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7월 20일 광무황제를 강제퇴위시킨 일본은 이어 같은 달 24일 대한제국정부를 강박하여 「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고위관료를 임명하거나 파면할 수 없고, 외국인 고문관을 기용할 수 없었다. 모든 통치 권한을 통감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새로 등극한 융희황제는 일본정부의 꼭두각시에 다름 아니었다. 인사권을 장악한 일본은 한국 식민지화에 부담이 되는 한국인 관리를 배제시키고 새로 일본인 관리를 임명하였다. 이들이 내정·재정·치안 등 전반을 장악함에 따라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말았다.
「정미7조약」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법적 근거로 3개 조항의 비밀각서가 부수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궁 수위의 임무를 담당케 하고 기타를 해대(解隊)할 것.
2. 교육이 있는 사관(士官)은 한국 군대에 남아서 일할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기타는 일본 군대로 부속케 하고 실지 연습케 할 것.
3. 일본서 한국 사관을 위하여 상당한 설비를 할 것.
특히 이 각서의 3번 항에는 다음의 내용을 추가, 군대해산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1. 육군 1대대만 존치하여 황궁 수위에 임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산할 것.
2. 군부를 비롯한 육군에 관계하는 관아를 전부 폐할 것.
3. 교육 있는 사관은 한국 군대에 머물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기타는 일본 군대에 부속시켜 연습시킬 것.
4. 해대(解隊)한 하사졸(下士卒) 중 경찰관의 자격이 있는 자는 이를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는 가급적 실업(實業)에 종사하도록 할 것.
실업에 종사시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간도(間島)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시킬 것.
2) 둔전법(屯田法)에 따라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킬 것.
‘군사지식이 없고, 무능하며 신뢰할 수 없는 군대’라는 이유를 들어 통감부는 대한제국군의 해산을 준비하였다. 이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 실제로는 대한제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저항세력인 군사력을 해체시켜야만 안정적으로 식민통치를 할 수 있다는 극도로 계산된 정책적 조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대해산 준비와 관련하여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예상되는 시위대의 봉기에 대비하고 무기를 박탈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다수의 병력 출동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서울에 주둔한 부대들에 대하여 엄중한 경계를 명령하였고, 용산의 보병 3개 중대를 도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미 7월 20일 광무황제 퇴위를 전후하여 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의 병사들과 서울 시민이 합류하여 일본 군경에 저항하였던 적이 있었다.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직후 분노한 학생을 포함한 서울 시민 수만 명은 종로에 모여 ‘결사회’라고 쓴 기치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군경은 총검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결사회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진하였다. 그러자 시위대 병사 수십 명은 나무 몽둥이로 무장한 시민 결사대와 합류, 일본인에게 총을 발사하여 3명을 사살하였던 것이다.융희황제가 등극한 지 며칠 후인 1907년 8월 1일 드디어 다음과 같은 「군대해산 조칙」이 선포되었다.
짐이 생각하건대 나랏일이 매우 곤란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극히 절약하여 요긴하게 이용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도리가 오늘의 급선무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 군대는 고용병으로 조직되었으므로 상하가 일치하여 나라의 완전한 방위를 돕지는 못하고 있다. 짐은 이제부터 군사제도를 고칠 생각 아래 사관을 양성하는 데 전력하고 뒷날에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하려고 한다. 짐은 이제 해당 관리에게 지시하여 황실을 호위하는 데 필요한 사람들을 뽑아 두고 그밖에는 일시 해산시킨다. 짐은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랫동안 쌓인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특별히 은혜를 베푸는 돈을 나누어주니 너희들 장교, 하사, 군졸들은 짐의 뜻을 잘 체득하고 각기 자기 직분을 지켜 허물이 없도록 할 것이다. … 군대를 해산할 때 인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할 것이며 혹시 칙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킨 자를 진압할 일은 통감에게 의뢰할 것이다.
이 조칙은 7월 31일 밤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가 융희황제를 강박하여 재가 형식으로 받아낸 것으로 이완용은 통감 이토에게 “법제개혁을 위하여 공포한 칙어를 받들고 군대를 해산시킬 때 인심이 동요하지 않게 예방하며 … 또는 칙어를 어기고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으면 그것을 진압할 것을 각하에게 의뢰한다는 황제폐하의 칙서를 받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군대 해산
군대해산 당시 대한제국 군대의 편성상황을 보면, 서울에는 시위 제1·제2연대가 있어 산하에 각기 3개 대대 규모를 두었다. 지방에는 수원을 비롯하여 청주․원주․대구․광주․해주․북청․안주 등 8개의 주요 지역에 진위대를 두는 한편, 각 진위대에는 분견대(파견대)를 두고 있었다. 군대해산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계획되어 있었다.
