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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쾌복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1941년 대구사범학교에서 항일비밀결사 조직 다혁당 결성(당수)

1941년 7월 체포, 1943년 징역 2년 6개월형 선고받고 광복 이후 출옥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권쾌복 / 유흥수 / 배학보

권쾌복 , 1921 ~2009 , 독립장 (1963) 유흥수 , 1921 ~2016 , 독립장 (1963) 배학보 , 1920 ~1992 , 애국장 (1991)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지배 정책이 극에 달하던 1937년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선생들은 학교에 만연한 민족 차별을 목격하고, 민족의식의 함양과 독립운동에 필요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비밀결사 ‘백의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데 앞장섰다. 1940년 유흥수 선생은 비밀결사 ‘문예부’에 참여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의지를 담은 기관 잡지 『학생』의 발간에 앞장섰다.

1941년 선생들은 일제의 패망을 전망하여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실력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비밀결사 ‘다혁당’을 조직하고 활동을 이끌었다.

1.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다

권쾌복 선생은 1921년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지금의 구미시) 시미동 217번지에서 아버지 권상근(權相瑾)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밀양으로 이주하여 성장했으며, 1937년에 밀양공립보통학교(密陽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유흥수 선생은 1921년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고산리 137번지에서 아버지 유석규(柳錫圭)와 어머니 평강 채씨(平康 蔡氏)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7년에 운산면의 여미공립보통학교(余美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배학보 선생은 1920년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동암리 596번지에서 아버지 배계흠(裵桂欽)과 어머니 순천 김씨(順川 金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937년에 선남공립보통학교(船南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세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운 가정 형편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모습에 매료되어 1937년 4월에 대구관립사범학교(大邱官立師範學校) 심상과(尋常科) 9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대구사범학교(지금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는 1906년 애국계몽운동이 벌어지던 시기에 설립된 사립대구사범학교로 출발하였다. 1923년 식민지교육의 핵심이 되는 사범학교의 교육을 통제하려는 일제의 교육 정책에 따라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慶尙北道公立師範學校)로 전환되었다. 1929년에 정식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사범학교의 교육을 강화하려는 조선총독부의 학교관제 개정에 따라 대구관립사범학교(大邱官立師範學校)로 전환되었다.

세 선생이 입학할 무렵인 1930년대 후반 대구사범학교에는 전국에서 우수한 능력을 가진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입학경쟁률이 평균 8~10대 1이 될 정도로 치열했으며,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사범학교는 졸업 후 보통학교 제2종 훈도(訓導, 지금의 초등학교 교사)라는 장래가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 학교에 비해 특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의 학비는 전액 면제되었으며, 성적 상위 30퍼센트에 해당하는 학생에게는 생활비 명목의 관비(官費)까지 지급되었다. 조선인 학생이 중심이 된 심상과는 입학 정원이 약 100명으로 수업연한이 5년이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은 약 9대 1이었다.

세 선생이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1937년은 일제 침략전쟁의 서막이 오른 시기였다. 1929년 경제대공황으로 빚어진 경제적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한 일제는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동시에 군사력을 키우면서 군국주의를 강화하고 일왕(日王) 중심의 전체주의 국가로 나아갔다. 1931년 만주 침략에 이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1937년 7월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켰다. 이듬해에 일제는 총력전을 펼치기 위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원활하게 동원할 국민총동원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조선으로 확대하였다.

일제가 침략전쟁을 벌이는 동안 조선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공급하는 병참기지였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은 물론 조금이라도 식민지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될 만한 인사들이 탄압을 받았으며, 일반인들도 이전보다 더 철저한 감시와 통제로 숨죽여 지내야 했다. 동시에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때 일제가 내세운 허구적인 동원 이데올로기가 일제와 조선이 한 몸이자 한 형제라는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이었다. 내선일체는 민족 차별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을 없애고 전쟁 동원의 저항을 최대한 줄여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기만에 찬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가 추진한 황국신민화 정책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분야가 교육이었다. 의식 형성기에 있는 학생들에게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범학교는 자라나는 아동을 ‘황국신민’으로 양성할 미래 훈도를 교육하는 기관이었기에 일제의 간섭과 통제는 더 극심하였다.

