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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8년

주요공적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회합장소 제공

1920년 한인구제회 이사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김구 등에게 은신장소 제공

1940년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임정승인을 위한 활동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조지 애쉬모어 피치

조지 애쉬모어 피치 , 1883 ~(1979) , 독립장 (1968)

1920년 한인구제회 이사를 역임하고 1932년 윤봉길 의거를 지원했으며, 1940년 중국국민당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활동

1. 머리말

일제강점기 대한독립운동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진행되었다. 그 중 해외 독립운동은 지지기반이 약하고 언어 등 제약이 있었으므로 현지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운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16년까지 56명의 외국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omore Fitch, 한자명 費吾生)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서 대한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던 외국인 중 한 명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한자명 費啓鴻)와 그의 부인 제랄딘(Geraldine Townsend Fitch)까지 2대에 걸쳐 부자와 부부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독립운동사에서 ‘피치 목사’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으나 그 일가가 함께 활동했다는 내용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외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일가를 살펴봐야 한다.

2. 출생과 성장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이하, “필드”)는 1845년 1월 28일 미국 오하이오주 에이번(Avon)에서 프레몬트(Fremont) 장로교회의 목사였던 페리스 피치(Ferris Fitch, 1805 ~ 1846)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클리블랜드(Cleveland)에 위치한 아델버트 대학(Adelbert College, 지금의 Western Reserve University)을 졸업하고 신시내티(Cincinnati)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인 레인 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하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필드는 아델버트 대학에 다니던 중인 1869년 11월 18일,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인 로버트 멕레란(Robert William Bolton McLellan)과 벨린다 멕레란(Bellinda McLellan)의 딸인 메리 맥레란 피치(Mary McLellan Fitch, 1848 ~ 1918)와 결혼했다. 메리 역시 페인스빌 여자 신학교(Painesville Female Seminary, 지금의 Lake Erie College)를 졸업한 선교사였다.

필드와 메리는 중국 선교에 대한 신념으로 1870년 11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해 선교활동에 나섰다. 중국에 도착한 필드 부부는 상하이 외곽 지역의 장로교 선교구역에 집을 구했고, 상하이에서 첫째 아들 로버트(Robert Ferris Fitch, 한자명: 司徒華林, 1873 ~ 1954), 둘째 메리 엘리엇(Mary Elliot Fitch, 1875 ~ ?), 셋째 자넷(Jeannette Griswold Fitch, 1878 ~ 1945) 등 1남 2녀를 낳았다. 필드와 메리는 얼마 뒤 상하이 근처 쑤저우(蘇州)로 이동했고, 넷째 애쉬모어(George Ashmore Fitch, 1883 ~ 1979)와 다섯째 앨리스(Alice Rayond Fitch, 1884 ~ 1971)를 낳았다.

필드의 자녀들은 모두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특히 2남 3녀 중 애쉬모어뿐만 아니라 장남 로버트도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에 위치한 웨스턴 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돌아와 항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1916년부터 1922년까지 항주 기독교대학(지강대학, 현 절강대학)의 교장을 역임했다. 당시 로버트가 항주 기독교대학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에는 엄항섭·심훈 등의 한국인들이 수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버지 필드와 동생 애쉬모어처럼 한국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필드의 자녀 중 대한독립운동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던 인물은 2남 3녀 중 넷째인 애쉬모어로, 1883년 1월 23일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났다. 애쉬모어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다.

1897년 뉴욕에서 찍은 가족사진
1897년 뉴욕에서 찍은 가족사진

1906년 오하이주에 위치한 우스터대학(The College of Wooster)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 and Columbia University)에 진학했고 1909년 졸업과 함께 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12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중국 각지에서 YMCA 총간사를 역임했다.

애쉬모어는 상하이에 온지 1년 만인 1910년 미국에서 대학생활 중 만난 앨버타(Alberta Casterlin Kempton, 1886 ~ 1919)와 결혼하고 2남 2녀를 두었다. 그러나 1919년 2월 앨버타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사별했다. 이후 감리교 선교사로 상하이에 온 제랄딘(Geraldine Townsend, 1892 ~ 1976)과 1924년 결혼했다.

