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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찬익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박찬익

박찬익 , 1884 ~1949 , 독립장 (1963)

중국에서 벌인 독립운동은 중국정부의 정책에 영향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에 대한 외교는 절대적인 분야였고 이 일선에 섰던 분이 박찬익 선생이었다. 광복군 창설이나 좌우합작, 정부 요인과 가족의 생계 문제 해결,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까지 그의 노력이 빠진 곳이 없었다.

망명자 규합하고 중국과 교섭하여 총기와 실탄 조달

박찬익(朴贊翊, 1884.1.2 ~ 1949.3.9) 선생은 1884년 1월 2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반남(潘南) 박씨이며, 호는 남파(南坡). 집에서 사서삼경을 마칠 무렵인 1902년 그는 심탄실과 결혼했다. 1904년 서울로 옮겨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에게 대들다가 학교를 중퇴했다. 이 무렵 그는 일제의 황무지개척 요구안에 대한 반대투쟁에 참여하고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에는 고향 파주로 가서 사립보통학교 통역교사를 지내다가, 신민회에 발을 들여 놓고, 황해도 등 서북지역을 돌며 계몽교육운동에 나섰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1908년 다시 상경하여 공업전습소 염직과를 마쳤다. 졸업 무렵 그는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의사원으로 뽑혔다. 특히 대종교에 들어가서 장차 그가 갈 길을 정하게 되었다. 박찬익이 대종교를 택한 이유는 잃은 국가를 되살리자면 단군 신앙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910년 2월에 그는 만주로 망명했는데, 서일이 앞장서서 대종교 중심의 무장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자 여기 적극 뛰어들어 망명자들을 규합했다.

특히 1913년 그가 중광단에서 필요한 무기 구입을 위해 중국과 벌인 교섭은 대단한 성과를 가져왔다. 보병총 300정, 권총 10정, 수류탄 150발, 탄환 5,000발 등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신흥무관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대한독립의군부 창설에 참여하고,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9인으로 서명

1915년 5월 그는 대종교 중간급 지도자인 상교(尙敎)로 진급했다. 그러면서 그는 간도를 떠나 길림과 북경, 그리고 연해주를 오가며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활동내용은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이다. 대종교 총본사 지회를 설립하면서, 이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일제가 대종교에 대해 ‘미신타파’를 내걸고 나선 근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겉으로는 ‘미신’을 타파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단군 신앙을 짓밟아 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망을 부수려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장작림에게 대종교를 금지시키라고 주문했다.

박찬익 선생의 사진
박찬익 선생의 사진

박찬익은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 창설과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 참가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의 ‘조선독립선언서’와는 다른 것으로 동포들에게 결사항전하여 독립을 되찾자고 외친 것이다. 박찬익은 여기 민족대표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갔다. 이해 4월 10일부터 이튿날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회의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이를 운영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웠다. 4월 23일 서울 국민대회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조직될 때, 박찬익은 박은식, 신채호, 손정도, 조성환 등과 함께 18명의 평정관(評政官)이 되었다. 한성정부는 얼마 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박찬익은 길림에 머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길림통신부에 근무하였다.

1921년 박찬익은 상해로 다시 이동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정식으로 발을 디뎠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1921년 4월 경기도 대표로서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었다. 7월에는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뽑혀 정부의 외교임무를 전담하였다. 당시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1920년 12월에 상하이에 왔다가 1921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신규식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선임하고서, 그에게 손문(孫文)이 세운 호법정부와 협력하여 태평양평화회의에 공동보조를 이끌어내라고 주문했다.

신규식은 자기를 도와줄 외교통으로 박찬익을 꼽고 외무부 외사국장을 맡겼다. 신규식이 1922년 숨을 거둔 뒤로도 박찬익이 맡은 활동은 외교와 대종교 중흥이 핵심을 이루었다. 우선 그는 중국과 외교교섭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11월 부여족 통일회의에서 신민부가 탄생하자, 중국 당국에 대한 교섭 임무가 그의 몫이었다. 또 1925년 10월 삼시협약 때문에 이강훈, 신갑수 등이 붙들리자, 석방을 위한 교섭에 나선 사람도 그였다. 1926년 초에는 임시집정관 단기서(段祺瑞)를 만나 한국 독립운동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1927년 북만주에서 유일독립당이 추진되자, 외교위원장을 맡았다.

일제의 압박으로 중국이 만든 '대종교 포교 금지령' 결국 해제하게 만들어

다음으로 그의 활동은 대종교 포교에 대한 자유를 확보하는 데 두어졌다. 일제는 대종교가 철저한 항일조직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일제는 만주 군벌에게 한국 독립운동과 함께 대종교 포교활동을 금지하라고 요구하였고, 이러한 조건은 삼시협정에도 담겼다. 그래서 만주에서 대종교 포교만이 아니라, 이를 축으로 이루어지던 독립운동마저도 활기를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박찬익은 조성환과 함께 중국 당국에 포교를 금지하는 것을 풀어달라고 ‘해금 청원서’를 제출하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결국 1929년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뒀다.

