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독립운동가
액자프레임
독립유공자 사진
2021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종호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주요공적

1912년 이상설, 김립, 김도여와 함께 권업회 설립

권업회 운영자금 및 신문발간 비용 제공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이종호 / 김학만 / 최봉준

이종호 , 1887 ~1932 , 독립장 (1962) 김학만 , 미상 ~미상 , 애국장 (2012) 최봉준 , 1862 ~1917 , 독립장 (1996)

1. 연해주 한인사회의 중심 권업회

1) 연해주 항일운동의 연원

러시아 원동 연해주는 일제강점기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조선 후기 기근과 봉건정부의 폭압을 피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만든 연해주 한인사회는 을사늑약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받아들여 해외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시작된 연해주의 반일운동은 1908년 조직된 연해주의병의 국내진공작전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최재형을 중심으로 한 초기 이주민들과 1906년 연해주로 망명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중심으로 한 정치망명자들은 서로 협력하여 1908년 5월경 남부 우수리주 연추(煙秋)에서 동의회를 결성하고 연해주의병을 편성하였다. 연해주의병의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은 1908년 7월에 시작되었다. 전제익, 안중근, 엄인섭 등이 인솔하는 동의회 소속 의병 2,3백명이 두만강을 건너 경흥군 홍의동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어 수백 명의 의병이 수차에 걸쳐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함경북도로 진공하였다. 초기 선제공격을 통해 홍의동전투와 신아산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회령까지 진격한 연해주의병은 결국 회령 부근 영산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연해주로 귀환하였다.

국내진공작전의 실패 이후 연해주의병 지도자들은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단일군단으로 통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독자적 의병활동이 전력의 분산을 가져와 효과적인 항전을 벌일 수 없었다는 점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10년 6월 항일 의병전쟁의 상징적 인물인 유인석이 중심이 되고 홍범도, 이진룡 등 의병장 출신들과 이갑 등 계몽운동 계열 인사들이 합일하여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편성되었다. 하지만 의군이 편성되어 활동을 미처 개시하기도 전인 8월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대한제국 멸망의 비보가 알려지자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연해주의 한인 700여 명은 개척리의 한인학교에서 대회를 열고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는 병탄 반대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합병’의 원천무효와 한민족의 자주권과 독립결의를 주창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헤이그특사로 당시 연해주로 돌아와 있던 이상설이 기초한 선언서 말미에는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 거주하던 한인 8,624명의 서명록이 첨부되었다. 이러한 성명회의 활동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의 요구에 굴복한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성명회는 1910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2) 권업회의 조직과 활동

성명회 해체 이후 연해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자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보다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방략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삼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러시아지역 한인의 자치결사인 권업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911년 6월 1일 이종호, 김익용, 강택희, 엄인섭 등이 발기하여 그해 12월 정식 창립된 권업회는 표면상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경제주의 단체를 표방하였다. 즉, 권업회(勸業會)라는 조직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한인의 실업을 권장하고, 직업과 일터를 알선하며, 생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저축을 장려하고, 상애상신(相愛相信)의 친목을 도모하여 문명의 행동을 도모하자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목표는 ‘조국독립’이라는 권업회의 최고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표면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권업회 추정지(블라디보스톡)ⓒ독립기념관
권업회 추정지(블라디보스톡)ⓒ독립기념관

권업회는 애초부터 가장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항일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한 기관으로 조직되었다. 다만 그 명칭을 권업회라 한 것은 일제의 의심을 피하고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계봉우는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권업신문󰡕에 게재한 「아령실기(俄領實記)」에서 “회명을 권업이라 함은 왜구의 교섭상 방해를 피하기 위함이요 실제 내용은 광복사업의 대기관으로 된 것이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또한 1912년 권업회 발회식에서 최재형은 “우리 동포는 한갓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나 자활의 길이 서지 않으면 하등의 공을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각자 일하여 재력을 만들고 상당한 준비를 하여 일조 기회가 도래하면 일거에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라고 역설하였다. 결국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여 끝내는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권업회를 조직한 인물들의 면면에서도 알 수 있다. 권업회 창립은 러시아 연해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중요 항일민족운동자가 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발기회의 임원으로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큰 어른인 최재형이 회장에, 저명한 의병대장 홍범도가 부회장에 각각 선임되었다. 12월 19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임원은 의장 이상설, 부의장 이종호, 총무 김익용, 한형권, 재무 김기룡, 서기 이민복, 의원 이범석, 홍병환, 김만송 등이었다. 이외에 특별임원으로 수총재에 유인석, 총재에 이범윤, 김학만, 최재형, 최봉준 등이 선출되었다. 주요 부서의 장에는 교육부장 정재관, 실업부장 최만학, 경용부장 조창호, 종교부장 황공도, 선전부장 신채호, 검사부장 윤일병, 통신부장 김치보, 응접부장 김병학, 기록부장 이남기, 사찰부장 홍범도, 구제부장 고상준 등이 임명되었다. 이외에도 연해주는 물론 간도 지방에서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초청되었고, 이들이 다시 각 지방에 회원 권유위원으로 파견되어 급속한 회세 확장이 이루어졌다.

