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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연기우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주요공적

강화 진위대 복무, 군대해산 후 제물포에서 거의

13도 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참여

경기, 강원 일대 의병장으로 활약

경기, 강원 지역 의거 계획 중 인제 일본 헌병분대에 부친과 함께 체포(설)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연기우

연기우 , (1865) ~(1910) , 대통령장 (1962)

“아! 슬프다.

삼천리강토를 보전하지 못하니 너나없이 어찌 애통치 않으리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이 몸 차라리 싸워 충혼이 되리라.”

대한제국 군인에서 의병장으로

연기우(延基羽, ? ~ 1911 / 1914)는 한말 의병의 역사에서 반드시 조명되어야 할 독립운동가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에 대한 행적은 물론 생몰 시기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의 이름 역시 한자로는 제각각 전해지는데, 공식적으로는 연기우(延基羽)에서부터 기우(起羽/基宇), 기호(基浩), 봉렬(奉烈) 등의 이명이 있다. 곡산 연씨 대동종친회(谷山延氏大同宗親會) 자료에 의하면, 그의 초명은 민우(敏宇)로 상주목사를 지낸 연비(延庇)의 13세손이라 한다. 그의 본관은 곡산인데 곡산은 황해도 동북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해발 1,100 ~ 1,200m의 산악지대였다.

한편, 연기우는 경기도 삭녕(朔寧) 출생의 강화진위대 부교(副校)로 알려져 있으나1), 적성(積城)의 사인(士人), 즉 적성의 선비로 전해지기도 한다.2) 삭녕군은 1914년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일부는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경기도 연천군(漣川郡)에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적성 역시 연천군 소속이었으나 현재의 파주시에 편입되었는데, 임진강을 끼고 있는 교통상 요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삭녕이나 적성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인접 지역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의 파주시와 연천군 경계지역을 출생지 또는 성장지로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은 경기도이지만 강원과 황해 세 개의 도를 연결하는 주요 루트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언제부터 강화진위대의 군인으로 근무하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연기우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회상기를 남긴 강호여는 연기우를 “용력이 과인하고 성균관 진사여서 학식이 고상하고 의분이 특별한 애국지사였다. 당시 그는 50이 넘는 사람이었는데 그를 ‘대장님, 진사님’하며 모두 존경”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3) 이로써 보면 그는 ‘진사’로 불릴 정도의 학식을 지닌 용맹한 애국자였다. 강호여에 따르면, 연기우는 당시 통감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에서 그를 “날아다니는 사람”이라 평했을 정도였다. 요컨대, 그는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둔 유생이었으나, 가정 사정으로 인해 학업을 포기하고 군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그는 30세 전후의 나이4)로 강화진위대의 건장한 부교(副校)로 생활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경찰은 연기우의 용모를 ‘신장(身長) 5척4촌(약 163 ~ 164㎝ - 필자 주) 가량으로 얼굴 왼쪽 관자놀이와 왼쪽 어깨에서 팔뚝까지 화상을 입었고, 상투를 틀고 수염은 적다’5)고 파악하였다. 그의 외모를 판단한다면, 작은 키에 상투를 틀었고 수염은 성긴 편이며, 왼뺨부터 왼팔까지 화상을 입은 다부진 모습이라 하겠다. 얼굴의 화상 흉터로 인해 금방 눈에 띄는 용모로 짐작된다.

연기우는 강화도의 진무(鎭撫)와 수비를 맡아 보던 지방군으로 수원에 본부를 둔 제1진위보병대대 소속이었다. 1900년에 강화는 경기도의 요충지로 주목받아 한때 진위연대로 승격되어 제1연대 제1대대 본부의 위상을 갖기도 하였다.6) 이듬해 1월 대한제국은 전국의 해안을 방어할 목적으로 포대를 설치했는데, 강화는 이미 1871(고종 8)년에 9개 포대에 총 72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1905년 2월 진위연대가 진위대대로 축소 개편되면서 대대본부는 강화도에서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강화도에 진위연대 겸 대대가 주둔 중일 때는 부사관 이상 약 100명, 일반 사병이 900명이나 되는 거대한 군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분견대로 격하되면서 강화도 분견대 규모는 장교 이하 약 50명 정도였다.7) 이처럼 갑작스런 군제 개편과 더불어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자 강화도 군인들의 불만과 울분이 쌓여만 갔다.

강제 해산령에 봉기한 대한제국 군인(Le Petit Journal 1907.8.4.)
강제 해산령에 봉기한 대한제국 군인(Le Petit Journal 1907.8.4.)

더욱이 1907년 7월은 우리 민족에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 삼아 7월 19일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고위관리를 대거 요직에 앉혔다. 7월 31일에는 고작 1만 명도 되지 않은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처럼 일제는 7월 한 달 동안 대한제국의 국권을 멋대로 유린하였다.

8월 1일 서울 시위대의 해산식을 시작으로 3일에는 수원, 개성, 청주 등 전국 각지의 진위대의 해산식을 거행할 예정이었다.8) 하지만 일제의 군대해산에 반발한 서울 시위대의 무장봉기는 삽시간에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해산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대표적인 부대로는 원주진위대와 강화분견대를 들 수 있다. 8월 2일 원주진위대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이 소집명령을 받아 상경하자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9) 8월 5일 이들은 무기고를 장악하여 1,200정의 소총과 약 4만발의 탄환을 확보한 후 강원도와 경기도, 충북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해산군인 정황 보고문
해산군인 정황 보고문

이러한 소식은 즉각 강화도의 군인들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강화진위대의 소대장은 민완식(閔完植)이었으나, 강화도 군인들은 강화진위대의 전 대대장이었던 이동휘(李東輝)를 믿고 따랐다. 이동휘는 1902 ~ 1904년 사이에 대대장을 역임한 후에도 강화지역 보창학교(普昌學校) 교장, 대한자강회 강화지부장, 감리교회 권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망이 두터웠다.10) 더욱이 그는 1907년 7월 30일 진위대원과 주민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연설로 주민들을 감동시켰다. 8월 2일, 그는 전등사에서 진위대원 연기우, 지홍윤(池弘允), 김동수(金東秀), 전 참교 유명규(劉明奎) 등과 봉기계획을 숙의하였다. 이와 같이 이동휘를 중심으로 전·현직 강화진위대 부사관급 이상의 장병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추진하였다.