제1. 군대해산 이유의 조칙을 발포.
제2. 조칙과 동시에 정부는 해산 후의 군인 처분에 관한 포고를 발표. 이 포고 중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1. 내각에 군무국을 두고 군부는 축소하여 존속시킨다.
2. 시위보병 1대대를 둔다.
3. 시종무관 약간 명을 둔다.
4. 무관학교 및 유년학교를 둔다.
5. 해산 시에 장교 이하에게 일시금을 급여한다. 그 금액으로는 장교에게는 봉급의 1개년 반에 상당하는 액수를 준다. 단 1개년 이상 복무한 자에 한한다.
6. 장교와 하사로서 군사학에 소양 있고 체격이 강건하고 장래 유망한 자는 1·2·3호의 직원 또는 일본 군대에 부속시킨다. 단, 하사는 일본 군대에 붙여 일하게 한다.
7. 장교와 하사로서 군사학 소양이 없어도 보통의 학식을 가지면 채용한다.
8. 병기·탄약은 반납을 받는다.
군대해산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제1. 군부대신은 군부의 주요 직원 및 헌병사령관, 여단장, 보병연대장, 보병대대장, 기병·포병대장을 불러 조칙을 전한다. 또한 해산 순서는 제2항의 포고로 제시한다.
제2. 전항 제관(諸官)은 곧바로 각기 부하에 대하여 대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조칙 및 포고를 전달한다. 이 때 각 대장과 같이 일본군 약 2중대를 각 병영에 동행시켜 필요한 병력으로 사용한다.
비고. 제1항 보병대대장 중에는 지방 진위대장도 포함한다.
이상과 같은 절차를 거쳐 군사기구로서 각종 군령 기관과 시위대를 위시로 진위보병 8개 대대, 치중병 1개 대대가 해산되었다. 다만 군부를 비롯한 시종무관부·동궁무관부·친왕부무관·무관학교·근위보병대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서울 시위대의 해산 상황을 살펴보자.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는 각 시위 대대장을 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의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에 소집하여 융희황제의 조칙을 하달하였다. 이때 사령관 하세가와와 군부 고문 노즈(野津)가 배석하였는데, 조칙 하달 후 도수체조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오전 10시까지 시위대 장졸들을 훈련원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이미 조선주차군 참모장 무다(牟田), 군부 고문 노즈 및 한국군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서울 요처에는 일본군이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중무장으로 철통같이 경계하고 있었다. 미리 상황을 파악한 다수의 병사들은 해산식에 불참하였기 때문에 훈련원에 도착한 병사들은 많지 않았다.
이 때 모인 병사들은 간단한 해산식을 마치고 정부로부터 계급에 따라 은사금을 지급 받았다. 은사금을 받고 병사들이 돌아가는 도중에 이를 보고 분노한 서울 시민들은 “너희들이 군인이 되어 헛되이 나라의 녹으로 배만 불리고 조금도 보답하는 효과가 없이 단지 몇 조각의 지폐로 달게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고 욕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군인들은 더욱 울분에 떨었고, 일부 병사들은 돈을 찢어 버리고 통곡하며 병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시위대 병사들이 일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병영에 들어가 총포를 모두 거두어갔기 때문에 무장봉기를 준비하지 못하고 제각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측이 걷어들인 총기 6만여 정은 용산 병기창에 보관되었다.
민족사학자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날은 흐리고 부슬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 아아 훈련원은 국가 5백년 무예를 닦던 장소이며, 오늘날의 군인들도 역시 다년간 뛰면서 무예를 익힌 곳인데 갑자기 오늘부터 헤어져야 하니 하늘인들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그 비참한 광경을 묘사하였다.
일본군에 접수된 한국군 병영
그런데 군대 해산식 거행 당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병고를 들어 참석치 않았다. 군대의 해산에 분개한 그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軍人不能守國 臣不盡忠 萬死無惜)”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중대장인 보병 정위 오의선도 칼로서 자결하였다. 같은 시간 한국군 교관 구리하라(栗原) 대위는 시위 제1연대 제1대대를 정렬시켜 훈련원의 해산식장으로 유도하였다. 하지만 대대장 자결 소식을 접한 병사들은 울분을 토하며 교관에게 달려들자 그는 병영으로 도망하였다. 이때 인근의 시위 제2연대 제1대대는 일본인 교관 이케 대위의 지휘로 훈련원으로 향하여 영문을 나가려던 중,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의 소식을 듣고 교관에게 폭행을 가하였다.
