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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환
양근환
, 1894 ~1950
, 독립장
(1980)
“나는 학문도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으로 일본인에게는 지지 않는다.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 중에는 조선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불찬성하는 사람도 있는 줄로 생각하지마는, 어찌 그럴 리가 있으랴.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 헌병 제도가 변하여 순사 제도가 되고 무단정치가 문화정치가 되는 것은, 결국 별 차이 없는 것이다. 조선독립을 일본 사람도 자기 일같이 생각하여 주기를 바란다.”
- 1921년 민원식 척살에 성공한 뒤 도쿄로 압송되는 도중 경관에게 남긴 말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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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심 강한 청년, 타국에서 고학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하다
양근환(梁槿煥, 1894.5.9 ~ 1950.9.15) 선생은 1894년 5월 9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얼굴이 둥글고 성격이 대담하며 강경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무슨 일이든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성격이 있었다. 일제가 조선을 무력 침탈한 이후, 소년이었던 선생은 항상 조국의 독립을 절실히 염원하였다. 선생은 천도교인이었다고 하는데, 평소 일제의 조선 강점을 지지하거나, 독립을 주장하지 않으면 매우 격분했다고 한다.
선생은 18세에 백천 읍내에 설립된 사립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졸업하고 20세가 되던 1914년, 서울에 올라와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를 다녔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더욱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고향집에 내려간 후 각처를 떠돌며 방랑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보병대에 입교하였는데, 재학 시절 일본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큰 싸움을 벌인 일이 있었다. 이 일로 몇 사람을 상하게 하여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50일간 구류를 살기도 하였다.
선생의 종형 되는 양진환(梁鎭煥)은 “원래 그가 성격이 급하고 항상 협기(俠氣: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기상)가 많았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한문으로 소학과 맹자를 읽고 스스로 동명학교와 공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고 전하였다. 또한 선생이 보병대에 들어간 이유는 체육을 배우기 위함으로, “운동에 특히 취미를 가졌고, 읽는 서적은 대개 정치에 관한 서적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선생은 어릴 적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의협심이 강한 편이었고, 이를 위해 운동과 정치이론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곧 고향에 내려가 만세 시위운동에 열렬히 참여했다. 하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없게 되자, 그 해 9월 제국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선생은 곧 그곳에서 니혼(日本)대학 정치경제과(政治經濟科)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고향에 노부모와 형제들이 많은 관계로 늘 학자금이 부족하였다. 그러다 보니 낮에 국수장사와 인삼 행상을 해야 했고, 밤에는 인력거를 끌거나 신문 배달, 또는 철공장에 나가 일하는 등 힘겨운 고학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결국 선생은 가난으로 인해 더 이상의 학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양근환과 동경의 집 모습
노동과 고학을 병행하던 선생은 일본 여성 석정승자(石井勝子)와 혼인하여 딸 둘을 낳았다. 네 식구는 도쿄 시내인 우입구(牛込區) 조도전(早稻田) 학권정(鶴卷町) 65번지에 있는 조선물산상회 이은종(李殷宗)의 집에 함께 기거하였다. 도쿄에서 함께 공부하던 선생의 친구는 선생이 어렵게 노동하여 번 돈을 주위의 고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때때로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이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또 항상 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되는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상해로 가려 하였으나, 부인과 두 자식이 있어 고민하였다고 증언했다.