그러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강화헌병대는 8월 11일로 예정된 해산식을 9일 오후로 앞당겨 거행하였다. 강제로 해산식을 마친 이들은 무기와 군복을 반납한 후 약간의 급여를 지급받고 떠날 것을 종용 받았다. 강화진위대 부교였던 연기우는 이러한 처사가 군인답지 못한 행동이고 국가의 앞날이 걱정된다며 울분을 토로하였다. 전직 군인들과 주민 수백 명의 호응을 받은 해산군인들은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기와 탄환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강화도의 해산군인들은 항일의병으로 전환한 것이다.

해산군인이었던 강화의병들은 일본군의 강화도 침공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일본군 오구라(小倉) 대위는 8월 10일 보병 1개 소대를 거느리고 강화분견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강화도로 출동하였다.11) 당시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군대해산 항전 기사
군대해산 항전 기사

(8월 10일 - 필자주) 오후 4시에 강화에 도착하여 장차 상륙할 때 韓兵 약 50명이 맹렬히 사격을 하는데 日兵이 强行上陸하여 北方 一地를 점령하매 한병은 江華府로 퇴각하여 다시 民徒 약 300명을 증가하여 성벽을 의지하여 완강히 저항하는지라. 同隊에 소총 10정이 있고, 居民이 계속 증가할 조짐이오, 목하 피차가 對戰 중인데 일병 死傷은 戰死卒이 4명이오 船夫가 1명이오, 行爲不明한 下士 1명이오, 負傷兵이 5명이요 船員은 2명인데, 이러한 정보를 접한 일본군 사령부에서 보병 제14연대 赤司 소좌가 거느린 보병 약 2개 중대의 기관포 2문과 그 부대 장교이하 14명을 오늘 11일 오전 6시 20분에 출발한 열차를 탑승하고 응원토벌하기로 출발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3일자 「江華風塵」 ; 현대문으로 수정, 이하 같음

오구라(小倉) 대위 일행은 갑곶에 도착하여 기관총 2정을 앞세우고 상륙하려다 강화의병에게 기습을 당하였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1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상당한 타격을 받았으나 강화도 상륙에 성공하였다.12) 나아가 이들은 퇴각하는 의병들을 추격하여 강화읍성 동문 근처에 이르렀다. 주민들이 합세하여 해산군인 등 약 600명의 의병들이 동문 성벽에 의지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일본군 사령부는 기관포 2문으로 무장한 보병 제14연대 2개 중대를 증파하여 강화의병을 압박하였다.

일제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일제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일본군이 11일 새벽부터 공격을 개시하자, 강화의병은 강화읍성 밖으로 탈출하였다. 이때 이들은 통진군(通津郡) 군아를 공격하여 총기와 탄약을 확보한 후 지홍윤은 해서(海西) 방향으로, 연기우는 장단(長湍)으로 이동하였다. 일본군은 섬 내에 은신한 강화의병을 찾고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일진회원을 앞세워 집집마다 수색하였다. 그러다 의심이 나는 사람을 발견하면 모조리 죽였는데, 그 숫자만 약 50명이나 되었다.13) 이 과정에서 강화 보창학교장 이동휘가 경시청에 체포되었다.14) 그는 아마도 강화도 해산군인들의 무장봉기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것이다.

강화도를 떠나 임진강 유역으로 자리를 옮긴 연기우는 훗날 일본군조차 두려워하는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장단군 덕물포(德物浦)에서 의진을 정비하여 의병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15) 연기우는 그를 따르는 의병을 모아놓고 국가의 존망이 눈앞에 닥쳤으니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자고 다짐하였다. 아울러 그를 따르던 해산군인들을 능력에 따라 부서를 정하고 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엄정한 군율로 결사토적(決死討賊)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로써 연기우를 비롯한 해산군인들은 마침내 독자적인 의병부대로 전환하였으며 연기우는 생사를 초월한 의병장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다

군대해산은 1907년 후반 이후의 항일투쟁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16) 첫째, 항쟁 지역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군대해산 이전에는 주로 중남부 지역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된 데 반해 그 이후에는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다. 둘째, 전술의 향상과 무기의 확충을 들 수 있다. 군사지식이 풍부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부대의 전략과 전술을 보강할 수 있었고, 더욱이 이들이 신식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의병부대의 구성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군대해산 이전에 의병장들은 대체로 전직 관료이거나 양반 유생들이 많았으나 이후에는 해산군인들의 비중이 매우 높아졌다.17) 아울러 이들이 가담함으로써 산포수와 광부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다. 그리하여 전 민족적 항일전선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18)

이처럼 군대해산은 의병항쟁의 불길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국 각지에서 고립적이고 외로운 항일투쟁을 전개해왔던 의병들은 해산군인들의 항쟁을 통해 점차 자신감을 회복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해산군인들의 투쟁역량을 바탕으로 투쟁방안을 전혀 새롭게 전환시켜 갔다. 무엇보다 먼저 이들은 각기 고립적으로 투쟁해왔던 방법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졌다. 비록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진들과 연합투쟁을 전개하거나 연합을 시도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19) 이때부터는 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의진 간의 연합이나, 연계하는 투쟁전략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20)

이러한 연합전선의 형성이 전국적으로 통일된 대규모의 의진, 즉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21)를 결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요컨대 전국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병부대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갖춘 이른바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과정은 이인영(李麟榮)의 판결문에 잘 요약되어 있다.

