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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동진

훈격아이콘 훈격: 대통령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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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권동진 , 1861 ~1947 , 대통령장 (1962)

무인 가문에서 출생하여 군인의 길을 걷던 선생은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난 후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이후 계몽운동을 병행하면서 3.1독립선언에 33인 대표 중 한 명으로 서명하였으며, 6.10만세 운동과 같은 민족통일전선운동을 꾀하였다. 신간회 창립에 힘 쏟았으며,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던 선생은 1945년 12월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한 독립국가 수립에 온 힘을 쏟았다.

한말 격동의 회오리를 군인의 길로 헤쳐 나가다

권동진(權東鎭, 1861. 12. 15 ~ 1947. 3. 9) 선생은 1861년 충북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에서 아버지 권재형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이들 권씨 집안은 누대로 안동에서 세거했으나, 아버지 대에 괴산으로 이거했고 이곳에서 그가 태어난 것이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권필이 무과에 급제한 뒤 오위도총부 부총관, 공조참의 등을 역임하면서 무인 가문을 형성해 갔다. 백부 권재유와 아버지 역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백부는 절충장군, 아버지는 경상도 중군(中軍)을 지냈고, 셋째 형인 형진과 다섯째도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관의 길을 걸었다. 특히 형진은 갑오개혁에 참여하며, 내무참승, 의주부사, 숙천부사, 평안병사, 경무사 등을 지냈으며, 을미사변때 대원군과 함께 ‘명성황후 폐위’에 가담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기도 했다. 여덟 살 되던 1869년 무렵, 집안이 서울 재동으로 이사하면서 서울에서 소년기를 보낸 그는 19세 되던 1880년경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군 장교를 초빙해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이 무렵 셋째와 다섯째 형 역시 1880년 경진무과에 나란히 급제했던 것을 보면, 그가 군인의 길로 나간 것은 그 같은 집안의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사관을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해 만든 사관학교 1기생은 108명이었으나, 그 가운데 1882년 봄 10명을 졸업생으로 배출했다. 이때 그는 수석으로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졸업 직후 남행부장에 임명된 그는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조희연 등과 초관(哨官)에 임명되어 좌우영의 교련을 맡았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박영효가 거느리는 전후영 소속으로 있다가 무관학교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 번을 들어가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김옥균 등 개화파 세력과 자주 접촉하면서, 그는 형 권형진과 함께 개화파 세력에 가담했던 것 같다.

3년여 간 별군직으로 영문 생활을 지낸 그는 1885년 무렵 경상남도 함안군수로 임명되어 1년 남짓 근무하기도 했다. 함경도 안무중군(按撫中軍) 겸 토포사(討捕使)로 있다가 중추부(中樞府) 내금장(內禁將)을 지내고, 1894년에는 거문도 첨사(僉使) 겸 수방장(守防將)으로 나가기도 했다. 당시에는 소위 출세를 하려면 권문세가를 찾는 것이 세태였지만, 그에게는 그와 같은 처세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오로지 의기 충천한 동료 군인들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한편 15여년을 군인으로 몸담아 오던 그에게 1895년의 을미사변은 생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집안의 상을 당해 서울에 머물던 그는 새로이 조직을 재편한 훈련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훈련대에는 그의 형 권형진이 제2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권형진이 1895년 8월 대원군의 ‘명성황후 폐위’ 획책에 가담하면서 선생을 포함한 동지 8명도 경복궁 점령에 가담한 것이다. 이들은 일본 낭인들의 명성황후 시해 음모와는 관계없이,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려는 대원군의 획책에 동원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로 결국 그는 1895년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일본 망명에서 손병희를 만나다

망명길에는 그의 동지들인 조희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신응희, 정란교, 오세창 등도 함께 했다. 망명 초기에 그는 일본 도쿄의 근위사단에서 병학을 공부하는 한편 3연대에서 3년여 동안 실습을 쌓았고, 일본 육군성에서 경리사무를 익혀나갔다. 그러는 동안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 조희연, 장박, 유길준, 유세남 등과 교류하면서, 변해가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깊게 고민해 나갔다. 그러다가 1900년 형 권형진이 국내에 들어갔다가 참형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오사카로 건너갔다가,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손병희와의 만남은 그의 행로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타고난 무인 체질인 그였지만, 손병희와의 만남을 통해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감복하고, 급기야 천도교에 입교한 것이다. 이후 귀국하기까지 그는 손병희, 오세창 등과 굳게 결합하여 민족의 장래와 천도교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 갔다. 1906년 1월 5일 손병희 등과 함께 국내로 돌아온 그는 우선 천도교의 조직 정비에 힘을 쏟아 나갔다. 천도교대헌의 규정에 따라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한 손병희는 모든 교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천도교대헌은 권동진과 오세창, 양한묵 등이 힘을 모아 작성한 것이었다. 그는 손병희를 보좌하며, 도집(都執), 도사(道師)를 맡는 한편 전제관장, 포덕 주임 등을 역임하며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천도교 간부 사진.
천도교 간부 사진.