2. 항일운동에 뛰어들다

일제가 일본과 유사한 내용으로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이 없는 교육을 주창했지만,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1938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수업연한 2년의 연습과(演習科)가 새로 설치되었다. 연습과는 중학교 5학년 졸업생이 입학할 수 있는 제1종 훈도양성제도였으며, 대부분 대학 진학이나 취업을 하지 못한 일본인 학생들이 입학하였다. 일본인 교장과 교유(敎諭)가 주도하는 학교 당국은 연습과가 설치된 후 조선인 학생 중심의 심상과를 하급(下級)으로 취급하며 차별하거나 무시하였다. 이전부터 민족 차별에 불만이 많던 조선인 학생들의 감정은 더욱 나빠졌으며,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마찰도 더 빈번하게 일어났다.

민족 차별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1939년 ‘왜관사건’으로 표출되었다. 사범학교 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군수 물자 생산과 수송을 위한 노동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1939년 대구사범학교는 경부선 철로의 복선화 공사 중에서 왜관철교에서 약목까지 구간의 작업을 할당받았다. 학교 당국은 여름방학 동안 전·후기 두 차례 학생을 동원하여 철도 둑을 쌓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공사에 7월 하순에 먼저 심상과 4, 5학년과 연습과 1, 2학년이 동원되었다. 작업 도중 일본인 학생의 부당한 행위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학교 당국이 일본인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으로 처리하였다.

그 동안 학교 당국의 민족 차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은 대책을 논의하였다. 학생들은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의 작업량과 충돌 처리의 불공평을 성토하며, 평소에 민족 차별을 서슴지 않고 학생들을 괴롭힌 일본인 교사를 응징하기로 결의하였다. 학생들은 숙소에 묵고 있던 일본인 교사를 찾아가 민족 차별과 부당한 처리를 규탄하며 집단으로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7명의 학생이 퇴학당하고 11명이 정학처분을 받았다.

왜관사건은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 등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쳐 항일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후기로 노동에 동원된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은 왜관심상소학교 앞 낙동강 백사장에 동기생 20여 명과 모여 왜관사건의 진상을 공유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학생들의 의견은 즉각적인 실력 행사를 주장하는 강경론과 신중한 대응을 주장하는 온건론으로 나뉘어졌다. 세 선생은 학생들과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 행동 통일을 도모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그 자리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세 선생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는 ‘백의단(白衣團)’이었다. 민족의 상징이자 순결과 밝음과 절개를 상징하는 백의(白衣)에 착안한 명칭이었다. 권쾌복 선생이 단장을, 배학보 선생이 부단장을 맡는 등 조직 체계가 있었다는 술회(述懷)가 있으나, 참여했던 학생들의 기억이 달라 명확하지 않다. 조직 체계 구성 여부와 관계없이 두 선생이 주도했다는 점은 대체로 일치한다. 세 선생은 백의단을 결성한 후 학생들과 조선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 잡지 등을 읽고, 학교 당국과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해 대구의 앞산, 팔공산, 동촌유원지 등지에서 모임을 가지며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백의단의 활동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비밀결사에 대한 치밀한 준비와 명확한 인식 없이 왜관사건의 실상을 알고 난 후 울분에 찬 나머지 즉흥적으로 조직을 결성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대구사범학교에는 입학 동기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윤독회(輪讀會)’ 활동이 있었다. 윤독회는 일종의 독서 토론 모임으로 학생들이 역사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을 읽은 후 토론했으며, 나아가 국내외 정세를 논의하고 민족의식을 키워가는 기회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6년에 입학한 8기생인 4학년 박효준(朴孝濬), 강두안(姜斗安), 이태길(李泰吉) 등은 독서 모임을 통해 나온 성과를 모아 1940년 1월에 『반딧불』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였다. 이 책자에 실린 내용은 정지용과 이광수 같은 기성 작가의 작품이 중심이었으나, 은유적 표현으로 민족 자각을 촉구하고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의 문예작품도 일부 담았다. 『반딧불』은 200부 정도 발간되어 8기생 대다수에게 배포되었으며, 9기생 일부에게도 배부되었다.