1929년에는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고, 그 지부가 남경에 들어섰다. 그 대표직을 맡은 박찬익은 이때부터 남경에 수도를 정한 중국국민당 정부와 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30년 그는 중국국민당에 들어갔다. 중국국민당의 핵심인물이자 강소성 주석이던 진과부(陳果夫)의 소개를 받아, 그는 중국국민당 국제부 선전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중국국민당의 연결점이었다.

박찬익 선생 사진
박찬익 선생 사진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급하게 이동하면서, 박찬익의 활동 내용도 달라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것이나, 요인들을 정착시킬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중국정부와의 교섭에 달려 있었다. 당시 중국국민당과 교섭을 맡은 인물은 박찬익을 비롯하여 안공근(安恭根), 엄항섭(嚴恒燮) 등 세 사람이었다. 김구 일행이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에 잠적해 있을 수 있던 것이나 정부가 항주에 터를 잡은 데에도 박찬익의 외교에 힘입었다. 중국의 많은 지사들과 우리 정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서 박찬익의 역할은 대단했다. 은주부(殷鑄夫), 주경란(朱慶瀾) 등 중국의 명사들이 김구(金九)에게 특별 면회를 청했는데, 1933년 박찬익은 김구, 장개석(蔣介石) 두 거두의 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회담을 통해 중국국민당은 한인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에서 육성하기로 했다. 이듬해에는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 있는 중국군관학교에 특설반을 마련하여 한인청년들을 초급장교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중국과의 교섭 끝에 중국 내에 한국광복군 창설

193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경 남쪽 기강(綦江)에 도착했다. 그 무렵 김구는 이미 중경 시내에 머물렀고, 박찬익도 중경에 자리를 잡고 중국정부에 대한 교섭 임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1939년 10월부터 연말까지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릴 때는 그도 의원으로서 참석했다. 의원 활동은 1941년 10월 제33회 임시의정원 활동에도 이어졌다. 1940년 봄,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광복군 창설을 위해 중국정부와 교섭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군으로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달인 10월에 국무위원이자 법무부장이 된 박찬익은 중국국민당의 핵심인물인 주가화(朱家驊)에게 교섭하여 한인 청년들을 모집할 징모처 조직 활동비 10만원을 지원받았다.

박찬익 연설 사진
박찬익 연설 사진

1942년 박찬익에게 주어진 큰 임무 가운데 하나가 항일운동 좌파 계열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중국정부가 지원금 창구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방법이었다. 따라서 김구는 지원금 창구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단일화 시킨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를 밀고 나간 인물이 바로 박찬익이었다. 좌파인 김원봉 계열이 박찬익을 가장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의 노력은 결정적이었고, 좌파 계열은 끝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합류하였다.

박찬익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큰 과제는 중국정부가 광복군의 발목을 묶어 놓은 ‘9개 준승’을 풀어내는 것이었다. 1943년 2월 박찬익은 조소앙, 김규식과 함께 교섭 대표를 맡았고, 1944년 6월 5일, 김구와 장개석의 비밀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결과 5백만원 차관과 매월 활동비 1백만원 지원이 결정되었고, 이어서 ‘9개 준승’이라는 족쇄도 풀렸다. 중경시절 그는 당과 정부에서 활발한 활동력을 보였다. 한국독립당에서는 중앙집행위원이 되고, 정부에서는 법무부장을 맡았다, 1943년 9월에는 셋째 아들 박영준이 재무부 이재과장을 맡았다.

마지막 임무는 “광복 후 재중 동포사회를 안정시키고, 귀국을 도와라.”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은 후 박찬익의 과제는 정부가 환국한 뒤 외교 업무를 맡는 것과 동포사회를 꾸려나가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동포사회를 안정시키고 이들의 귀국을 돕기 위해 1945년 10월 15일 주화한교선무단(駐華韓僑宣撫團)을 구성한 뒤, 화북·화중·화남에 선무단을 설치하였다. 박찬익은 그 단장을 맡았다. 1946년에 그는 가족들과 함께 심양으로 옮겼는데, 1947년에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벌어지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만주지역에 많이 있는 한인들을 묶어 동북행영 장연지구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했다. 셋째 아들 영준이 부총대장을 맡았다.

박찬익은 만 64세가 되던 1948년 초에 건강이 악화됐음에도 불구하고, 김구가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만류하려고 급거 귀국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된 후에도 승인 받지 못한 것은 내내 그의 부담으로 남았다. 그는 이듬해 2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중국에서 벌인 독립운동은 중국정부의 정책에 민감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대한 외교는 절대적인 분야였고 이 일선에 섰던 분이 박찬익 선생이었다. 만주에서도 그랬고, 중국 본토에서도 그랬다. 특히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를 맡으면서, 광복군 창설이나 좌우합작, 정부 요인과 가족의 생계 문제 해결,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까지 그의 노력이 빠진 곳이 없었다.

대한민국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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