피치 일가 중 여성으로서 대한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제랄딘은 1892년 미국 미시간주 포레스터(Forrester)에서 프레드 타운센드(Fred H. Townsend)와 제인 로건(Jane Logan)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미시간주에 위치한 앨비언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견되어 1924년까지 감리교 청년회 총간사로 활동했다. 이후 남편 애쉬모어와 함께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1940년대 초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 및 언론 활동에 나섰다.

마지막으로 메리 엘리엇과 자넷, 앨리스 3명의 딸들 역시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돌아와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주목되는 점은 메리와 자넷 모두 애쉬모어가 다녔던 에이번의 우스터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우스터대학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다녔던 곳이기도 했다. 메리 엘리엇은 우스터대학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필라델피아 여자 의학대학(Philadelphia Women's Medical College)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쑤저우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다. 자넷도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닝포(寧波)에서 장로교 선교사인 남편과 함께 선교활동을 벌였다. 막내 앨리스는 어머니 메리가 다녔던 페인스빌 여자 신학교를 졸업하고 상하이와 미국 남부지역 YWCA 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앨리스는 1925년 영국인 사업가 윌프레드 해리슨(Wilfred Harrison)과 결혼하고 영국으로 가서 생활하여 필드의 5명의 자녀 중 유일하게 중국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조지 피치 일가는 모두 중국에서 활동하며 사회활동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과의 접점도 많았다.

3. 피치 일가의 독립운동 지원활동

(1) 피치 부자와 한국인들의 첫 만남

1870년 11월 5일 중국에 도착한 필드는 상하이와 쑤저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88년 미국 장로교 선교회 중국지회장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서적을 인쇄했던 미화서관(美華書館, The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 Press)의 책임자가 되었다. 더불어 미화서관에서 매달 간행하는 종교지 『차이니즈 레코더(The Chinese Recorder)』의 편집장을 맡았다. 『차이니즈 레코더』는 자유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종교지로서 중국에 퍼져가는 민족주의 사조를 반영한 잡지로 명성을 떨쳤다. 필드의 중국 활동은 장로교 선교사로서 그의 명망을 높이게 되었고, 한국인 기독교 신자들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필드는 1893년 11월 상하이에서 한국인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필드가 처음 만난 한국인은 윤치호(尹致昊)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개신교 선교와 영어 교육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필드는 윤치호에게 한국의 기독교 선교를 활성화하기 위해 감리교 선교사가 파견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이 시기 필드는 한국이 국제적으로 처한 위기에 대한 관심보다는 종교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는 1910년 일본의 한국병탄을 전후로 다수의 한인 기독교인들이 상하이로 망명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상해 YMCA 총간사 시절 조지 A. 피치
상해 YMCA 총간사 시절 조지 A. 피치

1910년 이후 한국인들과 중국 내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상하이로 망명한 한국인 기독교도들은 1914년 9월 중국 YMCA 총무 미국인 선교사 락우드(Lockwood)의 도움으로 중국 YMCA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당시 필드의 아들 애쉬모어가 중국 YMCA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피치 일가와 한국인들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되었다.

1915년 8월 대륙보(大陸報)에 미해군 YMCA회관이 ‘밀항’한 한국인을 비호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면서 일본영사관과 미국영사관 간에 교섭이 오갔다. 미 해군 YMCA 상하이지부는 1900년 의화단사건 때 황푸강에서 피해를 입은 모노카시호(USS Monocay)에 승선했던 기독교인 장병들을 위해 조직되었는데, 이때 미 해군 YMCA 상하이지부를 조직한 초대 총간사는 필드였고, 아들 애쉬모어가 이곳에서 근무했다.

