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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주요공적

1919년 임시정부 재무차장

1919년 제2회 임시의정원 의원 및 상임위원회 내부위원

백산상회를 통하여 임정에 자금조달

1921년 국민대표회기성회 활동 및 중한호조사 결성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대전현충원

소재지 : 대전광역시 유성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윤현진

윤현진 , 1892 ~1921 , 독립장 (1962)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의 핵심 인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차장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진정한 애국지사이다.

머리말

선생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만성재(晩惺齋)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5세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된다. 이후 1908년 엄정자(嚴貞子, 1891 ~ 1959)와 결혼하여 그해 연말 외아들 동건(東健, 1908 ~ 1964)을 낳았다. 이듬해 1909년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깊이 있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선생은 22세 되던 1914년 메이지(明治)대학에 입학한 이후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된 신아동맹당 당원으로서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1916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서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선생은 3·1독립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 국내의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 조직, 독립신문사 발기인 등을 맡으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중심적 인물로 활동하였다. 1921년 2월 상해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에 취임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게 된다. 독립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1921년 9월 뜻하지 않게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선생의 장례는 당시 상하이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는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생의 삶과 정신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출생과 성장기

선생의 자(字)는 의백(義伯), 호(號)는 우산(右山), 본관은 파평이다. 1892년 9월 20일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所土里)에서 필은(弼殷)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조부 홍석(洪錫, 1843 ~ 1902)은 홍(洪) 또는 석홍(錫洪)으로 불렸는데, 동래 출신 만석꾼으로 사천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조부에게는 선생의 부친이었던 필은(弼殷)을 비롯해 고성군수와 울산군수를 역임한 명은(命殷), 구포은행과 구명학교를 설립한 상은(相殷), 구포은행 주주와 사립구명학교 교장, 구포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등을 지낸 영은(永殷) 등의 네 아들이 있었다.

조부의 치적에는 많은 공과가 있으나 막대한 토지를 유산으로 남겨 네 명의 아들 모두가 거부가 되었다. 선생의 부친 필은(弼銀, 1861 ~ 1903년)은 자(字)가 정일(定一)이었는데 25세 때인 1886년 12월 3일 문과병과(文科丙科)에 급제하면서 생활의 터전을 동래에서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蘇塗里)로 옮겼다. 그 이유는 당시 갯가 사람들은 벼슬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식들이 과거를 칠 때 불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선생의 부친은 궁궐 못지않은 집을 짓고 양산서 구포까지 매일 마부를 보내 장을 보아다 식사할 정도로 거부였다. 소토리로 옮긴지 3년 만인 1889년 선생의 큰형이었던 윤현태(尹顯泰, 1889 ~ 1964)가 태어났다. 윤현태는 이후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주주로 활동하였다. 큰형이 태어나고 3년 뒤에 선생이 출생하였다.

선생의 부친은 1897년 경상도 어사를 거쳐 1900년 동래부윤 겸 부산항 재판소 판사가 되었는데 곧 삭탈관직 당해 숨어 지내게 되었다. 42세에 생을 마감한 부친의 삭탈관직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일본서 돌아온 중앙관리를 소홀히 접대했기 때문에 모함을 당해서 혹은 이방을 살해하게 되었는데 그 이방의 딸이 궁녀가 되어 왕에게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고 전할 뿐이다.

조부와 부친 형제들의 재산축적은 낙동강의 중심 포구였던 구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구포는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낙동강 하구의 요지로서 하단 포구와 함께 부산·경남지역 물산의 집산지였다. 선생의 집안은 이곳 구포에서 쌀을 모아 조선과 일본이 흉년일 때 모아 두었던 쌀을 일본에 팔거나 일본에서 새로운 상품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거액을 모았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재지가 비상하며 용모가 관옥 같고 어린이들과 놀 때도 출중한 기백이 엿보여 영매한 자질은 어릴 때부터 알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에 소토리 마을의 어른들은 주위의 아이들에게 “우산(右山)만큼만 되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선생은 7세 때인 1899년 소토리의 글방 만성재(晩惺齋)에 입학하였다. 원래 만성재는 양산 출신의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정신을 궁행실천하기 위해 안평중(安平重, 만성재는 그의 호)이 설립한 글방이었다.

