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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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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대
채광묵
, 1850 ~1906
, 독립장
(1977)
채규대
, (1890) ~1906
, 애국장
(1992)
“나라의 힘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앉아 원수 놈들의 압제를 두고 본단 말이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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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와 학문
채광묵(蔡光黙, 1850 ~ 1906)은 1850년 홍주 매평리(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매평리)에서 부친 동식(東軾, 호 華南)과 안동 권씨 사이에 태어났다. 자는 명숙(明叔), 호는 구연(龜淵), 본관은 평강이다. 화남선생으로 불린 부친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선조인 채충원의 영향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채충원(蔡忠元, 1598 ~ 1665)은 자를 원부(元夫), 호를 병추(病醜)라 하는 이로, 인조 9년(1631)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 형조참의, 경주부윤 등을 지냈다. 암행어사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군에 의해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통진부사(通津府使)로 있던 그는 남한산성에 달려갔으나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홍주 일대에 세거한 것으로 알려진다.
채광묵은 어려서 부친의 훈육을 받아 뜻이 강개(慷慨)하고 절개가 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어김이 없었다 한다.1) 부친의 영향을 받아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오로지 효(孝)와 의(義)에 뜻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데 힘썼다.
1896년 홍주의병 항쟁
1895년 10월, 일본군과 일본 낭인배들이 경복궁을 기습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는 자신들의 책임을 일체 부인했으며, 김홍집 친일내각은 일본의 압력에 황후의 지위를 격하시켜 평민으로 만드는 폐비조칙을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무나 비참한 시해소식에 접한 민중들은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국제적 범죄행위로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침략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 분명하다.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이 있은 지 불과 3개월이 지난 1895년 12월 30일(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을 선포하였다. 이때 내세운 단발의 명분은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가 일반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 내린 조선사회에서는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생들은 이것을 신체적 박해로,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단발령에 대한 재야 유생들의 반향은 더욱 커 극단적인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단호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발령이 반포된 다음 날로 의병투쟁의 기치를 들고 울분을 토로한 이천의병장 김하락(金河洛)은 재야 유생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또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의식으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유생들은 반침략, 반개화의 의병을 봉기하여 이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지산 김복한 (경향신문 1990.4.20.)
한말 일제 하 홍성은 항일민족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으로 특히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의 의병항쟁은 한말 의병사에서 대표적인 의병항쟁으로 평가된다. 1896년의 홍주의병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행위에 반대하여 단발령 공포 직후 봉기하였다. 1896년 홍주의병은 김복한(金福漢)을 총수로 하여 반개화, 반침략론을 실천에 옮긴 홍주지역 유생들의 반일투쟁이다.
채광묵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리자 안병찬(安炳瓚)의 부친인 안창식(安昌植)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먼저 1896년 1월 12일(음, 1895년 11월 28일) 안창식 등과 함께 청양의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하였다. 이 향회에 지역의 유생들이 참석하여 군사 활동을 결의하고, 180여명의 민병을 모집하였다. 홍주의 유생 이근주(李根周)도 비분강개하여 임승주, 임한주 등 선비들의 연명을 받아 관찰사 이승우에게 항쟁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다음 날 채광묵은 안병찬과 함께 이들을 인솔하여 홍주성에 들어갔다. 1월 14일(음,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이봉학(李鳳學), 이세영(李世永), 김정하(金正河) 등 수백 명이 성안에 들어왔다. 15일에는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朴昌魯)가 사민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李彰緖)는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관아에 집결하였다.
조양문
홍주 일대의 민병세력에 김복한(金福漢)을 비롯한 전직 고관들이 합세하였다. 이들은 안병찬, 이봉학 등과 비밀히 연락을 취하여 의병 봉기를 준비하면서, 관찰사 이승우를 만나 의리정신을 들어 여러 차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한 바 있다. 이들은 이승우(李勝宇)에게 동참할 것으로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의병들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관 강호선 등을 체포하고 창의의 깃발을 조양문 위에 걸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관찰사 이승우가 의병에 참여하였다.
