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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송재만

훈격아이콘 훈격: 애족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0년

주요공적

대호지면사무소 사환으로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진행, 징역 5년형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송재만 / 이인정 / 한운석

송재만 , 1891 ~1951 , 애족장 (1990) 이인정 , 1859 ~1934 , 애족장 (1990) 한운석 , 1884 ~1950 , 애족장 (1990)

1919년 4월 4일 충청남도 서산군(현 당진시) 대호지면 – 정미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고종 국장에 참례한 유생들이 귀향해 서울의 3·1독립운동을 전하고 대호지면사무소 면직원들이 독립만세를 준비했다. 면민들에게 집합 공문을 발송하고 한운석이 애국가를 작사하여 인쇄하고 송재만 등이 태극기를 제작했다.

면장 이인정이 면사무소에서 4~500명 면민들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고 지휘하여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송재만, 한운석 등은 1000명의 군중들과 천의시장,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제의 진압에 맞서 주재소를 공격 파괴하고 일경과 일본인을 응징했다.

1. 4월 4일 대호지면 – 정미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붕어(崩御)로 국장을 치루게 됐다. 고종의 독살설이 횡행(橫行)하고 한국민들의 울분도 들끌었다. 전국 각지의 인사들이 국장을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 충청남도 서산군 대호지면내 인사들도 2월 하순경 상경했다. 이들은 도호의숙(桃湖義塾)에서 수학한 유생들로 의령(宜寜) 남씨의 남주원(南柱元), 남상락(南相洛), 남상돈(南相敦), 남계창(南啓昌), 남상직(南相直) 등과 전주(全州) 이씨의 면장 이인정(李寅正)의 아들 이두하(李斗夏), 조카 이대하(李大夏) 등이다. 서울의 3월 1일 독립선언과 독립만세를 목격하고 이어 3월 3일 국장을 참례한 후 인천을 경유해 배편으로 돌아왔다. 남상락은 백화점에서 목제 석유 램프를 구입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넣어 귀향했다. 이 램프는 아들 남선우가 보관하다가 1986년 10월 독립기념관에 기증해 2008년 8월 12일 등록문화재 제386호로 지정됐다.

국장을 참례한 유생들이 귀향해 지역 유생과 회합을 갖고 독립만세를 외치고자 했다. 구체적 실행은 대호지면 면직원들 중심으로 추진됐다. 3월 26일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소사 송재만(宋在萬), 면서기 김동운(金東雲), 강태완(姜泰玩), 민재봉(閔載鳳) 등이 회합을 가졌다. 김동운이 ‘지금 각 지방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군에서 만세를 부르지 않는다면 다른 지방에 대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고로 만세를 부르도록 노력하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찬성했고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다수를 집합시켜야 하는데 먼저 군중을 집합시키는 방법을 강구하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다음날 3월 27일 오후 4시경 면사무소에서 민재봉, 김동운 등이 다시 회합을 갖고 군중들을 집합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 김동운‘각 구장에게 도로를 수선한다는 취지의 공문을 발송하여 4월 4일 오전 8시경까지 면내 각 집에서 1명씩 면사무소에 집합시켜 만세를 부르고 4월 4일은 천의시장의 시일(市日)임으로 군중을 인솔하여 시장에 가서 부르자’고 발의(發議)를 했다. 이에 참석자 모두는 찬성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4월 2일 밤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송재만이 강태완에게 ‘각 구장들 앞으로 도로 수선의 건(件)으로 면사무소에 집합하라’는 취지의 공문을 작성하여 줄 것을 부탁했다. 강태완은 ‘도로 보수 가로수 정리(道路補修並木整理)의 건(件)’공문을 기안하고 등사판 원고를 작성하여 송재만에게 건넸다. 이어 송재만이 면사무소 등사판으로 공문을 인쇄하고 강태완이 공문 하단의 면장 이인정 명의에 ‘瑞山郡大湖芝面面長印’의 면장 직인을 압인(押印)해 공문을 완성했다.