이곳에서는 소위 을사보호조약 후 효충계(孝忠契)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선 24동지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만성재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춘하추동 계절 따라 천성산(千聖山)에 올라 호연지기를 키웠다. 그때마다 뛰어난 한시를 지어 일행을 경탄케 하였다고 한다. 10세 때 사서삼경을 능통하고 옛 역사와 제자백가의 서적에도 정통하였다.

선생이 한학을 배울 당시 국내 각지에서는 뜻있는 분들에 의해 근대학교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이에 1906년 이후 신교육은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사립학교는 한때 그 수가 전국에 3,4천을 헤아렸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사립학교들은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에 의해 감소하였으나 1910년 5월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은 사립학교의 수는 모두 2,250개교였다. 이 가운데 보통학교가 16개교, 각종 학교가 2,225개교(종교학교 823개교 포함), 고등학교가 2개교, 실업학교가 7개교였다. 이후 1910년 10월 말 현재 관공립학교는 보통학교 132개, 고등학교 3개교, 실업학교 14개교, 전문학교 3개교, 사범학교 1개교 등이었다. 그런데 당시 학교들은 대부분 초등교육 내지는 중등교육 정도의 교육기관이었고, 지식층이라 불릴 만한 학생들을 배출하는 고등교육기관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1907년 음력 9월 9일 구포 구명(龜明)학교 개교식
1907년 음력 9월 9일 구포 구명(龜明)학교 개교식

이와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선생은 15세 되던 1907년 구포의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구명학교는 1907년 9월 9일(음력) 구포 지역의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선생의 숙부인 윤상은(尹相殷)과 윤명은(尹命銀), 구포 객주였던 장우석(張禹錫) 등이 설립한 학교였다. 구포 사립학교 설립취지서를 보면 교명을 구명(龜明)이라 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초대교장은 장우석이 맡았고 이어서 일제시기 대표적 민족운동가 중의 한 분이었던 백산 안희제(安熙濟)는 1909년 교장에 취임하여 2년간 구명학교를 직접 운영하였다. 이 무렵 안희제는 1907년 의령면 중동에 의신학교와 1908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각각 설립하여 신학문 교육에 앞장서고 있었다.

따라서 구명학교는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심어 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 선생은 구명학교 설립과 함께 입학하여 16세였던 이듬해 1908년 양산의 만석꾼 집의 딸로서 자신보다 한 살 더 많았던 엄정자(嚴貞子, 1891 ~ 1959)와 결혼하였다. 선생은 결혼한 그 해 연말 외아들 동건(東健, 1908 ~ 1964)을 낳았으며 이후 옥경(玉卿)과 혜경(惠卿) 두 딸을 더 낳았다.

구명학교에 입학했던 선생은 1908년 9월 13일, 동기 6명과 함께 제1회 졸업생으로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당시 16세였던 선생은 졸업과 함께 숙부 윤상은, 구포 일대의 객주, 동래와 양산 지역의 부호들이 주축이 되어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 선생은 회사 주식 500주(1주당 50원) 중 32주를 소유하여 주주로 활동하였다.

구포저축주식회사는 구포 일대 객주들이 운영했던 저축계를 발전시킨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금융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20세 때인 1912년 6월 구포저축주식회사가 구포은행으로 정식 출범할 때 1만주(주당 50원) 중 150주를 소유하면서 구포은행에 관여하였다. 구명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된 선생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이 더 크고 원대하다는 것을 알고서 17세였던 1909년 중국으로 가게 된다.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 지역을 둘러보면서 국제정세와 다양한 분야에 걸쳐 견문을 넓힌 선생은 외국의 저명한 정치가와 여러 독립지사들과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 그 결과 체계적인 근대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선생은 마침내 일본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일본유학시절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을 이끌다

1910년대 중반 국내의 고등교육 체계는 경성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같은 전문학교들이 운영되고 있었으나 대개는 일제의 식민교육 정책에 의해 경제, 법률, 의학, 공업, 농업 등 실용적인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대학 교육을 받기 위해 다수의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일본이나 미국, 중국 등지에 유학을 가게 된다. 선생 역시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22세가 되던 1914년 봄,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한말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시작했던 많은 학생들은 일본에서 유학생단체들을 결성하였다. 1905년 이후 일본에서 조직된 각종 유학생단체는 주로 출신 지역별로 결성되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단체들이 바로 태극학회(1905.9), 공수학회(共修學會), 호남학회, 낙동친목회, 대한유학생회(1906.9), 한금회(漢錦會), 대한학회(1908.2), 연학회(硏學會) 등이었다. 여러 단체로 난립된 유학생단체들은 마침내 1909년 1월 대한흥학회로 통일을 보게 된다.