계몽운동에 앞장 서다

귀국 직후 그는 중추원 부참의(副參議)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여 만에 그만두고, 출판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에 정진해 갔다. 그가 전개한 계몽운동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대한협회 활동이었다.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7년 11월 설립된 대한협회는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주지로 국민계몽을 전개한 계몽운동단체였다. 그는 대한협회 실업부장과 부회장 등을 맡으며, 실업 진작을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 정미7조약 등을 통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에서 국민계몽과 식산흥업으로 민족 자강을 달성하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 무렵 대한협회 지도부는 을사늑약에 의한 일제의 통감정치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문명부강을 이루면 국권회복도 달성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당장 독립의 실현보다 문명개화의 실현을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선생은 일본제국주의의 본질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이 독립국의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그리고 러일전쟁의 결과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것은 안타깝지만 시세의 형편상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대한협회의 한계였고, 선생도 그러한 문명개화론적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끝내 1910년 멸망하고 말았다. 한국인의 자주 의지를 저버린 일제의 강제병탄을 반대하던 선생은 장도적 차원에서 민족독립을 추구해 나갔다. 당시 선생은 두 갈래의 길에서 고민해야 했다. 하나는 1910년 늦가을 이동휘가 찾아와 권유했던 것처럼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길을 걸어가든지, 다른 하나는 종교인으로서 국내에 남아 천도교를 통해 대중과 함께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길이었다. 천도교의 중임을 맡던 그는 천도교 포교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받아들이며, 후자의 길을 걸어 나갔다.

3.1운동으로 인류주의를 실천해 나가다

일본 망명시절 오세창과 함께 찍은 사진
일본 망명시절 오세창과 함께 찍은 사진

천도교 포교에 힘을 쏟던 그는 1차대전 종전과 함께 세계가 개조되는 상황에서 민족독립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평화회의에 제출한 14개조 가운데 민족자결 조항을 보고, 한국문제를 그 범위에 들어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12월 초 오세창, 최린 등과 뜻을 모은 그는 기독교세력과의 연합, 국외 민족운동세력과 연결하는 전민족적 틀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천도교의 3.1운동은 그와 오세창이 교단 내 계획을 추진해 가고, 대외관계는 주로 최린이 맡아 추진해 나갔다. 선생은 손병희를 설득하는 한편 민족대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양한묵, 나용환, 나인협, 박예환 등을 추천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선생이 추구한 만세운동이 천도교 차원에 머물지 않고, 기독교·불교 등 타종교 세력과 민족독립을 위해 기꺼이 연합해 갔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이념을 초월해 민족운동을 전개해 간 3.1운동과 한국민족주의의 특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1운동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3월 1일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그는 독립선언식 직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 출옥했다.

권동진선생 동상
권동진선생 동상

선생이 출옥할 무렵 세상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사회주의가 수용되면서, 한동안 민족사회는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은 대체로 2,30대의 젊은 지식층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60이 넘은 그는 민족독립을 위한 길에서 사회주의를 품에 아우르는 넓고 깊은 포용성을 내보였다. 그러한 사실은 1923년 잡지 <개벽>에 발표한 “인류주의(人類主義)는 나의 가장 찬송하는 이상이외다”는 글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모든 주의 중에서 인류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피력하면서, ‘인류를 위한 진리, 복리에 기반하고, 천부의 평등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인류주의’라 정의했다. 그리고 인류주의 가운데 무형의 진리가 종교 또는 도덕이고, 무형의 진리가 사회주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교와 도덕은 정치적 수단으로 타락한 일도 있지만, 사회주의는 금권만능주의의 해독을 지닌 사회조직의 결함을 개조할 수 있는 ‘선견(先見)’을 지닌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 해독을 제거하고 인류의 꽃다운 이상향을 건설하는 것이 곧 인류의 최고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인류주의를 최상의 이상으로 추구하던 그는 사회주의를 인류주의의 실현 논리로 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는 인류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무형적인 종교보다도 실질적인 것으로 인식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종교와 도덕적인 힘에 의한 사회 개조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실질적 사회 개조의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 사회주의를 주목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종교의 틀 안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민족통일전선운동의 구심점이 되다