4월 3일 송재만은 면내 8개 마을 구장이나 구장대리의 집으로 방문해 직접 공문을 전하고 ‘4월 4일 도로 수선의 건(件)으로 각 집 1명씩 면사무소에 집합할 것’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또한 밤에 면사무소에서 송재만은 애국가를 만들어 군중들에게 반포하기 위해 한운석(韓雲錫)을 초청하여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알리고 군중들에게 반포할 애국가(愛國歌)가 필요하다며 작사(作詞)를 요청했다. 한운석은 독립운동의 취지에 찬성하여 그 자리에서 애국가를 작사했다.

간교한 일본의 강폭한 주장에

끝내 우리나라 억지 강탈당해

우리 통탄(痛歎)을 조우(遭遇)하게 되니

살아 거소(居所)없고 죽어 장지(葬地)없네

이 원수들 갚지 않고 어찌하랴

각인 노력하고 한마음 협력해

불구(不俱) 대천(戴天) 원수들을 갚아

무궁전세(無窮傳世) 우리나라 독립하세

이어 그는 작사한 애국가를 등사판 원지에 적어 일부를 인쇄하여 송재만에게 교부했다. 한운석이 원고를 작성하던 중에 민재봉, 김동운 등 4명이 면사무소에 왔다. 송재만 등 참석자들은 돌아가며 윤번(輪番)으로 등사판을 사용해 약 400매를 인쇄했다.

그리고 이들은 송재만이 자기의 상의(上衣)를 만들기 위해 구입해 두었던 광목(廣木) 3척(尺)을 가져 와서 함께 구한국기인 태극기 1기(旗)를 제작했다.

4월 4일 아침 공문에 의해 면내 마을 주민 약 400 ~ 500명이 면사무소 앞에 집합했다. 면장 이인정은 면민들에게

여러분을 모이게 한 것은 도로를 수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조선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모이게 한 것이다.

각자는 이에 찬성하기 바란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향해 나아가자.

등의 내용으로 연설을 했다. 이어 이인정이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에 면민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송재만은 전날 제작한 애국가와 태극기를 면사무소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는 태극기를 김순천(金順天)에게 건네 주어 김순천을 선두에 서게 했다. 또한 애국가는 직접 군중들에게 1매씩 교부하고 도중에 참가한 군중들에게도 교부했다. 군중들은 이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인정의 지휘 하에 송재만 등이 앞서 태극기를 흔들고 민재봉, 김동운 등 주도 인사들이 각 마을 주민들 약 100명씩 정도를 인솔하며 약 7km 정도 떨어진 정미면 천의시장을 향해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만세 군중들이 조금리에서 ‘서낭댕이 고개’를 넘어 장정리에 이르자 미처 면사무소에 집합하지 못했던 마을 주민들이 합세했다. 오전 11시경 쯤에 만세 군중들은 천의시장에 이르렀다. 이인정의 지휘 하에 송재만을 선두로 군중들은 열을 지어 돌며 천의시장 각 곳과 언덕이나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을 활보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재소에는 순사 우에하라(上原尙定), 순사보 이재영(李在英)과 유기우(柳冀祐) 등 3명이 있었다. 유기우는 주재소에 머물고 우에하라와 이재영은 천의시장이 열리는 날이라 시장의 염건피장(鹽乾皮場)으로 나가 감시했다. 수백 명의 군중들이 정미면 승산리를 거쳐 천의리로 들어와 시장에서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장 군중들도 합세하여 약 1,000명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이에 우에하라와 이재영은 처음에 군중들에게 ‘속히 물러가라’, ‘집으로 돌아가라’라며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만세 군중들의 위세에 압도되어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활보하는 모습만을 바라보며 관망만 했다.