그러나 대한흥학회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패망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그 결과 1911년 삼남친목회, 황평(黃平)친목회, 청년구락부 등의 결성을 비롯해 1912년 호남다화회(湖南茶話會), 낙동(洛東)동지회, 폐서(浿西)친목회, 삼한구락부, 해서(海西)친목회, 동서구락부, 철북(鐵北)친목회 등 출신 지역별 유학생 단체들이 재차 난립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에 1913년 가을 각 유학생 단체들의 협의체 조직으로서 성격을 갖는 조선유학생학우회가 결성된다.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조직된 이후에도 각 출신 지역별 모임은 분회 형태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1917년 조선유학생학우회는 이전보다 더 통일성을 갖춘 조직체로서 거듭나게 된다. 그 결과 조선유학생학우회는 웅변회, 졸업생 축하회, 신입생 환영회, 운동회 등의 행사를 통일적으로 개최하고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된다. 각 시기별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발간한 『학지광』의 주요 간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대 후반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주요 간부

임기 회장 총무 평의회의장 편집부장

제4기(1915.2 ~ 1915.10) 백남훈(白南薰) 박이규(朴珥圭) 김리준(金利埈) 장덕수(張德秀)*

제5기(1915.10 ~ 1916.2) 신익희(申翼熙) 윤현진(尹顯振)*

제8기(1917.2 ~ 1917.10) 노익근(盧翼根) 차남진(車南鎭)

제9기(1917.10 ~ 1918.2) 김명식(金明植)* 김철수(金喆壽)* 양원모(梁源模)* 최팔용(崔八鏞)*

제10기(1918.2 ~ 10) 김태영(金泰英) 김도연(金度演)* 노익근(盧翼根) 최팔용(崔八鏞)

제11기(1918.10 ~ 1919.2) 노익근(盧翼根) 백남규(白南奎)*

박찬승, 『한국근대정치사상사』, 역사비평사, 1992, 118 ~ 119쪽. 인명 뒤의 * 표시는 신아동맹당에서 활동한 인물

위의 표에서 보듯이 선생은 신익희와 함께 제5기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조선유학생학우회 외에도 1906년 8월 창립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1915년 11월 이광수, 신익희, 장덕수 등이 창립한 조선학회, 1915년 4월 김정애, 나혜석 등이 창립한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등이 있어 각 단체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들 단체의 활동은 신지식층을 중심으로 반일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들 유학생들 중 선생을 비롯해 반제국주의운동에 적극적이었던 학생들은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결성하였다. 선생은 신아동맹당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는데 1915년 봄 김철수(金錣洙), 장덕수, 정노식, 김철수(金喆壽), 전익지(全翼之) 등과 함께 동경 인근의 다마천(多摩川)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돌려 마심으로써 열지동맹(裂指同盟)을 맺었다. 이때 열지동맹원들은 장차 상하이나 싱가포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상호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회원 확대에 노력하던 열지동맹의 김철수(金錣洙)는 그해 가을 최익준(崔益俊), 하상연(河相衍) 등과 접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익준이 중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반제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했기 때문에 김철수(金錣洙)는 최익준을 매개로 중국인 유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최익준과 하상연이 관여한 중국인 유학생 조직은 1915년 10월 결성된 동아동맹회(東亞同盟會)였다. 결국 김철수(金錣洙)는 최익준의 제의를 받아들여 황췌(黃覺) 등 중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반제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마침내 1916년 봄, 선생은 열지동맹원들과 조선인 유학생 최익준, 하상연, 김명식(金明植), 김양수(金良洙), 중국인 유학생 황췌, 뤄훠(羅豁), 덩시민(鄧潔民), 셰푸아(謝扶雅), 대만인 유학생 펑화룽(彭華榮) 등, 전체 40여 명과 더불어 “아세아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세아를 세우자”라는 목적 아래 비밀결사 신아동맹당을 조직하였다. 조선과 중국의 열혈 유학생들이 결성한 신아동맹당은 일본제국주의 타도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의하고 자신들과 같은 처지로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인도와 베트남 출신 재일유학생들을 가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아동맹당에 참가한 조선인 유학생은 일찍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김철수(金錣洙)와 장덕수 같은 인물들을 비롯해 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신아동맹당의 활동은 크게 보아 집회연설, 각종 단체조직, 모금 및 반일 서적배포 등이었다.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집회와 연설 등을 통해 민족해방을 대중적으로 선전하고 대중의 열망을 모아 나갔다.