1월 16일 홍주관아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채광묵 등은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면에 통문을 띄웠다. 채광묵은 이때 김복한의 지시에 따라 이창서와 함께 남면 소모관의 직을 맡았다. 청양군수 정인희는 창의소를 별도로 청양읍내에 설치하고 홍주부에 연락을 취해 포군 5백 명과 화포 1천 자루를 관찰사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만인 1월 17일(음,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서리들의 유혹에 넘어가 의병 지휘부 인사들을 차례로 구속하였다. 그는 유생들의 권유와 위협에 마지못해 거의에 참여는 하였으나 실패를 두려워하였다. 김복한·이설·홍건·안병찬·송병직·이상린 등 6명은 법부의 훈령에 압송되어 한성재판소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2월 25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임금의 특지로 전원 사면 석방되었다. 이때 채광묵은 의병을 소모하기 위하여 외지에 나가 있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2)
상소투쟁
채광묵은 홍주의진이 와해된 후인 1898년 송수만(宋秀晩)·김운락(金雲洛)·심선승(沈宣承)·이건석(李建奭)·이문화(李文和)·이세진(李世鎭)·김연식(金璉植) 등과 함께 명성황후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이름을 도약소(都約所)라 하고 상소를 올렸다. 채광묵은 이 상소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적을 복수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국외로 도망한 적을 잡아오지 않는 외부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한규설을 탄핵하였다. 채광묵 등의 탄핵소를 받은 한규설은 “지난번 채광묵의 상소가 올라오자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라면서 사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은 비답을 내려 사임하지 말라고 하였다. 반면 이완용은 “그가 무고(誣告)한 것에 대해서는 반좌율(反坐律)이 있겠지만, 신은 통분하고 억울함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채광묵 등이 자신을 무고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고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청하였다.3) 주지하듯이, 1905년 이완용은 을사조약의 체결을 주도한 매국 역적이 되었으며, 한규설은 끝까지 이를 반대하다 파면되었다.
1901년 8월 조정에서는 대흥군수를 통하여 대흥의 광시에 거주하고 있던 그에게 내부주사(內部主事)의 교지를 내려 보냈다. 그러나 그는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어찌 먼저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면서 강하게 거절하였다.4) 그리고 벽에 자신의 뜻을 표시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5)
대한제국의 나라 光市 산속에 숨어 / 光武國中光市隱
빛을 감추고 몸을 아끼나 이름이 없음이여 / 韜光自愛嘿無名
원수와 아직도 같은 하늘아래 있으니 살아있음이 부끄럽구나 / 讐天尙戴生猶愧
의로운 길을 찾았으니 죽음 역시 영예롭다 / 義路能尋死亦榮
채광묵은 이 시에서 광시의 시골에 숨어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지만 원수를 갚을 힘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또한 아직도 국모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 있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고 죽음 또한 영예롭고 의로운 길이라면서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의 한국척식회사 (황성신문 1906.9.26.)
도약소 통문 기사 (독립신문 1898.11.18.)
채광묵은 1904년 6월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가 한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한 일에 대하여 유학(幼學) 김기우(金箕祐), 이기하(李起夏) 등과 이를 성토하는 통문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철도, 어업 등의 이익이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고 또 일본인이 한국의 산림천택과 진황지의 개척권을 청구한 일이 신문에 난 것을 보았다. 채광묵 등은 모두가 놀라 떠들지만 방책은 없고 장차 이를 허가한다면 인민들이 어디에 몸을 의탁하여 살 것이냐면서 대책을 마련하고자 통문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통문을 배포하기 전에 평리원 판사 허위(許蔿)를 만났으며, 통문을 황성신문사에 맡겼다. 그리고 20일 밤에 채광묵을 비롯한 김기우, 허위, 김연식(金璉植), 이상천(李相天) 등 5명이 일본 공사를 만나 일본인의 요구가 무리함을 질책하고 담판을 했다. 일본 공사는 일본 순사와 헌병을 시켜 이들 중에 김기우를 체포하여 경무청에 인계하였다.6) 주한 대리공사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는 김기우 등이 일본을 멸시하고 격한 말로 중상하여 양국의 친교를 생각할 때 대단히 유감이라면서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에게 이들을 엄벌할 것을 요구하였다.7)
1906년 홍주성전투와 순국
민종식 의병장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채광묵은 다음 해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채광묵은 1895년 홍주의병을 함께 일으켰던 안병찬에게 “나라의 힘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우리 임금의 신민 된 사람으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 원수 놈들의 압제를 그냥 두고 본단 말이오.”라고 하고 의병을 계획하였다. 채광묵은 안병찬, 박창로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민종식은 이들의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였으며, 박토 10여 두락을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민종식은 대장에 추대되자 1906년 3월 15일(음, 2월 21일) 광시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천제를 지내고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의병대는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일명 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관군의 저항에 후퇴한 의병대는 진로를 화성으로 바꾸어 청양의 합천 일대에 진을 쳤다. 그러나 관군이 오후 6시 먹고개에 도착하여 이를 탐문하고 밤 10시경 합천 인근에 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3월 17일) 오전 5시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은 의병대를 공격하여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고 의병은 해산되었다.