만세 군중들은 시장에서 술을 마신(飮酒) 후 오후 3시경부터 귀가하려고 움직였다. 오후 3시 30분경 군중들은 시장이나 부근, 천의리와 승산리 경계 등에 흩어져 휴식을 취하며 귀가를 준비했다. 이인정도 군중들을 이끌고 시장에서 약 30간(間)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우에하라와 이재영은 염건피장에 군중들이 모여 협의하는 것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다. 이때가 오후 4시경으로 급보를 받은 당진경찰서에서 니미야(二宮), 다까지마(高島) 2명의 순사가 도착했다. 당진 순사 2명이 ‘태극기를 압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해 우에하라와 이재영 등 4명이 염건피장으로 왔다. 순사들이 태극기를 압수하려고 하자, 군중들은 저항하며 돌을 던졌다. 우에하라가 군중들을 제지할 때, 위협을 느낀 니미야가 권총을 발포했다. 군중들은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하느냐!’라며 소리쳤다. 남계창이 ‘당진에서 온 순사가 권총을 발포했다. 돌을 던져라’라고 소리치며 돌을 던지고 주위에 있던 군중들에 ‘순사가 왔다가 도주하고 있다. 자네들도 따라 가라’라고 독려했다. 약 800명의 군중 가운데 약 반 정도의 군중들은 소리를 외치며 순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추적했다. 니미야, 다까지마, 우에하라는 주재소 앞 제방에서 군중들을 제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군중들의 공격에 니미야, 다까지마는 논 가운데로 밀려 넘어지면서 주재소를 향해 도주했다. 우에하라와 이재영도 뒤따라 주재소로 달아났다.

일경들을 뒤따라 온 군중들은 주재소를 둘러쌓고 돌맹이나 흙덩이(土塊) 등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공격 파괴했다. 고울봉(高蔚奉) 등 적서리 인사들은 주재소 앞 제방에서 돌을 주워 던졌다. 권주상(權周相) 등은 주재소 동쪽 밭에서 투석했다. 한운석은 주재소 앞 10간(間) 정도 떨어진 도로에서 돌을 주워 던져 사무실 앞 장지문의 유리를 깨뜨렸다. 송재만, 고수식(高壽植) 등은 주재소 남쪽 밭에서 돌을 주워 주재소로 던졌다. 북쪽에 있던 군중들은 주재소 내로 들어가 건물과 기물들을 파손하고 ‘순사를 죽이자’라고 소리쳤다. 남태우(南泰祐) 등은 몽둥이로 주재소를 부수었고 제지하는 이재영에게 ‘너는 발포를 했으니 때려 죽이겠다’라고 소리치고 몽둥이로 난타했다. 군중들의 공격으로 박한봉(朴漢鳳) 소유인 주재소 건물의 문, 장지문, 유리창 등이 파괴되고 주재소의 비품인 문패, 문등, 게시판 등이 파손되었다.

군중들의 공격으로 주재소에 갇히게 된 일경들은 위협을 느끼게 되자 주재소를 버리고 탈주하기 시작했다. 먼저 당진 순사 니미야, 다까지마가 주재소를 뛰쳐나와 구시장(舊市場)을 향해 달아났다. 이에 군중 몇 명이 추적했다. 우에하라는 주재소에 총기가 있어 주저하고 있다가 구시장 쪽으로 도주했고 이재영도 뒤따라 달아났다. 송재만 등 군중들은 순사들을 추적했다. 그리고 주재소 뜰에 있던 유기우도 김팔윤(金八允) 등이 구타하며 칼(劍)을 빼앗으려고 하자 도주했다. 주재소 뒤쪽에서 밭으로 도주하던 유기우는 약 30명의 군중들에게 추적을 당하고 붙잡혀 얼굴, 어깨, 허리 등에 손, 발, 몽둥이 등으로 공격을 받아 인사불성이 되었다.