필드와 한국인들의 본격적인 접촉은 YMCA계통의 협화서국(協和書局, The Shanghai Mission Bookstore)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필드가 협화서국을 운영하게 된 것은 미화서관을 운영했던 경험과 1888년 『차이니즈 레코더』의 편집장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협화서국을 통한 본격적인 한국인과의 접촉은 1917년에 이루어졌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한 여운형은 난징(南京)에 위치한 진링대학(현 난징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17년부터 상하이에 위치한 협화서국에서 위탁판매부 주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협화서국에서 이루어진 필드와 여운형의 만남으로 필드는 일본의 강압적인 한국 식민지배의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필드는 아들 애쉬모어를 통해 여운형을 1918년 11월 28일 상하이에서 열린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주중 미국대사 예정자의 환영파티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때 여운형은 크레인을 직접 만나 한국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여운형이 초대장도 없이 환영파티에 참가하여 크레인을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북경정부 외무부장인 왕정팅(王正廷)이 애쉬모어가 주재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쉬모어는 상하이 YMCA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매주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쑨원(孫文), 탕사오이(唐紹儀), 왕충휘(王寵惠) 등 중국국민당 정부 인사뿐 아니라 중국의 유명한 사업가 쑹자수(宋嘉樹), 니치지에(聶其杰), 모우추(穆藕初) 등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피치 일가의 인적 네트워크는 한국인들이 중국 국민정부 인사들과 교류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피치 일가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감시를 불러왔다.

1940년 연안에서. 맨왼쪽부터 첫 번째 조지 피치, 네 번째 저우 언라이 다섯 번째 왕밍.
1940년 연안에서. 맨왼쪽부터 첫 번째 조지 피치, 네 번째 저우 언라이 다섯 번째 왕밍.

(2) 한인구제회·인성학교와 ‘조지 피치’ 父子

필드는 상하이에서 중국으로 망명한 한국인 기독교인과 접촉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한국인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으로 나타났다. 때문에 결국 일제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필드에 대한 일제의 본격적인 감시는 재건된 대한적십자사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대한적십자사는 1909년 7월 일본적십자사에 흡수되었으나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8월 29일 대한적십자회 설립이 공포되며 재건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에서는 한인구제회가 조직되어 한국과 만주·중국 등지에서 일제의 탄압 하에 있는 한인 구호를 위한 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모금과정은 부진했고 이 모습을 지켜본 필드는 대한적십자를 통해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필드는 구제회의 모금이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자 당시 중국에 있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집하여 한인들을 돕기 시작했다.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를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시켜 영국, 미국에게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또한 필드는 경제적 지원에서 더 나아가 중국 상하이에 망명해 온 한국인 청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일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아들 애쉬모어가 주로 YMCA에서 중국인들과 교류하며 일제의 감시를 느슨하게 만들었고, 필드는 한국인들을 중국인으로 위장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1908년 초 대동보국회 상하이연회(大同保國會 上海聯會)에서 설립한 대동학교(大同學校)가 설립되었다. 이후 1913년 동제사는 상하이 한인학생들의 유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으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했다. 이처럼 1910년 국권피탈 이후 망명자들이 늘어난 상하이에서 한인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는 곧 1916년 인성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몰려드는 한인은 더욱 증가했다. 1919년 9월 1일 4명의 학생으로 개교한 인성학교는 1920년 4개 학급, 학생 수는 30명까지 그 규모가 성장했다. 이처럼 학교규모가 성장하자 학교운영에 필요한 운영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인성학교 측은 학교의 성장과 함께 새로운 학교 부지를 확장하는데 있어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예산 확보를 위해 미주 한인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청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연계가 가능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기금모집을 위한 고문위원으로 참가했는데 5명의 외국인 중에서 피치(필드), 파커, 롤링슨, 탈레트 4명이 미국인이었다.

필드의 상하이 한인사회에 대한 지원은 1922년 6월 상하이주재 일본총영사로 하여금 미국총영사 커닝햄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사태를 불러왔다. 일본총영사의 유감 표명은 비공식적인 구두 전달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일본의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미국인 선교사에 대한 미국정부의 제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비록 비공식적인 요구였지만 커닝햄은 필드에게 대한적십자사가 4월에 발행한 문서의 직접 작성 여부와 지원금 조성 경위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이에 필드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 그렇습니다. 그 문서는 내 승인 하에 작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작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미국인의 증언을 통해 한국인들이 본국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어떠한 탄압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지원한 돈은 정직한 방법으로 모금되었고, 이 돈은 고통 받는 한국인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수년 동안 상하이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정치적 포부를 격려하거나 이념적인 선전을 한 적은 없습니다. …

