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김삼출은 1933년 당시 김천읍에서 단야직공(鍛冶職工)으로 일하면서 교풍회(矯風會) 소속의 야학교사로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상순경 조선공산당 김천그룹재건협의회(金泉그룹再建協議會)의 하부조직으로 결성된 '올그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홍정태(洪正泰)가 동지 규합을 목적으로 교풍회 야학교사로 들어오면서 동료 야학교사인 박노천(朴魯天)과 함께 뜻을 같이 하기로 협의하고 동월(同月) 중으로 회원 상호간에 주의와 학설을 연구하고 학생들의 의식훈련에 주력하기 위하여 '교원회(敎員會)'를 조직하였다. 그해 7월 김천읍 성내정 김덕수(金德守)의 집에서 홍정태, 박노천 등과 함께 학생운동의 확대,강화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하여 '과학연구회(科學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1934년 6월 상순경 김천그룹재건협의회의 지도책임자인 백낙삼(白樂三), 박노천 등과 함께 김천읍 소재의 감천(甘川) 천변(川邊)에서 회합하고 조선에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새로운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1935년 5월부터 시작된 '조선공산당 김천그룹재건협의회사건'의 관계자로 김삼출은 김천경찰서에 체포되었고, 오랜 취조를 거쳐 12월 1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공소가 제기되어 공판 계류 중이었으나, 1937년 8월 6일 주거지인 김천군 김천읍 남산정 36번지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東亞日報(1935. 12. 24)
- 判決文(大邱地方法院:1937. 9. 7)
- 每日新報(1935.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