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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우재룡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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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룡

우재룡 , 1884 ~1963 , 독립장 (1963)

선생은 활동만큼이나 투옥된 기간도 길었다. 산남 의진 활동 중 체포되어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며, 주비단 활동 중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선생은 긴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일제와 타협하거나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광복 후에는 광복회를 재건하고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다.

“타고난 무인 성품으로 열 아홉 살에 군인의 길 시작”

우재룡(禹在龍, 1884.1.3 ~ 1955.3.3) 선생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에서 단양 우씨(丹陽禹氏) 채희와 진주 강씨(晋州姜氏)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딸 다섯을 낳고 나이 마흔에 이르러 선생의 출생을 보았다. 선생의 자(字)는 이견(利見), 호(號)는 백산(白山), 고려 말 유학자였던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21세손이다. 선생의 자서전적 성격을 갖고 있는 ‘백산실기’를 통해 보면 출생지인 왕산리를 떠나 경북 청도군 풍각(豊角)으로 이주해 5년을 거주했고, 일곱 살 되던 해에 청송군 유전(楡田)으로 이주했다.

선생은 청송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으나 ‘성품이 쾌활하였기에 글공부에는 항심이 없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선생은 문인적 소양보다는 무인적 성향이 강했다. 이는 부친의 영향으로, 부친인 우채희는 한말 무과를 통해 사과(司果)벼슬을 역임했다. 선생은 청송에서 영천(永川)으로, 그리고 대구부 성서면 신당리(新堂里)로 이사한 후 대한제국 군대에 들어갔다. 국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대항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선생은 1902년 대구부 진위대에 입대하여, 군대해산이 이루어지던 1907년까지 5년간 근무했다.

일제가 군대해산하자 탈영하여 의병전쟁에 참전

선생은 대구진위대에서 근무하던 중 대구 감옥에 수감된 의병장 정용기(鄭鏞基)를 만나 항일 민족 운동으로 삶의 큰 방향을 잡았다. 정용기는 부친인 고종의 측근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들어 1905년 12월부터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1906년 3월 영천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설치하고 봉기했다. 영해로 진군하여, 경주를 지나던 중 경주진위대의 간계에 속아 체포되었다. 우재룡 선생은 정용기가 수감되자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찾아와 석방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그를 흠모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의제(義弟)가 되어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한다.

선생은 대구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해산을 맞았으나 이에 반대해 동지들과 탈영했고, 석방된 정용기가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갔다. 의진에서 의심을 품고 선생 등을 조사하자 선생은 비분강개하여 “대한사람이 대한사람을 속이겠는가. 우리가 만약 그 따위 야심을 갖고 왔다면 하늘 밑에서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외쳤다. 정용기는 선생 등을 불러 들여 크게 기뻐하며 의진에 편입시켰다. 선생은 1907년 7월 나이 스물넷에 의병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산남의진은 산악지대를 이용해 북상하여 강원도를 거쳐 서울에 도달해 황궁을 호위하며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다는 목표를 가지고 거병했었다. 거병 초기 정용기가 체포되면서 활동이 중지되었으나 정용기가 석방되면서 다시 의진을 정비했던 것이다. 정환직은 정용기가 1906년 9월 대구 감옥에서 풀려나자 영천으로 내려와 다시 의병을 모집해 강릉으로 북진할 것을 상의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정용기는 1907년 4월 의진을 편성하였으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모병과 무기구입이 여의치 않고, 영해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돌석(申乭石)의병대도 일본군에 자주 패해 강릉으로의 북상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산남의진은 1907년 7월에서야 북상을 시작할 수 있었고 선생이 산남의진에 참여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대한제국 훈련사진
대한제국 훈련사진

서울에서 일본군과 일전 벌인다는 목표로 청하, 월연동에서 일본군 격파

군대해산으로 참여한 군인들이 가져온 근대적 무기는 의병의 무장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군인들은 유격전을 비롯한 전술을 향상시켰으며 의병들을 훈련시켜 전투력을 크게 키웠다. 선생은 ‘연습장’을 맡아 의병들에게 군대 경험을 전수했다. 선생의 첫 출병은 의진에 참여한지 며칠 되지 않는 1907년 7월 12일이었다. 산남의진은 관동지역으로의 북상을 위해 영해방면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첫 전투는 청하(淸河)전투였다. 산남의진은 7월 17일(양력 8월 25일) 의병 300여명과 함께 청하읍을 공격해 분파소를 소각하고 한인순사 1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의진은 청하에서 획득한 무기를 천령(泉嶺)에 감추고 8월 초 청송(靑松)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장마로 청송 공격은 실패하고 다시 신령(新嶺)으로 이동했다. 백산실기에 의하면 신령에 도착한 산남의진은 일본군이 영천에서 청송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다렸으나 일본군이 오지 않아 전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안동과 의성을 거쳐 신령에서 매복해 8월 14일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회오리 바람을 동반한 소낙비가 내려 일본군을 퇴각시키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산남의진이 이와 같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의 이동상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과 산악지대를 이용한 유격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8월 24일 일본군이 영천에서 자양으로 이동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의진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1개 부대는 노항동(魯巷洞), 다른 부대는 검단동(檢丹洞)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선생은 선봉을 맡아 월연동(月淵洞)에서 포위된 일본군을 공격해 그 중 한 명을 참수했다.