필드는 미국총영사 커닝햄에게 보낸 답변에서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자신의 모금과 구호 활동은 정치적인 활동이 아닌 순수한 구호활동으로 불법적인 면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자행하는 한국인 탄압을 문제시하며 자신의 활동이 타당하다 주장했다. 또한 『독립신문』을 통해 “나는 정치적으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조한 일이 없다. 그러나 차가운 추위에 슬퍼하는 한국동포를 위해 구제사업을 경영한다. 이는 선교사인 나의 신성한 의무다”라고 하며 선교사로서 자신의 활동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이에 커닝햄은 재차 필드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미국시민이 외국에서의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대한적십자사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국무부의 요청을 준수하지 않는 것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救濟會의 活動
救濟會의 活動

필드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모금활동과 인성학교의 기금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필드의 활동은 3.1운동 이후 한국 내 선교사들이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며 국제적 사건으로 만든 것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910년대부터 망명한 한인기독교인들과의 접촉과 협화서국에서 여운형과의 만남은 선교사인 필드에게 인류애적 동정을 불러일으켜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대 초반부터 1920년대까지 상하이에서 적극적으로 한인들을 지원하던 필드는 1923년 2월 17일 상하이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상하이 화이하이공원(淮海公園)에 안장되었다. 필드 사후 1930년대에 들어서면 필드의 아들 애쉬모어와 그의 부인 제랄딘이 뒤를 이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3) 애쉬모어 피치 부부와 한국 독립운동

피치 일가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193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필드를 대신하여 아들인 애쉬모어와 그의 부인 제랄딘이 주역이었다. 1909년 장로교 목사가 되어 중국 상하이로 돌아온 애쉬모어는 아버지 필드가 한국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던 것을 계기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애쉬모어는 1923년 2월 아버지 필드가 별세한 이후에는 대체로 중국내 YMCA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애쉬모어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피신을 돕는 등 한국인들을 지원하면서 태평양전쟁기에는 미군을 도와 일본에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의 부인 제랄딘은 1940년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 애쉬모어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1920년대 애쉬모어는 대체로 중국국민당 인사들과의 교류를 집중적으로 하는 면이 보이지만 간헐적으로 한국인과의 접촉이 드러난다. 그는 1923년 아버지 필드가 사망한 후인 6월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가면서 김마리아(金瑪利亞), 황기석, 손진실(孫眞實) 등과 함께 같은 배에 동승해 한국인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김마리아 등과의 동행은 아버지 필드가 한인들의 미국 유학을 도왔던 것처럼 한인들의 미국 유학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애쉬모어는 상하이 YMCA에서 중국국민당 인사들과 함께 성경공부 모임을 지속하고, 상하이 로타리클럽의 창립멤버가 되는 등 중국 인사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갖는다. 당시 애쉬모어가 자주 교류했던 인사들은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장췬(張群), 궈다이치(郭泰祺) 등 중국국민당 인사들이었다. 이는 1940년대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외교에 나선 한국인들이 애쉬모어를 통해 중국국민당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특히 부인 제랄딘은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0년 연안에서 맨왼쪽 조지 피치(1피치, 2.3. 4.저우 언라이 5. 왕밍)
1940년 연안에서 맨왼쪽 조지 피치(1피치, 2.3. 4.저우 언라이 5. 왕밍)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발생한 윤봉길 의거로 애쉬모어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어두운 밤에 4명의 한국인들이 프랑스조계에 있는 우리 집에 왔다. 그 중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명은 한국의 위대한 영웅이며 망명정부를 이끄는 김구였다. 김구와 같이 온 사람들은 비서인 엄항섭,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 그리고 김철이었다. 김구는 우리에게 오늘 홍커우공원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모자가 본인이라고 밝혔다. …중략.

