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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부춘화

훈격아이콘 훈격: 건국포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2003년

주요공적

1932년 1월 7일과 12일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 주도

도사(도지사)와 해녀들의 권익을 위한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 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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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춘화 / 김옥련 / 부덕량

부춘화 , 1908 ~1995 , 건국포장 (2003) 김옥련 , 1907 ~2005 , 건국포장 (2003) 부덕량 , 1911 ~1939 , 건국포장 (2005)

1. 일제강점기 해녀들의 고달픈 삶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알아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던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종일 일했으나 번 것은 기막혀 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코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장 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비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한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제주해녀항일운동에 같이 참여했던 우도 출신의 강관순 지사가 일제의 감옥에서 지은 해녀노래 가사이다. 이 노래를 통해 육지로 일본으로 돈 벌러 바깥물질 나갔던 해녀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1920년 제주도 어른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는 해녀들을 보호하고자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만들었다. 해녀조합은 해녀가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팔게 하며, 중개도 하여 주고, 자금을 융통하여 주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8천 명이 넘는 해녀들이 너도나도 해녀조합에 가입했고, 해녀조합은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키워주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출범한 지 10년도 안 되어 서서히 해녀들의 권익을 가로막고 수탈하는 기구로 바뀌어 갔다. 해녀들을 보호해야 할 조합이 오히려 일본 상인과 일본 해조회사 등 일제의 편이 되어버렸다. 당시 해녀조합장은 제주도를 통치하던 일본 제주도사(현재의 도지사)였기 때문에 해녀들의 어려운 처지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해녀들이 힘을 들여 채취한 전복이나 우뭇가사리 등 해조류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조회사에 판매되었는데, 수익의 절반을 이 회사에 수수료로, 또 1/5 정도를 해녀조합의 수수료로 지불했다. 여기에 해녀조합비, 거래상인 임금 등을 빼고 나면 해녀의 실제 수입은 1/5 정도밖에 안 되었다. 또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에 대한 가격도 당시 가격의 반 정도로 지정해 버려 해녀들은 지정가격에 억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이윤은 생산자인 해녀가 아니라 해녀조합과 상인들에게 넘어가 버렸다. 결국 당시 해녀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따낸 해산물을 자유롭게 팔 수 있는 권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편이 되어버린 해녀조합은 더 이상 해녀들을 보호하는 조합이 아니었다. 봄철이 되면 육지로 바깥물질을 나갔다가 가을에 돌아와서는 제주도 해안에서 작업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 해녀들은 초등학교 교육도 받을 겨를이 없이 먹고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배우지 못한 해녀들은 부당한 해녀조합 측에 항의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수탈당하고 있었다.

2. 일제의 횡포에 항의하여 제주해녀들이 시위를 벌이다

제주도 동쪽에 있는 구좌읍 하도리와 우도는 해녀들이 매우 많은 마을이다. 이 마을 여성이라면 어릴 적부터 물질을 배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도리에서 나고 자란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20대 나이가 들어서도 교육을 받지 못하고 해녀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녀조합과 일제 당국의 횡포가 심해지자, 그녀들은 이대로 눌러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 항일의식을 가졌던 동네 지식인 청년들의 권유로 당시 하도보통학교 야간부 강습소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녀들은 청년 지식인 교사들로부터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받았다. 한글과 우리 역사, 산수, 사회 등을 공부하여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의식을 깨우치게 되었다. 일제 측 상인들이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 가격을 속이지 못하게끔 저울 보는 법도 야학에서 배웠다고 한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같이 공부하여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1회 졸업생이 되었다.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맨 윗줄 가운데가 부춘화, 두 번째 줄 왼쪽으로 두 번째가 김옥련, 오른쪽으로 두 번째가 부덕량이다.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맨 윗줄 가운데가 부춘화, 두 번째 줄 왼쪽으로 두 번째가 김옥련, 오른쪽으로 두 번째가 부덕량이다.

이제 해녀들은 더 이상 일제의 횡포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지 않았다. 1930년 성산포에서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부정판매에 항의하던 하도리 청년들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도리 해녀들은 일제 당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해녀들은 스스로 해녀회를 조직하여 단결하여 갔다. 해녀회는 성산포와 구좌면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런 가운데 하도리 해녀들이 해녀조합을 상대로 투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31년 하도리 해녀들이 캐낸 감태와 전복의 가격을 조합 측에서 강제로 싸게 매기려 하자, 해녀들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거센 항의에 부딪힌 조합 측은 정상적인 매입을 약속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결국 하도리 해녀들은 조합의 무성의한 태도에 반발하여 1931년 6월부터 직접 투쟁에 들어가기로 결의하였다.

우선 해녀들은 이웃 마을인 종달·연평·세화리 해녀들에게 진상을 호소하고 면민들에게 조합의 정체를 알리고 규탄하는 활동을 개시하였다. 활동적인 해녀들은 각 마을을 다니면서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우리들의 생활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해야 하며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결국 1931년 12월 20일 하도리 해녀들은 회의를 열어 해녀조합에 대한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확정하고, 즉각 해녀조합 사무소가 있는 제주읍으로 향했다. 경찰의 제지를 염려하여 발동기선을 타고 제주읍으로 출발했으나, 폭풍으로 배가 나아가지 못해 이 투쟁은 실패했다. 결국 본격적인 투쟁은 다음 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1932년 1월 7일 하도리 해녀 3백여 명은 세화리 오일장 날을 이용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호미와 비창(전복을 따는 도구)을 들고, 어깨에는 양식 보따리를 메고 하도리로부터 시위 행렬을 지어 세화 시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부근 마을에서 모여든 해녀들과 합세, 집회를 열어 해녀조합에 대한 성토를 하고 제주읍을 향해 행진하여 나아갔다. 시위 행렬이 평대리 구좌면사무소에 다다르자, 면장이 나서서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여 오후 5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해녀조합에서는 채취 해산물에 대한 지정판매를 강행하기로 하였다. 조합의 지정판매에 불만을 품어오던 구좌·성산의 해녀들은 각 마을별로 회의를 여는 등 해녀조합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마침 지정판매일인 1월 12일은 제주도사 겸 해녀조합장인 다구치[田口禎熹]가 새로 부임한 뒤 순시하러 구좌면을 통과할 날이고 세화리 장날이었다. 따라서 구좌면 하도·세화·종달·연평리, 정의면(현재 성산읍) 오조·시흥리 등의 해녀들은 시위를 벌이기로 결행하고, 이 기회에 도사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기로 결심하였다.