피고는 (중략) 항상 통감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자이다. 융희 원년 7월 군대가 해산되고 전 황제폐하가 양위하자 요로의 대신을 매국노라 지목하여 이들을 살육하고 새로이 자기가 신임하는 자로 정부를 조직하여 일본인은 물론 기타 외국인을 국외로 구축하는 등 당시의 정사를 변경할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이구채, 이은찬 등과 공모하여 당시의 거주지인 문경에서 이들이 인솔해온 동지 및 원주에서 해산된 군인 5백 명으로 조직된 3진의 대장이 되어서 전기한 취지로 격문을 전국에 배포하는 한편, 의병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통감 및 각국 영사들에 대하여 “대일본제국이 마관조약(馬關條約)에 반(反)하는 행위가 있음”을 호소하였다. 진군하여 지평에 이르자 그의 도당이 8천명에 이르렀다. 이어 양주로 가서 동지인 허위, 이강년의 무리와 합하니 그 규모가 1만 명에 달하였다. 이에 허위를 군사로 삼고 이강년, 이태영, 이은찬, 김준수, 연기우 등을 각 부장으로 삼아 스스로 총지휘자가 되었다. 도당 각자에게 무기와 군량을 출연시키고 해산군인들을 의병에 가담시켜 탄약을 만들게 해서 일거에 경성으로 들어가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수비대, 기타와 충돌하였다. 거사 이래로 약 4개월 동안 강원도, 경기도의 각지에서 대소 약 38회의 전투를 거듭하였다.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372쪽

이인영 등은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친일대신을 타도하여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고자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하였다. 아울러 거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국의 영사들에게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호소하였으며 전국 각지에도 격문을 보내어 13도창의대진소의 결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전국적인 의진을 결성하여 일거에 서울로 진격하는 등 일본군과 약 4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는 것이다.

서울 진격작전 모형
서울 진격작전 모형

당시 전국 각지에서 16개 의진이 합세함으로써 약 8천명의 연합의진을 형성하며 세를 과시하였다. 그 후 의병장 허위(許蔿)를 비롯한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양주로 집결함으로써 48개 의진 약 1만 명의 규모로 증가하였다.22) 이때 연기우도 참여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13도창의대진소의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3도창의대장에 추대된 이인영은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과 상의하여 진명(陣名)을 정하고 각도 의병의 칭호를 부여하는 등 전국적인 연합의진을 편성하였다.23) 하지만 1908년 1월경 이인영 등 지도부는 13도창의대진소의 부서를 재정비하였다.24) 그중 군사장 허위는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까닭에 경기도 의병을 대표하면서 13창의대진소의 모든 군사활동을 통괄 지휘했다. 연기우는 경기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허위와 연계되어 참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1907년 가을부터 임진강 유역의 연천, 적성 등지에서 허위를 비롯한 김규식(金奎植), 권중설(權重卨)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일제의 구축(驅逐, 어떤 세력을 몰아서 쫓아냄)에 앞장섰다.25) 아마도 이때 허위와의 인연으로 그도 13도창의대진소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1908년 1월 연기우는 13도창의대진소의 대대장의 직책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나 지도력의 부재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특히, 그는 앞장서서 진군하다가 김규식과 같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연기우가 부상당한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선생(허위-필자주)께서 친히 敢死兵 100명을 거느리고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되는 지점에 전군이 와서 모이기를 기다려 일제히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後軍은 시기를 어기고 일병이 졸지에 몰려와 장시간 사격을 몹시 심하게 하니, 이때 후원군이 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퇴진되었고, 김규식 연기우가 모두 탄환을 맞고 붙들렸다.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 『독립운동사자료집』 2, 241-242쪽

군사장 허위가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연합의진 간에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하게 된 과정과 일제와의 교전 중 김규식과 연기우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황현(黃玹, 1855-1910)은 “허위와 이인영의 부하는 조수연, 김규식, 홍인관, 이병채, 장순원, 오수영, 김연상, 황재호, 이명기, 연기우, 고재석, 박종한, 윤인선, 황순일, 김운이, 이동섭 등 모두 16인인데, 역사(力士)로 이름을 떨쳤다. (중략) 의병장 허위가 붙잡혔으며, 부하 김규식도 체포되었는데 뛰어난 용맹이 있어서 압송되는 길에 포승을 끊고 몸을 솟구쳐 달아났다”26)고 전하고 있다. 아마도 이때 연기우는 김규식과 더불어 부상을 당해 체포되었다가 탈출한 것으로 짐작된다.

경성 동대문 밖에서 의병의 사체를 찾는 가족들(런던신문 1907년 8월)
경성 동대문 밖에서 의병의 사체를 찾는 가족들(런던신문 1907년 8월)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되자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된 후 군사장 허위는 경기도 임진강 유역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27) 연기우 역시 마전과 장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연기우는 새롭게 탄생한 의진의 지도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적인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시도한 서울진공작전은 역사적 의미가 각별하였다. 먼저 13도창의대진소는 최초로 편성된 전국적인 연합의진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시도한 연합전선의 구축이나 의진 간 연계 전략은 이후 자주 시도됨으로써 후기의병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만, 전술적 한계와 연합전선의 미숙함 그리고 일본의 정치적 결단에 기대하는 인식의 한계 등은 이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불세출(不世出)의 의병장

연기우는 창의존양군수부(倡義尊攘軍帥府)의 대장이라거나, 동한창의존양대장(東韓倡義尊攘大將) 혹은 창의한북대장(倡義漢北大將)이라 표방하였다.28) 세 가지 명칭에 ‘창의’가 모두 들어있는데, 이는 스스로 의병임을 가장 중시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한북’은 한강의 북쪽에서 의병활동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며, ‘존양’은 대한제국을 존중하고 외세, 즉 일본을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울진공작전 이후에도 그는 임진강을 넘나들며 경기도의 포천, 삭녕, 철원, 연천, 마전, 장단, 적성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당시 신문에는 그에 관한 기사가 매우 많은 편인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의병대장 연기우씨는 근일에 부하 40여 명을 거느리고 삭녕, 적성 등 군에 종종 왕래하는데 연씨는 지혜와 용맹이 겸전하여 일 헌병과 접전하되 한 번도 패하지 아니한 고로 그 지방에 주재하는 일 헌병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가는 곳마다 민간에 터럭만한 폐단이 없는 까닭에 인심이 안온하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24일자 「거룩한 의병대장」