김구와 3명의 동료들은 한 달 동안 우리 집의 위층 객실에서 숨어 지냈다. 김구는 절대로 외부로 외출하지 않았고, 그나마 나머지 인사들은 다른 한국인들과 접촉하기 위해 아주 가끔 택시를 이용하여 외출을 했다. 그들은 외출할 때에도 각기 다른 택시회사를 이용하여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스파이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었다. 나는 아내 제랄딘과 함께 김구 일행을 중국인으로 위장시켜 차에 태우고 상하이를 탈출시켰다. …

애쉬모어가 기억하는 위 내용은 『백범일지』에도 언급된 것이다. 윤봉길의 의거 직후 김구 일행은 프랑스조계에 위치한 애쉬모어의 자택으로 찾아왔다. 이미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한국인들과 안면이 있었던 애쉬모어는 잊지 않고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애쉬모어는 한 달 동안 자택에서 김구 일행을 보호해 주었는데, 이후 일본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들을 중국인으로 변장시켜 상하이에서 탈출시켰다. 또한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검문과 체포를 지켜본 애쉬모어는 한국인들의 구호에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애쉬모어는 안창호의 체포 소식을 듣고 프랑스 언론인들과 지식인들과 접촉하여 체포 과정에서의 불법성을 언급하며 석방운동에 나섰다. 애쉬모어는 프랑스계 언론사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안창호는 잘 알려진 대로 한국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불법 체포되어 일본 당국에 인계된지 10일이 지났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그가 홍커우공원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체포했습니다. 일본은 안창호에 대한 체포영장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영장으로 그를 체포하고 나중에 체포영장을 수정했습니다. …중략… 안창호는 일본 당국의 손에 무한정 잡혀 있어야 하나요? 그는 주어진 권리에 따라 합법적, 공개 재판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인에 대한 검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한국인 체포와 검색에 대한 위임장이 있습니까? 프랑스의 정치적 난민에 대한 태도를 보면 프랑스는 전통적인 시대(민주공화정 이전의)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애쉬모어는 일본 경찰의 행동에 대해 프랑스가 묵인하는 것은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포기하고, 과거의 전통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냐는 강한 비판으로 프랑스인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애쉬모어는 동시에 프랑스조계의 경찰서장이었던 에티엔 피오리(Etienne Fiori)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피오리에게 보낸 서한 역시 위의 자료와 같은 논조로 인성학교 교장 출신인 상하이교민단의 이유필(李裕弼)에 대한 압박을 중지하고, 일본 경찰의 불법 행위에 대해 프랑스조계가 도움을 주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 이후 보인 애쉬모어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이 더 이상 한국인만의 활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애쉬모어가 프랑스의 민주주의 정신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를 인류 보편적 가치인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애쉬모어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는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인이 해결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애쉬모어의 태도와 한국 내 외국인 선교사들의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폭로는 전 세계로 하여금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지배에 대해 다시금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1936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국민당정부가 이동하자 애쉬모어는 그해 9월 난징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상하이를 떠났다. 그런데 난징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노구교사건을 일으키며 중일전쟁을 본격화하고, 12월 13일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의 군인, 포로, 시민을 가릴 것 없이 대량 학살극을 벌였다.

이에 애쉬모어는 난징에 있던 독일 지멘스사 난징지사장 욘 라베(John Rabe), 난징대학교의 미국인 교수 마이너 베이츠(Miner Searle Bates), 찰스 릭(Charles Riggs), 선교사 존 매기(John Magee) 등과 함께 일본군의 학살극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지대를 설정하고, 이를 운영할 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for the Nanking Safety Zone)를 조직했다. 애쉬모어는 국제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난징에서 벌어진 참극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며 일제와 정면으로 맞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미국에 체류 중이던 부인 제랄딘은 한국인들의 외교활동을 지원하면서 부부가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2) 제랄딘의 한미협회 지원과 태평양전쟁기 애쉬모어의 활동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미국 내에서 반일여론이 득세했고, 곧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할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내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1941년 4월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대미외교를 전담할 기관으로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했다. 주미외교위원부의 책임자가 된 이승만은 그동안 위축되었던 구미위원부의 틀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더불어 이승만은 자신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해 줄 한미협회와 한국기독교인친한회를 만들었다. 이 두 단체의 설립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해 미국인들의 동정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애쉬모어와 부인 제랄딘은 이승만이 만든 한미협회와 한국기독교인친한회에 참가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특히 미국으로 간 제랄딘은 한미협회의 후견인으로 임정의 승인외교에 주력했다. 제랄딘은 한미협회에서 한국독립의 당위성에 대한 연설을 시작으로 『뉴욕타임스』에 한국의 상황을 기고하여 임정에 대한 미국사회의 관심을 가져오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1942년 랭던(William Langdon)이 작성한 「한국 독립문제의 몇 가지 측면들」에 근거해 정책을 수립했다. 이 영향으로 미국은 임정을 승인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James Cromwell)은 미 국무부 장관 헐(Cordell Hull)에게 서신을 보내 적극적으로 임정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다. 크롬웰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랭던 문서에 기초한 대한정책에 근거해 임정 불승인 기조를 유지했고, 결국 한미협회의 활동만으로는 임정 승인 외교가 수월하게 진행될 수 없었다.