또한 2, 30명의 군중들은 도주하는 순사 3명을 붙잡아 ‘무슨 이유로 발포했냐!’라며 따지고 옷을 찢고 주먹 등으로 구타했다. 송재만, 강태완, 남상직, 이춘응(李春應) 등은 이춘실(李春實)의 집 앞에서 우에하라와 이재영을 발견하고 ‘이 놈들이 발포했다. 때려 죽이자’라고 소리치며 군중들을 독려했다. 이에 송봉숙(宋鳳淑) 등이 몽둥이로 일경들을 구타하고 고울봉 등은 돌을 던졌다. 남태우 등은 이재영의 손을 움켜잡고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 김팔윤 등과 함께 공격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일본인 다지리(田尻足穗)가 우에하라와 이재영을 구출하기 위해 군중들을 제지했다. 그러자 군중들은 다지리도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틈을 타서 우에하라는 군중들을 헤치고 탈출해 시장 방면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천의시장 동쪽 도로에서 우에하라는 군중들에게 다시 붙잡혀 냇가에 내동댕이쳐졌고 이어 논 가운데에서 넘어진 상태에서 4 ~ 50명에게 포위당해 돌과 몽둥이로 난타를 당했다. 송재만 등의 공격을 받은 우에하라는 왼쪽 두개골의 창상 등 12곳에 상처를 입고 순사복이 찢기고 휴대한 칼을 빼앗겼다. 또한 다지리가 도주하자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추적했다. 시장 중앙에서 군중들에게 붙잡힌 다지리는 구타를 당하고 몽둥이로 머리를 맞고 가까스로 도망쳐 집으로 탈주했다.

오후 5시경 다지리는 머리 2곳에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 왔다. 당시 천의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14명이었다. 이들은 군중들의 독립만세 소리를 듣고 모두 다지리 집으로 피신해 있었다. 다지리를 뒤따라 온 2 ~ 30명의 군중들이 다지리의 집을 포위하고 창과 문을 부수었다. 송재만과 이대하가 실내로 들어가 엎드려 있는 다지리를 구타하고 부인 다지리우메(田尻ウメ)와 일본인들에게 ‘총포와 돈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라고 말하고 경대(鏡臺), 다기(茶器) 등을 부수고 실내를 수색했다. 이어 한운석, 송무술(宋戊戌) 등 4명이 실내로 들어갔다. 송재만은 방안에 걸려 있는 엽총 1정과 탄환 약간을 발견하고 이를 밖에 있던 20명의 군중들에게 전달했다. 군중들은 엽총을 어딘가로 가져 갔다가 다시 가져 와서 실내에 있는 송재만 등에게 건네 주었다. 이때 대호지면 서기 최병직(崔秉直)이 엽총을 휴대한 송재만과 한운석, 송무술 등에게 ‘어떠한 이유로 이와 같이 난폭한 행동을 하는가? 후일에 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빨리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송재만은 최병직의 태도에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이들은 엽총을 파손한 후 총을 가지고 실내를 나왔다. 곧 이어 송재만 등 3, 4명이 다시 실내로 들어가 다지리에게 ‘권총을 내놓아라!’라고 말하며 발로 걷어차고 부인을 향해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자 다지리는 부인에게 권총을 내어주라고 시켰다. 송재만은 권총을 받아 ‘후일 소요(騷擾 - 독립운동)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탈취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집을 나와 고수식(高壽植) 등 10여 명과 함께 군중 대열에 합류했다.

송재만이 권총 1정과 탄환 약간, 이대하가 엽총 1정, 김동운이 우에하라의 칼을 소지하고 군중들과 함께 대호지를 향해 귀가하던 중 장정리에 이르러 이인정이 탈취한 무기들을 숨겨두라고 명령했다. 이에 송재만은 무기를 모아 장정리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대호지면 북쪽 끝자락 적서리의 덤불 수풀 속에 숨겨 두었다.

