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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황상규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무오독립선언서 서명

김원봉 등과 의열단 조직

일제 기구와 고관 처단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있다 밀양폭탄사건으로 체포(징역 7년)

신간회 위원으로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구명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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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규

황상규 , 1891 ~1931 , 독립장 (1963)

황상규, 그는 누구인가

1910년 이후 한국민족은 조국강토의 안팎 도처에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벌였다.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시세와 환경조건의 변화에 조응하는 다양한 운동방략을 채택, 동원하였는데, 국외 독립군 무장투쟁이나 국내 노농·학생·여성 대중의 조직적 항일투쟁 못지않게 중요한 위치를 점했고 그 의의도 자못 컸던 것이 국내외 의열(義烈)투쟁이다.

의열투쟁의 이념적 목표는 제국주의적 약육강식의 기존 세계질서를 천하정의·만국공의 정신에 입각하여 무너뜨리고 평등호조의 공생공존 질서로 변환시킨다는 것이었다. 당면의 현실적 목표는 일제 타도와 조국광복이었고, 그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한 최적의 방법론이 일제의 주요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응징이었다.

이처럼 암살과 파괴를 주된 활동내용으로 삼는 의열투쟁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로 본격화하여 맹렬히 전개되어 갔는데, 가장 먼저 그것을 시동 걸고 앞장서 이끈 주체는 의열단이었다.

의열단 창립의 주역은 약산 김원봉(金元鳳)이었다는 것이 오랜 통설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의 연구 성과들에 의하여, 창단 기획 및 준비의 주역은 중국 길림의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라는 조직원들이었고, 그 중심에 황상규가 있었으며, 김원봉은 그를 도와 창단 동지들을 모으고 묶어내는 일을 주로 맡았던 것임이 규명되었다. 말하자면 황상규가 의열단 창단 과정의 산파였던 셈이다.

나아가 황상규는 의열단 초기 단원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의열단이 최초의 국내 특공거사 계획을 거국적으로 추진했을 때 그는 뒤로 빠져 있지 않고 단원들과 똑같이 밀입국하여 폭탄거사 실행을 함께 꾀하다 피체되어 장기 옥고를 겪었다. 그럼으로써 언행일치·솔선수범의 혁명가적 자세를 몸소 보여주고, 의열단 감투정신의 원초적 공급자가 되었다.

생애 초기의 국내활동과 항일운동

황상규는 1890년(1891년 설도 있다) 경상남도 밀양군의 밀양성내 노하골(현재는 밀양시 내이동)에서 창원 황씨 문옥(文玉)과 허경순(許敬順)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별호를 백민(白民)이라 했고, 별명은 관운장(關雲長)이었다.

별호가 만일 ‘백의민족’의 준말로 지어진 것이었다면, 강렬한 민족의식의 의취가 거기서 느껴진다. 혹은 한 점 티끌 없이 순직하고도 소탈한 낮은 자리의 삶을 살겠다는 결의가 배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좀 특이해 보이는 별명은 자칭한 것이었기보다, 『삼국지』 속의 명장 관우와도 같이 무게 있고 믿음직스러운 언행, 굳센 의지, 불퇴전의 용기와 함께 한없이 넓은 도량을 갖추었던 그의 인품을 경모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일 터이다. 그의 성품에 대해, “한없이 강직하며 용감하여 기대를 많이 받았다”(동아일보)는 평언도 있으니 말이다.

황상규 선생 집터
황상규 선생 집터

그의 가정배경과 학업이력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가정이 빈한했고 독학을 했다거나, 밀양 향교 안에 1909년 설립된 진성학교를 졸업했다는 얘기만 전해진다. 일부 문헌에는 그가 18세 때(1908년경) 밀양군 상동(上東)의 고명학원과 밀양 읍내의 동화학교, 그리고 마산의 창신학교를 설립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동화학교에 관한 근래의 연구성과나 창신학교 설립에 관한 공식기록들에 비추어보면 신빙성이 많이 약한 얘기들이다.

고명학원과 관련해서는 황상규가 교사로 있으면서 『동국사감』이라는 역사교재를 저술하여 가르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교사였던 그가 설립자로 오인되어 잘못 전해져 온 것인지 모른다. 동화학교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게, 그의 일시적 교사직 이력이 설립자로 과장 또는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실은 1908년 7월에 밀양 성내에 노동야학이 개설되었는데, 생도가 200여 명에 달하나 교비 조달의 어려움을 딱하게 여긴 관청에서 교사들을 명예교수로 추대했고, 그 중 체조교수가 황상규였다 한다(황성신문). ‘창신학교 설립’ 운운도 1911년부터 그 학교의 교감으로 재직 중이던 안확(安廓)이 1913년경부터 황상규와 항일 비밀결사 활동을 같이했음에서 연유하여 만들어져 나오게 된 얘기인 것 같다.