산남의진은 보현산(普賢山) 주위 마을에 주둔하면서 북상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용기 대장은 일본군이 입암(立巖, 현 영일군 죽장면)에 유숙할 것을 예상하고, 의병장들에게 매복을 지시했다. 선생은 본진이 입암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퇴로를 막아 모두 섬멸하기 위해 매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9월 1일 저녁 일본군이 입암에 들어와 유숙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용기는 작전대로 본대는 어둠이 걷히는 새벽을 이용해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선생을 비롯해 김일언, 이세기는 퇴로 차단을 위해 매복에 들어갔다. 그러나 매복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가 벌어졌다. 매복하기로 했던 이세기가 먼저 입암을 공격한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자 본진이 입암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입암전투의 패배는 산남의진에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의진의 피해는 너무나 컸다. 대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이 전사하고 입암은 초토화되었다. 대장을 비롯해 지휘부를 구성했던 의병장들이 전사하면서 산남의진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동아일보 1921년 6월 11일자 기사 사본
동아일보 1921년 6월 11일자 기사 사본

선생은 산남의진이 해산의 위기에 처하자 선봉장이 되어 직접 군사들을 훈련시키며 정순기와 함께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진을 재편성했다. 재봉기한 산남의진은 청송의 보현산(普賢山)과 영일군 동대산(東大山) 일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청하분파소, 흥해분파소 등을 공격했으며, 영덕읍을 공격해 일본군을 사살하는 등 경북지역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정환직은 군수품이 부족하고 일본군의 기습이 잦아지자 의병장들을 각지에 파견해 유격대와 군수품을 조달해 각기 강원도로 북상할 것을 지시했다. 정환직이 북상을 지시한 것은 본래 봉기 목적인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기 위함이었으며, 자신이 먼저 북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환직은 강원도로 북상 도중 청하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이때 창녕지역에서 군수품 모집을 하던 중 정환직의 체포 소식을 듣고 이세기 등과 함께 정환직 구출 작전을 시도했으나 비밀이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정환직은 1907년 12월 7일 영암에서 일본군에 의해 순국했다. 산남의진은 또다시 대장을 잃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대구 동화사 근거지로 경북에서 20여 차례 일본군과 전투

정환직 대장이 순국하자 선생을 비롯한 산남의진의 의병장들은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최세윤 대장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경상도 일대에 각 책임자를 배정한 후 소부대로 유격전을 펼치기 위해 의진을 재편성했다. 선생은 의진의 전략수정에 따라 영천 서부지역의 책임을 맡았다. 선생은 동화사(桐華寺)를 근거지로 삼고 팔공산(八公山) 일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산남의진은 1908년 2월부터 7월까지 경북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20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최세윤 대장이 일본군에 체포되고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더 이상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했다. 선생도 이 시기 일본군에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체포 일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생은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다. 선생의 옥중 생활의 시작이었다.

백산실기
백산실기

선생은 합방특사(合邦特赦)로 풀려났으나 일제의 감시가 계속되면서 은거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은거 중이던 선생은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제자인 박상진(朴尙鎭)과 만나면서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박상진은 울산 출신으로 스승인 허위가 의병전쟁 중 순국하자 그의 뜻을 계승해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과 함께 산남의진에서 활동했던 양제안(梁濟安)의 소개로 박상진이 직접 선생을 찾아온 것이다. 선생은 박상진의 독립운동 방략을 듣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선생은 이때부터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거처를 박상진이 거주하고 있던 경주 녹동으로 옮겨 광복회 조직에 착수했다.

선생은 1915년 7월 15일(음력)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했다. 광복회는 한말 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이 연합해 결성한 국내비밀단체였다.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로 민족운동세력이 크게 약화된 시기였다. 민족운동 주체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국내독립운동은 침체된 상황이었다. 광복회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국내 민족운동세력들을 규합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던 단체였다.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인 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도 참여했다. 광복회 결성에 참여한 이들은 이념과 투쟁노선이 달랐으나 독립이라는 목적 아래 연합할 수 있었다.

광복회는 독립을 위해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이 준비되면 일제와 전쟁을 치르려고 했다.. 이를 위해 한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해 식량과 병력을 공급할 계획을 수립했다. 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4대 행동강령 아래 다음과 같이 투쟁 강령을 채택했다.

①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④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⑤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대구)에 두고, 한(韓)·만(滿)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 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⑥ 일인(日人)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 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⑦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日人)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광복회 조직하여 지휘장을 맡고, 만주 길림에도 지회 건설

광복회는 독립전쟁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도 군대식으로 만들어, 본부에는 총사령(박상진), 지휘장(우재룡, 권영만), 재무부장(최준), 사무총괄(이복우)로 구성하고 국내외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전국에 광복회 지부를 설치했으며,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연락기관을 국내와 만주에 설치했다. 선생은 군자금 모집과 국외 연락책임자로 일했다. 선생은 대동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권영목(權寧睦)이 제공한 비용으로 길림에서 손일민(孫一民), 주진수(朱鎭洙), 양재훈(梁載勳), 이홍주(李洪珠) 등과 함께 1915년 12월 길림 광복회를 설치했다. 선생은 박상진과 함께 광복회 결성을 추진하면서 만주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광복회가 결성된 후에도 계속해서 만주와 국내 연락을 책임졌고, 박상진은 선생에게 만주 본부인 길림 광복회 설치를 맡겼던 것이다.