천의경찰관주재소의 순사 1명, 순사보 2명은 만세 군중들의 위력에 제압당해 진압 해산시키지 못하고 관망만 하다가 당진경찰서 순사 2명이 출동하자, 태극기를 압수하고 군중들을 해산시키고자 했으나 오히려 군중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주재소도 파괴됐다. 일경들을 구출하려던 일본인도 공격을 받았다. 군중들을 제압하지 못한 일제는 서산경찰서와 당진경찰서에서 순사 8명을 출동시키고 홍성수비대에서 보병 5명을 증파했으며 일본인 14명을 서산 읍내로 철수시키고 주재소를 폐쇄했다.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4월 5일부터 사후 탄압 과정에서 송봉운(宋逢運)이 수비대에게 부상을 당해 4월 7일 조금리 자택에서 순국했다. 면장 이인정, 남주원(南柱元) 등이 체포되어 서산경찰서로 끌려갔고 1차로 17명이 검거 당했다. 이어 군경(軍警)에 의해 200여 명 이상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서산경찰서에서 갖은 악형을 당한 후 일부 인사들은 훈방 조치되고 서장의 즉결처분으로 ‘조선태형령’에 의해 경찰서에서 4월 22일 10명, 23일 16명, 24일 28명, 25일 14명, 26일 4명으로 5일동안 72명이 태 90의 태형을 당했다. 또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5월 13일 면소 2명, 5월 21일 기소 유예 19명, 증거 불충분 18명, 불기소 1명, 6월 5일 불기소 1명, 6월 17일 기소 중지 1명, 증거 불충분 2명, 6월 30일 기소 중지 28명, 9월 8일에 2명이 면소 처분을 받았다. 6월 30일 기소 중지 28명 가운데 6명은 추후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고 2명은 1920년 5월 19일과 7월 7일에 기소 유예됐다. 공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김도일(金道一, 5.21)과 이달준(李達俊, 6.17)이 순국했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된 인사는 54명이다. 3건의 재판 중 남성우, 민재봉, 이인정 등 34명의 경성복심법원과 이인정 등 4명의 고등법원 판결문만 현재 남아있다.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 공문서 위조 행사, 상해 등의 죄명(罪名)으로 태30 ~ 60 6명, 태90 10명, 징역 8월 8명, 징역 1년 28명, 징역 1년6월 1명, 징역5년 1명으로 형이 확정되어 고초를 겪었다. 남정혁(南廷爀)은 1921년 5월 2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월·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 이인정, 한운석, 송재만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 이인정,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

본관은 전주(全州), 세종대왕의 5자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의 후손으로 임정부정공파(臨汀副正公派)로 광평대군 15세손 택연(宅淵)의 3자 가운데 장남이다. 서산군 대호지면 사성리 510번지에서 태어나 유학을 익혀 1894년 내부 과시(科試)에 합격하고 1897 ~ 1912년까지 자인(玆仁) 현감(군수)을 역임한 후 귀향했다. 1914년 3월 1일 일제의 ‘부군통폐합(府郡統廢合)’으로 55세에 초대 대호지면장(1914. 4. 1 ~ 1919. 4.)이 되었다. 이후 정미면 산성리 98번지로 이거했다.

그는 4월 4일 대호지면 면사무소 앞에 집합한 면민 4 ~ 500명에게 ‘도로 수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모이게 한 것이다. 각자 찬성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향해 가자’라고 연설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어 면 소사 송재만(宋在萬)이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 앞세우고 애국가를 배포했다. 그의 지휘하에 군중들은 오전 11시경 천의시장에 도착하여 시장 일대와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을 활보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재소 일경들은 1,000명에 이르는 만세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진압 해산시키지 못하고 관망만 했다.

오후 3시경 이후 만세 군중들은 귀가하려고 염건피장 부근, 천의리와 승산리 경계 일대 등에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시장에서 30간(間) 정도 떨어진 곳에서 군중들과 휴식하며 귀가를 준비했다. 그런데 오후 4시경 당진에서 출동한 일경 2명과 주재소 순사, 순사보가 태극기를 탈취하려고 시도하자 군중들은 저항하며 돌을 던지고 일경들을 구타했다. 그러자 일경들은 주재소로 도주했고, 군중들은 주재소를 공격 파괴했다. 위협을 느낀 일경들이 주재소를 버리고 구시장 쪽으로 탈주하자, 군중들을 이들을 추적하여 붙잡아 구타하는 등 부상을 입혔다. 군중들을 제지하려고 달려든 일본인도 응징했다. 오후 5시경 송재만, 한운석 등이 일본인 집을 습격해 엽총, 권총, 탄환 등을 획득했다. 그는 귀가 길에 장전리에서 송재만 등이 획득한 총기, 탄환, 일경의 칼을 송재만에게 숨길 것을 명령했다. 이에 송재만은 면의 북쪽 끝자락 적서리 덤불 숲속에 숨겼다.