4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린 의병대장 연기우가 지혜와 용맹함을 겸비하여 일본 군경과 싸워 한 번도 패하지 않아 오히려 일본 헌병이 두려워할 정도라는 것이다. 특히, 민폐를 끼치지 않아 주민들의 두터운 지지를 기반 삼아 이들의 활동이 장기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연기우는 일제의 강력한 진압작전을 피하기 위해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 지역에 있는 광덕산(廣德山)에 가옥 다섯 채와 백운산에 2인용 가옥 20여 채를 지어 근거지로 삼았다.29) 광덕산 산채는 천연의 요새로 3면이 절벽이어서 통행할 수 없이 오로지 외길뿐이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일제 군경에 발각되어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지혜와 용맹함을 겸비한 연기우는 일본 군경의 두려운 존재였는데, 그것은 그가 강화진위대의 부교로서 군사적 지식이 출중하고 구국애민의 신념이 투철했던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거느린 의병 역시 저마다 출중한 능력을 가진 자들로 선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 점은 강호여의 회고에 잘 나타나 있다.

의병무기 및 신표
의병무기 및 신표
의병무기 및 신표
의병무기 및 신표
의병무기 및 신표
의병무기 및 신표

우리 의병대 지도간부들 대장은 연기우, 한문 지식이 상당한 당시 진사, 중군장 원철준, 좌익장 임학도, 우익장 이수영, 선봉장 심상근 모두 일등 포수들 애국자였다. 군대 서기장 김극수, 길흉판단 선생 백군보가 참모부에 있었다. 군인들은 300 ~ 400명에 달하였는데 절대 다수는 40 ~ 50세가 되는 깊은 산간에서 한평생 짐승잡이 하던 1등 포수들이었고 (중략) 연기우 대장 명령으로 적으면 20 ~ 30명씩 많으면 40 ~ 50명씩 영솔하고서 전투공작을 하였고, 길흉판단 선생이 손가락을 폈다 구부렸다 하면서 길흉을 판단하고 공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대 규율은 엄숙하였고, 장교들이나 군인들 간에 친목하였고 애국정신만은 과연 경탄하게 튼튼하였던 것이다.

『늙은 빨치산들의 회상기』, 「강호여 회상」

연기우 의진은 총 3 ~ 4백 명으로 구성되었다. 연기우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아장(亞將) 제갈윤신(諸葛允信)·중군장(金仲運, 원철준)·좌익장(임학도)·우익장(宋秉泰, 이수영)·선봉장(延成七, 심상근)·보호장(保護將 洪元裕)·사령장(司令長)·향관(餉官)·중대장(李愚錫, 鄭濟煥)·별무관(別武官, 洪天喜)·서기장(김극수)·참모부(백군보)·부장 등이 의진의 지도부를 형성하였다.30) 하지만 연기우 의진의 정확한 편제는 알 수 없다.

이들은 주로 참모인 백군보의 조언에 의지하여 군사작전을 전개하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20 ~ 30명 혹은 40 ~ 50명 단위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애국심이 매우 출중하고 군율도 엄숙했는데, 의병들은 대부분 포수 출신의 40 ~ 50대 연령층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우 의진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의병 20여 명은 대부분 20 ~ 30대가 많으며 직업 역시 농업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이처럼 애국심과 결속력이 강한 연기우 의진은 주민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연기우 의병장이 직접 나서서 시국의 급박한 상황을 주민들에게 간절히 호소하는가 하면,31) 이들은 가는 곳마다 주민들을 괴롭히거나 민폐를 끼치는 일이 전혀 없었다.32) 물론 연기우 의진 역시 항일투쟁을 위한 물자조달과 무기의 확보 등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연기우는 각 군의 면장들에게 군자금 조달 명령서를 발부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부민(富民)들에게는 군수전을 요청하였고, 통과하는 마을이나 각 면에는 옷이나 짚신의 제공 등을 부탁하였다.33)

더욱이 연기우 의병장은 주민이나 부호로부터 조달받은 군자금과 물자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음의 신문기사에서 그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의병장 연기우씨가 삭녕 등지로 향하여 가는데 그 자제가 길에서 그 부친을 보고 자기의 집에 생활이 곤란하여 굶어 죽게 된 정을 고하매 연씨가 엄절히 거절하고 조금도 애휼하는 뜻이 없는지라 그 부하에 있는 사람이 군수전 중에서 오십 환을 사사로 획급하였더니 연씨가 그 사정을 알고 가로되 그 돈은 공용에 쓸 것이라니 사사로 쓰는 것이 불가하다하여 그 돈을 즉시 환수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국문판> 1910년 2월 1일자 「장하고 굳은 마음」

그는 군자금으로는 굶어죽을 처지에 놓인 자신의 친아들조차 구휼할 수 없다며 부하가 몰래 아들에게 준 공금을 환수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다소 애매하지만,34) 이로써 의병장 연기우는 군자금을 사사로이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기우는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항일투쟁만을 최우선시 하였다. 이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의진의 무장력을 강화하였다. 예컨대, 북간도의 이범윤(李範允)을 통해 신무기를 구입하거나,35) 1909년 5월 이들은 강원도 이천에서 프랑스인 천주교 전도사의 집에서 다량의 탄환과 총기를 빼앗아 무장한 적도 있었다.36) 심지어 헌병보조원이 소지한 양총 탄환을 몰래 빼내어 무장을 강화하였다.37)

