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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양한묵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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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양한묵 , 1862 ~1919 , 대통령장 (1962)

세상의 어려움에 눈을 돌리다

양한묵[梁漢黙, 1862.4.29(음) ~ 1919.5.26] 선생은 1862년 음력 4월 29일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계리에서 제주 양씨 상태(相泰)와 낭주(郎州) 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이고 호는 지강(芝江)이었다. 선생의 집안은 원래 4 ~ 5대조부터 100여 년 동안 전남 능주에서 살다가 10대조인 산형(山迥) 때 해남으로 이주하여 300여 년 동안 거주하였다. 사회적으로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양반의 명문가였다. 선생의 12대조 팽손(彭孫)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1대 조부터 벼슬길이 막혔지만, 10대조 산형(山迥)은 해남에서 선비들과 시를 짓고 생활하였고, 조부 제하(濟河)도 영암 양사재(養士齋)의 분관을 운영하면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또 선생의 어머니도 경전과 역사를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가까운 조상이 벼슬길에 나간 사람은 없지만, 선생은 시골의 양반, 즉 향반으로 대접받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선생의 집안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조부는 영암 양사재의 분관을 운영할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며, 관개 수리사업을 벌여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아버지 대에는 집안에 상당한 정도의 노비를 거느릴 수 있는 경제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선생의 집안은 해남에서 평판도 좋았다. 조부는 수리사업으로 인근 농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아버지는 1886년 전국에 콜레라가 유행할 때 여러 가지 비법을 사용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였으며, 어머니는 1857년 가족과 상의하여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선행으로 주변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이것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선생의 집안이 피해를 입지 않은 배경이 되었다.

선생은 일곱 살 때 어머니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고, 여덟 살 때에는 양사재(養士齋)에 들어가 유학을 배웠다. 15세에 이르러서는 상서와 춘추 등 유가의 여러 서적을 섭렵하였고, 18세 때에는 불교·선교·천주교·신교(神敎)·음양복술에 관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선생은 19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나주군 산포면 송촌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선생은 능주목(綾州牧) 오도면(吾道面) 율치(栗峙, 현재의 화순군 북면 율치리)로 이거하여 학생을 교육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면서 선생은 시간이 나면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구월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묘향산 등의 명산대찰을 주유하였고, 이 세상을 구제할 진인(眞人)을 만나고자 남해의 자하도를 찾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외척의 발호와 관리의 탐학,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고통 받는 백성의 실상을 목격하고, 나라를 구할 방책이 무엇인지 모색해보기도 하였다.

사회 개혁을 꿈꾸며 동학에 입교하다

지강 양한묵 선생의 문집 표지
지강 양한묵 선생의 문집 표지

선생은 전국을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농민을 비롯한 피지배층이 정신의 구원과 세상의 개혁을 위해 동학에 입교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1893년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동학도들이 교조신원운동을 벌이는 것을 보고 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선생이 동학과 직접적인 접촉을 갖게 되었던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894년이었다.

1894년 선생은 능주의 고향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능주에는 남원대도소 김개남 휘하의 동학농민군이 진출하여 자금과 식량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 전투의 막바지에는 전라남도의 장흥·보성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이 다수 체포되어 능주목으로 압송되어 왔다. 이때 선생은 사형을 당하게 된 무수한 동학농민군을 구출하였다고 한다. 자세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시 선생의 활동은 능주목사 조존두(趙存斗)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1895년 말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의 도움으로 9품직인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능주목사인 조존두가 1893년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로 활동하여 안면이 있던 어윤중에게 선생을 천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1895년 11월부터 1896년 7월까지 고향인 능주에서 세무관으로 활동하였다. 천성이 대소사를 소홀히 함이 없었던 선생은, 창고에 난마와 같이 산적한 정리되지 않은 문서를 신속히 정리하여 능주의 향리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선생은 1896년 7월 상경하여 전동에 거주하였다. 이곳에서 결의형제를 맺은 바 있던 조존두와 교류하며 지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려고 각축하는 상황에서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자주·자강·민권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목격하였다. 선생이 1897년 중국의 북경·천진·산동 등지를 유력(遊歷)하였던 것은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처한 한국의 불꽃을 지켜보려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1898년 선생은 일본과 세계열강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알아보고, 세계정세를 시찰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개화운동을 추진하다가 일본에 망명하여 있던 조희연·권동진·오세창 등과 교류하며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였다. 이들의 소개로 선생은 1902년경 이상헌이라 변명하고 돈 많은 장사꾼으로 지내던 동학의 교주 손병희를 만났다. 당시 손병희는 1901년 일본에 온 후 국내에서 동학 자제 24명을 데려오게 하여 교토의 부립제1중학교에서 수학케 하는 등 동학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선생은 손병희와 교류하며 손병희의 개화사상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선생은 손병희가 러일전쟁의 상황을 이용하여 민회운동을 전개하려던 1904년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는 동학의 평등사상과 개벽사상에 공감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학세력의 힘을 이용하여 정치와 사회의 개혁을 이루려던 선생의 열망에 따른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연구활동과 교육을 통한 계몽에 전념하다

일제가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했음을 알리는 보도기사(<황성신문> 1904년 7월 25일자).
일제가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했음을 알리는 보도기사(<황성신문> 1904년 7월 25일자).