시위 제1연대 제1·2대대의 병사들은 곧바로 탄약고를 접수한 뒤 무기를 휴대하고 영외로 빠져 나와 일본군에 대해 총격을 가하면서 적극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일본군과 시위대가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남대문 안쪽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3사단 산하의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는 훈련원을 향해 출발하였고, 소속 중대 가운데 시위대의 병영을 접수하려고 했던 일본군 제9·10중대는 병영을 나온 시위대 병사들과 사격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일본군 제9중대의 1개 소대는 한국군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일본군 제10중대의 1개 소대는 시위 제1연대 제2대대를 향해 접근해 오자 영내의 시위대 병사들은 그들을 향해 발사하였다. 나아가 시위대 병사들이 남대문 수비병에게도 맹렬하게 총격을 퍼붓자 일본군들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였다.
한국군 시위대의 저항이 예상외로 맹렬하다는 보고를 받은 일본군 제13사단장은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장 사카베(坂部義男) 소좌에게 오전 9시 30분 남대문 병영에 있는 2중대와 기관총 3문으로 남대문 수비병 및 소의문(서소문) 수비병과 협력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의 항쟁을 속히 진압하도록 지시하였다. 종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51연대 제2대대 또한 소대 병력을 소의문 방향으로 이동시켰고, 일본군 제1대대도 오전 9시 50분 덕수궁 포덕문에 있는 소대 규모의 병력을 소의문 방향으로 증파하였다.
이동하던 중 일본군 척후병은 덕수궁 중화전 밖에 있던 시위대 병사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하지만 곧바로 응전함에 따라 시위대 병사들은 서북방 및 서남방으로 후퇴하여 소의문 내의 병영으로 피하였다. 일본군 나카자와(半澤)가 이끄는 소대는 제10중대와 협력하여 시위대 병영공격에 착수하였고, 포덕문에 있던 제1대대장은 나카자와 소대를 지원하기 위해 제3중대로 하여금 소의문으로 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시간에는 시위대 병사들은 이미 후퇴한 뒤였다.
일본군 수뇌부는 오전 10시 시위 제2연대 제3대대가 훈련원으로 향해 출발하였고, 일본군과 접전하는 시위대 병사들을 제외한 한국군 각 대대는 10시 15분 모두 훈련원 에 집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종로 주둔 일본군 보병 제7중대를 사카베 소좌에게 배속시켜 후퇴한 시위대 병사들을 속히 진압케 하였다. 오전 10시 20분 사카베 소좌는 제9중대 및 공병대로 하여금 곧바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를 공격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한국 시위대 병사들은 격렬하게 응전함에 따라 일본군에서도 사상자가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제9중대에 배속되었던 기관총 1문 및 남대문 수비대가 보유하고 있던 기관총 2문을 동원하여 한국군을 공격하였다. 나아가 오전 10시 40분 지원병으로 일본군 제12중대가 도착하여 제9중대에 배속되었다. 일본군 제9중대장 가지하라(梶原) 대위는 부하들과 함께 시위대 병영에 돌입하였는데, 사방으로부터 집중적인 사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남겼다. 병영 안으로 침투한 가지하라 대위는 시위대의 총탄에 맞아 격살되었는데, 그는 러일전쟁 중 여순전투에서 여러 차례 용맹을 떨쳤던 자로서 러시아 병사 19명을 살해하여 ‘도깨비대장(鬼大將)’이란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이후의 전투상황은 더욱 치열해졌다. 양측이 맞붙어 전투를 벌일 때, 오타(太田) 공병소위는 수류탄을 영내에 던졌기 때문에 다수의 시위대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이 틈을 노려 일본군 제12중대 또한 영내에 돌입함으로써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시위대 병사들은 영내로 침투한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고, 결국 중과부족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부대 밖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으로 탈출한 시위대 병사들은 이후 의병부대에 참여함으로써 후기 의병전쟁의 전투성과 민중성을 고조시켜 갔던 것이다.
한편 일본군 제10중대는 8월 1일 아침 시위 제1연대 제1대대를 접수하러 오던 중 정문 부근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 병사들로부터 맹렬한 기습을 받았다. 오전 10시경 시위대 병력이 더욱 증가하자 일본군은 새로 증파된 제7중대 및 공병 1분대와 함께 오전 10시 50분 시위 제2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고 병영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되자 병영을 탈출한 다수의 시위대 병사들은 민가로 숨어 들어갔고, 일부는 일본군 남대문 정거장 수비병들을 공격함으로써 항쟁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이날 전투의 한국군 시위대의 피해는, 전사자가 장교 11명, 준사관과 하사 57명, 부상자 100명, 포로 516명이었다.