이인정 선생 묘소
이인정 선생 묘소

그는 4월 23일 구류되어 5월 13일 기소되었다. 9월 8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고 9월 10일 송치되었다.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여 12월 24일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으나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상고를 제기했으나 1920년 2월 7일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 한운석, 애국가를 작사하고 주재소를 공격하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홍성군 갈성면 금곡리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1915년 5월 20일 서산군 대호지면 도이리 8통 1호의 1번지로 이주했다가 대호지면 조금리 364번지로 옮겼다. 의령 남씨 문중에서 설립한 도이리의 도호의숙과 남주원이 설립한 사성리의 반곡서당(盤谷書堂)에서 강학(講學) 활동을 했다.

그는 4월 3일 밤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송재만(宋在萬)의 의뢰로 독립만세 시위 때 배포할 애국가(愛國歌)를 저작했다. 이를 송재만이 면사무소 등사판으로 약 400매를 인쇄했다.

4월 4일 아침에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면민 4 ~ 500명이 집합해 면장 이인정(李寅正)의 연설을 듣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송재만이 애국가를 면민들에게 1매씩 배포했고, 이어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이동할 때 만난 인사들에게 애국가를 배부했다. 오전 11시경 천의시장에 도착하여 만세 군중들과 함께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 일대를 활보했다. 음주를 한 후 오후 3시경부터 귀가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오후 4시경 당진경찰서 순사들이 출동해 태극기를 압수하려 하자 군중들이 일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에 솔선하여 주재소 구내에 들어가 주재소 건물에 돌을 던져 유리창 등 시설물을 공격 파손시켰다. 이어 송재만 등과 함께 6명이 다지리(田尻足穗) 집에 들어가 피신해 있던 일본인과 다지리의 부인 다지리우메에게 ‘총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라고 소리치고 실내를 수색해 엽총 1정을 찾아냈다. 이어 3 ~ 4명이 재차 실내로 들어가 다지리를 발로 걷어차며 ‘권총을 내놓아라’라고 소리치자, 다지리가 아내를 시켜 권총을 건넸다. 송재만이 권총 1정과 탄약, 이대하(李大夏)가 엽총 1정을 가지고 함께 다지리 집을 나왔다.

한운석 선생 묘소
한운석 선생 묘소

그는 이후 체포되어 5월 14일에 구류되고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9월 8일 공주지방법원의 예심 결정에 의해 공판에 회부되어 10월 24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여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으나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상고를 제기했으나 1920년 2월 7일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송재만, 태극기를 제작하고 순사와 일본인을 응징하다

본명은 요혁(堯爀), 본관은 은진(恩津), 부친은 명현(名鉉), 모친은 양씨이다. 서산군 이북면 내리에서 태어나 천안군 천안면 읍내리 131번지로 이주했다가 서산군 대호지면 조금리 364번지에서 생활했다.

그는 대호지면사무소 용인인 소사(小使)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에 찬성했다. 3월 26일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면서기 강태완(姜泰玩), 민재봉(閔載鳳) 등과 회합해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고 3월 27일 공문을 발송해 면민들을 집합시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4월 2일 면서기 강태완(姜泰玩)에게 부탁해 작성한 ‘4월 8일 이른 아침부터 각 마을은 그 담당 구역의 도로를 수선하라’는 ‘도로보수가로수정리의 건(道路補修並木整理ノ件)’공문을 인쇄했다. 4월 3일 출포리 임용규(林龍圭), 송전리 민두훈(閔斗勳), 도이리 남상현(南相鉉), 사성리 박희탁(朴熙鐸), 적서리 차영렬(車英烈), 두산리 김홍록(金烘祿), 장전리 정원우(鄭元愚), 마중리 남상익(南相益) 등 구장이나 구장대리의 집을 방문해 공문을 전달하고 주민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밤에는 한운석(韓雲錫)에게 의뢰해 작사한 ‘애국가(愛國歌)’를 약 400매 인쇄했고 또한 구한국국기 1기를 제작했다.

