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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연병호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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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

연병호 , 1894 ~1963 , 독립장 (1963)

1. 연병호는 누구인가

연병호(延秉昊)는 1937년 중국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기까지 20여 년 세월을 국내와 중국대륙, 만주 등지를 무대로 찬연한 자취를 남겼음에도 오랫동안 가려진 독립운동가 중의 한 분이다. 그의 독립운동 행적으로는 1919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나,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의정원, 1930년대 한국혁명당이나 신한독립당 등의 독립운동 정당에서의 활동 정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나마 사실 규명조차 미진한 채, 20여 년간 독립운동의 궤적을 연대기로 작성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중국대륙을 누비며 활동한 때문인지 일제 첩보문서에는 본명 외에도 연병준(延秉俊), 연도명(延圖明), 연병학(延秉學), 연순일(延順一), 연범구(延範九) 등 10여 개의 이명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일제가 착오를 일으킨 것도 발견되지만, 활동 무대가 넓어 연병호의 실체를 파악해내기 어려웠던 점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만주 독립군에 참가할 무렵 본명보다 주로 연병학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연병호는 다양한 얼굴로 비춰진 독립운동가였다.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특히 중국 인사들과 교류가 깊어 중국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다. 때문에 그는 한·중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나갔다. 그런가 하면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그를 두고 일제는 ‘적색운동의 거두’라 지목할만큼 이념과 사상의 폭이 넓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연병호는 1894년 11월 22일 충북 괴산 도안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영향을 끼쳤던 이는 형 연병환(1878∼1926)이었다. 연병환은 영국인의 도움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후 1908년부터 북간도 용정에서 중국 해관원의 일을 보았다.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연병환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용정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2개월간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형의 영향으로 연병호는 1913년 고향에서 소학과정인 동명학교를 마치고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중학과정인 창동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1년 남짓 만에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20세 무렵인 1915년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다녔다. 이때 교육부 간사를 맡고 있던 안재홍을 만나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함께 조직한 조용주와도 친교를 맺기에 이른다. 조용주는 조소앙의 동생으로 1910년대 이후 줄곧 형 조소앙과 행동을 함께하던 인사였다. 조소앙도 이 무렵 잠시 국내에 머물고 있었는데, 안재홍과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동지적 관계를 이루던 사이였다. 연병호는 이들과 만나며 민족현실에 대한 깊은 논의를 나누었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세워 나갔다.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언제 망명했던가는 확인되지 않으나, 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조소앙·조용주와 함께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난에 찬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선 연병호는 20여 년 동안 독립운동의 최전선인 국내에서 비밀단체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주도적으로 결성하였고, 만주 독립군단체인 대한정의단군정사에 참가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유호청년회 등 청년단체 활동에 앞장섰고, 북경에서 무장투쟁론을 앞세워 독립군단체인 신민부의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30년대는 남경에서 정당 활동을 펼치는 등 독립운동의 이념이나 방략에 구애받지 않는 변화무쌍한 독립운동의 자취를 남겼다.

2. 독립운동 2세대의 지도자

그럼에도 연병호의 독립운동 가운데 많은 부분이 왜 세상에 묻혀져야 했을까. 그의 활동을 제대로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부족했던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가 되겠지만, 독립운동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독립운동을 얘기할 때 우리는 주로 독립운동 지도자를 중심으로 살피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독립운동사가 왕왕 지도자들의 영웅담으로 채색되는 일도 없지 않았다.