1910년 1월경 “연기우는 보통 한장(韓裝)으로 피스톨 및 패검(佩劍)하고 부하의 과반(過半)은 다갈색의 양복을 입고 학생모를 쓰고 일견(一見) 보조원(補助員)같이 가장(假裝)하고 나머지 부하는 보통 한장(韓裝)을 하고 30년 식 총 7정, 엽총 14정, 화승총 1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38) 다시 말해 이들은 한복이나 다갈색 양복을 착용하고 신식무기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서 일본 군경과 맞서 싸웠다.39) 때로는 가짜 의병들을 징치(懲治, 징계하여 다스리다)하거나 토색질을 일삼는 토호들을 처단40)하는 등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연기우 의진은 일본 군경과 싸울 때 결코 상대방을 얕보지 않았다.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강기동(姜基東), 이진룡(李鎭龍) 등이 이끄는 의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하며 일제 군경을 괴롭혔던 것이다. 이들이 연합하여 활동하는 모습을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朔寧, 金川, 麻田 等地로 出沒하는 延基羽, 田聖瑞, 李鎭龍 等이 京畿道 楊州, 抱川 地方으로 根據하는 姜基東과 氣脈을 相通하여 日本人을 苦케 한다 함은 屢報하였거니와 去番 順川民擾事件 以來로 徒衆이 增加하는데 最近 黃海道 觀察使의 報告를 據한즉 從來로 2, 3十名 乃至 4十名의 團體로 出沒하던 者 等이 7, 8十名의 多衆을 이루어 示威運動을 行하는데 警察署及憲兵은 嚴密히 搜索하나 彼等은 모두 地理에 精通한 者인 故로 出沒을 自由로 하며 또 搜索隊를 逢着하면 卽時 土民으로 粉裝하여 踪跡을 藏匿하는데 其中 李鎭龍과 같은 者는 農民과 混하여 汽車로 京城에 頻繁 往復한다 하였더라.

『황성신문』 1910년 3월 3일자 「海西暴警」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연기우 등의 의병장들이 서로 기맥을 통하면서 일본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데, 평남 순천(順川)의 시장세(市場稅) 사건 이후 의병들의 규모가 크게 증가해서 20 ~ 30명에서 40명 규모에서 70 ~ 80명 규모로 증대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군경이 이들을 엄밀히 수색하더라도 모두 현지 지리에 정통하여 자유자재로 활동하며 주민으로 변장해서 종적을 감춘다는 것이다. 이진룡 의병장은 농민들과 섞여서 기차를 이용하여 서울을 자주 왕래할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평남 순천의 시장세 사건으로 인해 의병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평남 순천/의 시장세 사건이란 1910년 1월말 약 3천 명의 시장 상인과 농민들이 일제의 시장세 징수를 거부하며 재무서와 일본인 상점 등을 습격, 방화한 것을 말한다.41) 이는 일제의 가혹한 경제수탈정책에 대한 저항운동이자 한국인의 대표적인 생존권 투쟁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상인과 농민들이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의병항쟁에 투신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적괴 연기우(1914.6.23.)
적괴 연기우(1914.6.23.)

이와 같이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활동하던 의진들은 서로 협력하여 연합전선을 형성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였다.42) 특히, 연기우, 강기동, 이진룡 등은 흔히 “삼괴(三魁)”43)로 알려질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던 것 같다. 이들은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수시로 서울을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44) 아마도 이들은 13도창의대진소가 못다 이룬 서울진공작전의 염원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들의 굳은 의지는 의병장 김수민이 연기우에게 “국세(國勢)가 일이월변(日異月變)하여 동포의 구활이 묘연무기(渺然無期)하여 인민의 화색(禍色)이 박두한즉 종금(從今) 이후로 양 진이 연합하여 경성에 침입하여 조속도지(早速圖之)”45)해야 한다는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김수민은 연기우와 의형제를 맺고서 신식무기를 주고받으며 강력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46) 김수민 의진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넘나들며 활동했는데, 군기가 엄정하고 유격전에 능숙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보수집 능력도 탁월하여 대일항전을 장기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는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09년 8월까지 활동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고 말았다.47)

연기우를 비롯한 경기도 의병의 서울 공격설은 배일여론의 조성에도 한몫을 했을 것이며, 일본 군경에게도 적지 않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즉, 일본 군경은 연기우가 이끄는 의진과는 가능한 맞서지 않고 회피하였다.48) 이 무렵 일제는 연기우 의병장을 회유하기 위해 삭녕수비대장을 통해 면담을 요청하였다.49) 이에 대해 그는 정미7조약을 폐기하고 각지에 있는 토벌대와 병참기지를 철폐한 후에나 면담할 수 있노라고 답신을 보냈다. 다시 말해 일제가 식민정책을 포기하고 물러나지 않는다면 끝까지 싸울 것임을 천명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의병진압에 총력을 기울였다. 1910년 3 ~ 4월 사이에 일제는 연기우 의진을 비롯한 경기, 황해지역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기우 의진의 중군장 김중운과 선봉장 연성칠 등이 전사하는 등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연기우 자신도 철원에서 체포되었다가 구출된 적도 있었다.50) 5월에는 일제가 연기우와 강기동을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를 별도로 파견하기도 했다.

결국 6월에 이르러 일제는 연기우의 방탄 요갑(防彈腰甲)을 찾아내었다.

鐵原憲兵管區所에서는 去五日 朔寧郡 葛峴里 閔鎭西氏家에 延基羽의 防彈腰甲이 있음을 듣고 卽往搜索하여 押收하였는데, 그 腰甲은 牛皮 二匣으로 만들어 馬蹄釘을 閒隙이 없도록 釘鎖하였으며, 길이는 1尺6寸5分, 넓이는 1尺7寸인데 小銃의 彈跡 2處가 있으나 穿入치 못하였는 故로 參考物로 만들만 하다더라.