그 ‘비밀결사’란 다름 아닌 일합사(一合社)였다. 일합사는 친목단체로 위장한 채 조직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데다 국지적 조직이기도 했던 때문인지, 그 성립과 활동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몇 가지 단편적 정보들을 모아서 정리해보면, 일합사는 “조국광복의 일편단심을 모아서” 국권회복에 청춘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결의에 의해 1913년에 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상규를 비롯하여 밀양의 청년지사이던 김대지·구영필·윤치형, 경북 칠곡 사람인 이각(=이수택), 서울 출신이면서 초빙을 받아 마산으로 가서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해 있던 안확, 훗날 마산의 3·1운동을 주도하고 신간회 지회장도 맡게 되는 실업인 명도석 등이 같이 참여했던 것 같다.

이와 별도로, 1913년 말에서 1914년 초쯤에 황상규를 필두로 김대지와 이각이 비밀결사 광복단에 가입하여 정식 단원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복단은 1913년경 경상북도 풍기에서 의병운동 경력자인 채기중·한훈 등 10여 인의 발기로 결성되었는데, 조직망을 넓히고 회원을 늘려가는 과정에 경남지역의 청년지식인들이 영입된 것 같다. 그 후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의 주도로 대한광복회가 결성될 때 광복단원들도 대부분 참여하여 새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이처럼 일합사와 풍기광복단은 황상규·김대지·이각 등의 중복 가입자가 있었고, 결성 시점도 비슷했다. 그렇게 보면 두 비밀결사는 은밀히 기맥이 통하는 정도를 넘어서, 직접 연결되어 연합활동을 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일합사는 광복단 조직을 경남지역으로 확장시키려는 목적에서 결성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움직임이 결국은 대한광복회라는 통합조직으로 흡수되어 갔고, 광복회원들은 1916년부터 군자금 확보와 무기 구득을 위한 공격적 거사를 수차 감행하였다. 그로 인해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고 조직이 노출되어, 1918년 1월부터 주축인물 다수가 속속 검거되고마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자체 규약도 만들어 조직적으로 움직이던 일합사 역시 몇 년 후 그 존재가 일경에 포착되어버린 것 같다. 1917년경에 구영필과 김대지가 만주 봉천과 평양에서 연이어 일경에 피체되고, 명도석 등 다른 회원들도 줄줄이 피검, 압송되어 간 것이다. 당연히 그로 인해 일합사 활동은 중지되고 조직도 해체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조직이 파괴되어감에 광복회(와 일합사)의 미 체포 회원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국외로 피신하는 길을 택하였다. 황상규도 김대지와 함께 1918년 말에 고국을 떠나, 광복회 만주본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인 만주 길림으로 갔다. 이때 같이 망명한 밀양인 이병철은 안동현(현재의 단동)에 원보상회를 개점하고 비밀연락기관 역할을 맡아하기 시작했다.

만주 망명 직후의 독립운동과 의열단 창립 주도

길림에서 황상규는 여준, 조소앙, 김좌진, 손일민 등 여러 망명지사들과 함께 의병적 무장투쟁의 의지를 모아서 1919년 2월 말에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고 재무를 담당했다. 그리고 국외 망명 독립운동자들의 연명으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의 서명자 39인 중 1인이 되었다. 의군부는 동년 4월에 조선독립군정사(통칭 길림군정사)로 명칭을 바꿨고, 황상규의 직명은 회계과장으로 되었다.

그 조직은 장차 무장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현재의 주·객관적 여건을 감안해 대일항쟁의 효과적 방책을 모색하는 것도 급선무였다. 그로부터 얻어진 결론이 ‘육탄혈전’이었다. 소수 정예의 결사대를 조직해서 폭탄을 갖고 적의 요새를 부수는 작탄(폭탄을 터뜨림)투쟁을 결행함에 의해 일제 통치기관과 그 요인들을 타격·섬멸하자는 것이었다.

그 무렵 2월에 남경 금릉대학에 재학 중이던 김원봉이 북행길에 올라서, 3월에 길림으로 들어섰다. 이것은 황상규의 부름을 받고서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두 사람은 8살 차이의 고모부와 처조카라는 특별한 관계였음에서이다.