한국 독립운동은 1894년 의병이 일어난 이래 광복되기까지 50여 년간 4세대에 걸쳐 전개되었다. 전통적 이념에 의한 의병이 1세대를 이루고, 뒤를 이어 근대적 이념에 의한 독립운동세대가 등장하면서 2·3·4세대로 계승 발전해갔다. 독립운동 1세대는 유림계 원로들이 의병에 참가하면서 연령층의 폭이 넓었지만(1820∼50년대 출생), 1870년대 출생자들이 2세대를 이루고, 1890년대 중·후반 출생자들이 3세대, 1920년 전후의 출생자들이 4세대를 이루며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시대 변화와 함께 각 세대간의 학문과 사상이 달랐고, 그러한 변화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1세대가 전통 학문을 익히며 구시대적 안목에서 망국의 변을 극복하려고 했다면, 2세대는 어려서 전통 학문을 익혔으나 격변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면서 구시대와 신시대를 연결하는 가교적 역할을 담당했다. 1세대의 독립운동이 전통적 의식과 방법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들 2세대는 근대적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어간 주체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근대적’ 독립운동의 1세대라 할 수 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신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독립군, 해외 한인사회 등의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가 하면 3세대(근대적 독립운동의 2세대)는 신시대에 태어나 어려서 신학문과 신사상을 접하면서, 새로운 사조인 사회주의 사상을 독립운동에 접목하면서 독립운동의 폭과 깊이를 더해 나갔다. 이들 3세대는 3·1운동에서 만세운동의 전위를 담당했으며, 1920년대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4세대(근대적 독립운동의 3세대)는 1940년대 전반 전시체제에서 식민교육을 강요받던 상황에서도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항일투쟁을 벌이던 학생들, 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등 해외 독립군에서 활동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렇듯 독립운동은 세대를 달리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근대적 독립운동의 1세대(1870년대 출생)는 구시대에 태어나 장성한 뒤 신시대를 맞이한 인사들로서 보재 이상설, 우당 이회영, 석오 이동녕,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안중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격변기에 살면서 구시대를 신시대로 연결하는 가교적 역할을 담당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근대적 독립운동 2세대(1890년대 중·후반 출생)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타파되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는 등 구시대를 마감하고 신시대를 열어 가던 상황에서 출생하여 전통사회의 기성세대를 대신할 주체로서 성장한 사람들이다.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꿈의 상징이었던 이들은 소년기에 망국을 경험하고, 민족의식을 키워오다가 3·1운동 때 청년층으로 성장하여 민족운동의 선봉을 담당해 나갔다.

그렇게 볼 때 연병호는 근대적 독립운동의 2세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2세대는 어려서 신학문을 익히고 소년기에 근대적 사상과 이념을 체득하고, 그와 같은 신념과 철학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독립을 최고 목표이자 가치로 삼았던 것에는 1세대와 다름없지만, 세대간의 역할에 따라 독립 달성을 추구해가는 내용과 방법에서 차이가 없을 수 없었다. 3·1운동 때 1세대가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 갔다면 이들 2세대는 청년·학생으로 만세운동의 대중화를 담당해 갔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전민족적·대중적으로 확산되기까지에는 이들 2세대의 역할이 컸다. 그런 점에서 독립운동 2세대는 3·1운동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주체로 부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나 청년단체의 활동에 앞장섰던 연병호는 그런 2세대 독립운동의 선봉이었고, 새 시대의 독립운동을 이끌어 간 인사였다.

3.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다

獨立紀念日의 말
獨立紀念日의 말

연병호가 독립운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하면서였다. 단체 이름에서 표방하듯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를 지원하는 청년들의 단체였다. 그리고 청년들을 주체로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이 세대로 이어가며 발전해 간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체였다. 3·1운동 전까지만 해도 청년·학생은 기성세대의 지도를 받는 위치에 머물렀으나, 3·1운동을 경험하면서 독자적 운동 주체로 부상한 것이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결성을 주도했던 인사는 연병호를 비롯하여 조용주, 송세호, 안재홍, 이병철 등이다. 이 단체의 특징은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해에서 귀국한 인사들에 의해 조직 결성이 추진되어갔다는 점이다. 당시 상해에는 각처에서 몰려든 독립지사들로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내로라 하는 독립운동의 명사들이 집결했으나,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은 열기만큼 견고하지 못했다. 특히 민족 독립의 큰 뜻을 품고 상해를 찾았던 젊은이들에게는 지연, 학연 등에 의해 형성된 파벌 의식이 구심력의 장애 요소로 비쳐질 수 있었다. 이때 조소앙을 비롯해 연병호, 조용주, 송세호 등은 청년을 중심으로 굳건한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국내에서 청년 비밀단체 성립을 추진해 갔다.