12일 장날이 되자 세화경찰관 주재소 동쪽 네거리에 종달·오조리 해녀 3백여 명과 하도리 해녀 3백여 명, 세화리 해녀 4십여 명이 일시에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면서 만세를 외치며 세화장으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세화장에 모여든 군중들과 더불어 집회를 열고,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항쟁의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차례로 하였다. 이때 마침 제주도사를 태운 자동차가 시위대 뒤로 달려오다가 놀라서 도사 일행은 구좌면 순시를 포기하고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집회를 중단하고 차에 몰려가서 도사를 에워쌌다. 해녀들은 호미와 비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1932년 1월 12일 다쿠치 제주도사에게 항의시위를 벌였던 상황을 보도한 신문기사(『朝鮮新聞』 1932. 1. 16 ; 사진은 다쿠치 데이키 제주도사)
1932년 1월 12일 다쿠치 제주도사에게 항의시위를 벌였던 상황을 보도한 신문기사(『朝鮮新聞』 1932. 1. 16 ; 사진은 다쿠치 데이키 제주도사)

사태가 험악하여지자 도사는 해녀들과의 대화에 응하기로 하였다. 이에 해녀 측에서는 ‘지정판매 반대’, ‘해녀조합비 면제’,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의 항일적 성격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직접 도사와 담판을 벌였다. 결국 도사는 해녀들의 시위에 굴복하여 요구 조건을 5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사가 돌아간 이후 일제는 무장경관대를 출동시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수십 명의 청년들을 체포하여 버렸다. 심지어 전남 경찰부에서 응원 경관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에 각 마을 해녀들은 심하게 반발하였고, 26일에는 우도 해녀들이 주동자를 검거하러 온 배를 에워싸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결국 27일 종달리 해녀들이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이 출동하여 진압 해산됨으로써 해녀들의 저항은 진정되었다.

3. 항일운동의 주역 해녀들, 독립운동가로 우뚝 서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 해녀항일운동 주역 세 사람은 1932년 1월 하도·종달·세화·우도·시흥·오조리 지역 해녀 1천여 명이 참가한 투쟁을 주도했던 여성이다. 부춘화는 1908년 구좌면 하도리 굴동에서 부원돈의 장녀로 출생하여 1922년 당시 15세 때부터 해녀 생활을 했다. 김옥련은 1909년 구좌면 하도리 서문동에서 1남 4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9살 때부터 물질에 나섰다. 잠수 실력이 좋아서 비슷한 또래 해녀들 가운데 1, 2등을 다투었다. 부덕량은 구좌면 하도리에서 부계준의 장녀로 태어났다. 13세부터 해녀 생활을 시작했고 17세에 본격적으로 해녀 경제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서 함께 한글 공부를 하고 근대 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제주섬 동쪽의 토지는 척박하여 여성이라면 모두가 물질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웠다. 먹고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삼던 물질 노동의 가치에 대해 세 해녀는 야학을 통해 새로 자각하게 되었다.

부춘화는 1928년 하도리 해녀회장으로 뽑혔고, 김옥련·부덕량도 해녀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항일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해녀항일운동 과정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함에 대한 항의 시위운동에 앞장섰다. 1931년 12월 20일 일제의 해녀 착취에 항의하기 위해 하도리 해녀회 대표회의에서 그녀들은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해녀 대표 10여 명과 함께 1932년 1월 세화리 장터 시위에서 해녀들을 규합하며 시위에 앞장섰다. 모든 해녀투쟁 참여자를 대표하여 일본인 제주도사와 협상을 직접 했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경찰에 체포되어 미결수로 수개월간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안타깝게도 부덕량은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폐병으로 1939년 10월 4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대중운중이며 민족운동이다. 여성들이 주체가 된 운동이었고, 연인원 1만7천 명이 참여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제주도 항일운동이자 한국에서의 최대 어민항쟁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항일운동으로 평가를 받아 결국 해녀항일운동의 주역인 부춘화(2003, 건국포장), 김옥련(2003, 건국포장), 부덕량(2005, 건국포장) 등 세 주역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제주해녀항일기념탑 전경(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소재)
제주해녀항일기념탑 전경(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소재)

2018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1932년 제주 구좌읍에서는 일제의 착취에 맞서 고차동, 김계석, 김옥련, 부덕량, 부춘화 다섯 분의 해녀로 시작된 해녀 항일운동이 제주 각지 800명으로 확산됐다”면서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7천명이 238회에 달하는 집회시위에 참여했다. 지금 구좌에는 제주해녀 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가혹한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부당한 경제적 차별과 수탈, 억압에 저항한 고발이었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투쟁이었다. 해녀항일운동은 해녀라는 공동체를 넘어 제주도민의 지지와 호응으로 이어져 제주도 항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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