뒤이어 여름에 김원봉은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로 찾아갔다. 황상규의 지도를 받고서였을 것이다. 거기서 김원봉은 동향 친우들인 김상윤·한봉근·한봉인과 재회했고, 이종암·이성우·서상락·강세우·신철휴 등의 다른 재학생들도 새로 알게 되고 의기가 통하여 동지로 규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졸업 직후인 10월에 전원 길림으로 동행하여 집결했다.

밀양의 3월 만세시위를 주동했던 윤세주와 윤치형, 창원의 4월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배동선(=배중세), 교사이면서 청주의 3·1운동을 주동했던 곽재기가 모두 만주로 탈출한 후 길림에 와 있어서, 그들과도 합류할 수 있었다.

의열단 결성지
의열단 결성지

이들 10여 명의 청년들은 길림성 파호문 밖의 중국인 집을 빌려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혔다. 그리고는 11월 9일 밤에 다들 모여앉아 조직결성과 활동방침에 관해 밤새워 논의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할 결사대적 조직으로 의열단을 창립시켰다.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함”,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을 확고히 가짐”,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단의(團義) 실현에 매진함” 등의 10개 공약을 정하고 비장한 결의도 다졌다. 황상규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자와 밀양 출신 청년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창립단원들은 서로 피를 나눈 형제처럼 굳은 의리로 뭉치고자 했다. 그리고 의형제 중 우두머리라는 의미의 ‘의백’(義伯)을 한 사람 정하여, 단의 대표자 겸 지휘자로 삼기로 했다.

청년기의 황상규 선생
청년기의 황상규 선생

그러면 그때 의백으로 선임된 이는 누구였을까?

김원봉이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인데, 그의 회고담이 많이 들어간 저술인 『약산과 의열단』(1947) 속의 서술을 존중하여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러나 최초의 의백은 황상규였고 그가 피체된 후에 김원봉이 단장 직을 승계한 것이라는 견해도 몇 가지 논거와 방증자료를 갖고서 강력히 대두된 바 있다. 창단 전후의 여러 정황, 연령서열·이력사항 등이 자연스레 중시되는 상식적 견지, 그리고 두 사람 간의 특별한 관계 등에 비추어보면, 오히려 후자의 견해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다만, 황상규 스스로가 조카인 김원봉과 함께 단원 반열에 서기보다는 외곽의 후견인 혹은 고문격의 위치와 역할을 자담코자 하여 창단회합 자리를 일부러 피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는 그의 의중대로 김원봉이 의백으로 추대되도록 만들거나 조정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상당히 어색한 일처리로 여겨졌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제3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애초 의백으로 추대되었던 황상규가 국내기관 특공거사를 위해 귀국하면서 김원봉은 중국에 남도록 특별지시를 함과 동시에 차후로는 그가 ‘단장’이 됨을 공언하고 직위를 이양했을 가능성 말이다. 그러나 어떻든 현재로서는 어느 쪽의 주장·추리가 맞는 것인지 확언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니 일단 통설을 유지하기로 한다.

의열단의 제1차 국내 특공거사 추진에 참여

의열단 결성 취지가 본래 그랬듯이, 창립단원들은 처음부터 고강도의 ‘암살파괴운동’을 벌여나갈 것을 결의했다. 표적은 총독통치의 두 인적 주축을 이루는 일본인 고관과 한국인 민족반역자 부류, 그리고 식민지 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와 부속 시설물들이었다. 구체적으로 적시하면,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탐(敵探),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을 처단하는 것이고,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들이었다.

단원들은 한마음으로, 지체 없이 국내거사 준비에 돌입했다. 우선은 경성(京城)의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세 곳을 투탄공격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단원 전원이 이 계획의 추진에 참여하며, 안동현의 연락기지와 경남지방 항일운동자 몇몇의 측면지원을 받기로 했다. 국내 현지에서의 준비와 실행은 부단장 곽재기가(그는 김원봉보다 다섯 살 위이면서 단원 중 최연장자였다) 지휘하고, 김원봉과 강세우는 중국에 남아서 후방지원과 선전 등의 일을 맡아하기로 약정했다.

