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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수흥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주요공적

만주 대한통의부 민사부 외무원

임시정부 직할 육군주만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로 활동

일제 고관 처단을 목적으로 국내로 들어와 황해도에서 군자금 모집

서울 및 경기도에서 일제 파출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친일 부호 처단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사형)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수흥

이수흥 , (1905) ~1929 , 독립장 (1962)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시기 바란다.”

- 이수흥 선생 최후 진술 중에서 -

대일 항쟁기 우리 독립운동의 목표는 일제에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여 자주적이고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의열투쟁, 외교활동, 실력양성론, 무장투쟁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독립운동 방략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장투쟁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로 약칭)는 설립 때부터 이러한 무장투쟁을 목표로 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 압록강 건너 남만주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한 참의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이다.

재만독립운동 단체들은 경신참변 이후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통의부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념의 대립과 인선을 둘러싼 내부적 갈등이 나타났다. 이에 회의를 느낀 통의부 의용군 군인들은 대일 무장투쟁에 보다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참의부를 결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참의부는 설립 초기부터 무장투쟁에 주력하였다. 만주지역에 설립되었던 대표적인 무장단체인 삼부(三府, 참의부·정의부·신민부)에서 벌인 항일 무장투쟁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참의부에 의해 수행된 것만 보더라도 참의부가 무장투쟁에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참의부의 무장투쟁은 「사이토 총독 저격」, 「고마령 전투」 등 남만주 현지에서 수행된 것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국내진공전을 통해 수행되었다. 참의부 무장대원들은 주둔 중인 남만주지역에서 가까운 압록강을 건너 주로 평안도 일대에서 일제와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참의부 국내진공전의 대표격이 되는 것이 바로 이수흥 선생이 수행한 무장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이수흥 선생의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자료의 부족도 있었거니와 혼인을 하지 않고 일찍 순국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만주 무장투쟁의 대표 이수흥 선생

이수흥 선생 초상화
이수흥 선생 초상화

이수흥(1905 ~ 1929) 선생은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이일영(李日瑩)으로 본관은 연안이다.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으로 연성군에 봉해진 이곤(李坤)의 후손이 되며, 외암(畏庵) 이식(李拭)의 10대손이 된다. 이천 출신의 대학자 이식은 숙종 때 학식으로 천거되어 여러 곳의 수령을 지냈으며 영조의 스승이기도 하다. 사후에는 이천군의 사림들이 그의 학덕을 추모하여 사당을 세우기도 했던 명망 있는 인물이다.

이수흥은 이천 공립보통학교를 입학하여 다니다가 13세에 자퇴하였으며, 14세에 입산하여 수년 간의 승려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세에 부친의 만류로 하산하였다가 이듬해인 19세에 만주로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이때가 1923년 3월 말이다. 그는 만주 길림성에서 김좌진이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신명학교에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는 1922년 8월 30일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고, 1923년 2월에는 통의부 주도세력과 대립을 보이던 의병계열이 통의부를 탈퇴하고 새롭게 의군부를 설립하던 때다. 이수흥의 재판기록(소화2년 형공 제1711호)에 의하면, 그는 1923년 7월 말경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무장투쟁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독립군 무장투쟁과 일제의 참패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만주지방에는 수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일제에 대항하는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무장활동은 국내로부터 만주로 들어온 수많은 애국 청년들로 독립군을 편성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무기를 구입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들 독립군들은 국경지대인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파출소 등 일제의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맹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을 영구 식민지화 하려는 일제로서는 만주지역이 이러한 항일 무장단체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홍범도가 이끄는 「봉오동전투」(1920년 6월)에서의 참패였다. 일제는 1920년 8월 만주지역의 한인 무장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작전>을 수립하고, 1920년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간도침공의 구실을 만들었다.

일제는 조선군 19사단을 중심으로 2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만주로 침입시켰지만 오히려 「청산리대첩」 등으로 패전만 거듭하였다. 대규모 토벌작전이 실패하자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의 근거지인 한인부락을 초토화하는 대규모 살육·방화를 자행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경신참변>이다. 일제의 만행은 이듬해인 1921년 5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청산리대첩에서 승리한 독립군 주력부대는 북만주 밀산 지역으로 집결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일제의 공격을 피해 1921년 초 러시아 이만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만주지역에 남아있던 독립군 부대도 진용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각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흩어진 낙오병을 모으고 연락원을 파견하여 부대를 재편하였다.