예를 들어 1916년 6월 11일 선생은 김효석과 함께 메이지대학 졸업생회에서 “장래 조선동포를 위해 결사적으로 활동할 것”, “임관(任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으며 선생과 같은 고향 출신의 김철수(金喆壽)는 1918년 4월 3일 일본으로 유학을 오게 된 학생들의 환영회에서 ‘자유평등과 조선의 발달, 조선민족의 품성향상을 진전하고 있는데 경찰에 매수된 비열한이 있다면 역사 있는 국민인 우리들은 그들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신아동맹당은 중국인 유학생과 연계하여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일본으로 밀반입하여 유학생들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신아동맹당은 각종 유학생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던 핵심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각 유학생 단체들을 지도하는 총지휘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신아동맹당원이 활동했던 주요 단체는 앞서 보았던 조선유학생학우회였다. 1915 ~ 1918년 사이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간행한 『학지광』 편집부에는 신아동맹당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학지광』은 사실상 신아동맹당원들이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지광』 창간호 속표지
『학지광』 창간호 속표지

신아동맹당은 『학지광』의 편집부뿐만 아니라 평의회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는데 1915년 평의원 14명 중 2명이 신아동맹당원이었으나 1916년에는 확인 가능한 4명의 평의원 중 의장을 포함해 2명이 신아동맹당원이었다. 이후 『학지광』의 평의원이 10명으로 구성된 1917년 이후에는 의장 및 부의장을 포함해 매년 3 ~ 4명의 신아동맹당원 소속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학지광』의 중심적 역할을 맡았으며 총무와 각 집행부 부장들로 구성되었던 집행임원회의 4명 중 2명 이상이 신아동맹당원이었다.

그만큼 선생이 몸담고 있었던 신아동맹당은 유학생들의 중심된 언론매체였던 『학지광』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일본유학 시절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에서 활동했던 선생은 24세였던 1916년 유학생활 2년 만에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국내로 돌아온 선생은 1919년 3월 상하이로 건너가기 전까지 3년 동안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들을 전개하였다.

귀국 이후 대동청년단과 교육운동에 앞장서다

1916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선생은 3년 동안 국내에 머물면서 양산, 부산, 구포를 무대로 다방면에 걸쳐 항일운동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선생의 양산집 사랑방은 경남지역 인사들이 부산을 왕래할 때 반드시 들러보는 거점이 되었다. 단적인 예로 신아동맹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장덕수의 소개로 그의 형 장덕준(張德俊) 같은 분은 아예 선생의 집에 상주하다시피 하였다.

울산의 부호로서 경남일보를 설립하고 초기 상해 임시정부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던 김홍조(金弘祚) 역시 선생과 많은 나이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 부산으로 갈 때는 일부러 양산에서 선생을 만나기도 하였다. 뜻있는 많은 분들이 선생의 집을 방문하거나 또 선생의 집에서 장기간 체류했다는 사실은 선생의 평소 인품과 교유관계가 매우 광범위하였음을 말해준다.

선생은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1919년 상하이로 가기 전까지 3년 동안 경제적 활동과 함께 비밀결사운동과 교육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먼저 선생이 관여했던 비밀결사단체였던 대동청년단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은 1909년 10월 남형우의 집에서 보성중학교 교장이었던 박중화(朴重華)를 비롯해 김두봉, 안희제(安熙濟), 신백우, 이경희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비밀결사체였다. 대동청년단은 1907년 결성된 신민회 조직이 영남 지역에 크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신민회계열의 영남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단체였다.