홍주성 수복 기록화
의병장 민종식은 간신히 탈출하여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의 친척인 민진석 집에서 은신하던 중 이용규 등과 5월 9일(음, 4월 16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치동(현,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이들은 홍산, 서천, 남포 등지를 점령하고 광천을 거쳐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성 시내에 들어왔다. 홍성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여 5월 20일 아침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의병진에서는 진용을 정비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지시하였다. 이때 해미 군수가 포군 10명과 약간의 군자를 보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고종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작성하여 이민학에게 주어 올리게 하였다. 상주문의 내용에는 을사5적과 이토 히로부미를 주륙할 것을 포함시켰으며, 거병한 이유를 들면서 거의한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홍주성을 의병진이 다시 차지하자 신보균·신현두·이식·안항식·김상덕·유호근 등 각지 인사들이 차례로 집결하였다. 합천전투에서 패한 후 집에서 피해 있던 채광묵도 참가하였다. 민종식은 의진을 재편성하였는데, 채광묵은 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와 함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채광묵은 병중이었는데, 아들 규대(奎大, 1889 ~ 1906)는 부친의 출진을 만류하였으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아들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였다.
“국난을 당하여 순사(殉死)함은 곧 내가 평소에 가졌던 뜻이거늘 어찌 집안에서만 있을까보냐”
- 송상도, 『기려수필』, 권1, 채광묵 조.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은 공주 병력을 지원받아 홍주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의병부대는 이를 격퇴시켰다. 21일은 수원헌병부대에서 증파된 헌병과 경찰의 공격을 물리쳤다.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하이바라(排原) 경시와 조선 경무관 및 그 부하 20명이 증파되었다. 이들은 24일 공주경무진위대에서 파견한 57명의 조선병과 함께 의병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은 27일 토보(土坊) 경부를 비롯한 일본 경찰을 체포하였으며, 이때 체포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은 5월 29일 밤에 처형되었다.
홍주성 극복과 의병패주 (황성신문 1906.6.2.)
이와 같이 몇 차례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주차군 사령관은 포병과 기병, 헌병 및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견하여 경찰과 헌병 그리고 진위대에게 지원하도록 훈령하였다. 일본군 보병 제60연대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지휘하의 보병 2개 중대는 기병 반개소대와 전주수비대 1개 소대와 합세하여 30일 홍주성을 포위하였다. 의병 측에서도 방어태세를 정비하였다. 29일에는 곽한일과 남규진의 부대 400여명이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과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 숲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오전 2시 반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했으나 31일 오전 4시경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 사살케 하였다. 의병은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이때 양민 역시 다수 희생되었다.8)
이 전투에서 채광묵 부자는 성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막다가 순국하였다. 일본군의 총알이 빗발치자 어떤 이가 그에게 대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채광묵은 “이미 대의를 부르짖었는데 어찌 차마 도망가 살 수 있겠는가?”라면서 부자가 일본군의 칼날에 전사하였다. 황성신문에서는 채광묵의 죽음을 6월 28일자에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蔡李哀哉
전설을 據한 즉 年前 京約所에서 열심하던 蔡光黙씨의 부자가 금차 홍주성에서 中丸被沒하고 客冬에 상소하다가 警廳에 피수하였던 李偰씨도 自家에서 십여 일 却食하고 飮酒致命하였다더라.
- 『황성신문』 광무 10년(1906년) 6월 28일 잡보
蔡李哀哉 황성신문(1906.6.28.)
서울에서 상소 올리는데 열심이었던 채광묵 부자가 홍주성에서 탄환에 맞아 절명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상소를 올리고 서울 경무청에서 옥고를 치른 이설(李偰) 역시 집에서 단식 자결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채광묵의 부인이 후일 시신이라도 찾고자 하였으나 부자의 유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유족들은 다음 해에 남아 있는 의복을 수습하여 청양의 신왕리 압수동(鴨水洞) 산록에 장사지냈다. 그의 족조 황석(黃石)과 사돈인 유상준(兪尙濬)은 부자가 함께 죽음에 정묵(楨默)의 아들인 규현(奎現, 1905 ~ 1979)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였다.9)
채광묵의 전사 소식을 들은 김복한(金福漢)은 다음과 같이 그의 순국을 기렸다.
“저 학식도 없고 의리도 모르는 놈들은 참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평상시에 의리를 공부하여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도 각자 도망가 살려고 한다. 그들이 채광묵의 의로운 죽음을 보고서 혹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 송상도, 『기려수필』, 권1, 채광묵 조.
안병찬은 아들과 함께 순국한 채광묵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다음과 같이 애통해 하였다.