조선인 관공리들에 대한 의열단의 경고장
조선인 관공리들에 대한 의열단의 경고장

무엇보다도 거사용 무기의 확보가 선결을 요하는 문제였다. 이를 위해 창단 직후부터 기울인 노력이 1920년 3월 들어 결실을 맺었다. 김원봉과 곽재기·이성우가 상해로 내려가서 백방으로 애쓴 결과, 1차로 탄피 3개와 폭약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화약압축식 대형폭탄, 도화선 점화식 중형폭탄, 투척 즉발식 소형폭탄(즉 수류탄) 1개씩을 제조했다. 다시 4월 중순에는 폭탄 13개(점화식 7개, 투척식 6개) 제조용의 폭약과 탄피, 권총 두 자루, 탄환 1백 발을 모 중국인으로부터 추가 구입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단원들은 속속 국내로 잠입했다. 황상규는 김상윤·윤세주와 함께 자금조달을 위한 선발대로 1919년 12월 중순경에 입국했다. 뒤이어 밀입국한 단원들도 밀양·부산·마산·서울 등 각자의 연고지로 분산하여 잠복상태로 들어갔다.

상해서 구입한 무기의 국내 밀반입은 두 차례에 걸쳐 이어달리기 식으로 진행되었다. 1차분 폭탄 3개를 3월 중순에 안동현의 영국인 세관원 유스 포인에게 소포로 부쳐놓고는 곽재기가 대련(大連)을 거쳐 안동으로 가서 소포를 찾아 원보상회의 이병철에게 넘겨주었다.

의열단 자금 협조 명령서
의열단 자금 협조 명령서

이병철은 옥수수 스무 가마 속에 폭탄을 숨겨 포장해서 밀양의 화물운송점으로 부쳐놓고 기차 편으로 뒤쫓아 갔다. 밀양역에서 화물을 찾은 그는 폭탄만 따로 빼내 사회단체 밀양구락부의 대표이던 김병환에게 넘겼고, 김병환은 미곡상점을 겸하는 자기 집의 마루 밑에 숨겨놓았다.

2차분 무기 묶음은 5월 초에 이성우가 옷상자로 위장해서 휴대하고 선편으로 안동현까지 가서 이병철에게 건네주었다. 이병철은 먼저 번처럼 옥수수 다섯 포대 속에 무기를 넣어 포장하고, 다른 열다섯 포대와 뒤섞어 화물인 것처럼 위장해서 부산진역의 한 운송점으로 보냈다. 이것을 배중세가 수령한 후, 비밀 표식이 된 다섯 포대만 따로 추려 창원군 진영에 사는 강상진의 집 창고에 숨겨두었다.

이처럼 무기가 잘 반입됨에 따라 임무분담과 자금조달 등의 다른 준비작업에도 박차가 가해졌다. 총지휘자 곽재기는 3월 하순에 입국하여 거사준비 상황을 점검하면서, 한봉근·신철휴·김상윤·윤세주 4인을 투탄요원으로 우선 지명했고, 나중에 곽재기 본인과 이성우·김기득(=김태희) 3인이 추가되었다. 곽재기는 다시 상해를 다녀오고는 서울 공평동의 한 여관에 지휘소를 차려놓고 수차 지방순회 점검도 해가면서 거사준비를 독려하였다.

거사 실패로 피체되다

특공거사 결행일은 7월 10일경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거사계획이 차질을 빚고 말았다. 밀양 김병환의 집이 경기도 경찰부원의 불시 수색을 당하여, 은닉폭탄 3개가 적발, 압수되어버린 것이다.

밀양의 폭탄이 적발됨과 더불어 경성부 관내에 경찰의 특별경계령이 내려져서,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진영에 보관 중인 2차 반입분 폭탄 13개는 거사 때 뿌릴 격문의 인쇄비가 조달될 때까지 서울로의 이송이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6월 16일에 황상규는 동지들과 함께 불행히도 체포되고 말았다. 서울 인사동의 모 중국음식점에서 이성우·이낙준(李洛俊) 등과 거사 행동계획을 의논하고 있던 중에 김태석과 그 부하들의 급습을 받아서였다. 이 급습은 밀정 김진규의 제보에 의해서였다 한다.

무기 보관상태 점검 차 부산에 가 있던 곽재기와 김기득도 그곳 여관에서 검거되고, 윤치형·배중세 등 다른 단원들과 협력자들도 연이어 피체되었으며, 진영의 무기 은닉처도 결국 발각되어 9월 20일에 모두 압수되어버렸다. 그래도 이종암·김상윤·서상락·한봉근·이수택 5인은 재빨리 피하거나 은신하여, 전원 피체라는 최악의 사태는 간신히 면하였다.