1904년 10월 경 동학이 진보회(進步會)를 설립하고 개화운동을 전개하였을 때 선생은 국내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동학교단이 설립한 진보회와 1904년 말 진보회와 일진회(一進會)가 통합한 후 결성된 일진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선생은 동학교단이 일본정부와 결탁하여 친일적 개화운동과 정치개혁운동을 벌이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아니면 조존두·조희연 등과의 인연으로 양반지배층 혹은 황실과 관련된 단체에서 활동해야 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1904년 7월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양여요구에 반대하여 이동재, 송수만, 심상진 등과 서울에서 보안회(輔安會)를 설립하고 그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 철회로 보안회가 곧 해체된 까닭에 선생의 활동이 잘 확인되지 않지만, 선생이 반일적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고 하였던 것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은 1904년 12월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 등의 독립협회 계열의 인사들이 일진회를 타도할 목적으로 황실의 지원과 보부상의 참여 속에 설립한 공진회(共進會)에 일반회원으로 참여하였다. 공진회는 제도에 입각한 황제의 통치권 행사, 법률에 의한 정부의 행정, 법률에 의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 규정 등을 강령으로 삼아 실현하려고 하였다. 선생도 공진회가 1905년 2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기까지 이와 같은 입장에서 활동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생은 입헌군주정의 실시를 위한 헌정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05년 5월 중순 윤효정(尹孝定)·이준(李儁)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의 설립을 발기한 후, 같은 달 24일 이를 창립하였다. 헌정연구회의 평의원으로서 입헌군주제의 실시와 관련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생은 ‘헌정요의(憲政要義)’를 저술하여 1905년 7월 15일부터 8월 3일까지 <황성신문 皇城新聞>에 연재하였다. 선생은 이 글에서 국가의 본의와 국가와 황실의 분별, 국가와 정부의 관계, 군주와 정부의 권한, 국민과 정부의 관계, 군주의 주권과 국민의 의무와 권리 등 국가학과 정치학의 기본적인 문제를 설명하였다.

선생은 1905년 8월경 손병희와 동학의 천도교로의 개편 문제 등을 상의하기 위하여 일본에 갔다. 선생은 일본에서 손병희와 동학의 근대화 문제를 상의하는 한편 이기·나인영·윤주찬·오기호 등과 포츠머스에서 러일전쟁의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 가서 한국의 입장을 알리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자 일본 천황과 총리대신 등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자 서신을 보내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헌정연구회가 1905년 11월 일본의 보호를 요청한 일진회와 을사늑약을 방임한 정부의 대신을 비난한 일로 해산당한 직후에는 곧바로 다른 정치·사회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다. 1906년 4월 헌정연구회의 윤효정 등이 주도하여 대한자강회를 설립하였을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1907년 11월 대한자강회의 윤효정·장지연 등과 천도교계열의 권동진·오세창 등이 설립한 대한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일반회원으로 활동하였을 뿐이다. 일본의 우익세력과 통감부가 후원하는 계몽단체에는 참여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참여한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던 것 같다.

호남 출신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선생은 1907년 7월 호남 출신의 이기·고정주·강화·백인기·나인영·윤주찬 등이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표로 호남학회를 창립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1908년 2월 15일 열린 임시총회에서는 임시회장과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선생은 이 날 ‘교육방침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하여 교육계몽의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이후 주로 천도교 활동에 전념하던 선생은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李在明) 등이 이완용을 저격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에 연루되어 12월 하순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이재명사건 관련자 중 오복원(吳復元)과 김용문(金龍文)이 천도교도로 선생의 문인이었으므로 일경이 이완용저격 미수사건이 선생의 지시로 일어났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선생은 당시 학생들의 신변을 걱정하여 즉각적인 행동보다 향후를 대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910년 4월 14일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그 때까지 근 4개월의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천도교 교리서를 펴내며 근대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다

1904년경 일본에서 동학에 입교하였던 선생은 손병희를 도와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천도교의 근대화운동에 기여하였다. 1905년 8월경 일본에 가서 손병희와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는 문제를 협의하였고, 1905년 말에는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천도교대헌 天道敎大憲]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노력에 힘입어 1905년 12월 동학은 천도교로 변경될 수 있었다.

양한묵 선생의 심문조서
양한묵 선생의 심문조서

1906년 초 손병희와 비슷한 시기에 귀국한 선생은 1906년 2월 10일 천도교 대도주로부터 집강(執綱)이란 원직(原職)과 현기사(玄機司) 진리과원(眞理課員)이란 주직(住職)을 받았다. 이후 선생은 1906년 8월 서북삼도교구 관장자, 1906년 10월 현기사장 서리에 임명되었고, 1907년 4월부터 9월과 1908년 4월부터 1910년 3월까지 현기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면서 천도교의 교리를 정비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선생은 1909년 법도사(法道師)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천도교의 교리서 편찬에 많은 공을 세웠다. 1906년 [천도교문], [천도태원경 天道太元經], [천도교전 天道敎典], 1907년 [대종정의 大宗正義], [성훈연의 聖訓演義], [도경 道經], [체리종약 體理宗約], [현기문답 玄機問答], 1909년 [대종정의 大宗正義], 1912년에는 [무체법경 無體法經]을 저술·간행하였다. 선생은 이 저작을 통하여 사람과 한울과의 관계를 밝히고, 동학의 교리를 현대문명에 맞게 근대화하였다.

