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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원희

훈격아이콘 훈격: 애족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2000년

주요공적

1927년 4월 근우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 계몽강연 활동 전개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던 중 병을 얻어 사망,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박원희 / 김영순 / 조복금

박원희 , 1898 ~1928 , 애족장 (2000) 김영순 , 1892 ~1986 , 애족장 (1990) 조복금 , 1911 ~미상 , 애족장 (2018)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은 동시에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 세계인류를 위하여 싸우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1. 민족통합적 여성단체 근우회

1927년 5월 27일, YMCA 강당에서 근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적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는 신간회 결성으로 촉발된 여성계의 전국적 통일기관 마련을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근우회의 창립은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근우회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여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근우회는 “조선여성을 불행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서 조선 사회 전체를 괴롭히는 요소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전 세계의 불합리와도 의존·합류하는 것이고 모든 문제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 해결의 길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성문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진단하였다. 이러한 진단 아래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위해 싸우는 것은 동시에 조선사회 전체를 위하여 나아가 세계인류를 위하여 싸우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성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방향 아래 ‘조선 여자의 강고한 단결을 도모함, 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이라는 강령을 채택했다.

이러한 방향성은 1928년 임시전국대회 이후 수정을 요구받기도 했다. 근우회 내의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노동계급 여성에 더 주목하고, 이들을 조직화할 필요성이 있 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노동여성의 조직화와 그들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은 1929년 들어 본부 사회주의자들의 과거 운동에 대한 자기비판 속에서 다시 언급되었다. 1929년 5월 창간된 기관지 『근우』에서는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한층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근우회 내의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결과였고, 이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서의 위기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에 1929년 7월 개최된 제2회 전국대회에서 선출된 새로운 간부들은 ‘① 조선여성은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공고한 단결과 의식적 훈련을 기함 ② 조선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전적 이익의 옹호를 기함’이라는 새로운 강령이 제시되었다. 7월 25일 집행위원회에서는 근우회 운동의 재정비를 위하여 ‘①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철폐 ② 일체 봉건적 민습과 미신타파 ③ 조혼폐지 및 결혼의 자유 ④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⑤ 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⑥ 부인노동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임금 지불 ⑦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폐지’라는 행동강령이 제정되었다.

이는 당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성문제를 집약하고 있으며, 대중 활동의 큰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 시기 근우회의 대표적인 활동은 여학생운동 지원이었다. 근우회 본부는 전주여고보 사건, 진명여고보 사건, 광주학생 사건 등에 대하여 「퇴학처분해제 권고문」을 발송하였다. 이어 12월 9일 ‘광주학생사건’과 관련한 민중대회 개최 결의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간부진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근우회는 국내외에 69개의 지회를 조직하였다. 지회에서는 ‘여성의식 향상을 위한 강연회와 토론회, 회원모집 및 회원간 친목 도모를 위한 문화행사, 문맹 퇴치를 위한 부인야학 개설’등의 사업이 전개되었다. 지회 가운데 근우회 하동지회는 부인 야학을 개설한 몇 안되는 지회 가운데 하나였다.

1927년 민족통합적 여성단체로 출발했던 근우회는 1931년 들어 해소의 위기에 봉착했다. 광주학생운동의 서울시위 개입과 관련하여 근우회의 사회주의자들이 검속되었고, 이후 근우회에 대한 탄압이 한층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0년 말부터 신간회 해소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모든 통일전선 단체로 확산되었다. 근우회 또한 신의주지회를 시작으로 해소가 결의되는 등 해소 논쟁에 휩싸였다. 결국 일제의 탄압으로 집행위원회조차 자유롭게 열 수 없는 상황에서 해소 결의조차 못한 채 근우회는 1931년 막을 내렸다.

2. 근우회 창립을 이끈 박원희·김영순

1) 근우회 이전의 항일투쟁

박원희 지사
박원희 지사

박원희는 1927년 근우회 창립에 참여하고 이후 1928년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우회를 이끌었던 여성독립운동가이다. 1898년 3월 10일 충남 대전에서 부친 박래빈(朴來彬)과 어머니 충주박씨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박원희는 관립한성고등학교를 거쳐, 1915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설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철원공립보통학교에서 의무복무기간인 4년을 마치고 1920년 초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1921년 7월 15일 김사국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함께 일본으로 가서 3년간 유학하였다. 1923년 초 귀국한 박원희는 여자고학생상조회가 주최한 강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곳에서 「여성의 반역」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후 지역 단체인 광진부인회를 시작으로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925년 초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1926년 말에는 화요회계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과 함께 통합적 사회주의 단체인 중앙여자청년동맹을 탄생시켰다. 이는 근우회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김영순 지사
김영순 지사

김영순의 항일투쟁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189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14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 군산 메리볼덴 여학교 교사로 있다가 2년 후 모교인 정신여학교 사감으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1919년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1919년 9월에 이르러 김마리아·황애시덕 등을 중심으로 결사부·적십자부를 새롭게 꾸리는 등 조직을 탈바꿈하였다. 독립전쟁에 좀 더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때 김영순은 서기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그 조직이 드러나면서 김영순도 함께 체포되어,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태화여자관 교사를 거쳐 정신여학교 사감으로 재직하였으며, 1927년 근우회 창립을 이끌었다.