창단 후 처음인 대적거사를 결사적 의지로 기획했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준비하고 추진했는데, 뜻밖의 비밀누설로 인해 마지막 단계에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특공거사 계획이 “3·1운동 이후로 세상의 이목을 가장 놀라게 한 사건”으로 입에 오르내릴 만큼 대담무쌍한 것이었기에, 총독부 당국자들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하며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하나 마냥 감춰둘 수만은 없는 사건이기에 총독부 경무국은 7월 29일에 그 ‘전모’를 발표하였고, 동아·조선 두 신문이 호외를 내면서 ‘밀양폭탄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크게 보도하였다.

밀양폭탄사건 판결문
밀양폭탄사건 판결문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은 독립운동의 전투성을 크게 거양시켜 준 선도적 사례였음에서, 다른 운동조직 및 결사체들도 자극을 받아 유사한 거사 기도가 그 후로 속출하였다. 또한, 이번 사례가 주는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긴 김원봉은 보다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워서,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및 서장폭살의거,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폭파의거, 김익상의 조선총독부진입투탄의거 등을 연이어 성공시킬 수 있었다.

밀양폭탄사건 관련 피검자는 모두 20명이었다. 전원이 경남경찰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7월 31일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여 동안의 예심 절차를 거친 후 황상규는 검사의 유죄 결정으로 기소되었고, 14명의 다른 피고와 함께 1921년 3월부터 경성지법의 재판정에 세워졌다. 경찰 조사와 검사국 예심 과정에서 갖은 악형과 고문이 가해졌음에도 황상규는 혀를 깨물고 입을 다물어 한 마디도 자백하지 않았다. 때문에 검사는 그의 혐의사실을 다른 피의자들의 진술을 통해서만 겨우 인지하여 극히 일부만 적시하게 된 것이어서, 그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기소’처럼 되고 말았다고도 한다.

황상규 선생(앞줄 오른쪽 2번째)과 의열단 동지들
황상규 선생(앞줄 오른쪽 2번째)과 의열단 동지들

1920년 6월 21일의 결심공판에서 황상규에게는 ‘폭발물취체규칙’과 ‘제령 제7호’ 위반 죄목으로 징역 7년형이 선고되었다. 그 형량은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도 변경되지 않고 그대로 확정되었다. 곽재기·이성우 8년, 김기득·이낙준·신철휴·윤세주 7년, 윤치형 5년, 김병환 3년, 배중세 2년 등, 다른 동지들의 형량도 대부분 무거운 것이었다.

황상규의 형기는 1923년에 칙령으로 5년 4개월로 감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1926년 4월 24일에 김태희와 함께 마포의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그리고는 거의 6년 만에 밀양 내이동의 집으로 돌아온 그의 귀에 애통하기 그지없는 말이 먼저 들어왔다. 전년도와 금년도에 아들·딸 하나씩이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냥 주저앉아버릴 그가 아니었다.

지역사회운동에의 진력과 민족문화운동 참여

고향의 동지들은 다들 백민의 출옥을 반기고 기뻐하며 위로의 자리도 마련하는 한편, 더욱 믿음직스럽고 성숙해진 그의 풍모를 대하고는 기대감도 내보였다. 그에 부응하듯이 백민은 먼저 출옥해 있던 의열단 동지들인 김병환·윤치형과 함께 밀양의 사회운동 조직에 들어가서 혁신과 단결을 기하도록 하고, 사회운동을 통한 항일역량 강화와 기반 다지기에 힘쓰고자 했다.

밀양지역 인사들과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
밀양지역 인사들과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