한편 선생은 교리강습소 교육의 장려를 통하여 천도교인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선생은 1907년 6월 지방교구에 “종교가 흥왕하는 시대를 당하여 … 교인의 정성과 면목이 도저히 진리에 몽매하면 교인자격의 큰 흠절이라. 학교를 설립하여 신리학(神理學)과 인계학(人界學)을 아울러 가르치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다. 그리고 1908년 7월 20일에는 각 교구의 성화실 내에 야간교리강습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게 하였으며, 1909년 9월에는 기존의 성(聖), 경(敬), 신(信)과 외에 교육을 담당하는 법과(法科)를 신설하였고, 1909년 11월에는 연원주의 계급을 정할 때 강습소 설립인의 다소와 강습소 졸업생의 다소를 참작하도록 하였다. 이 교리강습소에서는 학생들에게 근대적인 지식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활동은 3.1운동 시 각지의 천도교인들이 투쟁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배경이 되었다.

선생은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후에는 세계질서의 재편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노령, 만주, 중국, 미주의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고 한다. 또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천도교인 회유공작에 맞서 손병희와 힘을 합하여 한국의 문화와 윤리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아울러 1910년대 후반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3·1 독립만세운동 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다

선생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大阪每日新聞>과 <경성일보>를 보고 미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알게 되었다. 자기 민족의 일은 자기 민족이 처리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서, 한국이 마땅히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2월 20일 서울 돈의동에 있는 권동진(權東鎭)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큰 일이 있다. 우리 조선을 위하여 매우 좋은 일이 있다고 전제하고 그 기쁜 일은 국권을 회복할 독립선언을 하려고 한다. 구주전란 평화회의에서 종래 속국인 각국은 전부 독립 자치를 용인할 것을 결의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조선의3 국권회복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양한묵 선생의 유해 반장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2년 5월 5일자).
양한묵 선생의 유해 반장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2년 5월 5일자).

즉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하여 종래 속국으로 있었던 나라들을 독립·자치케 한다는 소식이 있으니, 국권회복을 희망하는 한국인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선언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계획이 손병희·오세창·최린과 협의하여 추진되고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깜작 놀랄 만한 계획을 들은 선생은 매우 기뻐하며 그 계획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과 수단을 연구할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있던 윤익선(尹益善)에게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알리고 그로 하여금 학생을 동원케 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전남의 화순에 사람을 파견하여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알림으로써 이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인 3월 15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될 수 있도록 하였던 것 같다.

선생은 2월 23일 권동진의 집을 방문하여 그로부터 기독교계 및 불교계와 힘을 합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왔다. 그리고 2월 25일 다시 권동진의 집에 가서 그가 보여준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돌려주었다. 선생은 2월 27일 오전 손병희의 집에 가서 홍병기로부터 저녁에 김상규(金相奎)의 집으로 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동일 오후 4시 손병희의 비서인 김상규의 집에서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 등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선생은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예비모임에는 요통이 심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3월 1일 오전 손병희를 방문하였고, 학생을 비롯한 군중의 절제되지 않은 행동을 피하기 위하여 시위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고, 그곳에 참석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독립선언식 직후 출동한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가혹한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는 과정에도 선생은 민족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선생은 경성지방법원 예심괘 담당검사 영도웅장(永島雄藏)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문: 피고는 조선이 독립이 될 줄 아는가?

답: 반드시 되리라는 생각은 없어도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문: 금후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지금 강화회의에서도 민족자결이 제창됨으로써 일본정부의 원조로 자립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금번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고, 금후도 기회만 있다면 할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야심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고 독립으로써 조국이 부흥된다면 대단히 좋겠다고 생각하고 나의 직책인 천도교의 포교에 종사할 것이다.

요컨대 선생은 이번 거사로 독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한국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하였다. 독립 후 어떤 권력이나 지위를 획득하려는 야망도 없었으며, 단지 한국인이므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독립 후에는 전과 같이 천도교의 포교활동에 전념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양한묵 선생 무덤 전경
양한묵 선생 무덤 전경

이러한 선생의 당당한 답변은 더욱 가혹한 일경의 고문을 불러왔으리라 짐작된다. 감옥에서의 고초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면회한 아들에게 ‘몸과 마음이 편안하니 너는 근심하지 말라’는 쪽지를 보내어 가족의 근심을 덜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그러나 56세의 노구가 일경의 고문을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선생은 1919년 5월 26일 서대문감옥에서 길지 않은 인생을 마감하고 환원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중순국이었다. 순국 후 선생은 서울 수철리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1922년 5월 고향을 그리던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 천도교단이 주선하여 선생의 묘소를 전남 화순으로 반장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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