3. 항일비밀결사 ‘문예부’를 결성하다

1939년 9월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이 확전되면서 세계정세가 급변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에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여 어려움에 빠졌으며, 중국을 지원하던 미국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을 내세우며 국면 전환을 꾀하였다.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지배하던 식민지를 자국의 기반으로 편입시킬 구상을 세우고,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三國同盟)’을 맺었다. 이 동맹은 일제가 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 확립의 주도권을 가지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새로운 질서 확립의 주도권을 갖는 것에 서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동맹 국가 중에 한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중일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국가로부터 공격받을 경우에는 서로가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날로 강화되는 학교 당국과 일제 관헌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항일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1940년 11월 23일 이태길의 하숙방에서 유흥수 선생은 독서 모임의 활동을 주도하던 박효준, 이태길, 강두안, 박찬웅(朴贊雄), 동기생인 문홍의(文洪義), 이동우(李東雨) 등과 전쟁 상황을 포함한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학생들은 세계정세를 볼 때 곧 일제가 패망하므로 다가올 독립을 위해 보다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일치하였다. 박효준이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실력을 양성하며, 독립운동을 벌여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의 결성을 제의하였다. 유흥수 선생을 포함한 참석한 학생들이 그 제안에 모두 동의하였다.

유흥수 선생과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문예 활동을 표방한다는 의미로 비밀결사의 이름을 ‘문예부(文藝部)’라고 결정하였다. 박효준이 조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으며, 별도의 조직 체계를 두지 않았다. 다만 운동방침으로써 1)부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2)부원은 매주 토요일 각자가 쓴 작품을 가지고 참석하여 각기 이것을 감상 비평하고 서로 의견 교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유흥수 선생은 같은 입학 동기인 9기생을 중심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1940년 11월 하순부터 문홍의와 함께 조강제(趙崗濟), 박호준(朴祜雋), 이주호(李柱鎬)를 차례로 만나 문예부의 결성 목적을 설명한 후 가입을 권유하였다. 세 학생은 비밀결사의 결성 취지에 동의하고 가입하였다. 1941년 1월 하순까지 문예부 부원은 10명에 이르렀다.

문예부의 주된 활동은 부원들이 지은 문예작품을 서로 읽고 비평하는 것이었다. 유흥수 선생을 포함한 부원들은 하숙방을 중심으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거의 매주 토요일에 모임을 가졌다. 부원들은 회합에서 각자가 지은 시, 수필, 단편소설 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비평했으며,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였다. 문예부는 문학 작품을 감상 비평하는 활동에 그치지 않았다. 부원들은 국외 정세를 포함한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부원들은 중일전쟁과 세계대전의 전황을 볼 때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될 것이라는 의견에 일치를 보고 독립에 대비할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41년 2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4. 민족의식과 항일의지가 담긴 책자를 발간하다

문예부는 부원들의 내부 활동에 그치지 않고, 그 성과물을 잡지 형태의 책자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성과물이 기관 잡지 성격의 『학생(學生)』이었다. 유흥수 선생이 이 잡지의 발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1년 3월 초에 유흥수 선생은 문홍의, 이동우, 김근배(金根培)와 함께 부원들의 원고를 수집하여 작품 일부를 발췌·편집하였다. 선생은 부원들과 밤을 새워 가며 원고를 정리하고 등사 원지에 철필로 써서 등사를 한 후 제본하였다. 『학생』은 부원들이 검거될 당시에 모두 압수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예심종결서」에 박효준이 작성한 발간 취지가 일부 담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灼)함과 여(如)한 정열과 고(固)하고 관(貫)한 정신의 응결(凝結)은 수(遂)히 우리의 전도에 무언가 희망을 생겨나게 했다. 이 정열과 희망은 민족을 위한 자각과 예술 창조에까지 향상시켜야 하겠다는 마음을 억제치 못한 결과 우리 학교의 전통과 민족 발전을 위하여 우리 문예부는 고고(呱呱)의 소리를 울리면서 단연 궐기한 것이다