『황성신문』 1910년 6월 18일자「防彈腰甲押收」

철원 헌병대는 삭녕군 갈현리 민씨 가에서 연기우의 방탄 요갑을 압수했는데, 소가죽과 말편자로 만든 요갑으로 총탄이 뚫지 못한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연기우 의병장의 방탄요대가 피탈되었다는 점은 더 이상 항일투쟁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무렵 연기우의 부하들이 경기도 포천에서, “이번 가을에 우리 대장 연기우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쳐 일본 병은 물론 일본인을 국외로 내쫓고 합방을 방지하려 한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초려(焦慮)하고 있으나 군자금이 없고 또 병기부족으로 뜻과 같지 않다. 국가의 존망이 목전에 절핍(切逼)한 오늘 우리 동포는 속히 군자금을 갹출(醵出)하여 외국으로부터 예리한 병기를 구입, 거사하여 합방을 막아야 한다.”라며 군자금을 강요했다는 것이다.51)

연기우 의병장 부하 체포 기사(1910.6.10.)
연기우 의병장 부하 체포 기사(1910.6.10.)

6월 이후부터 일제의 강점까지 연기우의 동향은 신문기사를 통해 딱 한 번 확인되는데, 강기동이 그와 더불어 시국의 급박한 상황을 협의할 것이라는 내용이다.52) 곧이어 7월에는 그의 부하 현학인(玄學仁)이 부하 11명을 데리고 자수했으며, 역시 그의 부하였던 이주보(李周甫)는 서울 전동에서 체포되었다.53) 이와 같이 1910년 중반 이후 연기우 의병장의 근황을 확인하기 어렵다. 일제 역시 그가 미국이나 연해주로 도주하였거나, 강원도 북부지역에서 신병을 치료 중이어서 부하들을 일시 해산시킨 것으로 파악하였다.54)

나라가 망한 지 1년이 지난 1911년 12월 중순 연기우 의진의 별무관(別武官) 홍천희(洪天喜)가 경기도 연천 헌병대에 체포되었고,55) 이어 의병장 연기우를 사살했다는 내용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지난 23일 경기도 가평군파견소의 헌병상등병 上山宇兵衛씨는 헌병보조원 丁光燮·李東根 등 2명을 거느리고 적도를 수색차로 가평 북방 약 6리 되는 華岳里 부근에서 출동 중이더니 동일 오후 7시경에 적도 연기우 및 부하 3명이 共히 산중에 도주함을 알고 즉시 추격하여 상호 격투하다가 적의 신식 연발총 및 소지품을 압수하고 연기우는 흉부 복부 및 左腕의 3개소에 중상을 당하여 즉사하였고 보조원 2명은 다른 적과 격투하다가 무수 부상을 당하고 필경 총으로써 적을 刺殺하였는데 그 나머지는 도주하였고 上山 上等兵은 4彈, 보조원은 각 40여 彈을 발사하여 上山 상등병은 중상을 당하였고, 적도의 총을 탈취하고 연기우의 印章, 書翰, 書籍, 軍帽 등을 압수하였다더라.

『매일신보』 1911년 12월 28일자 「延基羽를 射殺-憲兵補助員의 大活動-」

연기우는 부하 3명과 가평헌병대와 마주쳐서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때 연기우의 인장과 모자, 편지와 서적 등을 압수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1911년 2월에는 의병장 강기동이 북간도로 망명하기 위해 원산에 갔다가 그곳 헌병대에 체포되어 희생된 바 있었다.56) 이로써 짐작건대 나라가 망한 후 연기우와 강기동은 해외 망명을 도모했을 것이다.

그런데 3년 후 연기우 의병장은 다시 한 번 신문지면을 장식하였다.

6월 14일 麟蹄分隊 岩店派遣所에서 賊魁 延基羽及同人의 父 延成漢을 체포하여 目下 인제분대에서 取調中인데 연성한은 연기우됨을 自服하였으나 연기우는 默而不答하며 17일 밤 以來로 인제읍 동방 약 60리 지방에서 총 2柄을 휴대한 賊徒 4명이 배회한다는 풍설이 있는 고로 인제분대에서 수색대를 急行케 하였다 하며 연기우는 明治 40년 間에 時時로 數名의 부하를 率하여 경기 강원 황해 3도에 跨하여 橫暴를 逞하다가 그후 행동이 不明한 자이다.

『매일신보』 1914년 6월 23일자 「賊魁 延基羽 遂就縛」

1914년 6월 14일 인제분대 암점파견소 헌병들이 연기우 부자를 체포하여 취조 중인데, 연기우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병장 연기우의 1911년 12월 전사설(戰死說)과 1914년 체포설(逮捕說)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연기우 의병장 전사 보도기사(1911.12.28.)
연기우 의병장 전사 보도기사(1911.12.28.)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일제는 1910년 강점 이후 의병장을 체포하면 그의 옥중 동정이나 재판과정, 혹은 처벌내용을 『매일신보』를 통해 공개하였다. 앞서 보았던 의병장 강기동이 그러하고,57) 1915년에 체포된 채응언(蔡應彦) 의병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58)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위의 체포기사는 어쩌면 해프닝일 수 있을 것이다.

의병장 연기우(1913.10.12)
의병장 연기우(1913.10.12)

하지만 연해주에서 간행되는 『권업신문』 등에는 1913년 중반 이후 연기우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가 잇달아 게재되었다.59) 신문기사를 종합해보면, 그가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내 모처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는데, 오래지 않아 경기·강원 일대에서 ‘대거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내었다. 당시 연기우는 “산골짝에 다니며 배고프면 눈 집어먹고, 졸음이 오면 돌 틈에서 자면서 4, 5년을 일인과 싸운 사람”60)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다면 연기우 의병장은 1911년 12월 23일 경기도 가평군 화악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닐 수 있는지 궁금하다. 당시 발표된 기사로 본다면 매우 구체적인 전투상황을 전해주며, 그의 인장이나 모자, 편지 등의 자료로써 연기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더욱이 그가 전사했다기에 더 이상의 후속 기사는 찾을 수 없다.

연기우 의병장 소식(1913.11.26.)
연기우 의병장 소식(1913.11.26.)