한미협회 인사들은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이미 광복군을 승인하여 공식적인 지원을 했던 중국국민당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당시 한미협회 이사진들은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발송했다.

이 서한에 서명한 사람들은 한국의 독립에 금전적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시민활동을 하는 자들로, 20년 이상 한국 상황에 관심을 가진 미국 시민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 국무부를 설득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중략 … 우리는 당신의 정부가 한국을 돕는 것은 동양에서의 전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리더십과 불굴의 용기는 민주적인 세계의 감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을 믿습니다. 중국은 한국의 이웃으로 평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한국을 도울 수 있는 국가입니다.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이 한국을 돕는다면 우리 정부도 중국의 리더십에 응답할 것입니다. …

위의 서한을 작성한 인사들은 한미협회 인사들로 감리교 목사였던 이사장 해리스(Prederick B. Harris)와 신문기자로 재무를 담당한 윌리암스(Jay J. Williams), 변호사로 법률 고문이었던 스태거스(John W. Staggers)였다. 서한에서 이들은 동아시아에서의 중국이 지니고 있었던 전통적인 역할을 상기시키며, 중국국민당이 먼저 임정을 승인하는 모습을 보이면 연합국들도 이에 대한 응답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국민당이 지난 1941년 11월 소위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으로 광복군 활동을 규제한 것도 비판하며 중국국민당 정부의 임정 승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임정승인 외교는 지지부진했고 임정 내부에서 벌어진 정쟁은 계속 임정 승인을 미루게 만들었다.

한미협회의 중국국민당 정부 접촉을 통한 임정승인 외교 시도도 여의치 않게 흘러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미협회 후견인으로 활동하던 제랄딘이 나서게 되었다. 제랄딘은 한미협회의 다른 인사들과 달리 이승만 이외에도 김용중 등 미주 한인사회의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미국 내 주요인사들과 접촉했다. 게다가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장제스, 장췬, 궈다이치, 쑹메이링 등 중국국민당 정부 관계자들과 이미 1920년대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국 한미협회 인사들은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교섭이 어려워지자 제랄딘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쑹메이링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제랄딘은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 중국국민당 정부의 임정 승인을 재촉했다.

조지 A. 피치의 부인 제랄딘 피치
조지 A. 피치의 부인 제랄딘 피치

… 난 당신(쑹메이링)이 내 남편(애쉬모어)과 그의 아버지(필드)가 한국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승만과 김구처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망명자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수십 년 동안 쉬지 않고 헌신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 중략 … 지금 총통(장제스)이 이끄는 중국 사람들이 중경에서 한국 임시정부에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한 데에 대해서 우리의 국무부(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국무부는 극동에서 중국의 리더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서방 국가들도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 중략 … 나는 워싱턴에서 제안된 한미협회 회의에 참석할 것입니다. 또한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과의 회동 약속을 확보해서 한국 독립의 문제를 언급하여 그녀가 임정과 한국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할 것입니다.