대동청년단은

①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세할 것

② 새 단원의 가입은 단원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을 것

③ 단의 이름이나 단에 관한 사항을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④ 경찰이나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시키지 말 것

등을 규칙으로 하였다.

회원이 가장 많을 때는 120여 명에 이르렀는데 초대 단장은 남형우, 부단장은 안희제(2대 단장)였다.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현재 확인 가능한 인물은 선생을 비롯하여 53명이다.

확인 가능한 대동청년단 단원 53명 중 선생을 포함하여 오상근, 배천택, 김두봉, 최창식, 김명식, 이극로 등은 뒷날 사회혁명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담했으며, 박중화, 신백우, 이수영, 고순흠 등은 1920년 3월 15일 국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노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들 53명의 출신 지역을 보면 경남 14명, 경북 15명으로 영남 지역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 외 출신지역이 분명치 않은 7명을 비롯해 나머지 인물들은 신민회계열로 파악된다. 선생을 포함하여 대동청년단에 참가한 영남지역 인사들은 주로 백산상회나 조선국권회복단에 속한 상인, 지주, 계몽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중소지주, 부농, 부상(富商) 출신으로 신교육을 통해 신사상과 신지식을 수용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과 자강운동에 앞장섰다.

대동청년단의 구성원들은 1910년대 대부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국외에서 많이 활동하게 되는데 선생과 남형우, 최완 등은 상해 임시정부, 곽재기는 의열단, 김동삼은 만주, 백광흠은 조선공산당 등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이밖에 선생은 서상일, 이호연, 윤병호, 이수영, 윤상태, 최완, 이우식 등과 함께 백산상회에 관계하였다. 사실 선생은 백산 안희제와 항일운동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두 분은 대동청년단의 단원이었으며 또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했을 때는 선생의 큰형이었던 윤현태(尹顯泰)를 매개로 다수의 자본금을 투자했을 정도로 선생과 백산의 관계는 돈독했다.

이는 상해 임시정부에 막대한 비밀자금을 제공한 백산 안희제의 백산무역주식회사에 선생과 선생의 큰형 윤현태가 막대한 주주를 소유한 것과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실질적으로 주관했던 재무차장을 맡았던 점을 감안하면 선생과 백산 안희제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에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원래 백산 안희제가 1916년 개인 경영으로 출발하여 1917년 10월 무렵 경기호황에 힘입어 자본금 14만원의 합자회사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백산상회는 1919년 공칭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성장하게 되는데 1919년 당시 조선인이 설립한 회사로서 자본금 100만 원 이상의 회사는 제조업에서 경성방직주식회사, 상업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와 동양물산주식회사 등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설립될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손꼽히는 회사였다. 주주들은 부산과 경남지역의 지주들이 많았는데 경주의 최준(崔浚, 2,000주), 선생의 큰형 윤현태(尹顯泰, 2,000주)와 숙부 윤상은(1,000주), 백산 안희제(安熙濟, 2,000주) 등이 다수의 지분을 보유하였다.

백산상회 터
백산상회 터

한편 선생의 큰형 윤현태는 1919년 일금상회(一金商會)를 경영하였으며 1920년 3월에는 동아일보 발기인 78명에 숙부 윤상은과 함께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는 1920년 고향 양산에서 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을 운영하였는데 회사의 전무는 양산의 지영진(池榮璡), 지배인은 동래의 부호 추봉찬(秋鳳璨) 등이 맡았다. 의춘상행은 종래 의춘양행(宜春洋行)으로 알려져 왔으며 선생이 직접 설립한 일종의 소비조합으로 이야기 되어 왔다.