하지만 위의 『매일신보』의 체포기사가 나오자, 『권업신문』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노라는 반응을 보였다.61) 이 기사에서는 연성환이 고문을 이기지 못한 거짓 자백일 가능성이 크므로 『매일신보』의 기사를 신뢰할 수 없다는 기대 섞인 기사로 채워져 있다. 그가 매우 유명한 의병장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와 관련된 기사는 게재되지 않았다. 따라서 체포기사는 오보일 가능성도 있다고 짐작되나, 그 이후 연기우 의병장의 행적은 전혀 알 수가 없다. 1913년 해외에서 간행된 신문에 연기우의 근황이 게재된 것으로 보아서는 1911년 사망설은 사실이 아닐 수 있으나, 1914년 체포설 이후 그는 종무소식이란 점이다. 아래의 인용문에서도 연기우는 체포되어 순국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과연 1911년 이후 의병장 연기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문제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1907년 8월 강화도에서 시작된 연기우의 항일투쟁은 임진강을 넘나들며 경기, 강원, 황해 3도의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그는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여 부상을 당해 체포되어 생명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오로지 국권회복에 몸과 마음을 바친 불굴의 의병장이었다. 정부에서는 연기우 의병장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끝으로 『대한계년사』에 수록된 연기우 의병장에 관한 기사로써 그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고자 한다.

연기우 의병장 공적비(강화도)
연기우 의병장 공적비(강화도)

연기우는 積城의 선비로서 본래 충의를 품었는데, 일본인들이 장차 우리나라를 병탄할 것을 알고서 드디어 개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여러 차례 일본인과 싸워 번번이 기발한 계책으로 격파하였다. (연기우는 의병이) 지나는 수많은 읍과 마을을 추호도 범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모두 그 의기에 감동하여 혹은 소를 잡고 술로 대접하였으나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일본인이 가장 꺼려해서 그 아들을 잡아다가 거금을 주고서 그 아버지를 유인해 오도록 시키면서 만약 귀순한다면 총애하여 벼슬을 내릴 것이라 하였다. 기우가 분노하며 말하기를, ‘내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다만 大義를 부식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말을 한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휘하 병사들에게 아들을 포박하여 총살하라고 명령하였다. 많은 의병들이 울며 처형을 중지하라고 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울지 않은 자가 없었다. (중략) 후에 의병이 패하여 부하는 다만 수십 명으로 이리저리 떠돌다 갖은 풍상을 다 겪었음에도 (국권회복의) 뜻을 조금도 꺾지 않았다. 국망 후 결국 일본인에 체포되어 해침을 당했다.

정교, 『대한계년사』 하, 300 ~ 301쪽

연기우는 일본의 간교한 흉계에 놀아난 아들을 죽이고, 오로지 구국애민을 실천한 불세출의 의병장이었다. 따라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그의 충성심과 의리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항일독립운동기념탑(연천 출신 독립운동가 50인 각인) 경기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372-1
항일독립운동기념탑(연천 출신 독립운동가 50인 각인) 경기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372-1
13도창의군탑
13도창의군탑

참고문헌

ㆍ『韓國獨立運動史』 11 ~ 18, 국사편찬위원회, 1982 ~ 1989.

ㆍ『獨立運動史資料集』 2 ~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ㆍ『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ㆍ黃玹, 『梅泉野錄』, 국사편찬위원회, 1955.

ㆍ鄭喬, 『大韓季年史』 하, 국사편찬위원회 1957.

ㆍ『大韓每日申報』, 『皇城新聞』, 『勸業新聞』, 『每日申報』

ㆍ『韓國獨立運動史』 1, 국사편찬위원회, 1965.

ㆍ『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ㆍ崔翠秀,「1910年 前後 江華地域 義兵運動의 性格」,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 1988.

ㆍ金順德,「후기의병운동」,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5.

ㆍ김순덕,「京畿地方 義兵運動 硏究(1904 ~ 1911)」,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2.

ㆍ홍영기,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주석

1)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포상자 공적조서 및 내부 경무국 편, 「暴徒史編輯資料」, 1909 ; 『독립운동사자료집』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602쪽. 한편, 이 시기의 강화진위대를 정확히 말한다면 진위 제1대대 강화분견대라고 해야 옳으나, 강화진위대로 통칭하고자 한다.

2) 鄭喬, 『大韓季年史』 下, 국사편찬위원회, 1957, 300쪽. 한편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崔翠秀, 「1910年 前後 江華地域 義兵運動의 性格」,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 1988, 64쪽의 각주 87 참조). 국가보훈처에서 건립한 「순국열사 의병장 연기우 공적비」에서도 구리면 인창리에서 성장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일제 군경은 그를 경기도 연천출생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暴徒에 관한 編冊」, 융희4년 6월 5일 ; 『한국 독립운동사』 18, 국사편찬위원회, 1989, 309쪽). 이렇듯 연기우의 출생지가 다양하게 전하고 있어서 객관적인 자료가 발굴되지 않은 한 그의 출생지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곤란할 것 같다.

3) 이인섭 편, 『늙은 빨치산들 회상기』(독립기념관 소장), 「강호여 회상」 참조.

4) 강호여는 연기우의 연령을 50세 이상이라 짐작했으나, 최취수는 1880년대 초반에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였으며(최취수, 앞의 논문, 64쪽 각주 87 참조), 일제측 자료에서는 30세로 파악하였다(『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3년 2월 12일 ; 『한국 독립운동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84, 445쪽).

5) 『暴徒에 관한 編冊』, 융희3년 2월 12일 ; 『韓國獨立運動史』 13, 444 ~ 445쪽.

6) 최취수, 「1910년 전후 강화지역 의병운동의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 1988, 53쪽.

7) 위의 논문, 54 ~ 55쪽. 강화도 해산 군인들의 의병활동은 최취수의 논문을 주로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8)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469-470쪽.

9) 『한국 독립운동사』 1, 254쪽.

10) 최취수, 앞의 논문, 63쪽.

11) 조선주차군사령부 편, 위의 책, 686쪽.

12) 『한국 독립운동사』 1, 국사편찬위원회, 1965, 622 ~ 623쪽.

13)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4일자 「江華消息」.