우선 그는 밀양의 청년운동에 가담하였다. 1920년 창립 이후로 활동이 극히 부진한 채 근근히 유지되어 오던 밀양청년회가 1927년 3월에 총회를 열어서, 자체 혁신과 밀양사회 개혁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한 달 전에 출옥한 윤세주도 바로 몸을 일으켜 그 대열에 동참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4월의 집행위원 개선 때 황상규·윤치형·윤세주 3인이 신임 위원으로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원숙한 지도력과 투쟁성을 갖춘 인물들이 청년회를 혁신 재건시키고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5월 들어 밀양청년회는 경남도 당국이 밀양군청의 위치를 밀양역전으로 옮기려 하는 데 반대하는 운동을 개시하였다. 몇 명의 일본인 지주를 위하여 다수 군민의 이해를 희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5월 3일 밤, 군청 앞 광장에서의 진정위원 보고회에서 황상규가 축사를 하고 군청이전 대책위원회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반대운동은 점점 기세를 더하여 연말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후 2년여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1927년 10월의 청년회 정기총회에서 황상규가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회원 연령을 30세 이내로 제한한다는 규정이 재확인 결의되자 그는 곧 사임하였다. 하지만 그 문제에 일절 개의치 않고 그는 지역사회의 현안에 적극 개입하여 백의종군의 자세로 해결 또는 개선에 일익이나마 담당하려 했다. 일례로, 1927년 11월 9일 밀양공립농잠학교 1·2학년생 전원이 학교 당국의 강압조치에 항의하여 동맹휴학에 돌입하자 황상규 등 5인이 학부형 및 유지 모임에서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어 학교당국을 상대로 활동했다. 같은 달, 밀양공립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학생 1명이 타서 죽은 불상사가 있은 직후, 학부형회 부회장이던 황상규가 조사위원 대표로 선임되어 조사활동을 벌이고, 교장 및 담임교사의 사과와 재발방지 서약서 제출을 요구하여 관철시키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로 밀양공보 학부형회는 교육시설·교육환경 개선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하여, 1928년 3월에 황상규 등 5인이 교섭위원이 되어서 경남도 당국에 교사 개축을 건의했다. 그런데도 당국이 외면하고 소극적인 태도만 내보이자, 발분한 학부형회가 스스로 개축 기성회를 조직하고 비용 모금에 착수하였다. 그런가하면, 밀양여자청년회가 운영을 주관하고 있던 여자야학회의 교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황상규는 교섭위원이 되어서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애를 많이 썼다. 또한 그 해 여름에는 농촌문제 대강연회, 경남축구대회, 밀양유학생간담회 등의 연이은 개최에 앞장서고 매번 사회를 보는 등 지역사회 내의 중요 행사들을 주도하며 활력 넘치는 행보를 이어갔다.

이외에 그는 언론운동과 한글운동 등의 전국적 민족문화운동에도 참여하여 힘을 보탰다. 일제의 극심한 언론통제에 맞서서 새로운 민족지를 육성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영남 출신 민족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중외일보를 인수하고 주식회사로 재창립하려는 움직임이 나오자 황상규도 호응하여 발기인으로 동참한 것이다. 총 2400주 중 고작 5주를 인수하는 빈궁한 처지이긴 했지만(최대 주주는 290주를 인수한 마산부호 이우식), 그래도 그는 1928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이우식·안희제·이상협 등의 호협지사형 대주주들과 활달하게 교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1929년 10월에는 조선교육협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발기하여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황상규도 그 발기인 중 1인이었다.

신간회 운동에의 헌신과 지켜내기 위한 노력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전열 내의 좌우합작에 의한 최대의 민족협동전선 조직이던 신간회운동에도 황상규는 헌신적으로 참여했으며, 마지막에는 ‘해소론’에 반대하여 조직을 지켜내고자 무진 애를 썼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반(反)자치론 절대독립 노선을 고수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일대 연합전선 조직체로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그 후 신간회 중앙본부는 자체의 인적·조직적 역량을 확충함과 아울러 지방조직의 구축 및 활성화에도 힘쓰기 시작했다.

신간회 창립 총회
신간회 창립 총회

그런 흐름 속에서 밀양에서도 신간회 지회 설립 움직임이 일어나 1927년 12월 19일에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창립준비위원이던 황상규는 그 대회의 임시의장이 되어 본부 규약을 낭독하고 지회 규칙을 통과시켰다. 연후의 임원선거에서 황상규가 회장, 김병환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창립대회 이후로 회원 가입자가 급증하여, 며칠 사이에 70명에서 13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신간회 밀양지회의 창립과 조직구성을 주도한 이들은 3·1운동과 의열단 창건 및 밀양폭탄사건에 직접 참여했거나 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어 온 인물들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특히 황상규와 윤세주가 지역의 민족운동 재활성화에 앞장서면서 그 기운과 실력이 신간회 지회 설립으로 결집된 것이다. 그들의 경험과 식견을 지역의 젊은 사회주의자들도 존중하고 기꺼이 지도받으려는 자세였다.

창립 두 달 후인 1928년 2월에 밀양지회가 발표한 운동방침 7개 항은 본부가 제시했던 6개 항의 운동방침이나 인근 양산지회의 그것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높은 수위의 정치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 역시 황상규·윤세주 등 중심인물들의 개별 특성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신간회 밀양지회는 “1인 1구좌, 1구좌는 1원”의 로치데일(Rochdale) 방식의 협동조합을 1928년 2월에 결성했다. 이사회에서 조합장으로 선임된 그는 협동조합운동이 경제운동으로 시작하지만 종국의 목적은 정치운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했다. 그 후 밀양협동조합운동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이처럼 황상규는 신간회 밀양지회의 창립 및 초기 활동 단계에서 최고 지도자 역할을 맡아했을 뿐 아니라, 군내 선전홍보 및 조직 확충, 인근지역 지회와의 유대증진 활동을 폈고, 본부 대회에도 출석하였다. 그야말로 신간회 지회를 주축으로 하는 밀양 사회운동권의 ‘신간(身幹)’이 된 것이다. 그 후 2년여 동안 밀양지회는 필요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나름의 원칙과 방향을 정해놓은 위에서 다양한 활동을 펴나갔다.

