 밀산 봉밀산에서 토지개척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갑을 비롯한 신민회 인사들은 1910년 4월부터 국내를 탈출하여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칭타오(靑島)에서 모여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청도회담에서는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의 문제로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청도회담이 끝나자 이갑을 비롯한 신민회 인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이곳에 도착하여 강제 병합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재러한인사회가 비분강개하는 가운데 9월에 이른바 해삼위회담(海蔘衛會談)이 개최되었다. 이 때에도 이갑은 안창호와 함께 시종일관 “의연히 농지개척에 주력하여 생활안정을 얻는 기반 위에서 독립운동의 투사를 양성하는 것이 한민족의 미래운동에 유리할 것”임을 역설했으나 만주에서 속히 군인을 양성하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갑 선생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거주지 부근
이갑 선생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거주지 부근

많은 논란 끝에 최종적으로 만주의 길림성 밀산현에 농토를 매수하여 토지개간 사업을 일으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운동의 중심지를 만들며, 계획의 추진을 위해 군사교관, 일반 과학 교수 및 농사전문가를 초빙할 것 등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북만주 밀산에서 아세아실업주식회사와 미주의 태동실업주식회사가 재미한인의 주금(株金)을 모금하여 개척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독립운동 기지개척 자금을 대기로 한 이종호가 약속을 번복함으로써 장애에 부딪히게 되었다. 해삼위회담을 끝낸 이갑은 자신의 목적지인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그로 건너갔다. 페테르부르그에서 이갑은 러시아 외교관과 정치가들과 교류하며 국제정세를 살피며 독립의 기회를 엿보고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러시아에서 발행 부수가 많은 신문으로 알려진 <노바야 보렘아>(신시대) 신문사를 찾아가 한국민의 불행한 처지와 독립운동의 전개에 대한 결의와 계획을 주지시키고 무엇보다도 페테르스부르그에 청년양성소를 만들어 청년교육에 착수하고자 하였다. 매일 침식을 마다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자 고심했던 그에게 자신의 후원자인 이범진 전 러시아 한국공사의 자결 소식은 큰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러시아에서 괴질 걸려. 안창호가 구명 위해 미국 초청했으나 근육마비로 상륙 불허

곤궁함 속에서 추위와 싸우며 자유로운 외교활동을 위해 러시아어를 하루바삐 익혀야 한다는 압박감에 과로까지 겹쳐 이갑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러시아 공부를 하던 이갑이 연필을 깎다가 손가락 끝을 칼 끝에 베이면서 손가락에 마비증상을 느끼게 되었다. 그로부터 손가락에서 손목, 팔등으로 마비증상이 번져 급기야는 반신 불구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안창호가 1911년 7,8월경 시베리아에서 미주로 귀국하는 길에 페테르스부르그에 도착하여 이갑을 만났다. 이 때 안창호는 이갑의 병세가 심각함을 감지하고 미국에 도착하여 부인 이혜련 여사가 바느질품을 팔아 마련한 적금 300불과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한다는 여행증명서를 이갑에게 보내왔다. 이 돈을 받고 이갑은 안창호의 신실한 우정에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이갑을 돕기 위해 재미 한인 156명도 기꺼이 연조금을 내어놓았다. 미국행을 결심했으나 혼자서는 거동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갑과 동행한 청년들은 러시아에 망명해 민족운동에 종사하며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총회에서 활약하던 서초(徐超)와 최광(崔廣) 두 젊은이였다. 그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유럽에 도착한 후 독일에서 뉴욕행 여객선을 탔다. 미국으로 가는 장정의 여정을 견디기에 이갑의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오랜 항해로 인해 탈진해버린 이갑은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다.

이갑 선생이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편지
이갑 선생이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편지

1912년 4월 30일 이갑과 서초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당시 검사원 감독인 베커씨와 면담한 결과 이갑은 상륙허가를 받지 못하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검사원이 자기와 악수만 할 수 있다면 상륙해주겠다고 했지만 이갑은 끝내 그의 손을 잡지 못했다고 한다. 오랜 항해의 보람도 없이 이갑 일행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기 위해 유럽으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함께 동행한 재러 한인사회와 재미 한인사회가 하나가 되어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를 살리고자 했으나 그 모두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유럽에 도착하여 독일 베를린과 프랑스 파리 등지에 들려 명의를 찾아 근육마비의 괴질을 고쳐보고자 노력했지만 차도 없이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갑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 본부가 있는 치타로 왔다. 이갑은 시베리아 지방총회 제2대 총회장으로 임명되었고 동포사회는 그를 열렬히 환영하며 지도자로 모셨다. 치타에서 <대한인정교보> 발행을 지도하고 북밀산(密山)에 설립된 무관학교 사업을 지도하는 등 그의 독립운동의 열의는 병중에서도 지칠 줄 몰랐다. 그러나 이갑의 병은 차도가 있는 듯 하다가 다시 악화되면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더 이상 활약할 수 없게 되었다. 치타는 이갑이 있기에는 너무도 추운 곳이었다. 그래서 좀더 온화한 곳에서 요양을 하고자 블라디보스토크로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이갑은 이동휘와 함께 광복군 정부를 구상하며 분열된 동포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한 전선을 갖추어나가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얼마 머물지 못하고 이갑은 1912년 12월 13일에 길림성 목릉으로 향하였다.