연병호와 조용주 등은 이미 구축한 동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단원을 포섭해 갔다. 불교 승려인 송세호는 1914년 상해로 건너갔을 때부터 조소앙, 조용주 등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월정사 승려인 그는 1916년 귀국했다가 3·1운동 직후 상해로 넘어가 연병호, 조용주 등과 청년외교단 결성을 추진해 갔다. 앞서 보듯이 연병호는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재학 시절 교육부 간사인 안재홍, 조용주와 인연을 맺었다. 안재홍은 조용주는 물론 그의 형인 조소앙과는 1910년 일본 유학때부터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기독청년회, 조선인유학생학우회 등을 통해 동지적 유대를 쌓아 갔으며, 1913년 여름 안재홍이 상해를 여행할 때 신규식과 조소앙이 주도하던 동제사에 가입한 일도 있었다. 1915년 조소앙이 잠시 귀국했을 때 중앙학교 학감으로 있던 안재홍이 교장을 맡아 줄 것을 간청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청년외교단의 단원 대부분은 기독교도였다. 그런 가운데 불교 승려인 송세호, 이종욱, 용창은 등이 참가하면서 종교 이념을 초월한 단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청년외교단에는 단장을 두지 않고 총무 책임체제로 운영되었다. 2인 총무제를 두어 안재홍은 강령 및 규칙 등 운영의 기초가 되는 문안 작성을 맡고, 이병철은 주로 자금과 조직을 맡았다.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 외교특파원으로는 조소앙과 불교 승려 이종욱을 선임했다. 청년외교단은 서울에 중앙부를 설치하고 국내에는 대전, 회령, 충주에 지부를 두고 상해에 해외 지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상해지부는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나갔다. 이종욱은 1919년 8월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되어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청년외교단의 조직과 관련해 특기할 것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결성을 지도했다는 점이다. 이들 두 단체는 명칭도 다르고 구성원이 각기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신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와 여학교를 중심으로 전국적 조직을 갖추었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통해 조직 기반의 폭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조직이 정비되는 가운데 청년외교단은 1919년 8월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건의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했다. 즉 ‘독립운동의 대단결을 촉구하면서 임시정부를 중심한 해외독립운동계의 결집, 국내독립운동단체의 연합, 통일적 중추기관의 설치’ 등을 내세웠다. 독립운동에서 결집과 통일을 당면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연통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외교시보〉를 발행하여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한편 〈국치기념경고문〉을 인쇄하여 독립운동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청년외교단은 외교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독립전쟁에 대비한 적십자회를 설치하는 한편 배달청년단으로의 개편을 추진해 갔다. 그러한 청년외교단의 변신과 발전은 곧 2세대 독립운동의 활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4. 만주 독립군에 참여하다

연병호는 국내에서 청년외교단의 조직이 정비되자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주로 향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을 연계하는 일이었다. 이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전쟁에 대비해 만주 독립군단체의 통합에 힘을 기울여 나갔다. 연병호는 1919년 말 북간도 안도현에 근거지를 둔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해 그 역할을 담당해 갔다. 이 단체는 1919년 3·1운동 직후 의병 출신의 이규·강희·이동주·조동식 등이 구한국 군인들을 모아 조직한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를 임시정부의 권고에 의해 1919년 10월 명칭을 개칭한 것이다. 이 단체의 병력은 중국 보위단 이름으로 편성된 100여 명, 소사하 지방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 240명, 화전현 고상하에 주둔한 100여 명 등 400명이 넘는 대규모의 독립군단체였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와 연계를 가지면서 1919년 말 조직을 새롭게 편성했는데, 군정사 총재 이규, 부총재 강희, 비서과장 홍우찬, 서무과장 강두희, 심판과장 연병호 등이었다. 이때 연병호가 맡았던 심판과장은 총재를 보좌하는 참모로서 임시정부와의 연계가 주요 임무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외에도 연병호가 만주 독립군에 관여한 자료가 발견되는데, 길림성 동녕현 소수분에서 독립군을 편성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구체적 활동상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연병호가 권총과 소총을 휴대하고 있다는 일제 문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독립군 활동에 깊게 관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연대가 불분명하나(아마도 1920년경으로 추정) 안도현 하수산(何須山)에 근거지를 둔 대한독립광복단에서 산포대장(延秉學, 이명 연병호, 병준, 출신 충북 괴산 출신)을 맡은 사실도 확인된다. 만주 독립군과 관련한 행적은 보다 심도있는 조사가 따라야 하겠지만, 외교적 방략에 머물지 않고 무장투쟁의 방략에 의한 독립전쟁을 실천적으로 대비해 갔던 연병호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연병호 판결문
연병호 판결문

