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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신현구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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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구

신현구 , 1882 ~1930 , 독립장 (1968)

선생은 17세의 나이에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스가 세운 공주 양명학교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졸업 후 한문교사로 재직하다가,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선생은 국내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을 조직하고 그 세력을 전국적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대한독립애국단은 국내에 존재했던 비밀결사 단체 중 규모와 조직력, 활동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연통제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일경에 피체된 이후 5년간의 감옥생활 끝에 출옥한 선생은 신간회 발행에 참여하면서 순국 전까지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에 힘을 쏟았다.

3.1운동 이후 시작된 독립운동의 전성기

3.1운동으로 결집된 민족적 역량은 국내외 독립운동의 새로운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해외 각처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군 등이 일어났으며, 국내에서는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들이 대거 생겨났다. 신현구(申鉉九) 선생이 1919년 4월경 서울에서 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3.1운동의 대중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조직된 대표적 국내 비밀결사였다. 당시 국내 비밀결사 가운데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처럼 처음부터 임시정부 지원을 표방한 단체가 있었는가 하면, 대한독립애국단이나 조선민족대동단처럼 자생적으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와 연결되면서 임시정부 지원을 행동 지침으로 삼은 경우도 있었다. 3.1운동 직후 서울에 본부를 두던 단체가 적지 않았으나, 규모나 활동면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이 가장 크고 활발했다. 이들 비밀결사는 3.1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이 어떻게 발전되어갔던가를 보여주는 구체적 실체로서 주목되어야 한다. 또한 국내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었던 이들 비밀결사는 국외 독립운동에 민족적 기반을 제공하면서 독립운동 진작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독립운동의 대중화 과정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수많은 비밀결사가 총력적 항쟁을 전개하면서 가히 독립운동의 ‘르네상스’라 일컬을만한 전성기를 구가해 갔다. 3.1운동 직후 서울을 비롯하여 국내에서 생겨난 비밀결사의 수만도 100여 개가 넘었으며, 임시정부 수립 후 전국 각처에 연통부와 교통국 등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이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 만주에서 70 ~ 80여 독립군 단체와 2만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이 독립전쟁을 벌였으며, 여기에 농민, 노동자, 여성, 청년, 학생들에 의한 각 부문운동과 사회, 경제, 문화분야에서 전개된 다양한 운동까지 살펴보면 명실공히 민족총력항쟁의 기간이었다. 선생의 대한독립애국단은 그 같은 독립운동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주역의 하나였다.

대한독립애국단 본부를 결성하다

선생은 1882년 충남 논산군 부적면 안천리에서 신지균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평범한 농가에서 성장한 그는 17세 무렵까지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다가, 공주 영명학교를 설립한 미 선교사 윌리엄즈(우리암, 禹利岩)를 만나면서 기독교에 입문하여 공주 영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영명학교를 마친 뒤 그는 공주 계룡에서 사립 원명학교를 세워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기독교 전도사업에 힘을 쏟았다. 20세 무렵인 1902 ~ 3년 모교인 영명학교에 한문 교사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이규갑 등과 교유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이 무렵 교육계와 기독교계 인사가 그러했듯이, 그는 계몽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온화한 성품의 그는 1908년 대한학회에 ‘탄애신불애국(歎愛身不愛國)’이라는 논문을 기고한 바도 있었다. 선교사들과 교류가 많았던 그는 1909년 정동교회의 미 선교사 텔러의 한국어 교사로 지내면서 1년 남짓 서울 생활을 보냈으나, 1910년 망국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낙향하고 말았다.