4월 4일 아침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약 4~500명의 면민들이 집합했다. 이인정(李寅正) 면장이 독립만세에 참가할 것을 연설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면민들도 합창했다. 이어 태극기를 김순천(金順天)에게 주어 군중 대열의 선두에 서게 하고, 군중들에게 애국가를 1매씩 배부했다. 또한 정미면 천의시장에 이르는 동안 각처에서 만난 군중들에게도 애국가를 배부했다.

오전 11시경 이인정의 지휘 하에 만세 군중들의 선두에 서서 천의시장에 도착했다. 약 1,000명에 이르는 만세 군중들은 천의시장 각처,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를 활보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음주(飮酒)를 한 후 오후 3시경 군중들은 대호지로 귀가하려고 움직였다. 군중들이 천의시장의 염건피장(鹽乾皮場) 부근, 천의리와 승산리 경계 지역 일대에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후 4시경 당진경찰서 순사 2명이 출동해 일경 4명이 염건피장 부근의 군중들이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강탈하려 했다. 이에 군중들이 돌을 던지는 등 저항하자, 일경들은 주재소로 도주했다. 군중들이 돌, 흙덩이, 몽둥이 등으로 주재소를 공격 파괴하자, 일경들은 주재소를 버리고 탈주하기 시작했다.

송재만 선생 묘소
송재만 선생 묘소

강태완, 남상직(南相直) 등과 함께 탈주하는 우에하라(上原尙定) 순사, 이재영(李在英) 순사보를 이춘실(李春實)의 집 앞에서 붙잡고 ‘이 놈들이 발포한 자이다. 때려 죽이자!, 죽이자!’라고 소리치고 순사를 구타했다. 이를 본 일본인 다지리(田尻足穗)가 순사들을 구출하려 군중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이에 군중들이 다지리도 공격하자, 다지리는 논 가운데로 도망쳤다. 군중들은 추적해 시장에서 다지리를 붙잡아 구타하고 몽둥이로 머리를 가격했다. 다지리는 오후 5시경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한운석, 송무술(宋戊戌) 등과 함께 6명이 다지리의 집에 들어가 피신해 있던 일본인과 다지리의 부인 다지리우메에게 ‘총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라고 소리치고 실내를 수색해 엽총 1정을 찾아냈다. 이어 3 ~ 4명이 재차 실내로 들어가 다지리를 걷어차며 ‘권총을 내놓아라’라고 소리치자, 다지리가 아내를 시켜 권총을 건넸다. ‘후일 소요(騷擾 - 독립운동)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탈취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권총 1정과 탄약을 가지고 엽총 1정을 가진 이대하(李大夏)와 함께 집을 나왔다. 그리고 귀가 길 장정리에서 이인정의 명령을 받아 무기류를 면의 북쪽 끝자락 적서리 덤불 숲에 숨겼다.

그는 일경에게 체포되지 않아 6월 30일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 중지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이후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 공문서 위조 행사, 강도, 상해, 가택 침입 등 7개 죄목으로 9월 8일 공주지방법원의 예심 결정으로 공판에 회부되어 10월 24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으나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동일 형량을 선고받았으며 불복해 고등법원에 상고를 제기했으나 1920년 2월 7일 상고 기각으로 징역 5년형이 확정됐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던 중 약 3년 후 가출옥으로 석방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독립만세운동의 의미를 새기다

첫째, 면장이 지휘하고 면직원들의 주도하에 전개했다.

면서기 민재봉, 김동원, 강태완과 면서기 송재만 등이 추진 세력으로 실질적인 독립만세를 계획하고 준비했다. 면장 이인정의 명의로 면민들을 집합시키는 공문을 작성해 구장들에게 전달했으며 애국가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면장이 직접 참여를 연설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지휘하고 면직원들은 면민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호지면에서 정미면까지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군중들은 천의시장,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을 활보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경이 태극기를 압수하려 하자 군중들은 일경을 공격하고 주재소를 파괴했다. 군중을 제지하는 일본인도 응징하고 그의 무기를 탈취했다. 독립만세와 일제에 대한 공격과 응징을 송재만 등 면직원들이 면민들을 독려하며 주도적으로 실행했다.

둘째, 국장을 참례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지역 유생들이 직접 참여했다.