5. 상해에서 청년회 운동과 임시의정원 활동을 벌이다

연병호가 만주에서 언제 상해로 돌아왔는지 시기가 명확치 않다. ≪독립신문≫(1920년 3월 30일자)에 〈독립기념일의 말〉이란 글을 게재하고, 용정에 있던 그의 형 연병환도 이 무렵 상해로 옮겨와 거류민단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 추정될 뿐이다(혹시 만주에 있으면서 원고만 투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독립기념일의 말〉은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그동안 독립운동에 대한 감상과 의지를 피력한 글이다. 주목할 것은 투철한 독립정신과 강인한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말로만 독립을 선언하지 말고, 반드시 삼천리강산에서 일제를 구축해 자유를 찾자’, ‘영웅적 사심을 버리고, 조국 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치자’, ‘임시정부가 무엇을 할까 바래기보다는 힘 있는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자’, ‘남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내 힘으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2천만 동포의 철혈을 하나로 모아 독립을 이루어 백두산에 태극기가 휘날리게 하자’ 등 구구 절절히 독립 달성을 위한 열정으로 가득찬 내용이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독립전쟁을 최고의 이념과 방략을 삼아 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청년 연병호가 이런 글을 쓰기까지는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싸운 경험이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말보다는 실천을 앞세우고, 공명심보다는 독립을 위해 진정으로 희생할 자신의 각오를 토해낸 것이었다.

연병호가 상해에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2년 3월 10회 임시의정원회에서였다. 이때 그는 민충식과 함께 신도의원으로 의정원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 무렵 임시의정원은 국민대표회 개최와 관련하여 혼미를 거듭하던 때였다. 임시의정원에 참석하기는 했지만, 연병호는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달라 사면청원을 여러 차례 해보았지만 반려가 거듭되었다. 때문에 임시의정원에 적을 두고는 있었으나,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을 고취하면서 청년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힘을 쏟아 나갔다.

第十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第十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그 첫 번째 결실이 1922년 4월 15일 조소앙 등과 함께 한인의 대동단결 및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상해에서 세계한인동맹회를 조직한 것이다. 결성 직후 회원은 500여 명에 달했으나, 상해에 거주하는 회원은 대략 200여 명을 유지하는 선이었다. 당시 상해의 한인단체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한인동맹회의 약장에 의하면 국적, 종교를 불문하고 17세 이상의 남녀로 조직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그리고 독립·평등·자유를 한민족의 정치·경제·종교상에 실현한다는 것을 강령으로 삼았다. 동맹회의 직원은 조소앙 외 10명이며 연병호는 주무를 맡았다. 그리고 동맹회의 연락처는 상해 프랑스조계 군영로 2호 연병호의 집이었다.

在上海 鮮人團體 一覽表
在上海 鮮人團體 一覽表

두 번째 성과는 1922년 6월 12일 인성학교에서 유호(상해)청년회를 발기, 조직한 것이다. 국민대표회 문제로 상해의 독립운동계는 불안이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유호청년회는 그같은 분위기에서 당파와 관계없이 35세 이하 남자로 자격을 정하고, 난국을 어떻게 해결해 갈 것인가에 대해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때 지정 연설자인 정광호는 “우리 청년은 더 이상 이를 묵인할 수 없어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을 각오로 독립운동의 목적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호청년회를 조직한 것이다, 본회는 각자의 의견을 들어 적극적으로 행동할 방침을 확정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어 윤자영은 “지난 8일 각 방면의 대표적 인사들로부터 의견을 들었지만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시국에 대한 조정책을 강구하기 위해 본회를 조직한 것이다.” 그리고 자유논단의 연설자로 나선 임재호는 “광복사업 아래 오랜 세월을 고심하고 노력했지만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고 각 당파의 사욕을 채우는 데 불과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여운형은 35세 이상으로 회원 자격은 아니었지만, 특별 출연해 “과연 청년들이 비분강개하여 각오를 다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청년들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희생하였다. 여러분들은 영원히 해산하지 않고 결합, 협력하여 사욕단체를 소탕하여 시국의 발전책을 강구하기 바란다”고 장려했다. 이어 결의를 통해 조사위원 9인을 선정했는데, 연병호는 윤자영, 정광호, 나창헌, 장덕진 등과 함께 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는 한편 연병호는 1922년 월 독립운동계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안창호, 신익희 등이 시사책진회를 조직할 때 조소앙 등과 함께 참가했다. 그러나 시사책진회에서도 해결 방도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연병호는 조소앙, 이필규,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고 말았다.