길림 광복회 설치는 광복회 결성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국내지부가 설치되기 이전이었고, 조직을 정비하고 확대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길림 광복회를 빠른 시점에 설치한 이유는 광복회 지도부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만주 조직 필요성의 시급함을 인식한 결과였다. 길림 광복회의 성격은 선생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박상진과 비밀히 국권회복을 목적하야 다수한 동지를 모집하야 대정 육년 유월경에 당시 박상진의 집에서 광복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동회 본부를 중국 길림 지방에 설치하고 조선 지방에는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며 길림 본부에서는 군대를 양성하고 병기를 사드리어 한편으로는 조선 안에 있는 각 지부에 배부하여 무력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얐다. 이와 같이 큰 단체를 설치한 운동비도 우리견이 각 지방에서 현금 칠천만원을 모집하야 당시 봉천에 있는 김좌진을 주고 김좌진을 추천하야 회장을 삼고 독립운동을 하든 터인데

<동아일보> 1921년 6월 11일자, [장승원을 총살한 광복회원 우리견]

선생이 중심이 되어 설치한 길림 광복회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였다. 광복회는 무장투쟁을 위한 사관학교 설립과 군대양성을 실현하기 전에 가장 먼저 만주 본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길림 광복회를 설치했던 것이다.

세금 운송하는 우편마차 공격해 광복회 군자금 확보

선생은 광복회 군자금 모집에도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회는 군자금 모집을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광복회는 1915년 12월 경주에서 우편마차를 공격해 8천7백원을 탈취하였다.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지휘장인 선생과 권영만(權寧萬)이 주도한 것이었다. 경주에서 대구로 세금이 운송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생과 권영만은 총사령 박상진이 제공한 권총을 휴대하고 세금운송마차 공격을 계획했다. 먼저 권영만은 환자로 가장해 우편마차 주인집에 숙박하고 대구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핑계를 내세워 우편마차에 동승했다. 선생은 운송마차를 정지시키기 위해 경주 광명리 효현교(孝峴橋)를 파괴하고 마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편마차가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권영만과 함께 세금을 탈취한 것이다.

우재룡 등 예심종결 결정문 사본(1921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
우재룡 등 예심종결 결정문 사본(1921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

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전국의 자산가를 조사하고 이들에게 의연금을 요구하는 포고문을 발송했다. 포고문 발송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만주에서 발송했는데, 선생은 국내에서 작성된 부호의 명단과 포고문을 만주로 가져가 발송했다. 광복회는 포고문의 효력을 높이기 위해 친일 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경북 칠곡의 장승원(張承遠)과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여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의 반격도 만만찮아 1918년 8월 무렵에는 지도부를 구성했던 대부분의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다. 선생은 다행히 국외로 탈출해 체포를 피할 수 있었고, 잠시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주비단 조직 후 기나긴 수감 생활, 광복 후에는 광복회를 재건

선생은 3.1운동 후 활동을 재개하면서 임시정부와 연계하고자 했다. 이런 논의는 1919년 8, 9월부터였으나 1920년 1월에서야 구체화되었다. 선생은 1920년 임시정부로부터 ‘경성에서 주비단을 조직해 조선독립을 전개하라’는 밀명이 떨어지자 6월 주비단을 조직했다. 주비단은 광복회의 1920년대 활동이었는데, 주비단원들은 ‘광복회’를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고 있었으며, 주비단 조직 이후에도 자신들을 ‘광복회원’이라 불렀으며 선생을 지도자로 여겼다.

그러나 ‘주비단’은 임시정부의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에 연루되어 거의 대부분 체포되었다. 선생은 논산과 서울 외에도 군산을 중심으로 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선생은 57세 되던 1937년 석방될 때까지 무려 16여 년의 긴 옥고를 치러야 했다.

광복회
광복회

선생은 광복이 되면서 광복회를 재건해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정신을 되살려 건국사업에 참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광복회와 주비단에서 활동했던 생존지사들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1일 서울 견지정 111번지에서 광복회를 재건했다. 12월에는 광복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독립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선양사업을 실시했다. 재건 광복회는 1946년 2월 15일 경북 입암에서 ‘고산남의진순절제공위령제(故山南義陣殉節者諸公慰靈祭)’를 거행했다. 이는 광복회 재건을 주도한 선생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선생은 산남의진 출신이었고, 선생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정용기의 순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건 광복회는 이 위령제를 끝으로 1946년 3월을 해소되어 더 이상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선생은 1955년 3월 3일(음력) 대구에서 서거하셨고, 1967년 현재의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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