경신참변 후 일시적으로 타격을 받았던 남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1921년 초부터 보민회·민회 등 친일단체를 몰아내고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이 급선무임을 절감하고 각 대표들이 모여 이러한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1922년 봄에 결성된 것이 「대한통군부」이다. 이후 이를 확대한 것이 1922년 8월 30일 결성된 「대한통의부」(통의부로 약칭)이다.

통의부는 무장투쟁을 주도할 군대로 의용군을 결성하였다. 통의부 의용군은 5개 중대로 조직되었는데, 실은 그 계통과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 즉, 의용군은 편제상 외양은 단일 군단인 것으로 보이지만 중대장을 중심으로 별도의 명령 계통을 가지고 있었다. 제1중대는 서로군정서 계통, 제2중대는 대한독립단 계통, 제3중대는 천마산대 계통, 제4중대는 또 다른 대한독립단 계통이고, 제5중대는 의병 계통인 것이다.

독립군의 이념 논쟁

통의부는 3.1운동 이후 남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단이 가장 폭넓게 통합을 이룩해 성립시킨 단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연합체적 성격이 강해 성립 초기부터 구성원 간의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보여 왔다. 특히, 주요 간부들 사이에 공화주의와 복벽이라는 이념갈등과 군권(軍權) 장악을 둘러싼 인선과 조직상의 이견이 나타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덕원과 양기탁의 관계였다. 통의부 창립 초기 인선에서 전덕원 계열이 요직에게 배제된 것에 불만이 컸다. 이 같은 갈등과 불만은 결국 무력 충돌을 가져왔다. 상해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사건은 일단 무마되었으나 결국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파 계열의 인사들인 채상덕·김평식·오석영·박대호 등은 1923년 2월 통의부 탈퇴를 선언하고 새롭게 의군부를 설립하였다.

참의부 결성

주만 육군 참의부 성명서
주만 육군 참의부 성명서

통의부가 의군부와 서로 반목하여 대립하고 있을 때 통의부 의용군 5개 중대와 유격대·독립소대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며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의부와 의군부는 분립된 이후에도 교민 호수의 쟁탈과 관할지역의 중복으로 자연 경쟁이 되면서 서로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통의부의 이러한 분열사태에 대해 지금까지 중립적 태도를 지켜오던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는 1923년 8월 대표를 상해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1924년 5월 참의부가 결성되었다. 결국 통의부의 제1차 분열로 의군부가 설립되었다면, 제2차 분열로 참의부가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참의부가 결성된 후 의군부의 군인들은 일부 통의부로 복귀하였으나 대부분 참의부에 참여하였다. 통의부는 제4중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군대가 이탈해 간 상황에서 더 이상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없기에 결국 단체를 해체하고 정의부를 결성하였다. 정의부에는 새롭게 6개 중대의 무장대를 결성하지만 이미 무장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교민들의 보호 육성에 더욱 힘을 쏟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무장투쟁사의 흐름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만주지역 무장투쟁의 특수성 때문이다. 이는 이수흥의 무장투쟁을 살피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 이수흥은 처음 만주로 건너가서 채상덕을 만났다고 한다. 이수흥이 채상덕과 만나게 되는 것이 사전에 특별한 관계가 있었는지는 현재의 자료로서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수흥이 채상덕을 만났던 것은 이후 그의 무장투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채상덕은 황해도인으로 최익현의 고제(高弟,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이다. 통군부를 결성할 때는 총장으로 취임했는데, 통의부에서는 부총재로 취임했다고 하나 자료에 따라서는 그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통의부에서 그의 위상이 배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롭게 의군부가 결성되었을 때 총재로 취임하였으나 곧 집안현에 은퇴하였다. 이후 참의부의 고마령 참변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스스로 자결하였다. 고마령 참변에서 순국한 당시 참의장 겸 제2중대장인 최석순은 일찍이 대한독립단 시절부터 채상덕이 아끼던 인물이었고, 함께 순국한 인물들 역시 채상덕이 평소에 아끼던 대한독립단 계통의 부하들이었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이수흥은 통의부→(의군부)→참의부로 전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참의부 제2중대 소속으로 중대장인 최석순의 직속 부하였다는 점이 그의 향후 무장투쟁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참의부의 국내진공전