공주 영명학교 10회 졸업사진
공주 영명학교 10회 졸업사진

공주에서 생계를 위해 서적상, 미싱회사 사원으로 일하다가 1915년경 서울에 올라와 이화학당 부속 여학교인 아현여학교, 공덕리여학교 등에서 한문 교사를 지냈다. 이때 정규식, 안교일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3.1운동을 민족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그는 보다 구체적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1919년 4월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한다. 3.1운동의 열망을 지속적 독립운동으로 이어가기 위한 전국 규모의 조직을 구상한 것이었다. 본부의 초기 단원은 동생인 신현창을 비롯하여 권인채, 김순호, 김영식 등이었다. 신현창은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1918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뒤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권인채는 동향 출신의 후배로 공주 영명학교에서 같이 근무한 일이 있고, 이 무렵 연희전문에 재학 중이었다. 김순호는 중앙학교 학생이었다. 이들은 문봉의, 서병철, 안황, 안교일, 김영철, 이시우, 김상덕 등을 동지로 포섭하면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연고 지역을 바탕으로 지단 설치에 힘을 기울여 갔다. 김영철은 경성의학전문 학생, 김상덕은 연희전문 학생이고, 안교일은 이화학당 부속 여학교 교사였다. 선생과 문봉의를 제외하고는 20대에서 30대 초의 신교육을 받은 청년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단장인 선생 아래 김순호가 재무총장, 문봉의가 재무감독을 맡았다. 부서 구성으로 볼 때 초기의 주요 활동은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국 규모로 조직을 확대해 나가다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애국단은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 등지로 조직을 확대해 갔다. 전라도의 조직 활동은 5월 초순 재무총장 김순호의 지도로 김영식이 주관했으며,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전북 고창지역에 지단을 설치할 수 있었다. 김영식은 강대선에 이어 박인식, 이기하, 유희영 등을 단원으로 포섭하였고, 고창 부호 강대직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본부의 재정 자금을 충당하였다. 주목할 것은 이들이 자금 모집 과정에서 ‘임시정부 지원’을 내세우지 않고 있던 점이다. 일반적으로 대한독립애국단이라 하면 임시정부 지원단체로 알려져 있지만, 결성 초기부터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대한독립애국단은 자생적 독립운동단체로써 독자적 활동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독립운동 열기가 국내외로 확산되면서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부상하자 그에 따른 지원 활동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 갔던 것 같다. 이 무렵 선생은 동생 신현창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 나갔다. 당시 임시정부는 6월 말 안창호가 내무총장에 취임하면서 7월 초 임시정부 국내조직인 연통제 시행을 공포하고, 국내 기반을 획득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가던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년 7월 충청도 지단과 8월 강원도단 설치 과정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표방하고 나섰다. 안창호가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을 격려하며 선생에게 보낸 감사장은 지단 설치에 주요한 활력과 근거로 활용되었다.

연통제 역할을 수행하다

임시정부의 성립은 민족의 주권적 의지의 표시였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조직화와 발전을 위해 최선의 길이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존립과 활동을 위해서는 국민적 기반이 있어야 했다. 임시정부의 성격상 국토와 국민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내로부터 국민적 지원이 없이는 그의 유지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당면한 문제는 국내로부터 인적, 물적 자원을 조달하는 국내 조직의 확보였다. 그리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국민적 의지를 한데 모으기 위해 각처 정부의 통합을 주도하는 한편 국내 조직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국내 조직을 확보하기 위해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하는 한편, 국내 독립운동단체를 결속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연통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이었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진두 지휘한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핵심적 조직으로서 ‘국민간에 기맥을 상통하고 복국사업의 완성을 기하여 내외활동의 일치’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연통제의 주요 활동은 임시정부의 선전, 통신연락, 자금수합 등이었다. 연통제는 1919년 7월 10일 공포된 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북부 지역에서는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연통제가 실시되지 못한 지역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던 대한독립애국단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등과 같은 단체들이 연통제 역할을 대행하고 있었다. 이 무렵 안창호가 선생에게 대한독립애국단 조직에 진력해달라는 부탁은 그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표방하면서 벌였던 임시정부 선전, 국내 정보의 수집, 자금 모집 등의 활동은 연통제의 활동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통해 국내 비밀결사와 임시정부가 더욱 밀착되었으며, 동년 9월경 임시정부 통합으로 국민적 열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들은 서울에 연통본부를 설치하는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하여 10월 초에는 상해에서 이종욱이 국내로 파견되어 대한독립애국단,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조선민족대동단의 인사들과 만나 연통본부 설치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이때 선생도 윤종석, 송세호, 나창헌, 전필순 등 청년외교단과 대동단 인사들을 만나며 연통본부 설치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연통본부의 설치는 의친왕 상행 망명 계획이 탄로나 조선민족대동단 조직이 파괴당하면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선생이 이수택 선생을 위해 쓴 추도문
선생이 이수택 선생을 위해 쓴 추도문

제2의 만세운동을 추진하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유력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국치일을 기념하거나 임시정부 통합을 축하하는 시위를 비롯하여, 국치일을 기념하는 시위, 소위 시정기념일과 천장절을 기해 전국 각처에서 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한독립애국단 역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강원도단에서 임시정부 통합 축하시위와 성루 본부에서 소위 천장절을 기해 제2의 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한 것이 그것이다. 강원도단에서 거행한 만세시위는 상해 임시정부의 강원도 특파원 신상완이 9월 중순경 강원도단 서무국장 강대려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축하시위의 계획을 전달하면서 추진되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처에 생겨났던 임시정부가 동년 9월 초 통합되면서 독립운동계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강원도단은 서울 본부에서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전달받아 10월 10일 철원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단원 전원이 참여한 만세시위는 치밀한 계획아래 진행되었다.