그러던 차에 신간회 중앙본부에서는 매년 개최 예정이던 전체대회가 경찰의 금지로 계속 무산되어 정상적인 활동을 해나가기 힘든 상황이 되자, 1929년 4월 들어 복대표대회 준비에 착수하였다. 도내에서 인접한 몇 개 지회가 연결을 지어 소구역회의를 통해 1명의 대표(‘복대표’)를 선출하여 보내면, 그들이 모인 회의로써 전체대회를 대신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신간회 본부 임원진
신간회 본부 임원진

그리하여 1929년 6월 28 ~ 29일 양일간 서울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리게 된 전국복대표대회에 황상규가 밀양·양산·울산 3개 지회로 구성된 양산 소구회(小區會)의 대표가 되어 참석하였다. 총 27인의 복대표들 중에서 중앙간부진 선출을 위한 도별 1인씩의 11인 전형위원을 뽑게 되었을 때 황상규는 경남 몫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검사위원을 선출함에 있어서 허헌(許憲) 다음으로 많은 횟수의 추천권을 행사하였다. 게다가 그 자신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서 38명 위원이 참석해 열린 7월 4일의 중집위 회의에서 그가 서기장으로 지명 선임되었고, 본부의 각 부장 전형에서도 핵심 중책인 서무부장으로 겸임 피선되었다. 이에 그는 신간회 밀양지회장 직을 내려놓았고, 김형달에게로 넘겨졌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의 일대 충돌사건이 발생하자 신간회 본부에서는 진상조사단을 급파하였다. 서무부장 황상규는 허헌 위원장, 김병로 재무부장과 함께 11월 9일 광주로 내려가서, 광주고보 학부형회 위원들을 만나고 유관기관을 방문하면서 사건진상 조사와 구속학생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귀경 후 11월 15일에 열린 중앙상무집행위원회에서 황상규가 진상을 보고했고, 상집위원회와 집행부는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12월 13일에 ‘광주학생사건 진상발표 대연설회(민중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경찰이 대회 개최를 엄금하고 허헌을 비롯한 신간회 간부 및 회원 외 청년·노동·여성단체 관계자 등까지 모두 91명을 예비검속하여 구금하는 대탄압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신간회 본부 기능이 마비되어버리자, 기소유예로 석방된 김병로가 다른 부장직을 겸임하고 사실상 위원장도 대행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1930년 11월에 열린 전체대회대행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황상규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재 선임되었으나 서무부장 직에서는 면임되었다(후임은 김항규). 그런데 경성지회가 중앙본부 일부 간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통의문’을 전국 지회들에 발송하여 본부에 맞서고, 신간회 ‘해소론’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부 지방지회들에서 나오면서 신간회 전체조직은 격랑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1931년에 들어서자 해소론, 존속론, 해소연구론 등 3파로 나뉘어 논쟁이 격화되었다. 거기에 더해, 원래 1931년 2월에 개최되어야 할 신간회 전체대회를 5월로 연기시키는 공작을 일제 당국이 은밀히 벌이고 그동안에 해소론이 번져가게끔 책동하였다.

이런 사태 속에서 그 이면을 꿰뚫어보고 있던 황상규는 의연히 신간회 해소론을 공박하고 반대하는 입장을 계속해서 피력했다. 밀양지회도 정기대회 결의 등을 통하여 일관되게 해소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인근의 마산지회와 양산지회도 같은 내용의 결의를 거듭 내고 신간회를 끝까지 지켜내려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헛되이, 1931년 5월에 개최된 제2차 전체대회에서 해소안이 졸속으로 가결되고 경찰이 그 결과를 밀어붙임에 의해 신간회는 스스로 해체·소멸되고 말았다. 해소 문제에 대하여 5월초까지 본부에 건의안이 제출된 상황을 보면 해소 건의가 5개 지회, 비 해소 건의는 9개 지회였다.