고종의 국장을 참례한 인사들인 남주원, 남상락, 남상돈, 남계창, 남상직, 이두하, 이대하 등은 도호의숙에서 학업을 함께한 인사들로 독립만세운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또한 이춘응, 남상은(南相殷), 남상집(南相集) 등 지역 유생들도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공격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서당 선생인 한운석은 애국가를 작사하고 참여해 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셋째, 전통적 동족마을에서 문중가문들이 적극 참가했다.

부안 김씨의 두산리 24명과 장정리 5명, 전주 이씨의 사성리 21명, 의령 남씨의 도이리 13명과 사성리 7명, 제주 고씨의 적서리 8명 등 집성촌 문중가문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또한 면내 가문으로 밀양 박씨 12명, 경주 김씨 10명, 여산 송씨 6명, 경주 최씨 5명이 참가했다. 그리고 경주 김씨, 함평 정씨, 연안 차씨, 은진 송씨, 나주 임씨, 남양 홍씨, 해주 최씨 등의 인사들이 독립만세를 외쳐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이인정과 이두하의 부자(父子), 남상돈과 남상락의 형제, 이두하와 이대하의 사촌간과 같은 친인척들이 함께 참여해 독립운동의 결속력이 매우 강했다. 이는 아침부터 오후 5시경까지의 장시간 동안에 수 십리 길을 왕복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순사 및 일본인을 공격하는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넷째, 면내 모든 마을에서 참가했다.

대호지면내에는 행정마을로 9개 마을이 있었다. 면장의 공문에 따른 영향이기도 하지만 면내 각 마을 주민들은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지인 대호지면사무소에 집합하거나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만세 행진을 하던 도중에 장정리 등에서 합류했다. 그 결과 일제의 탄압을 받은 인사로 사성리 42명, 두산리 37명, 도이리 36명, 송전리 31명, 마중리 18명, 장정리 13명, 조금리 11명, 적서리 9명, 출포리 2명 등 199명의 인적 사항이 현재 확인된다.

다섯째, 면계(面界)를 이동한 원정 독립만세운동이었다.

3·1독립운동은 대부분 전개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특히 3월 하순 신분, 연령, 종교,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의 여하를 불문하고 누구나 주도해 지역민들과 독립만세를 외치는 3·1독립운동이 일반화되면서 주요 전개지는 마을이었다. 전국에 원정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사례가 여러 곳이 있지만, 관할 치안기관(경찰, 헌병)이 있는 인접 면의 시장 개시일에 시장으로 이동해 시장과 주재소, 면사무소 등 일제 기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치안 기관을 공격 파괴하는 원정 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면 – 정미면 독립만세운동이 대표적이다. 원정 독립만세운동의 거리는 약 7km 정도이다. 특히 면의 북단인 적서리 주민들은 7km 넘게 걸어 대호지면사무소에 도착해 다시 정미면 천의시장까지 가는 약 35리를 걸어가서 이동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왕복 70리 길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여섯째, 단일 독립만세운동으로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독립만세운동 후 군경의 탄압에 1명이 순국하고 처음에 17명이 체포되었으나 이후 200명 이상이 서산경찰서로 끌려갔다. 경찰서에서 악형을 당하고 훈방된 인사들도 있었지만 4월 22일 ~ 26일의 5일동안 72명이 태 90을 당했고, 공주지방 검사국에서 면소 방면 4명과 기소유예 19명, 기소 중지 23명, 증거 불충분 20명, 기타 2명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며, 공주형무소에서 2명이 순국을 했으며, 법원 재판으로 6명이 태30 ~ 60, 10명이 태 90, 8명이 징역 8월, 28명이 징역 1년, 1명이 징역 1년6월, 1명이 징역 5년의 고초를 겪었다. 이와 같이 1개 면민들이 1회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순국 3명, 태형 88명, 불기소 65명, 면소 4명, 징역 39명 등 199명이 탄압을 받은 독립운동은 전국에서도 드물다.

이에 2020년까지 정부는 대통령표창 83명, 애족장 38명, 애국장 3명으로 124명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정부는 세분의 공적을 기리어 이인정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송재만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한운석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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