제랄딘은 쑹메이링에게 중국국민당 정부가 충칭(重慶)으로 피난한 임정 인사들을 지원한 것에 대한 감사를 표명했다. 또한 이러한 활동이 미 국무부가 극동에서의 중국의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중국국민당 정부가 지원을 계속한다면 서방국가들도 이에 동참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과의 회동을 통해 한국 문제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언급하고자 노력했다. 그동안 미주 한인사회와 한미협회 등 민간 부분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계속 언급하고 있었지만, 미국정부의 반응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처럼 제랄딘은 임정승인 외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본인이 가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제랄딘이 쑹메이링에게 서한을 보내고 난 뒤 곧 중국국민당 정부는 사실상 임정을 인정하는 분위기라는 답장을 받았다. 또한 동시에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도 미 국무부 장관 헐에게 임정 승인을 강력히 촉구했고, 스태거스 또한 임정에 대한 미국정부의 차관을 제공하도록 요청했다. 한미협회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임정 승인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제랄딘은 한·미관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제랄딘이 미국에서 정책결정자들과 접촉하며 미국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거나 미국 사회 전반에 한국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호소하던 시기에 애쉬모어는 중국에 남아서 활동했다. 전쟁의 여파로 1939년 중국국민당 정부가 이동하자 애쉬모어도 함께 충칭, 1944년 란저우(蘭州)로 이동해 YMCA 총간사로 활동했다.

이동기간 동안 애쉬모어는 버마 랭군과 충칭을 연결하는 ‘버마로드(Burma Road)’를 오가는 미군의 수송작전에 참가했으며, 중국에서 벌어지는 미군 작전에 고문자격으로 참가해 중국어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4년 6월 애쉬모어는 미 국무부에 임정의 인적구성과 이들이 종전 이후 한국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총 12개 항목으로 정리해 보고하기도 했다.

1952년 1월 8일,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문화공로훈장 수여 당시
1952년 1월 8일,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문화공로훈장 수여 당시

애쉬모어의 보고서는 1919년 임정 수립과 이후 모든 활동에 대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으며, 중국국민당 정부에서 파악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시각까지 담겨있었다. 또한 광복군의 활동에 주목하여 이들을 활용하여 대일전에 나서면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게다가 임정 내부 인사들의 정치적 성향까지 파악하여 보고했는데, 이러한 애쉬모어의 보고는 광복군 제2지대와의 OSS 합동작전과 미국의 전후 대한정책 수립과정 및 그 내용과 맥락을 같이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애쉬모어는 30여년 간의 YMCA활동에서 은퇴를 했으나, 곧이어 전후 복구를 위해 조직된 연합국구제부흥기관(UNRRA)의 중국담당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애쉬모어는 다시 한 번 은퇴를 하고자 했으나 1947년 7월 한국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1947년 7월 7일 한국에 내방한 애쉬모어 부부는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앞서 대한적십자사의 정식 발족 준비와 한국 YMCA 조직에 나섰다. 애쉬모어 부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 각지에 YMCA 조직과 함께 상하이에서 해왔던 것처럼 구호에도 앞장서다가 1949년 8월 8일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애쉬모어, 제랄딘은 한국과의 관계를 지속하며 구호 및 원조활동에 종사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애쉬모어는 1952년 1월 8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1968년 3월 1일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1963년 모든 활동에서 은퇴하여 타이완을 떠나 캘리포니아주 클레몬트(Claremont)로 돌아갔다.

은퇴 이후 클레몬트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제랄딘은 1976년 9월에 84세로, 애쉬모어는 1979년 1월 20일 96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운명했다. 이들은 뉴욕주 에섹스 카운티(Essex County)에 있는 밸리 뷰 묘역(Valley View Cemetery)에 합장되었다.

말년의 조지 A. 피치 부부
말년의 조지 A. 피치 부부

4. 맺음말

피치 일가는 1900년대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정부 수립 및 6.25전쟁을 거치는 긴 시간을 함께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들 중에서 피치 일가는 2대에 걸쳐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수많은 외국인 지원자들 중에서 하나의 독특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피치 일가는 가족이 전부 기독교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동하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 서구적 교육, 구호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성격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타도에 앞장섰다.

또한 피치 일가는 일제강점기의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과 타이완(臺灣)에서 활동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한국 YMCA 총간사로 한국에 온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한국의 YMCA 조직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제랄딘은 1947년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중앙대학교로 개편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며 명예학위를 받기도 했다.

피치 일가의 활동에서 보이듯이 대한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성향이 다분한 한국인들만의 투쟁은 아니었다. 대한독립운동에는 피치 일가를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는 한국 독립운동이 지니는 가치 때문이었다. 대한독립운동은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힘을 모아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세계인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애와 자유라는 기치를 되찾고자 한 자유운동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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