안타까운 별세, 만인의 애도

그로부터 넉 달 후인 1931년 9월 2일 밤, 밀양 자택의 병석에 누워있던 황상규가 영영 눈을 감고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났다. “나는 죽어도 집에서는 죽지 않고 대중을 위하여 밖에서 일하다가 밖에서 죽겠다”고 늘 다짐하던 그가 돌연 신병을 얻더니 41세의 이른 나이에 집에서 별세하고 만 것이다.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에 더하여 출옥 후의 수많은 과업들이 초래했을 심신피로의 누적,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신간회 자진 해체가 야기한 심적 충격과 울분이 그를 갑작스런 병고로 몰아넣은 것일 터이다.

황상규의 장례는 수십 개 사회단체 공동 주관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밀양 군민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수만 명 동지들이 조문을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장례일인 9월 6일, 밀양 읍내는 길거리가 막히고 교통이 두절됨에 완전 철시 상태가 되었고, 영결식장에 모인 사람이 만여 명에 달하였다. 마산·대구·약목·부산·동래·양산·진주·김해 기타 각 군에서 온 사회단체 대표들과 동지 수백 명이 조기와 만장을 들고 길게 참렬하였다. 장의위원장 정웅의 식사와 30인 장의위원회 명의의 영결문 낭독에 수천 명이 통곡하여,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백여 통의 조문과 조전도 일일이 낭독되었고, 밀양청년동맹 외 각 단체가 교대로 상여를 운구하였다.

백민 황상규 선생 동상
백민 황상규 선생 동상

군내 전 경찰력을 동원하여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해 있던 경찰 당국은 장례행렬이 어느 순간 대규모의 시위대나 봉기군으로 바뀔까봐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경남도경이 경북도경에 지원을 요청하여 수십 명의 형사대를 파견 받아 요소요소에 잠복시켰고, 조기·조문·만장 등을 압수하고 돌연히 길을 막아 장의 행렬의 진로를 방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군중이 조악(弔樂)을 울리며 경찰서로 몰려가 포위하고 대치하니, 당국은 경남·북 경찰을 총동원하여 간신히 진압했다. 이런 소란 속에 영구는 부북면 용지리 선영하에 가까스로 도착하여, 하관 안장되었다.

이튿날인 9월 7일에는 서울 경운동의 천도교기념관에서 권동진·안재홍·김병로 외 재경동지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가 거행되었다.

그의 별세 직후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황상규의 가정은 가난에 가난이 더하여져서, 지금 있는 집도 남의 집과 다름없는 것이었고, 한 뼘 땅도 없는 가정에 70여 세의 노모, 어린 두 아들, 출가한 딸 하나와, 당년 40세의 부인이 남겨졌다 한다. 1913년생인 그의 아들 황용암은 1927년 이후로 1930년대 초까지 밀양의 소년운동을 주도하고 청년운동·학생운동·노동운동에도 관여하여 수차 경찰에 검속 당하는 등, 부친의 정신을 이어받는 이상으로 그 초상을 그대로 재현시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백민 황상규의 역사적 공적과 인간상

돌아보면 백민은 어떤 존재였고 어떤 인물이었던가.

언뜻 보면 책 쓰고 교편이나 잡고 앉았을 단아한 선비의 인상이면서도, 일찍이 일합사와 광복단 운동부터 시작하여 의열단, 청년회, 신간회운동으로 이어진 항일독립투쟁의 가시밭길을 한 치의 흔들림도,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의연당당하게 헤쳐 온 용장 중의 용장이었다. 일견 형용모순이어 보일 ‘선비형 용장’과 같은 모습이 오히려 주위의 많은 동지들과 지역사회의 후배 운동자들에게 귀감과 사표가 되기에 충분했고, 실제로도 그러했음을 우리는 많은 대목에서 느낄 수가 있다.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의 영혼’으로 지칭되는 윤세주의 줄기찬 항일행로와 도량 큰 풍모만 하더라도 황상규의 영향을 빼놓고서는 제대로 다 살피고 운위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백민은 생전만 아니라 사후에도 밀양 출신 의열단계 독립운동가들의 영원한 맏형이요 정신적 대부로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다.

신간회 선전부장이었던 이종린의 평에 의하면, 황상규는 명망과 실상이 상부하고, 열정이 강하며, 지혜와 성심이 있고 수완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기질과 성품으로 그는 안락의 기회를 조금도 누림 없이 일생을 고행으로 시종했고, 난관에 봉착해도 절대로 피하거나 굴함이 없이 정면으로 뚫고나가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실로 위대한 독립투사요, 언행일치의 진실된 민족지도자의 반열에 설 만하다. 이와 같은 공적을 높이 기리어 1963년 대한민국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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