착검한 총을 들고 도열한 대한제국의 군인들.
영국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신문기자 멕켄지(Macken ie)는 이날의 전투에 대해 “그들의 용감한 방어는 심지어 적군도 높이 찬양하였다”고 하면서, “적어도 며칠 동안은 일인들은 그들이 이전에 말해온 이상으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은 주목할만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투과정에서 부상한 병사들은 제중원에 보내져 치료를 받았다. 이때 연지동의 정신여학교 학생들이, “저 동포들은 곧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우리들은 비록 여자이나 의로써 그들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날 밤 병원으로 달려가서 열심히 간호하였다. 외국어를 잘 구사하던 어느 신여성은 총알이 비오듯하는 상황을 무릅쓰고 군중들에게, “우리 동포를 우리들이 만약 구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구하리오”라고 외치면서 부상병들을 찾아 병원으로 보내는 데 앞장섰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무력으로 시위대를 강제해산시킨 뒤 지방 진위대의 해산에 착수하였다. 그 절차는 서울과 마찬가지로 병사들을 훈련장에 모이게 하여 맨손으로 무예를 시험하면서 일제히 총을 거두어 가는 방식이었다. 8월 3일 개성·청주를 시작으로, 4일 대구, 5일 안성, 6일 공주·해주·평양, 7일 안주, 8일 수원, 그리고 9월 3일 북청에 이르기까지 약 1개월간에 걸쳐 지방 진위대의 해산을 완료하였다. 그 결과 진위대 병사들 또한 제각기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한 진위대도 없지 않았다. 서울의 시위대 해산과 시가전 소식을 접한 원주진위대는 8월 2일부터 특무정교 민긍호의 지휘를 받아 무기고를 열고 병기와 탄약을 분배하고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8월 5일자로 봉기에 들어간 것이다. 해산군인을 중심으로 농민․포수를 규합한 민긍호 부대는 군대해산 직후 조직된 최초의 의병부대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근대적 군사 지식과 훈련으로 다져진 이들은 유격전술을 감행하여 일본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어 수원진위대 산하의 강화분견대를 비롯한 수많은 해산군인들이 의병진에 합류하였다. 해산 당시에는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해산 군인들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고향에 돌아가 의병항쟁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의 전투성을 고조시켜 갔다. 또한 허위나 이강년 등을 비롯한 많은 관료, 유생의병장들도 재차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항일 무장투쟁에 돌입하였다. 특히 이들 후기 의병부대에는 다수의 농민대중과 영세 상공인들이 참여하게 됨에 따라 의병운동의 민중성이 고양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 의병운동은 참여 계층이 확대되고 전투성이 한층 강화된 국민전쟁으로 발전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시위대 병사들의 군대해산 거부 항쟁에는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참위로 근무하던 선생의 역할이 컸다. 즉 선생의 결사항전은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의 자결과 함께 시위대 봉기와 항쟁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1881년 경남 의령(宜寧)에서 남철희(南哲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의 성장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일찍이 육군 보병 견습 참위가 되어 시위 제2연대 제1대대에서 근무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 당시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참령 박승환이 자결하자 선생은 비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윗 장교가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의로움을 보였는데 내가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마땅히 저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고 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총칼로 무장한 부하들을 이끌고 병영을 나가 일본군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은 남대문 담장 위에서 기관총을 앞세워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과 시위대 병사들은 일본군들과 용감히 싸웠다. 그것이 바로 남대문 시가전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사망자도 적지 않았다. 일본군 장교 가지하라도 선생이 거느린 시위대 병사들에 의해 사살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일본군이 병영을 넘어 들어오자 선생은 칼을 빼들고 크게 소리치며 앞장서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한 시위대 병사들은 일본군과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일본군의 총탄을 맞아 27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 순국하였던 것이다.
이날 시위대 참위 이충순도 선생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는 군대해산 소식을 듣고 모친과 결별하면서, “저의 직책이 비록 미약하지만 나라에 난리가 일어났으니 부득이 죽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선생과 같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던 것이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에서는 당일의 서울 시가전 이후 “나머지 군인들은 각자 흩어져 정미(丁未)의 팔로(八路) 의병으로서 다시 일어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선생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던 시위대 병사들의 서울 시가전을 정미의병이 발화되는 기점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 장교와 사병
독립운동사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큰 봉우리가 되는 정미의병의 빌미가 되었던 것은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이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의병운동을 거족적 차원의 국민전쟁으로 승화시킨 것은 시위대 참령 박승환의 자결 순국과 선생을 중심으로 시위대 병사들의 서울 시가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의 항쟁과 순국은 대한제국을 지키는 마지막 불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