14)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5일자 및 8월 17일자 「잡보」.

15) 추헌수 편, 『資料 韓國獨立運動』 2, 「韓國志士小傳」, 연세대 출판부, 1972, 362쪽.

16)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485 ~ 486쪽.

17) 위의 책, 389 ~ 491쪽.

18) 홍영기,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9쪽.

19)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202 ~ 203쪽.

20)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1907년 11월 28일자 「지방소식」.

21) 13도창의대진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신용하,「全國 ‘十三道倡義大陣所’의 聯合義兵運動」,『한국 독립운동사연구』1, 1987.

오영섭,「韓末 13道倡義大將 李麟榮의 生涯와 活動」,『한국 독립운동사연구』19, 2002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선인, 2007.

22) 「13도 창의대장이인영체포시말」, 『한국 독립운동사』 1, 719쪽.

23) 「제3회 이인영문답조서」, 『한국 독립운동사』 1, 737-738쪽.

24) 『大韓每日申報』 1909년 7월 30일자「義兵總大將 李麟榮氏의 略史 續」 참조.

25) 최취수, 앞의 논문, 73쪽.

26) 황현, 『梅泉野錄』, 국사편찬위원회, 1955, 452·456쪽.

27) 신용하,「全國 ‘十三道倡義大陣所’의 聯合義兵運動」, 『한국 독립운동사연구』 1, 29쪽.

28) 『한국 독립운동사』 1, 675 ~ 676, 710 ~ 711쪽 참조.

29)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3년 9월 23일 ; 『한국 독립운동사』 15, 416 ~ 417쪽 ; 김순덕, 앞의 논문, 144쪽.

30) 연기우 의진의 지도부 명단은 판결문과 신문기사 등 각종 자료를 종합하여 구성한 것이다.

31) 『대한매일신보』(국문판) 1909년 7월 11일자「의병장연설」.

32) 위의 신문 1910년 2월 24일자「거룩한 의병대장」.

33) 위의 신문 1909년 4월 15일자, 1910년 3월 15일자, 1910년 1월 9일자「잡보」 ; 『大韓民報』 1909년 11월 9일자「秋穀執留」, 1910년 3월 18일자「憲隊搜索」 등.

34) 같은 신문의 같은 날짜 국한문판에서는 기사가 다소 다르다. 삭녕을 행군할 때 친아들이 아닌 동사(凍死) 직전의 빈민가를 위해 그의 부하가 군수전 50원을 주었는데, 그가 군수전은 공용에 사용할 뿐이라며 환수했다는 것이다. 즉, 친아들이 아닌 삭녕의 빈민으로 기사화되어 있다. 국한문판의 빈민과 국문판의 친아들 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 불분명하지만, 연기우가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며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병활동에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까 한다.

35) 『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24일자「義兵連絡」

36)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3년 5월 14일 ; 『한국 독립운동사』 14, 287 ~ 288쪽.

37)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92쪽.

38)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4년 2월 14일 ; 『한국 독립운동사』 17, 274쪽.

39)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0일자, 10월 22일자, 1910년 1월 11일자「잡보」 등.

40) 연기우는 빈민들을 괴롭히는 진드기라는 별명을 가진 우승덕의 처단에 앞장섰다. 주민들이 그에게 우승덕을 처단해 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조치였다(『늙은 빨치산들의 회상기』,「강호여 회상」).

41) 『한국 독립운동사』 1, 505-515쪽

42) 경기도와 황해도의 의진들이 긴밀히 협력하여 연합항쟁을 도모하는 신문기사가 매우 많은 편이다. 예컨대,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8일자, 6월 8일자, 12월 22일자, 1910년 1월 15일자, 1월 20일자, 4월 1일자「잡보」와 『대한민보』 1910년 1월 5일자「抱川騷擾」·「元山通路杜絶」 등.

43) 『황성신문』 1910년 6월 8일자「三魁行動」.

44) 위의 인용문에서 이진룡이 서울을 자주 왕래한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연기우 역시 서울을 왕래한 것 같다(『대한매일신보』1909년 4월 22일자, 1910년 3월 22일자「잡보」).

45)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8일자「義將通牒」.

46) 金順德,「京畿地方 義兵運動 硏究(1904-1911)」,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2, 137쪽.

47) 『大韓每日申報』 1909년 8월 15일자「義將取調」 ; 『大韓民報』 1909년 8월 17일자「口供如流」.

48)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6일자「義將橫行」 및 같은 신문(국문판) 1910년 2월 24일자「거룩한 의병대장」.

49) 위의 신문, 1909년 8월 7일자「잡보」.

50) 김순덕, 위의 논문, 188-190쪽.

51) 「暴徒에 관한 編冊」, 융희4년 6월 24일 ; 『韓國獨立運動史』 18, 301-302쪽.

52) 『皇城新聞』 1910년 7월 7일자「準備捕捉」.

53) 위의 신문, 1910년 7월 20일자「李周甫被捉」.

54)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4년 6월 5일, 6월 10일 ; 『한국 독립운동사』 18, 308-309·373쪽.

55) 『每日申報』 1910년 12월 15일자「延基羽의 部下 押上」.

56) 위의 신문, 1911년 2월 15일자「賊魁 姜基東 就縛」 ; 2월 21일자「姜基東의 絶食」 ; 4월 19일자「姜基東의 砲刑」.

57) 金度勳,「韓末 姜基東의 義兵 活動과 그 性格」, 『軍史』 35, 1997.

58) 홍영기,「蔡應彦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 『한국 독립운동사연구』 26,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2006.

59) 『勸業新聞』 1913년 7월 20일자「내지 의병 소식에 대하여」, 10월 12일자「의병대장 연기우씨」 및 『국민보』 1913년 11월 26일자「연기우씨에 희망 소식」 등.

60) 『권업신문』 1913년 7월 20일자「내지 의병 소식에 대하여」.

61) 위의 신문, 1914년 7월 5일자 「연대장 피착이 사실일까」 및 「시사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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