1922년 5월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천도교는 구심점을 잃은 채 분열에 휩싸이게 된다. 신, 구파의 분화는 4세 교주 박인호의 승계문제에서 비롯되고 있었으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도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었다. 박인호의 승계를 인정치 않으려는 신파의 최린은 자치론에 기울고 있었고, 구파의 선생과 이종린 등은 자치론에 반대하면서 비타협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또한 선생과 이종린 등은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의 사회주의 인사들과 연대를 강구할 만큼 민족통일전선에도 강한 지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1926년 초 자치론이 다시 고개를 들자 이들은 사회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비타협적 세력을 망라한 민족적 조직을 구상해 갔다. 그리하여 1926년 3월 초에는 조선공산당의 강달영과 접촉하면서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협의를 거친 바도 있었다. 이들은 민우회란 조직 아래 사회주의 세력을 포함한 비타협적 세력이 망라된 민족적 조직을 구상하고 있었다. 천도교의 상무종법사 선생은 구파의 정점에 서 있었고, 그의 당주동 집은 이들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선생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의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는 6.10만세운동의 추진 과정에서 더욱 밀착되어 갔다. 6.10만세운동의 발원지는 중국 상해였다. 세칭 1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망명한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천도교 세력과의 연대를 전제로 6.10만세운동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천도교는 3.1운동 때 중심적 역할을 맡았던 세력이었다. 3.1운동 이후 천도교 구파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통일전선을 적극 모색하고 있었다. 6.10만세운동 당시 천도교 구파의 지도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나, 박래원을 앞세워 6.10만세운동을 적극 추진해 갔다. 천도교가 6.10만세운동에서 맡았던 역할은 격문 인쇄 및 지방 조직과의 연락이 주된 것이었다. 비록 천도교 구파의 세력이 신파에 비해 열세였고, 또 천도교청년동맹이 생긴지 얼마 안됐다고는 하나 천도교의 조직 기반은 전국적이었으며 세력 규모도 민족세력 중에서는 여전히 유력한 것이었다. 6.10만세운동 추진 과정에서 상해에서 보내기로 되어 있던 격문과 자금이 전달되지 않자, 박래원의 자금 요청을 받은 선생은 흔쾌히 1만원 가량의 자금지원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미처 자금이 모아지기도 전에 만세운동의 계획이 사전 발각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선생의 사진
선생의 사진

비록 만세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나지 못했지만, 자유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한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후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역사적 신호탄이었다. 6.10만세운동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같은 정치, 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해 민족운동이 전개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1운동이 종교 이념을 초월한 민족운동이었다면, 6.10만세운동은 정치, 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민족운동이었다. 그것은 국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으로 번져 나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 운동으로 나타났다.

6.10만세운동 직후 선생이 이종린, 박래홍 등 천도교 구파의 인사들과 신간회 창립에 적극 참가해 갔던 것 역시 그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신간회 본부 창립 부회장, 1929년에는 복대표 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으며 신간회 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나갔다. 신간회에 대한 그의 열정은 1929년 동아일보가 당시 유명인사들을 상대로 ‘10만원이 생기면 어떠한 일에 쓰겠는가’ 라는 설문 조사에서, 신간회 본부 회관을 건축하는 일과 신간회 사업자금을 쓸 것이라는 답변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가 신간회 운동에 매진했던 것은 식민지 한국의 현실에서 민족운동 세력이 결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 규명을 위해 광주에 사람을 파견하는 한편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해 나갔다. 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대중들에게 밝히고, 학생운동을 지원하기로 결의된 대회였다. 신간회의 원로 지도자였던 선생은 대회 당일인 12월 13일 연설을 담당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사전 탄압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피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그는 징역 1년형을 받고 고초를 치러야 했다.

무사심(無私心)의 인품

선생을 30여년 동안 스승으로 모셨던 이종린이 1935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한 평은 선생의 인품과 면모를 어느 것보다 적확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좀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

“세상에 그의 벗, 그의 동지가 많겠지만 씨를 아는 점에 있어서 나를 따를 이 없다고 자신하는 바이니, 그의 성미는 오직 ‘일’에 있을 뿐이요, 명예나 재물에 마음이 없으며 그의 특성은 오직 나아감에 있고, ‘함’에 있을 뿐이요. ‘뒷거름’과 ‘못함’이 없음을 나는 잘 아노라. 오세창씨와 권동진씨의 두 분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좋은 대조를 발견할 수 있으니, 오세창씨는 ‘꼭 해서 성공할 일’에만 착수하고, 권씨는 ‘성패이둔(成敗利鈍)’은 다음으로 미루고, 그 일이 해야 할 일이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으로 매진할 뿐이다(…)그런 까닭에 일을 잘 벌여 놓고, 간혹 수습을 잘 못하는 결점이 권씨에게는 있다. 그리고 28년 동안 권동진씨에 사심(私心)이 없는 일사(一事)를 나는 경험으로 알고 존경하기를 불이(不已)하였다(…)일상 술을 가까이 하지 않고, 담배도 안 피운다. 더구나 여색이나 금전이랴. 칠십 평생, 깨끗한 뜻과 청빈(淸貪)으로 시종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선생은 실행과 실천, 실질을 숭상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명리를 좆는 명망가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하는 지도자였다. 또한 근면, 성실, 검약의 정신과 면모는 그가 어떠한 고통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높은 지조를 지켜나간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순국 그날까지 독립국가 건설에 불꽃을 태우다

해방을 맞이할 때, 그의 나이 85세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는 건국운동에 매진해 갔다. 그는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국가 건설에 힘을 기울이는가 하면, 1945년 12월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독립국가 수립에 온 힘을 쏟아 나갔다. 또한 정치권이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대립하는 분열상태를 보이자, 신한민족당을 결성하며 ‘자율적 통일정권 수립을 목표로 전민족의 총의와 총력을 집중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건국운동은 독립운동을 계승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려는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독립 달성을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그는 해방정국의 혼란이 가중되던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하고 말았다. 그의 장례는 천도교당에서 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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