뉴욕 항에서 유럽 거쳐 시베리아 넘어 지구 반 바퀴…노령 목릉으로 찾아온 처와 어린 딸 상봉

목릉은 지리적으로는 북만주 지역이나 동청철도 조차지 안에 있어 행정적으로는 러시아령에 속해 있어 좀더 안심하고 이갑이 요양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재러동포사회의 주선으로 이곳에는 앞서 안중근 가족이 정착해 있었다. 목릉역 인근 주막거리에서 걸어서 20분쯤 되는 외딴 곳에서 안중근의 가족과 이웃해 있으면서 이갑은 안중근 가족의 돌봄을 받고 의탁하였다. 국외로 망명하고 가족과는 연락이 끊겼으나 이갑이 목릉에 정착하면서 국내의 가족들에게 이갑의 병환 소식이 전달되었다. 오랜 동안 남편과 떨어져 있었으나 이갑의 부인은 딸 이정희와 함께 목릉행을 감행하였다. 숙천을 떠나 압록강을 넘어 단동(丹東)에 도착하여 육로로 신민회 동지들에 의해 개척된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해 이갑의 형인 이위림의 집에서 머물면서 여행경비와 자금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심양과 장춘을 경유하여 하얼빈에서 동청철도를 타고 목릉에 도착, 마침내 이갑과 상봉하게 되었다.

재러 한인동포사회는 1913년 12월 25일에 이갑을 위한 의연금모집 발기회를 결성하고 대대적인 의연 모집운동을 전개하였다. 소왕령(니콜스크 우수리스크) 김이직의 주도로 그를 중심한 의연 모금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전 동포사회로 번져 나갔다. 당시 재러동포사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병환이 들어 고생하는 이갑과 같은 애국지사들을 외면해서는 안되며 이들의 애국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한 대대적인 국민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은 나라의 지사며 제일 귀중한 것은 지사의 생명이라. 이러므로 그 나라의 지사는 한번 나면 국민이 다 숭배하고 사랑하며 그 지사의 생명이 위태한데 이르면 국민이 다 보호하고 구호하나니 슬프다. 우리의 지극히 사랑하며 공경하는 전 참령 이갑(李甲) 씨의 역사는 우리 일반 다 아는 바거니와……사랑하는 동포들이여, 나라를 건설할 지사로 하여금 죽음이 가한가 삶이 가한가. 나라를 사랑하면 나라의 지사를 사랑할지요, 지사를 사랑하면 지사의 생명을 구할지라. 그 구하는 방법은 어디 있느뇨. 우리로 하여금 씨의 생명을 대신하자 하여도 할 수 없고 씨의 병을 대신 하자 하여도 할 수 없고. 다만 재정을 모아 유감없이 치료하는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나니 여러 동포들은 의연금을 속히 거두어 보내심을 천만 바라나이다.”

아내와 딸의 간호에 잠시 건강 회복돼 마지막 불꽃 일 듯 군사교육 청사진 펼쳤으나……

그러나 목릉에서도 이갑에 대한 일제의 감시 눈총은 계속되었다. 일제는 이갑은 “과격패의 일부분 두령”인 존재이며 목릉에서 “이갑이가 이 땅에서 동지를 모으는 중”이라며 경계하였다. 그러나 가족이 오면서부터 부인과 딸의 정성스러운 간호을 받은 이갑의 병세는 나아지는 듯 하였다. 일어나 앉기도 하고 운동도 할 정도로 차도를 보였다. 김현토의 권유로 행한 정좌법(靜坐法)을 시작한 이래로 건강상태가 좋아지자 이갑은 민족 대동단결의 결의를 다지며 청년학생들을 모아 군사교육을 하는 청사진을 다시 펼치며 의욕에 차게 되었다. 그러나 한 때 반짝 나아지는 듯했지만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졌으며 영양섭취가 줄어들면서 그의 병세는 크게 악화되었다. 한편 1914년 2월 7일경에 소왕령(니콜스크 우수리스크)으로 이주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전후하여 일본이 동청철도 연선에 가택을 수시로 수색하는 등 이 곳 목릉에까지 일제의 세력이 미치게 되면서 안중근 가족과 이갑은 부득이 러시아 니콜리스크(蘇王營)로 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찾아온 의사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언……“나는 고통도 없고, 공포도 없소”

李甲ノ死亡ニ關スル件
李甲ノ死亡ニ關スル件

니콜리스크에는 이동녕과 이상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동맹국가가 됨으로써 독립운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교포계몽과 산업 발전을 꾀하면서 시세를 관망하던 중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에 서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갑은 크게 낙담하였다. 6월 10일경 진료를 온 의사에게 이갑은 자신은 사흘밖에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였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6월 13일 오전 1시 30분에 41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나는 고통도 없고, 공포도 없소”였다. 이갑의 유골은 니콜리스크 시내 뒷산 백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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