2) 근우회 창립을 이끌다

박원희와 김영순의 근우회 활동은 발기 단계부터 시작되었다. 1927년 4월 26일 근우회 발기총회가 열렸다. 박원희 등 40명의 발기인단이 중심이 되어 총회를 이끌었다. 이들 40인은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던 지식 여성이었으며, 민족주의 여성운동계와 사회주의 여성운동계가 함께한 좌우연합의 성격을 띠었다. 이날의 총회에서 창립대회 날짜를 5월 중순으로 결정하고, 준비위원 21인을 선임하였다. 박원희와 김영순도 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날 창립대회 준비위원회 구성 및 사무 분장이 이루어졌다. 사무는 ① 강령·규약 초안 및 취지 작성 ② 총무부 ③ 재무부 ④ 회원모집 ⑤ 창립사무소 교섭위원으로 분장되었다. 박원희와 김영순은 유각경·황신덕·이현경·정칠성·조원숙 등 8명과 함께 회원모집의 역할을 맡았다.

1927년 5월 27일, YMCA 강당에서 회원 150명, 방청인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근우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창립총회에서 21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는데, 박원희와 김영순도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날 선출된 집행위원들은 5월 29일에 이르러 제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두 사람은 여기에 참여하여 근우회 활동 청사진이 될 8개 항을 결의하였다. 이날 부서 결정이 이루어졌는데 박원희와 김영순은 황신덕·김동준과 함께 교양부를 맡게 되었다. 발회식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져, 6월 17일 발회식 거행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1927년 6월 17일 발회식이 거행되면서, 박원희와 김영순은 한국여성운동의 한 걸음을 내딛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박원희의 근우회 활동은 집행위원회의 교양부원으로서의 역할이 중심을 이루었다. ① 약 7차례의 중앙집행위원회 참여 ② 편집부와 학생부 설립 운영, ③ 부인의 교양을 위한 강연, ④ 근우회 선전일의 팜플렛 제작·보급 ⑤ 근우회 지회설치를 위한 강연활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강연 활동은 부인 교양을 위한 핵심 활동이었다. 1927년 7월 14일 교양부 주최의 제1회 부인학술강습회에서 「부인문제」라는 주제로, 1927년 10월 14일 함흥에서는 「특수 환경에 처한 조선여성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날 “조선은 농산국이요 일본은 공업국이다. 조선의 원료를 염가로 일본에서 방매함으로서 조선의 경제는 날로 쇠퇴하여 간다. 이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적으로 무슨 기관이 있어야 하겠다”는 내용으로 강연 도중 경찰에 의해 중지 당하고 경찰서에 연행되는 고초를 겪었다. 1927년 11월 12일 인천 산수정 공회당에서 「조선청년의 지위와 사명」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박원희는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신간회 본부의 정기대회 준비 활동, 신간회 경성지회 활동이 확인된다. 그러나 박원희는 더이상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다. 병고로 1928년 1월 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26년 5월 8일 남편 김사국을 여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린딸을 남기고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동지들에게‘일들 잘 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못다 이룬 여성해방·민족해방의 꿈을 동지들이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박원희의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이루어졌다. 장례식에는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신간회 창립 및 제1회 집행위원회 활동 이후 김영순의 활동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박원희와 함께 교양부를 맡아 여성의 지위향상과 항일독립운동에 힘썼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근우회 하동지회를 이끈 조복금

전국적인 통일기관이었던 근우회는 지역의 지회 결성에 노력하였다. 전국적으로 69곳의 지회가 결성되었다. 경상남도 하동에도 1928년 7월 근우회 하동지회가 결성되었다. 조복금은 제영순 등과 함께 근우회 하동지회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복금 지사
조복금 지사

조복금은 1911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1926년 1월 진주여자잠업강습소를 졸업하였다. 이후 경남 하동에서 여성 청년단체 및 근우회 활동을 이끌었다. 조복금은 1928년 3월 21일 개최된 하동청년동맹여자지부 제1회 정기대회에서 제영순과 함께 서무재정부 역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7월 1일 근우회 하동지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날 조복금은 서무재정부를 맡게 되었다. 이후 확인되는 근우회 활동은 1929년 3월 24일 개최된 제2회 정기대회 참여이다. 조복금은 이날 대회에 참여하여 전국대회 출석대의원 선거의 건, 미신타파, 유아교양문제, 회관건축, 재봉강습회 등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날 새롭게 임원을 개선하였는데 조복금은 조광렬·김점표·김귀례·박삼모·조계해·강정희·조정희·제영순과 함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29년 6월 22일 근우회 하동지회 집행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하동지회 1주년 창립기념에 관해 논의하였고, 조복금은 7월 1일 기념강연회 강사로 결정되기도 했다.

1930년 들어 근우회 하동지회는 여러차례 정기대회 개최를 시도하였으나, 당국의 금지를 당하다가, 4월 6일 확대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부인 교양문제 등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근우회 전국대회 대의원 선출이 이루어졌다. 이날 조복금은 조정희 등 4명과 함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두 달 뒤인 6월 1일에 이르러 하동청년동맹 확대위원회가 개최되었는데, 조복금은 집행위원 겸 여자부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1년에 이르러 중앙의 근우회 소멸과 더불어 하동지역 근우회 활동도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이후 조복금은 노동항일운동·조공재건운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수 차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1년 6월 경남 부산에서 조선방직회사 직공으로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의 『노동자』 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징역 5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32년 7월 대구에서 권대형(權大衡)과 함께 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여 기관지를 출판・배포하고, 동지 규합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기소유예를 받았다. 이어 1933년 ‘전북교원비사사건’에 연루·체포되어 불기소 방면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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