한국 여성정치의 대모인 박순천(朴順天, 1898 ~ 1983)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여러 번 당시 유학생이던 그녀의 뒤를 밟았다고 한다. 한번은 그가 하숙집까지 따라와 편지를 던지고 갔는데, 펴보니 ‘나는 상해서 온 독립군 테러단이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하숙집에 나타나 중국 옷을 한 벌 얻어 달라고 부탁했으나 구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 선생은 사전에 어떤 결심이 되어 있었고, 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타국에서 고학하며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던 선생이 왜 도쿄 한복판에서 동족인 민원식(閔元植, 1887 ~ 1921) 을 처단해야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협회(國民協會)가 어떤 단체이며, 그 협회장 민원식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민족반역행위에 앞장선 국민협회와 협회장 민원식
일제는 1919년 3.1운동으로 드러난 조선 민족의 뜨거운 독립열망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지만, 식민지 통치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독립운동의 열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종래의 무단통치 대신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해야 했던 것이다. <동아일보>와 <개벽> 등 일간신문과 잡지의 발행을 허가하고, 집회·결사의 금지를 다소 완화하여 청년회를 비롯한 일부 임의단체의 설립도 허용하였다. 이로써 2년 만에 약 7천여 개의 사회단체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조치는 식민지 통치질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선인들에게 일부 제한된 자유와 자치권을 줌으로써 사상동향을 파악하고 민심의 악화를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문화정치를 통해 일제가 의도하는 것은 바로 친일세력의 육성을 통한 민족분열책이었다. 일제는 친일반동 단체인 국민협회를 서울에, 대동동지회를 평양에 각각 두었고, 일간 <시사신문>을 국민협회 기관으로 허가하였다. 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동포들의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친일분자 박춘금으로 하여금 조선인상조회(후에 상애회)를 조직하게 하고 이를 통해 동족인 조선인들을 탄압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일 유학생 중 학비 조달에 궁색한 이들에게 학비를 보조한다는 미끼로 친일세력으로 회유, 육성하는 공작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친일세력 육성에 가장 앞장선 단체가 바로 국민협회였다. 협회의 회장인 민원식은 일찍이 정치 협잡꾼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그는 경기도 고양군수를 역임한 후, 총독부의 지도 아래 국민협회의 간판을 내걸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시사신문>을 발간하여 내선일체론을 주장하며 조선인 참정권(參政權) 운동에 나섰다. 즉, 일본 의회의 중의원 의원선거법을 조선에도 실시하여 조선인도 일본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일본 국민 가운데 포함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는 자기의 주장을 신일본주의라고 했다.
신일본주의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일관되게 내세운 내지연장주의와 내선일치, 혹은 동화정책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것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이나 민족사상, 조선어까지 완전히 포기하게 하고, 오로지 충실한 일본 신민이 되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사람으로서 그러한 운동을 제창한다거나 거기에 가담하는 것은 곧 민족반역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민원식은 애초 민씨 일족이 아니라, 평안도 출신의 나가(羅哥)였다고 한다. 그가 20대 무렵 서울로 상경해 보니, 민씨 집안이 유력하였으므로 민원식으로 개명하여 행세하였다. 이처럼 그는 타고난 처세술과 친일 매국행각으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 마침내 총독부 군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정책을 표방한 조선총독부의 정책 또한 민원식과 같은 정치협잡배를 거둬들이고 양육하는 방향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는 조선 독립을 절대 부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 자치론을 주장하는 것조차 일본 국책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했다. 이와 같이 당시 일본 정치권의 조선 문제에 관한 인식은 매우 무책임·무성의 일변도였고, 총독정치 역시 동화정책 일변도로 나아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선생의 민원식 척살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민원식을 처단하고 상해행을 꿈꾸다
양근환 선생의 피체(被逮) 상황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1년 3월 4일자)
선생은 민원식이 서울에 국민협회를 만들고 그 회장이 되어 참정권 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분개하였다. 선생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민원식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副贊議)의 관직을 갖고 한·일 양 민족의 보전과 동화를 고취하는데 전력하였다. 더구나 그는 조선민족에게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하며 서울에 국민협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독립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쳐 왔다. 그는 평소 조선에서도 중의원 의원선거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 참정권 청원서에 서명한 이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도쿄에 체류하면서 새로 정당을 조직해, 이를 발판으로 대대적인 친일 매국활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민원식과 같은 친일인사들이 참정권 청원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민족적 치욕이며, 이런 자의 소행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장차 친일파가 더욱 창궐하여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될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단연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비수를 품고 민원식이 체재한다는 도쿄역 호텔 제14호실로 찾아갔다. 1921년 음력 2월 16일 한낮이었다. 선생은 자신을 ‘이기령’이란 이름의 유학생으로 속이고 면담을 요청하여 민원식과 쉽게 대면할 수 있었다.