6. 북경과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다

국민대표회가 무산될 무렵 연병호는 북경으로 무대를 옮겼다. 뜨거운 피를 지닌 청년 연병호는 파벌로 얼룩진 상해보다는 혁명의 신사상이 만발하던 북경을 택한 것이다. 후일 그의 이력서에 북경대학을 나왔다는 기록이 있고, 1925년 무렵에도 북경에서 활동하던 것을 보면 1923∼1925년 간에 대학을 다닌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대학에 다니는 한편 중국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한편 무장투쟁 방략에 의한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해 갔다. 그리하여 1925년에는 북경에서 한·중연합체인 동서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여기에는 주로 무장투쟁론에 의거한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중국의 혁명적 인사들이 참가했다. 이 무렵 한국 독립에 대한 전망은 극도로 불투명한 상황이었고, 독립운동계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때였다. 국내는 일제의 기만적 개량정책에 의해 민족사회가 개량화되어 가고, 상해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한 채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25년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하고, 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을 선출하면서 회생에 안간힘을 쏟았다. 1921년부터 제기되었던 이승만 탄핵안이 4년여를 끌다가 가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북경에 있던 연병호는 대통령 선출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천민, 박숭병과 함께 3인의 이름으로 〈교정서〉를 발표했다. 이천민의 본명은 이세영으로 1870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일찍이 홍주의병을 일으키고, 민종식 의병부대에서 활약한 의병계의 거물이었다. 그는 1913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와 그의 후신인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내고, 1921년 만주 독립군단체인 통군부 사령관, 1922년 통의부 군사위원장을 지낸 독립군의 지도자였다. 박숭병은 1919년 임시정부 초기에 군무부위원으로 활동한 인사였다. 임시의정원의 처사를 통렬히 비판한 〈교정서〉의 내용을 떠나, 연병호가 이들과 함께 뜻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무장투쟁 노선을 추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1925년 말 만주로 넘어가 신민부에 참가했다. 연병호가 어떻게 신민부와 연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의병과 독립군에서 이름이 높았던 이세영(이천민)의 권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중국어는 물론 러시아어에도 능통했던 그의 역할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국제공산당 조직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을 받는 일이었다. 이때 연병호는 중국 군벌 풍옥상의 책사로 활동하던 이완(이명 : 공인)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과 직접 교섭한 결과 5만원이라는 거액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26년 2월 1차로 받아온 3천원은 신민부가 계획한 군사강습소의 운영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무렵 신민부는 동녕현에 군사강습소를 세워 독립군을 대상으로 혁명적 사상 및 군사학을 가르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후 신민부와 관련한 연병호의 행적이 추적되지 않지만 국제공산당의 군자금 지원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볼 때, 그 역할을 담당해 가지 않았을까 한다.

7. 남경에서 한국혁명당·신한독립당을 조직하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연병호는 1929년 무렵 남경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혁명당 결성에 참가했다. 한국혁명당은 당시 남경 국민정부의 심계원(審計院)에서 근무하던 신익희 주도로 남경 지역에 머물던 무정부주의 및 사회주의계 인사들이 결성한 것으로 상해의 한국독립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 이후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계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리아래 정당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정당 활동은 중국의 혁명에도 영향을 받은 바 있지만,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을 보다 분명하게 정비한다는 차원에서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한국혁명당에는 연병호를 비롯하여 신익희, 윤기섭, 성주식, 안재환, 김홍일 등이 참가했다. 진보적 민주정당을 표방한 독립운동단체의 단결과 독립의식 고취를 당면 목표로 삼았다. 특히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연합전선을 꾀해 중국 국민당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연병호는 1930년 8월 25일 중국 항주에 있는 국민당 절강성집행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 독립운동의 전후 개황’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일이 있었다. 그의 연설은 중국 국민당 인사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것이었지만,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연설 내용은 ≪중앙일보≫(1930년 8월 29, 30일자)에 실릴만큼 중국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연병호가 행한 연설의 요지는 1) 한국이 일제에 강점된 원인 2) 한국 혁명의 개황 등이었다. 연병호의 독립관이나 세계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연설은 민족혁명에 대한 투철한 의지와 국제적 정세에 대하 탁견 등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놀라우리만치 높은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국내외 각처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실상을 정확하게 꿰뜷고 있었으며, 독립운동계가 나아갈 새로운 미래를 진단하고 있었다. “혁명이란 하루아침에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 광대한 민중이 혁명의 기본 역량이 되어야 한다. 일시적 좌절에 굴복하여 혁명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 혁명지사들의 민중계몽운동은 혁명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절대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10여 년 전만 해도 유치한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한국 혁명운동이 최근 10년 사이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국외 방면에서는 상해의 혁명정부가 전체 한국 혁명을 총지휘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혁명활동의 핵심적 역할은 독립당이 맡고 있다. 독립당의 조직은 민주집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민족독립, 민주건국, 경제평등 등을 종지로 삼고 있다.”, “혁명운동은 대중에 파고들어야 하고, 민중을 훈련시키고 민중을 향한 선전활동을 적극 전개하며, 민중을 조직하여 혁명무력의 근간으로 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의 혁명동지들과 연계를 강화해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공동분투해야 할 것이다.”