참의부는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군인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다. 참의부 독립군의 설립 당시 편제는 통의부 의용군의 편제를 그대로 사용했다. 다만, 초기 참의부의 군사편제는 제1중대장이 참의장을 겸임하는 것이었다. 참의부 독립군의 병력은 설립 시에 5개 중대의 군인 500여 명과 100여 명의 경호원이 있는 상당히 실력을 갖춘 부대로서 무기는 5분의 1 이상이 모젤 권총이고 기타는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참의부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유격전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참의부 독립군은 국제적 혹은 국가적인 지원이 없었기에 정규군으로 편성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막강한 일본군과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한민족 독립전쟁사에서 일관된 이른바 ‘유격전’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를 교란하고 지속적으로 민중의 항일정신을 고무하며 세계 우방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실제로 독립군은 만주에서 일본 정규군 몇 개 사단의 발을 묶어 놓는 역할을 하였다.

참의부 활동 보도기사(1924.3.10.)
참의부 활동 보도기사(1924.3.10.)

또한, 참의부 독립군은 형편에 따라 평소에는 소규모의 단위부대를 중심으로 무력항쟁을 전개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전투의 규모를 확대하여 각 중대가 합동으로 출동하여 적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는 작전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중국 당안관(기록보관소) 자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참의부 제1·2·3중대의 일부로 구성된 혼성부대 약 80여 명은 음력 정월 전후에 일거에 국내에 침입하여 강안(江岸)의 각 출장소를 습격하고 … ”

“참의부는 해빙기 이후 국내에 침입할 계획으로 각 중대로부터 각각 15명씩 선발하여 선내침입반(鮮內侵入班)을 편성하였는데 … ”

참의부는 정의부나 신민부에 비해 한·중 국경과 가까이 위치한 관계로 국내 진공작전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을 실행한 반면, 일본군의 공격도 다른 독립군 부대에 비해 더욱 심하게 받아 수많은 인명과 물자의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참의부군부대원 기념촬영(한민 1938.7.30.)
참의부군부대원 기념촬영(한민 1938.7.30.)

이러한 참의부의 대일본군 유격전은 통의부 의용군에서 분립하면서 1925년까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대일항쟁은 주로 국내 진공작전이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평안도 지방의 일제 관공서를 비롯한 경찰서·우체국·영림서 등 일제기관에 대한 기습전이었다.

참의부 독립군은 설립 초기부터 빈번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여 이 시기 국경방면에서 발생한 무장투쟁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하였는데 이런 와중에서 병력의 손실은 막대하였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고마령 참변’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중·일 간에 체결된 ‘미쓰야(三矢)협정’으로 참의부 독립군의 행동이 제한되고 재정적인 후원이 줄어 참의부는 점차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수흥이 무장활동을 벌였던 시기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수흥이 참의부 제2중대의 근거지인 집안현 뇌자구(磊子溝)를 출발한 것이 1926년 5월 26일로 음력으로는 4월 15일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참의부는 1925년 3월 고마령전투에서 일본 경찰의 기습으로 혈전 끝에 참의장이며 제2중대장인 최석순 이하 29명이 전사하는 참변을 당했다.

이에 더하여 1925년 6월에는 중국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스(三矢宮松) 사이에 이른바 ‘미쓰야(三矢)협정’이 체결되었다. 미쓰야협정 체결 이후 독립군들의 무기소지와 지도부의 체포 압박으로 참의부는 국내 진공작전을 비롯한 무장투쟁과 함께 중국 관헌의 단속에도 대비해야 했으므로 내외 협공의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참의부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1925년 이후 급속히 줄어든 것도 바로 ‘미쓰야협정’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독립군의 국내 진공 횟수는 1924년에 560여 건, 1925년에 270건, 1926년에 69건, 1927년에 16건, 1930년 3건으로 급감하였다.

이수흥의 재판기록에서도 “피고 이수흥은 요즘 조선 독립의 기세가 쇠퇴하고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이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하여 조선 내에 잠입하여 총독 및 기타 대관 등을 암살할 것을 계획하고”라고 하여 1926년 5월 만주의 사정이 급박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수흥이 실행했던 국내 진공작전에 의한 무장투쟁은 당시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고, 1925년 3월 고마령전투에서 전사한 제2중대장 최석순을 비롯한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에서 수행되었다. 이처럼 이수흥의 국내진공작전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수흥의 무장투쟁

이수흥은 단독으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번 거사는 그해 3월 고마령 참변으로 순국한 최석순 참의장을 비롯한 29명 동지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과 국내에 침투하여 조선총독부 총독과 고관들을 격살함으로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원대한 계획 아래 실행되었다.