서울 본부의 시위는 조선민족대동단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등의 단체들과 연합하여 추진되었다. 이들은 3.1운동과 같은 제2의 만세운동을 벌이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여기에는 임시정부의 지원도 따랐다. 당초에는 소위 천장절인 10월 31일을 기해 거행키로 했으나, 임시정부에서 전달된 ‘대한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가 국외 인사들로 이루어져 만세시위의 효과를 떨어트릴 수 있다고 하여 민족대표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부득이 연기되고 말았다. 조선민족대동단원 나창헌이 인선을 맡은 새로운 민족대표에는 국내 비밀결사의 주도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런데 학생과 청년들의 동원 책임을 맡았던 민강과 강매의 행적이 일경에 탐지되면서 11월 1일 체포되었고, 11월 10일 결행한 의친왕의 상해 망명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조선민족대동단의 조직이 파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생은 신변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한독립애국단과 조선민족대동단의 인사들을 규합하면서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추진시켜 나갔다. 11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11월 20일 선생마저 피체되고 말았다. 선생 피체 이후 안교일, 이신애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당초보다는 훨씬 축소된 규모로 11월 28일 안국동에서 거행하였다.

선생이 피체되었을 때만해도 대한독립애국단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강원도단에서 활약하던 조종대가 1920년 초 체포되면서, 강원도단인 ‘철원애국단’에 이어 서울 본부와 대한독립애국단의 지단이 발각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대한독립애국단의 이름으로 1백여 명이 넘는 단원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대한독립애국단의 영수였던 선생은 이 일로 5년여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선생의 판결문
선생의 판결문

신간회 발기인으로 다시 민족운동에 나서다

선생이 출옥할 무렵인 1920년대 중반은 3.1운동 직후의 사정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된 이후 독립운동의 구심력을 상실해 갔고, 사회주의가 독립운동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계는 적지 않은 대립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민족세력의 통합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 갔으며, 독립군 근거지인 만주에서는 독립군단의 조직이 정비되면서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3부체제로 정립되어 갔고, 중국 관내에서는 국공합작의 직접적 영향 아래 중국국민당 방식의 통일전선이 시도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1925년 소위 치안유지법이 발포되면서 여러 세력 간의 이념 공방보다는 공동연대의 지혜를 강구해 갔다. 그러나 일제의 분열정책에 편승한 타협주의의 대두는 민족사회를 타협 대 비타협의 구도로 재편해 갔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세력은 1926년 융희황제(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6.10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3.1운동과 같이 전 민족적 만세운동을 목표로 추진되었던 이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면서 당초 계획에 크게 못 미치는 규모로 그치고 말았지만, 민족독립을 위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6.10만세운동에서 형성된 민족통일전선은 이후 국내외 민족세력의 최대 당면과제로 부상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안창호는 6.10만세운동에 높이 평가하면서 중국 상해에서 민족대당 건설을 제창하며 민족대당운동에 앞장서 갔다. 국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1927년 2월 신간회 성립으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 조선일보 등의 세력이 협동하여 성립한 신간회는 3.1운동 이후 전개된 민족통일전선운동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선생은 신간회 발기인으로 신간회 창립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리고 경성지회 설립에도 힘을 쏟았다. 경성지회는 설립준비위원회들이 오랜 기간 공을 들인 끝에 1927년 6월 10일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회원 290여 명, 방청객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설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경성지회는 신간회 지회 가운데 가장 규모도 크고 활동도 활발한 비중을 가진 지회였다. 이때 선생은 서기의 일을 맡았다. 그런데 이 무렵 잡지 <심경(心鏡)>에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실었다가 다시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옥고 사실이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신간회 경성지회 설립 이후 선생의 활동이 찾아지지 않고, 1930년 7월 13일 사망한 것으로 미루어 3년 6월 형의 옥고를 치른 뒤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한 것으로 판단된다. 민족독립을 위해 10여 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한 선생의 독립운동은 광복의 초석으로 청사를 빛내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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