선생은 우선 민원식의 경계감을 풀기 위해 도쿄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고, 유학생동우회에서 환영회를 열고자 하니 왕림하여 고견을 들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요즘 국내 사정이 어떠한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민원식이 국내는 현재 아주 평온하다며 거만하게 대답하였다. 이에 선생은 지금 3천만 조선인 모두 궐기하여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터에 무슨 소리냐면서 “그대와 같은 자야말로 민족을 배반하는 자이다.”라고 호되게 질타하였다. 그러자 민원식은 독립운동자들을 모두 ‘불량 폭도’라고 매도하면서 오히려 반발하였다. 이에 격분한 선생이 언쟁을 벌이려 하자, 민원식은 벌써 벼루(硯)를 들어 그를 치려 하였다. 선생은 격분을 참을 수 없어서 품었던 비수를 뽑아 민원식의 배를 깊숙이 찔렀다. 민원식은 앞으로 거꾸러지면서 즉사하고 말았다. 면담을 시작한 지 20분도 채 안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선생은 거사 후, 용하게도 몸을 피하여 호텔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선생은 그날 밤 집에 돌아가지 않고 다음날 아침에서야 귀가하였다. 선생은 꽃 두 묶음을 사서 들어와 어린 두 딸에게 나눠주고, 양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부인에게 잠시 친구 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선생은 집을 나선 후 엄중한 경계망을 뚫고 곧장 나가사키(長崎)로 내려갔다. 나가사키 항구에는 상해로 떠나는 일본 객선 팔번환(八幡丸)이 2월 24일 오후 4시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저녁에도 태연하게 시내를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다음날 오후 2시경, 선생은 상해로 가는 팔번환(八幡丸) 3등 여객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전날 선생을 수상하게 여겨 검문을 했던 수상경찰서 순사가 뒤늦게 선생의 인상서(人相書: 범죄를 체포하기 위해 외모의 특징을 적어 돌리는 글)를 보고 뒤쫓아와 체포하고 말았다. 2시간만 버텼다면 상해로 도망하였을 것이었다. 체포된 후에도 선생은 매우 태연자약하게 행동하면서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은 각 신문사에서 나온 사진기자단 앞에서 여유 있는 포즈를 취하였고, 곧 도쿄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선생은 호송하는 경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기염을 토하였다고 한다.
“나는 학문도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으로 일본인에게는 지지 않는다. 일본 사람은 조선 사람 중에는 조선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불찬성하는 사람도 있는 줄로 생각하지마는, 어찌 그럴 리가 있으랴.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 헌병 제도가 변하여 순사 제도가 되고 무단정치가 문화정치가 되는 것은, 결국 별 차이 없는 것이다. 조선독립을 일본 사람도 자기 일같이 생각하여 주기를 바란다.”
민원식 척살 사건으로 인해 천도교 도쿄 전교실장(傳敎室長) 방정환·박달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연루 혐의를 받아 검속되었다. 박순천 또한 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곧 선생의 단독 범행임이 드러나 모두 방면되었다.
당당한 법정투쟁과 그 이후
양근환 선생의 공판
1921년 음력 5월 2일 도쿄지방법원에서 선생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공판정에는 한인 유학생들과 일본인 신문기자 등이 운집하여 초만원을 이루었다. 선생은 당당한 기세로 입정하여 조금도 후회하거나 굴함이 없이 자기 소행에 관하여 옳은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장이 총독 정치 밑에서 조선 사람의 생명과 재산 보호가 합병 이전과 비교하여 어떠하냐고 묻자, 선생은 우리 동포의 생명과 재산이 일본의 압제 아래에서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3천만 민족은 조국의 독립 회복을 절규하며 극도의 치안부재의 상태에 있다고 실정을 폭로하였다. 이에 검사는 사형을 구형하였고, 변호사는 상해치사의 일례이므로 가벼운 형을 줄 것을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당시 일본 법조인 중 제1인자였으며, 귀족원 의원을 지낸 바 있어 105인사건과 3.1운동의 대표 33인 공판에도 변론한 유지였다.
양근환 선생 사진
선생의 공판 도중 방청석에서 젊은 일본 여성이 뛰쳐나와 “의로운 사람 양근환을 죽이는 것은 일본의 수치다. 유죄 판결에 절대 반대한다.”며 항의하여 밖으로 쫓겨나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재판소 측은 더욱 경계를 엄중히 하여 장내에 순사를 배치하고 방청석에는 수효를 제한하여 입장케 했으며, 나머지 다수의 군중을 모두 몰아낸 후 심문을 개시하였다.
결국 일본 재판부는 최종 언도 공판에서 살의를 품고한 행동임에 틀림없다 하여 유죄로 판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 대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음에도 선생은 별로 기쁜 기색도 없이 시종일관 태연자약했다. 이후 선생은 감옥으로 호송되어 12년이라는 긴 수형생활에 들어갔다.
무기징역의 판결 선고를 받은 1921년, 당시 선생의 나이는 28세였다. 이후 선생은 일본 각지 형무소를 전전하다가 12년이 지난 1933년이 되어서야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미 40세의 장년이 되어 몸과 마음이 고단하고 피폐한 상태였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국사범으로서의 감시와 통제 아래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결국 선생은 고단한 삶을 달래며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쇠진하여 재기할 기력을 찾지 못하였다. 해방 후에는 ‘혁신탐정사’를 조직하여 반공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설상가상으로 남·북한 이념대립의 와중에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나 서울 종로구 중학동 자택에서 북한군에 납치되어 1950년 9월 15일 경기도 파주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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