이수흥이 사용한 권총
이수흥이 사용한 권총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그의 의거는 의열투쟁과 무장투쟁이 결합된 치밀한 독립투쟁의 소산이었다는 것이다. 일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려는 것이 의열·무장투쟁의 목적이라 할 때 의거의 성패여부는 상관이 없었다. 일찍이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평소에 “우리 단이 노리는 곳은 동경·경성 두 곳으로서, 우선 조선총독을 계속해서 대여섯 명을 죽이면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동경 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한국 독립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 국민 스스로가 한국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라고 말했다. 이수흥의 무장투쟁 의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때 이수흥의 가슴에는 오직 동지들에 대한 복수와 꺼지지 않는 무장투쟁의 투지만 남아 있었다.

1926년 5월 26일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이수흥은 조선총독 및 고관들을 격살하기 위하여 참의부 제2중대의 근거지인 중국 봉천성 뇌자구를 출발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모젤 권총 1정과 실탄 147발, 브라우닝 구식 권총 1정과 실탄 29발을 휴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하였다.

황해도 평산군 사건

이수흥은 국내진공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7월 6일 밤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발참리 김상렬(金商烈) 가에 모젤 권총을 들고 들어가 만주에서 들어온 독립군인데 군자금 500원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김상렬이 마침 금전을 갖고 있지 못함을 들어 거절하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되돌아 나왔다.

동소문파출소 사건

이후 이수흥은 경성으로 침투했다. 그는 일제의 검문을 피하며 7월 10일 오후 10시 50분경 경성 동대문경찰서 산하의 동소문파출소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보초 근무 중이던 일제 경찰 토쿠나가 마사루(德永勝)에게 권총을 소지한 것이 발각되자 즉시 모젤 권총을 꺼내 경찰에게 저격하여 대퇴부 등에 중상을 입히고 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조선총독부가 있는 경성 시내에서 벌어진 일로 일제가 삼엄한 경계를 펼쳤으나 이수흥은 유유히 경계망을 빠져나갔다.

안성 부호 박승륙 가 사건

이수흥은 이천군 읍내에 살고 있던 유택수와 함께 거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동리에 거주하는 안성 부호 박승륙(朴承六)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으로 9월 7일 오후 7시 30분경 박승륙 가를 찾았다. 그들은 신문기자라 칭하고 면회를 요청한 후 마침 집에 있던 박승륙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에게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로 진공한 독립군인데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박태병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수흥을 체포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이수흥은 재빨리 유택수가 소지했던 브라우닝 권총을 넘겨받아 그 집 대문 안에서 박태병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현장에서 즉사하게 하였다. 이때 집안에 있던 다수의 인부들이 달려오자 이수흥은 다시 2발을 발사하여 그들을 위협하며 도주로를 확보하였다.

여주 이민응 사건

9월 28일 오후 1시경 이수흥은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외계리에 있는 이민응 가를 찾아 용무가 있다고 하여 면회를 신청하였다. 집주인 이민응을 만난 이수흥은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들어온 독립군인데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민응은 자선사업에 종사하고 있어 자금 조달이 어렵겠다고 교묘히 속이고 이에 불응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천경찰서 현방경찰관주재소 사건

이수흥 의거 보도 호외(조선일보 1926.11.17.)
이수흥 의거 보도 호외(조선일보 1926.11.17.)

이수흥은 이민응이 자신을 교묘하게 속였음을 알고 10월 20일 오후 2시 30분경 이천군 백사면 현방리에 소재하고 있는 이민응의 식산회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회사 안팎으로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가까이 있던 이천경찰서 현방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이수흥은 주재소 사무실로 들어가 마침 집무 중이던 조선총독부 도 순사부장 모리마츠 타게노(森松武之)의 흉부를 향해 저격하였으나 불발하였다. 이때 순사부장과 또한 함께 있던 고사카 후지타로(小坂富士太郞) 등 2인이 후문으로 급히 도주하였다.

