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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영환

훈격아이콘 훈격: 대한민국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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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민영환 , 1861 ~1905 , 대한민국장 (1962)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민)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 선생이 국민에게 남긴 [경고대한2천만동포유서(警告大韓二千萬同胞遺書)](1905. 11. 30) –

광무황제의 외가이자 처가인 민씨가문에서 태어나

계정(桂庭) 민영환(閔泳煥, 1861.7. 2 ~ 1905.11. 30) 선생은 1861년 7월 2일 서울 견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이다. 흥선대원군의 처남 민겸호가 선생의 부친이었다. 그러니 선생은 광무황제 와 내외종간이다. 더구나 민겸호는 민치구의 아들로 민태호, 민승호와 형제간이었고, 민승호는 명성황후 민씨의 부친인 민치록의 양자였다. 따라서 선생은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뻘이 되기도 했다. 뒤에 선생은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의 생부는 민겸호, 양부는 민태호였는데, 생부는 임오군란 당시 구군인들에게 피살되었고, 양부는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 청년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로 보면 선생은 광무황제의 외가이자 처가인 민씨가문에서 태어나 척족세력으로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생부와 양부 모두가 살해되는 개인적 불행도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한 선생은 1877년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약관 17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이때는 척족 민씨세력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이라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후 선생은 가문의 배경과 명성황후, 그리고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아 출세 가도를 달렸다. 과거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 검열, 설서, 수찬, 검상,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에는 20세의 나이로 일약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임오군란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해 선생은 생부를 잃게 된다. 선생은 관직을 사직하고 3년간 복상하였다. 그리고 탈상한 1884년 선생은 이조참의에 임명되었고, 이후 도승지, 전환국 총판,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내무협판, 개성유수, 해방 총관, 친군 연해 방어사, 한성 우윤, 기기국 총판, 친군 전영사를 역임하였다.

서구의 근대식 제도로의 개혁을 주장

1887년 선생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예조판서로 승진하였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지냈다. 1893년 형조판서, 한성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에는 주미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한편 이즈음 일제는 한국에서 세력의 우위를 차지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강화조약으로 마관조약을 체결하여 요동반도 점령을 획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을 부추겨 삼국간섭을 행하여 일제의 야욕을 좌절시켰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불러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폈다. 이는 1894년 6월 일제의 경복궁 쿠데타로 붕괴된 민씨정권의 재집권을 노린 것이고, 나아가 한국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선생의 문관복 사진
선생의 문관복 사진

이렇게 상황이 급변하여 한국에서조차 세력이 위축될 위기에 빠지자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인류의 역사상, 심지어 제국주의 침략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선생은 이를 막지 못한 자괴감과 일제 침략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주미전권대사로 부임하지 않고 낙향하였다. 그 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미,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선생은 그 해 4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은 5월 26일 모스크바 크레믈린궁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선생은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로 길을 떠났다.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타고 상해, 나가사키, 동경을 거쳐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선생은 여기서 기차편으로 북미대륙을 횡단하여 뉴욕으로 갔다. 미국 뉴욕에 3일간 머물렀던 선생은 근대화된 도시와 선진 문물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어 선생 일행은 상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런던에 도착하였고, 유럽 대륙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 일행은 5월 26일 크레믈린궁에서 거행된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을 참관한 뒤, 약 3개월 동안 러시아에 머물면서 선진 문물과 제도 등을 견문하였다. 이때 선생은 러시아의 근대식 군사제도와 신식 무기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두 차례의 병조판서를 지낸 경험과 함께 당시 외세의 침략을 받고 있던 조국의 현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閔泳煥 報告書 1(1)
閔泳煥 報告書 1(1)

이같이 세계 일주로 서구의 선진 문물을 경험하고 그 해 10월 21일 귀국한 뒤, 선생은 의정부 찬정, 군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 1월 선생은 다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임 발령을 받았다. 특히 같은 해 3월 1일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라는 어명을 받아 다시 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 3월 24일 서울을 출발한 선생의 일행은 상해, 나가사키를 거쳐 마카오로 갔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싱가포르, 인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고 지중해를 건너 러시아에 도착한 것은 5월 14일이었다. 선생의 일행이 러시아에 도착한 것은 국서와 국왕의 친서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할 임무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의 일행은 러시아를 떠나 6월 5일 런던에 도착하였다. 선생은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 국서와 국왕의 친서를 전달하였고, 6월 22일 열린 즉위 60주년 기념식에도 참석하였다.