그러나 의춘상행의 설립자는 선생의 큰형 윤현태였고 설립 목적 또한 이윤을 추구한 주식회사였다. 의춘상행은 1920년 3월 의춘신탁주식회사로 변경되면서 회사의 업무 또한 종래 해륙물산의 위탁매매에서 부동산 매매와 대금업, 신탁업 등이 추가되었다. 선생이 1916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국내에서 대동청년단에 참여하고 독립사상을 후학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해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한 것들을 보아, 선생의 큰형 윤현태가 의춘상행을 경영하고 형제 두 분이 백산무역주식회사에 대주주로 참여한 것 모두가 형제 두 분의 협의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선생은 큰형과 함께 1919년 11월 백산 안희제가 중심이 되어 부산 및 인근지역 유지들이 우수한 청년들을 국외로 유학시킬 목적으로 설립했던 기미(己未)육영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이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선생이 기미육영회 발기인으로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큰형 윤현태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선생의 큰형 윤현태는 기미육영회의 간사로 활동하였는데 기미육영회는 창립 6개월 뒤인 1920년 5월, 회원 43명에 회원부담금 신청액이 12,000원으로 불입금만 5,000원에 이르렀을 정도로 대규모 장학회로 매년 10명씩 유학생들 선발할 방침을 세우고 제1차 유학생으로 김정설(金鼎卨), 진전한(錢鎭漢), 문시환(文時煥) 등 5명을 선발하였다.

기미육영회에서 유학을 보낸 대표적 인물로 해방 이후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과 국문학자 이극로(李克魯) 등이 독일로, 초대 국방부장관을 지낸 신성모(申性模)는 영국으로 각각 유학을 갔는데 이 모두가 선생과 선생의 큰형이 관여했던 기미육영회의 후원이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고 있었던 선생은 1919년 3월 20일 동생 덕경(德卿)의 혼례를 치르고 이튿날 3월 21일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로 가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 상하이에 도착한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탄생에 중요 역할을 하게 되는 동제사(同濟社)와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결성했던 독립임시사무소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결과 선생은 1919년 4월 13일 발표된 상해 임시정부 7개 위원회 중에서 신익희 이외 8명과 함께 내무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이후 선생은 9월 18일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각 도를 대표하는 도별위원 중 경상도위원으로 김창숙(金昌淑), 현정건(玄鼎健), 이규홍(李圭洪) 등과 같이 활동하였으며, 11월 23일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대한적십자회 회원을 확충하기 위해 모집에 앞장섰을 때 31대(隊)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서 선생은 1920년 1월 김구, 손정도(孫貞道), 김철(金澈) 등과 함께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 상하이에는 조선인들 중심의 의열단, 구국모험단, 화동유학생회 등과 같은 각종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와 같은 조직들은 1921년 30여 개에 이르렀는데 선생이 참여했던 의용단은 그 중 하나였다.

상하이에서 결성된 의용단은 사실상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의용단의 국내 활동지로서 평양, 황해도, 부산 등이 일제의 기록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의용단을 조직했던 선생은 1920년 2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기 위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주식을 모집할 때 발기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탄생에 초기부터 깊이 관여했던 선생은 1919년 9월 11일 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공포하고 총장과 차장을 임명할 때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어 1921년 2월 22일까지 재무차장으로서 임정의 살림살이를 주관하였다. 선생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해 임시정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호파, 관서파 등으로 분열되어 여러 가지 업무상의 마찰을 낳게 된다. 여기에 이승만의 대통령 호칭 사용문제, 1919년 11월 여운형의 도일(渡日)문제, 이승만 퇴진문제 등 여러 가지 사안들이 불거지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불협화음은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제6회 임시의정원 기념 사진
제6회 임시의정원 기념 사진

이에 선생은 차장급 인사들을 규합하여 1920년 5월 14일 차장과 비서장이 연맹하여 대통령불신임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총사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선생과 차장급 인사들이 제시한 이승만 대통령직 퇴진에 대해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노동국 총판을 맡고 있었던 도산 안창호는 회의적이었다. 그 이유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퇴진시킬 경우 친미외교에 손실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설령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퇴진시킨다고 하더라도 이승만 본인이 상해 임시정부의 결정사항을 무시할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도산 안창호의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해 차장급 인사들을 대표했던 선생은 “혁명 사업은 우선 내부가 서로 신임하고 응결하여야 되는바 현금 상황으로는 진행할 수 없으니 이박사가 퇴거하거나 우리가 퇴거하거나 양단간 해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맞서면서 국무원 연석회의에서 이승만 중심의 구미위원부를 해산할 것을 포함한 4개항의 요구조건을 재차 제시하였다. 선생을 선두로 차장급 인사들의 강력한 반발에 맞닥뜨린 안창호는 만약 차장들이 주장하는 대로 된다면 상해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분열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그 대안으로 ‘차장내각책임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선생과 내무차장 이규홍(李圭洪)은 안창호가 제시한 ‘차장내각책임제’를 채택하게 된다면 마치 차장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을 도모한 것으로 내비칠 수 있다고 보고 안창호가 제시한 ‘차장내각책임제’를 거절하였다. 이에 안창호 역시 선생과 차장들이 제시한 이승만 퇴진과 내각개조를 끝내 반대하였다.