『학생』의 발간 취지에는 문예부 부원들의 정세 인식과 실천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학생들은 침략전쟁 초기에는 일제가 승승장구하는 전세였지만, 점차 일제 패망과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인식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실력을 쌓아 나가자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과 실천 의지는 이 무렵 조선의 많은 지식인과 명망가들이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던 활동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잡지 『학생』에는 문예부원들이 한글로 쓴 시, 소설, 수필 등의 작품이 주로 실렸으며, 『반딧불』처럼 시국을 풍자하여 창작한 내용도 일부 포함되었다. 한글로 된 문학 창작과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탐구는 민족의 자각과 자긍심을 회복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이 잡지는 문예부원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을 가진 것으로 파악한 10여 명의 학생에게도 배부했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동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문예부는 1941년 2월에 활동을 주도하던 5학년의 졸업이 다가오면서 조직의 존속 여부를 논의하였다. 논의 결과 졸업생은 훈도로 재직하면서 보통학교 학생과 학부형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벌이고, 재학생들은 부원을 확대하면서 기존의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문예부는 9기생이 주축이 되었고, 유흥수 선생은 그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문예부는 결정에 따라 박효준, 이태길 등이 졸업한 후에도 1941년 6월 말까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유흥수 선생은 박효준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매월 한 번 씩 활동 상황을 보고하는 등 문예부 활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학생』 2호 발간을 위해 방학 중에 원고를 수집하여 2학기 개강과 동시에 발간할 계획을 세웠다. 유흥수 선생은 이동우, 문홍의, 박호준, 이주호, 김근배와 잡지 발간을 준비하였다. 졸업생들은 훈도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일제 패망과 조선 독립을 교육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주었다. 일반인에게도 조선 역사와 위인들을 설명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한편 문예부가 활동하던 무렵에 또 하나의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비밀결사는 1941년 1월에 5학년 임병찬(林炳讚)의 주도로 장세파(張世播), 안진강(安津江)등이 조직했으며, 문예부에서 활동하던 이태길과 강두안도 참여하였다. 연구회는 다가올 독립에 대비할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회원은 8기생인 5학년 학생이었다. 학생들은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독립을 위해 협력 매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연구회의 운동방침은 1)회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2)회원은 매월 1일 각자 분담 부문의 연구사항을 발표한다, 3)각 부문의 책임자는 해당 부문의 하급생을 지도 교양하고 동지의 획득에 노력한다고 결정하고 활동하였다. 이태길과 강두안 두 명의 학생이 문예부와 연구회에서 동시에 활동했지만, 이들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서로의 조직 실체를 모르는 가운데 활동하였다.

5. 항일비밀결사 ‘다혁당’을 결성하다

1941년 2월 연구회는 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의 존속 문제에 직면하였다. 모두 5학년 학생으로 구성되었기에 재학생을 확보하지 않으면 존속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유흥수 선생은 연구회의 임병찬과 장세파로부터 연구회의 확대 개편을 부탁받았다. 그 연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예부를 주도하던 박효준이 같은 8기생인 두 사람으로부터 연구회 존속 문제의 얘기를 듣고 유흥수 선생을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유흥수 선생은 동기생으로 문예부에서 함께 활동하던 문홍의, 이동우, 이주호, 박호준, 조강제 등과 이 문제를 협의한 결과 새로운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결사를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1941년 2월 중순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 등을 만나 그 동안의 상황을 설명하고 새로운 비밀결사의 결성을 제안하였다.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동기생으로 백의단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를 결성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그 결과 동기생인 4학년 이도혁(李道赫), 문덕길(文德吉), 서진구(徐鎭九) 등 10여 명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1941년 2월 15일 저녁에 유흥수와 이주호 선생의 하숙집에 유흥수, 권쾌복, 배학보, 이주호, 조강제, 이홍빈, 문홍의, 박호준, 이동우, 이도혁, 문덕길, 서진구, 최영백(崔榮百), 김성권(金聖權), 최태석(崔泰碩), 이종악(李鍾岳), 이홍빈(李洪彬), 김효식(金孝植) 17명이 모였다. 문홍의가 조선인의 자각으로 일치단결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문예·예술·운동 분야의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의 조직을 제안하였다. 학생들이 모두 동의하여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비밀결사의 이름은 ‘다혁당(茶革黨)’으로 결정하였다. 영웅은 갈색 또는 흙색인 ‘다색(茶色)’을 좋아하며, 혁은 ‘혁명’을 의미하였다. 다혁당은 조직 체계에서 당수와 부당수를 두고, 총무, 문예, 예술, 운동부 4개 부서를 두었다. 특히 문예부 산하에 문예창작부와 연구부를 두었는데, 이전의 문예부와 연구회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운동부는 당원의 체력 단련은 물론 교내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교류가 용이했기 때문에 설치되었다. 다혁당의 조직 체계와 당원 구성은 아래와 같다.