백사면사무소 사건

이천 백사면사무소(1926년)
이천 백사면사무소(1926년)

주재소 일본 경찰을 사살하려던 목적이 불발되자 이수흥은 배짱 좋게 다시 이민응의 식산회사를 찾아갔으나 사원들이 이미 모두 퇴근하여버렸다. 이에 이수흥은 독립자금을 확보할 목적으로 인근에 있던 이천군 백사면사무소를 찾았다가 당시 숙직 중이던 면서기를 저격하였다.

경성 전익영 가 사건

이수흥 공판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8.6.28.)
이수흥 공판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8.6.28.)

이수흥으로부터 브라우닝 권총과 실탄 25발을 넘겨받은 유택수는 10월 25일 오후 9시경 독립자금을 모집할 계획으로 경성부 중심에 있는 수은동 소재 전익영(全益榮) 가에 들어갔다. 마침 내실에 있던 그의 형 전기영(全基榮)에게 군자금 5천원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에 불응하고 밖으로 도주하려는 것을 저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수흥이 만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이수흥은 7월부터 10월까지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 유택수·유남수 가에 머물면서 이들과 모의하여 독립군 군자금 모집과 적 경찰 등의 응징에 힘썼던 것을 볼 수 있다.

때마침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부음(訃音)을 듣게 된 이수흥은 장례식에 비밀리 참석하게 되는데, 이때 이천경찰서 카와마타(河岐) 서장은 이수흥의 신장이 5척 단신이라는 말을 듣고 관내에 거주하는 신장이 5척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조사하게 하였다. 결국 그는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매국노의 밀고로 체포되어 배후를 추궁하는 일제 경찰의 갖은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수흥사건 공판장으로 모여든 방청객
이수흥사건 공판장으로 모여든 방청객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3천여 명이 동원된 삼엄한 경계 상태의 6개월 동안, 이러한 일련의 대사건을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흔적도 없이 수행하던 그는 동지 유택수와 함께 11월 6일 결국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3년여에 걸친 예심 끝에 1928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스스로 상고를 포기한 이수흥은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참의부는 설립할 때부터 무장투쟁을 그 목표로 하였다. 만주에는 참의부 이외에도 정의부, 신민부의 이른바 ‘삼부(三府)’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를 제외한 정의부와 신민부는 실질적으로 무장투쟁보다 교민들의 자치활동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군정부로서 기능보다 자치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참의부에서는 처음부터 무장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조직으로 출발하였으며, 행정조직으로는 군자금을 징수하기 위한 민사부만 두었을 뿐이다.

이수흥 선생 편지(1928.6.28.)
이수흥 선생 편지(1928.6.28.)

참의부 독립군의 항일투쟁은 주로 유격전의 형식으로 일제의 관공서를 파괴하여 식민통치 질서를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참의부의 전투 방식은 정의부 등 기타 독립군 부대에 비해 전투의 횟수가 잦고 행동의 주기도 짧았다. 이른바 ‘속전속결의 방식’을 취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참의부는 1923년 8월 통의부에서 분립하여서부터 1929년 해체될 때까지 7년여 동안 만주와 국내에서 일제의 관공서를 파괴하고 일제 군경 및 밀정과 친일파를 숙청하면서 재만 한인들과 내국인들에게 항일사상을 선전하고 그들의 항일투쟁을 고무시켰다. 참의부 독립군의 대일 무장항쟁은 한민족 독립투쟁사에서 가장 처절하고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이수흥 선생 동상(경기 이천 이수흥공원)
이수흥 선생 동상(경기 이천 이수흥공원)

바로 이러한 참의부 무장투쟁사 한 가운데 이수흥의 무장투쟁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수흥은 단독으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그의 무장투쟁은 은밀히 국내에 침투하여 총독 및 기타 고관들을 격살함으로 당시의 침체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치밀한 계획 하에 실행되었다. 또한 1925년 3월의 고마령 참변으로 전사한 직속상관 제2중대장 최석순을 비롯한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에서 수행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목적이 완전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서울과 경기 일원에서 과감하게 수행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무장투쟁사의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동원된 인원만 3천여 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대규모로 동원된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장장 6개월여 간을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흔적도 없이 목적을 수행했다는 것은 실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수흥 선생은 만주로 망명한 이후 한 번도 무장투쟁의 투지를 놓지 않고 일제와 싸우다 체포되어 끝내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무장투쟁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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