결국 선생을 비롯한 차장들은 1920년 6월 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불신임안과 사직서를 제출하게 되는데, 안창호의 설득과 주변의 만류로 사직서는 취소되고 5개월 동안 끌어온 상해 임시정부 개혁 논의는 서북파와 기호파의 지방별 대립, 국무원 사이의 불신과 갈등만을 증폭시키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 선생과 차장급 인사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혁신을 위한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

그러나 선생이 요구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혁신 노력은 1921년 2월 박은식, 원세훈, 왕삼덕 등 14인이 ‘우리동포에게 고함’을 통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국민대표회의는 1919년 4월 결성된 상해 임시정부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개조파와 이승만 배척, 상해 임시정부 해체, 새로운 정부수립 등을 요구한 창조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양측의 대립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1922년 2월 워싱톤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와 국민대표대회 개최를 위한 대회준비자금 마련의 어려움 등이 겹쳐 마침내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가 상하이에서 개최된다.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국민대표대회는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15일까지 63회에 걸쳐 회의를 진행하였으나 끝내 개조파와 창조파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 결과 이후의 국외 독립운동은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각계 약진하는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선생은 1921년 이후 국민대표대회 개최를 위해 개조파와 창조파가 대립할 때 개조파의 수장인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국민대표대회 상해기성회 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선생은 1921년 9월 15일 국민대표대회 상해기성회가 주최했던 상하이와 베이징의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상해기성회 대표로 참석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개조에 앞장섰다.

1921년 9월 상해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치러진 윤현진 선생의 장례식 광경
1921년 9월 상해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치러진 윤현진 선생의 장례식 광경

그러나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그동안의 과로가 겹쳐 1921년 9월 16일 하오 2시 상하이 보창로(寶昌路) 보강리(寶康里) 54에서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선생이 입원했을 때 도산 안창호는 자신의 소지품까지 저당 잡혀가면서 입원비를 대었고 장례비를 전담하며 몹시 애통해 했다. 선생이 임종하자 상해 임시정부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만장이 휘날렸고 선생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160여 명의 내빈이 참석하여 선생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선생의 유해는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동생의 죽음에 비통해 했던 큰형 윤현태는 뒤늦게 상하이에 도착하여 순한글 자필로 비석을 세움으로서 슬픔을 달랬다.

맺음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선생은 애국심 못지않게 부모님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다. 고국을 떠난 지 반년이 넘은 1919년 12월 15일(음력) 어머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 년이 되도록 일차 문후도 못하와 죄송한 마음과 답답한 생각은 잠시라도 없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 사이 감기 소문이 사방에 낭자함에 하도 궁금하와 이글을 올립니다…기체강건(基體康健)하시기를 빌고 바랍니다”는 대목에서 어머님에 대한 선생의 각별한 효성을 느낄 수 있다.

이 땅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 고국에 남은 부인 엄정자(嚴貞子) 여사와 아들 동건(東健)은 ‘반일(反日)인사의 가족’으로 온갖 박해를 받았다. 일제는 선생의 집에 아예 배급을 주지 않았으며 손자 석재(錫宰)의 경우 중학교 입학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호의 집안에서 태어나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었던 선생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독립자금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게 되고 가족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 또한 혹독하였다. 이에 일제하에 살아남아야 했던 부인과 자식들은 쑥을 캐러 다니고 콩깍지를 삶아 먹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선생의 삶은 해방이 되고서도 시간이 상당히 지난 1959년 4월 15일 양산의 뜻있는 분들이 양산군민 일동 명의로 양산시 교동 춘추공원에 선생의 기념비를 건립하면서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뒤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정부 또한 1962년 3월 1일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7년 12월 18일 양산시는 선생의 흉상을 새롭게 제작하여 춘추공원 내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엄혹한 시기 조국 독립을 위해 등불과 같이 살다가 우산(右山) 윤현진(尹顯振) 선생의 삶은 오늘날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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