“내가 형과 더불어 살고 죽는 마당에 의(義)만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먼저 목숨을 다하여 순의(殉義)하려는 본심을 얻었는데, 유독 나만은 완둔(頑鈍)하여 함께 죽기로 약속한 형만을 잃었습니다.”
안병찬의 채광문 제문
안병찬의 채광문 제문
안병찬의 채광문 제문
그리고 “형의 아들 규대가 형을 따라 죽었으니, 세상에서는 아버지는 충(忠)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 죽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10) 홍주의병에 함께 참여하였던 임승주(林承周)와 임한주(林翰周) 역시 채광묵을 ‘충신’이요 ‘의인’이라고 기렸다.11)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주성전투에서 채광묵과 함께 전사한 아들 채규대에게는 1992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맺는말
이상에서 보았듯이, 채광묵은 가학으로 유학을 수학하고 부친의 영향을 받아 충의정신을 배양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병찬 등과 김복한을 총수로 한 의병을 일으켜 반개화, 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다. 1896년 홍주의병이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채광묵은 상경하여 송수만 등과 도약소를 치리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적에 대해 복수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국외로 도망한 적을 잡아오지 않는 외부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한규설의 탄핵을 상소하였다. 1901년 8월에는 조정에서 내린 내부주사 직을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면서 강하게 거절하였다. 1904년 일본인 나가모리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김기우 등과 함께 반대 통문을 작성하고 일본공사를 만나 이를 질타하였다.
채광묵 묘(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채광묵은 안병찬 등과 또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 경찰대를 물리쳤다. 참모장의 직을 받고 항전하던 채광묵은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에 따라 파견된 2개 중대가 넘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수백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순국하고 말았다. 병든 몸을 끌고 의병에 참전한 부친을 모시고 항전하던 아들 규대도 홍주성전투에서 부친과 함께 전사했으니 아버지는 충(忠)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 죽었다 할 수 있다.
홍주의사총
홍주의사총
홍주의사총
참고문헌
ㆍ『인조실록』.
ㆍ『일성록』.
ㆍ『일신』.
ㆍ『경무청래거문』.
ㆍ『평강채씨족보』 권3(1953년).
ㆍ안병찬, 「제채공구연문 祭蔡公龜淵文」.
ㆍ김복한, 『지산집』.
ㆍ임한주, 『성헌집』.
ㆍ송상도, 『기려수필』.
ㆍ황현, 『매천야록』.
ㆍ채동열, 「광무의사구연족질유록 光武義士龜淵族姪遺錄」, 1949.
ㆍ김상기, 『호서유림의 사상과 민족운동』, 지식산업사, 2016.
ㆍ김상기, 「1895 ~ 1896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990.
ㆍ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주석
1) 채동열, 「광무의사구연족질유록 光武義士龜淵族姪遺錄」, 1949.
송상도, 『기려수필』, 권1, 채광묵 조.
2) 김상기, 「1895 ~ 1896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990.
송상도, 『기려수필』, 권1, 채광묵 조.
3) 『일성록』건양 2년 4월 25일·27일, 『관보』건양 2년 5월 28일·31일 호외.
4) 충청도 관찰영에 보낸 「청원서」 사본. 『일신 日新』13책, 광무5년(1901)10월 초4일조.
『매천야록』 권3 광무5년 신축 10월 “채광묵을 내부주사로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채광묵은 복수소를 올려 복수할 기회가 없다고 하였는데, 복수하기 전에 관함官啣을 받는 것은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하면서 강력히 사절하였다”.
5) 채동열, 「광무의사구연족질유록 光武義士龜淵族姪遺錄」, 1949.
6) 『경무청래거문』 1, 조복(照覆) 제14호, 「일본공관이 압송한 김기우의 공안을 알림」, 1904년 6월 25일(발신자 경무사 육군참장 신태휴, 수신자 외부대신 이하영).
『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2. 외부래(外部來) 1·2, 조복(照覆) 제109호 (47) [배일상소자 김기우 등의 진술서 및 관계 회답문 송부 건], 1904년 6월 25일(발신자 대한외부대신 이하영, 수신자 대일본임시대리공사 萩原守一).
7) 『경무청래거문』 1, 조회 제11호, 「유학 김기우 외 22명이 돌린 배일통문에 관한 건을 알림」, 1904년 06월18일 (발신자 외부대신 이하영, 수신자 경무사 신태휴).
8)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9) 안병찬,「제채공구연문 祭蔡公龜淵文」, 『평강채씨족보』권3(1953년).
10) 안병찬, 「제채공구연문 祭蔡公龜淵文」.
11) 임한주, 「제구연채공문 祭龜淵蔡公文」, 『성헌집』권3,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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