두 차례의 외유를 통하여 선생은 서구 여러 나라의 선진 문물을 보고 깨달은 바가 컸다. 그리하여 선생은 귀국한 뒤 서구의 근대식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군사 제도 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민권을 신장하여 근대식 국가 발전을 꾀하고, 군제를 개편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자고 광무황제에게 상주한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건의는 실제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였고, 다만 군제 개편 건의만 채택되어 육군을 통솔하는 최고 기구로서 원수부의 설치가 이루어졌다.

朝·俄會談文書
朝·俄會談文書

2천만 동포에게 유서 남기고 자결순국

민영환 동상
민영환 동상

선생의 조국 근대화 의지는 정부뿐만 아니라 사회단체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1차 외유를 마치고 귀국한 뒤, 독립협회의 국민 계몽운동의 취지에 찬동하여 이를 적극 후원하였던 것이다. 특히 선생은 1898년부터 서재필, 이상재 등이 지도하는 독립협회가 본격적인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자 적극적으로 이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의회를 개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 가장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관료로서 정부 내의 적극적인 독립협회 후원자가 되었다. 때문에 당시 독립협회의 핵심 인사였던 정교는 지금 정부 요인 가운데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선생과 한규설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광무황제에게 선생을 군부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상주까지 하였던 것이다.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초부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수구파 대신의 퇴진과 개혁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상소와 철야 시위를 연일 전개하였다. 그 결과 10월 12일 박정양을 수반으로 한 개혁파 내각이 수립되었을 때, 선생은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개혁파정부의 실세로서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즉각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안을 받아들여 한국역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11월 2일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는 의회설립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공화정을 수립하고 군주제를 폐지하려고 한다는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어 의회설립운동은 좌절되고 선생도 일시 파면되고 말았다. 그 뒤 황실의 지친으로 광무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선생은 다시 참정대신, 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선생의 건의에 의해 설치된 원수부의 회계국장, 장례원경, 포훈원총재, 헌병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선생이 공주부 관찰사에게 보낸 간찰(1904년 5월)
선생이 공주부 관찰사에게 보낸 간찰(1904년 5월)

한편 일제는 1904년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런 다음 같은 해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케 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여 갔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1905년 7월 29일 미국과의 카스라-태프트 밀약, 같은 해 8월 12일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같은 해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 조약 등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일련의 거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 받았다. 일제가 이 같은 침략정책을 자행하자 선생은 내부대신, 학부대신, 외부대신, 참정대신 등을 역임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일제 및 친일 각료들의 배척을 받아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한 것이다. 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때에 부인의 산소를 이장하는 일로 경기도 용인에 내려가 있다가 소식을 들었다. 비분강개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던 선생은 곧 서울로 올라와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조약 체결에 찬성한 매국 대신들을 토역하고 조약을 파기하도록 상소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1월 27일 조병세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가 을사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5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위협 아래 있던 광무황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과 조병세는 재차 상소를 올리고 대한문 밖에 엎드려 대답을 기다렸다. 선생을 비롯한 백관들의 상소로 조약 체결에 대한 반대 여론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일본 헌병을 출동시켜 백관들을 해산시키고 선생과 조병세를 잡아 가두고 말았다. 평리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9일 해질 무렵 석방된 선생은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개탄하였다. 이제 남은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을 깨우쳐 나라와 민족이 자유 독립을 회복하는데 초석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1월 30일 오전 6시경, 45세의 한창 나이로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2통을 남기고 품고 있던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 순국하였던 것이다.

선생이 명함에 쓴 유서(1905)
선생이 명함에 쓴 유서(1905)
선생이 명함에 쓴 유서(1905)
선생이 명함에 쓴 유서(1905)

선생이 남긴 유서 중 동포에게 남긴 [경고대한 2천만동포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민)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민충정공유고 표지
민충정공유고 표지

이 같은 선생의 죽음과 유서는 일제히 각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곧이어 선생을 따라 전 좌의정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 전 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등도 자결, 순국함으로써 일제 침략에 대한 강력한 투쟁 방략의 하나로 의열투쟁이 자리 잡게 되었다. 나아가 선생의 순국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구국 계몽운동이 발흥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죽음으로서라도 조국과 민족의 독립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준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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