다혁당의 조직 체계와 당원 구성
다혁당의 조직 체계와 당원 구성

다혁당은 학생 각자의 관심과 능력에 맞추어 조직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는 독립 및 이후의 국가 건설을 위해 전문 분야별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권쾌복 선생은 백의단에서 보여준 능력을 인정받아 당수를 맡았으며, 공회당 음악회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성악에 재능이 있어 음악부 책임과 함께 예술부장을 겸임하였다. 배학보 선생은 부당수를 맡고, 운동에 관심이 많아 운동부와 연구부에 배치되었다.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문예부 산하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았다. 부원으로는 문예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이동우와 박호준이 배치되었다. 또한 문예부에서 활동했던 이동우가 문예부장을 맡았으며, 문홍의, 이주호, 박호준은 문예부 산하 연구부에서 활동하였다.

다혁당의 규약은 1)당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2)당원은 매월 1회 회합하고 당수, 부당수 및 각 부장은 매주 1회 이상 회합한다, 3)각 부장은 책임지고 하급생을 지도 양성한다, 4)당원은 당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5)정당원은 결당식에 참가한 자에 한하며, 새로운 가입을 인정하지 말 것 이었다. 다혁당이 새로운 당원의 가입을 허용하지 않은 이유는 학교 당국과 일제 경찰의 감시가 삼엄한 상황에서 비밀결사의 존재가 발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6. 독립과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역량을 키워가다

다혁당은 문예부와 연구회의 활동을 계승하여 활동하였다. 학생들은 머지않아 일제가 패망하고 독립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각 분야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개발하여 최고 권위자가 되어 국가 건설에 기여하고자 했다. 졸업 후에는 훈도로서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유능한 학생을 선발하여 수재교육을 시켜 독립의 역량을 확대 강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학생들이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거나 수재교육에 역점을 둔 이유는 학생 스스로가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진학한 수재이자 엘리트라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립을 쟁취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영웅’, ‘수재’, ‘엘리트’가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학생들은 한글로 된 역사와 문화관련 서적을 의무적으로 윤독한 후 독후감을 발표했으며, 국내외 정세에 대해 서로 토론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또한 민족의식과 항일의지가 담긴 당원들의 작품을 모아 기관지 성격의 『학생』의 발간을 준비해 나갔다. 기관지 발간은 문예부에서 잡지 발간을 주도했던 유흥수 선생과 문홍의,이동우가 주도했으며, 당원의 작품을 감상 비평하고 엄선하여 『학생』 발간을 준비하였다.