연설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무장투쟁 노선을 취했다고 해서 임시정부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중추임을 강조했고, 손문의 삼민주의도 수용하면서 혁명의 주체로서 민중을 중시하였으며,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정당의 통합에도 남다른 열정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32년에는 한국광복동지회,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다가 1933년 2월에는 재만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으로 통합 발전시켜 나갔다. 재만 한국독립당은 상해에서 결성한 한국독립당과 다른 조직으로 1929년 한족총연합회가 김좌진이 세상을 떠난 뒤 홍진, 지청천 등이 생육사란 단체와 통합하여 확대 개편한 것이었다. 그런데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여 1932년 괴뢰 만주국을 세우자 재만 한국독립당은 북경으로 본부를 옮겼다가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김원식 등이 한국혁명당 대표 연병호, 윤기섭 등과 남경에서 통합 논의를 거쳐 신한독립당으로 통합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한독립당에는 당수에 홍진, 상무위원에는 김상덕, 신익희, 윤기섭 등이 선임되었으며, 연병호는 선전위원장을 맡았다. 그런데 양당의 통합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재만 한국독립당은 신민부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점이다. 그런 점에서 양당의 통합에는 신민부와 연결되어 있던 연병호의 조정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여진다. 신한독립당에서 연병호는 상무위원과 집행위원을 겸하다가 제2차 중앙위원회에서 상무위원을 사퇴하고, 집행위원을 수행하는 한편 정무위원회 주임을 맡아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연병호는 1933년 9월 충청도의원의 자격으로 다시 임시의정원에 출석했다. 임시의정원을 떠난 지 10여 년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 임시의정원은 쇠락해질대로 쇠락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어렵고도 힘든 시기에 임시의정원의 간판을 유지한다는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었다. 연병호의 임시의정원 활동은 진강시기까지 이어졌다. 1934년 1월 초 진강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26회 회의에서는 차리석, 윤기섭, 김철, 염온동, 김붕준, 조소앙 등의 기존 의원과 함께 연병호, 최동오, 신공제, 문일민, 양명진, 박창세, 장성산, 김홍서, 송병조 등이 새롭게 선출되어 임시의정원을 운영해 나갔다.

이 무렵 연병호는 신한독립당을 통해 당시 전개되던 대당조직운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대당조직운동이란 독립운동 정당이 각기 분립하고 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해 민족대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1935년 7월 신한독립당을 포함해 5개의 정당과 단체가 통일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민족혁명당의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속에서도 이념의 차이와 파벌이 형성되면서 신한독립당계의 인사들이 탈퇴하고 만 것이다. 통합을 외치면서도 이념과 파벌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당시 독립운동의 한계로 지적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국제정세가 악화되어 갔던 시대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 국제정세는 극단적인 나치즘, 파시즘 등의 군국주의가 팽창하면서 또다시 세계전쟁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그런 공포와 불안이 짓누르던 국제정세는 한국 독립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는 객관적 환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정당이 통합의 명분아래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연병호는 한국국민당에도 적을 두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연병호는 1936년 월간 ≪독립공론≫의 주간을 맡고 있었는데, ≪독립공론≫의 논조가 문제가 되어 김구를 따르는 청년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때 연병호는 청년들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시밭길 같은 독립운동의 길에서 동지 간에 일어나야 했던 참화는 그야말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남경에서의 생활도 여의치 못했다.

延秉昊(연병호) 被浦
延秉昊(연병호) 被浦

그러다가 1937년 초 일제 밀정인 상해거류조선인회장인 이갑녕이 저격되는 일이 일어나자, 일제가 대대적으로 한인 체포에 나섰는데 안타깝게도 연병호는 1937년 1월 7일 상해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그를 국내로 압송해 ‘적색운동의 거두’라는 혐의를 씌워 징역 8년형을 언도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으니, 20여 년의 독립운동에 이어 8년의 옥고 생활을 합쳐 30여 년간을 민족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한 것이었다.

해방 후 연병호는 제헌국회와 2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63년 1월 26일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申翼熙氏等30名 이번 選擧에 再選議員
申翼熙氏等30名 이번 選擧에 再選議員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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