학생들은 독립 후 국가 건설 과정에서 군사력을 키우는 예비 단계이자, 실력양성의 일환으로써 군사 훈련도 가졌다. 당원들은 공휴일이나 일요일에 대구 앞산 등지에서 학교에서 배운 교련 내용을 바탕으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또한 후배 학생들이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민족의식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도하였다. 아울러 축구부를 통해 다른 학교 선수들을 포섭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운동을 벌이려는 활동을 벌였다.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간의 차별 철폐에 대한 대응 방안 등도 논의하면서 일제가 주창한 내선일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활동은 1941년 5월까지 지속되었다.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홍성에서 훈도로 활동하던 정현(鄭鉉)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내용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일제 경찰이 정현의 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윤독회가 발간한 『반딧불』이 발각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일제 경찰의 수사가 확대되었다. 문예부에서 활동한 후 충남 논산에서 훈도로 재직하며 정현과 서신 교류를 하던 박찬웅의 집도 수색 당했다. 이 과정에서 문예부의 활동보고서가 발각되어 대구와 대전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다혁당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유흥수 선생은 1941년 8월 초에 고향인 충남 서산에서 체포되었다. 권쾌복 선생은 8월 말 개학을 앞두고 포항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 체포되었다. 다른 학생들도 대부분 연고지에서 체포되거나 수업 중에 체포되었으며, 졸업생들은 경북, 충남, 함북 등 근무하던 학교에서 검거되었다. 그해 11월까지 대구사범학교 교유 김영기(金永驥)를 포함한 조선인 교직원 및 학부형, 동문 등 모두 30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 경찰은 전시체제 하에서 큰 규모의 항일학생조직이 활동한 사실에 놀라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고, 민심의 동요와 사건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권쾌복, 배학보, 유흥수 선생을 포함한 관련자들은 사건 발각이 충남 홍성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충남 대전, 공주, 강경 등지에 분산 구금되어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1941년 12월에 35명이 예심에 회부되었으며, 이것은 이 시기 비밀결사사건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은 지 1년 3개월여가 지난 1943년 2월 8일에 예심이 종결되었다. 법에 규정된 예심의 구금 기간은 2개월이었지만 갱신 요청만으로 무한정 연장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강압적인 조사와 갖은 고문이 자행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예심에서 유흥수, 권쾌복, 배학보 선생 등 34명이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명이 무혐의로 면소(免訴) 처분을 받았다. 2년여 동안 일제 경찰과 검사, 예심 판사의 조사 과정에서 자행된 잔혹한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연구회에서 활동했던 박제민(朴濟敏)과 문예부에서 활동했던 박찬웅은 미결 상태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공판은 예심이 종결된 지 9개월 만인 1943년 11월에 열렸다. 11월 30일에 열린 1심 언도 공판에서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와 다혁당 활동을 벌인 ‘연속범(連續犯)’이자, 『학생』 발간에 앞장선 이유로 치안유지법과 형법 외에 출판법이 추가되어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권쾌복 선생은 다혁당 당수였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언도받았으며, 배학보 선생은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았다. 세 선생 외에 29명이 징역 5년에서 징역 2년 6월까지를 언도받았다. 권쾌복 선생은 1심에 불복하여 상고했으나 1944년 3월 23일에 기각되어 원심이 확정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문예부와 연구회의 강두안, 다혁당의 서진구, 연구회의 장세파는 잔혹한 고문과 그 후유증, 형무소의 형편없는 환경으로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린 끝에 옥중 순국하였다.

권쾌복, 유흥수, 배학보 선생이 주도하며 활동했던 항일비밀결사는 대구사범학교의 뿌리 깊은 항일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학교 외부세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자생적인 조직이었으며, 자연발생적이거나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비밀결사를 계승, 발전시켜가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항일운동을 벌였다.

항일비밀결사는 뚜렷하고 가시적인 활동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역사적 의의가 컸다. 먼저 당시 지식인 중심의 조선인 명망가들이 일제가 선전하는 침략전쟁에 고무되어 독립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길로 가던 상황과는 달리 세 선생을 포함한 학생들은 조선 독립을 확신하고 활동했다는 점이었다. 또한 이 시기 다른 사범학교 학생들이 식민지 지배 체제에 순응하여 조직화된 항일운동이 전무한 상황에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졸업 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항일운동을 벌인 점이었다. 아울러 비밀결사 활동을 벌였던 학생들이 학생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졸업 후 훈도로 진출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운동을 전개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추모비(경북대학교)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추모비(경북대학교)

권쾌복 선생은 독립 후 언론계에 몸담고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유흥수 선생은 공직과 경제계에서 활동하고 광복회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배학보 선생은 오랫동안 교육계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으며,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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