권업회가 조직될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서북파(평안도파), 북도파(함경도파), 기호파 등으로 불리는 파벌을 이루고 있었다. 이상설, 이범윤, 김학만, 유인석 등은 기호파였으며, 이강, 정재관, 차석보 등은 서북파, 그리고 이종호, 이동휘, 최재형, 김병학, 김익용, 최봉준 등은 북도파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위 권업회 임원 명단에서 알 수 있듯이 ‘조국독립’이라는 역사적 사명 앞에 계파를 초월해 단합을 이루어 단일 결사인 권업회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또한 프리아무르주 총독 곤닷치를 비롯하여 연해주 군무지사 마나킨 장군, 블라디보스톡 동양연구소 포드스타빈 교수 등 연해주의 주요한 러시아인 인사들을 명예회원으로 가담시켜 러시아 당국의 절대적인 지지도 이끌어냈다.

권업회는 중앙조직 외에 지방지회도 두었다. 지회는 20명이 참여하면 개설할 수 있었으며, 매년 2회의 전체회의를 열고, 2차례 회비를 납부해야 했다. 니콜라예프스크(니항), 하바롭스크, 이만, 우수리스크, 수청, 연추 등 10여 곳에 지회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창립 당시 300명으로 시작된 권업회의 회원은 1914년 1월에는 7천여 명 그리고 7월에는 만여 명에 이르렀다.

3) 『권업신문』과 한민학교

권업회의 활동 중에 주목을 끄는 것은 기관지 『권업신문』의 발행이다. 권업회 산하의 신문부에 의해 1912년 4월 22일에 창간된 『권업신문』은 『해조신문』(1908), 『대동공보』(1909), 『대양보』(1911)를 잇는 러시아 지역 한인의 대표적 언론이었다. 『권업신문』의 발행 목적은 권업회 사업의 홍보를 넘어서서 항일 민족 언론의 약진을 기함에 있었다. 당시 연해주에 망명해 있던 신채호를 비롯하여 이상설, 김하구 등이 차례로 주필을 맡았던 『권업신문』은 권업회 지회와 분사무소를 통하여 연해주 구석구석의 한인마을까지도 보급되었다. 또한 국내는 물론 서북간도와 미주 등지의 한인사회에까지도 보급되었다. 때로는 신문사 사원을 직접 각처의 한인마을로 파견하여 동포의 애국정신을 환기시켜 민족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권업회는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교육진흥에 특히 역점을 두었다. 교육의 내용은 철저한 민족주의 근대교육이었다. 이를 통하여 조국독립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권업신문』과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교육진흥을 역설하였던 권업회는 민족주의 교육열을 더욱 고취시키기 위해 먼저 블라디보스톡 개척리에서 신한촌으로 옮겨온 계동학교를 확대 개편하여 한민학교로 확장하였다. 한민학교는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민족주의 교육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한민학교 외에도 연해주 각지에는 한인마을이 들어선 곳마다 거의 예외 없이 한인학교가 설립되었다.

4) 권업회의 이면단체 대한광복군정부

연해주 한인사회의 자치기관으로 조직된 권업회는 ‘조국독립’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공공연히 군대를 양성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권업회에서는 독립군 양성의 기반이 되는 민족주의 교육진흥과 농상공업 등 실업권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독립군 양성은 가능한 한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실로 탄생한 것이 대한광복군정부이다. 독립군을 주축으로 국내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할 중추기관으로 조직된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군사지휘부였다.

1914년은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권업회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민족의식을 높이고 독립군의 군자금도 마련하고자 하였다. 또한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에 해당되어 연초부터 새로운 러일전쟁이 임박했다는 여러 풍설이 팽배하여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활용하고자 권업회에서는 이상설을 비롯하여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상설을 정도령으로 선출하고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군 항전을 준비하였다. 이후 각지에서 설립되는 망명정부들의 효시가 된 이 정부가 ‘광복군정부’라고 이름을 정한 이유는 독립군(광복군)을 조직하여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총괄하는 ‘군사정부’로 성격을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권업회는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과 더불어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다음과 같은 활동을 조직적으로 진행하였다.

첫째,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군의 중견간부를 양성하려 하였다. 1913년부터 중국과 러시아 국경에 위치한 중국령 나자거우(羅子溝)에 권업회 임원들인 이종호, 이동휘, 김립, 장기영, 김하석, 김규면, 전일 등이 대전학교(동림학교)라 부르는 사관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대전학교는 독립운동사상 최초의 사관학교였다.

둘째, 독립군의 군영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벌여 여러 곳에 토지의 조차를 추진하였다. 겉으로는 한인의 집단이주 개척을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군영지 마련과 독립군의 훈련을 목적으로 추진한 독립운동기지 건설 사업이었다.

셋째, 양군호와 해도호라고 불리는 비밀결사를 운영하였다. 양군호와 해도호는 겉으로는 잡화점 같은 상점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였다.

하지만 1914년 9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국이 되어 한인의 정치, 사회활동을 탄압하였다. 즉, 러시아는 일본과 공동방위체제를 확립하면서 자국 내에서의 한인의 모든 정치, 사회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권업회도 해체되고 『권업신문』도 정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인의 정치, 사회활동의 중요한 인물은 가차 없이 투옥되고 추방당하였다. 대한군정부도 치명적 타격을 받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역사에 그 이름만 남고 말았다.

위에서 살펴본 권업회를 조직하고 러시아 원동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중 세 분이 다른 모든 분들을 대표하여 2021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바로 ‘신민회 조직자에서 권업회 설립의 주역으로 선’이종호 선생과 ‘독립운동에 전재산을 바친 연해주 해상왕’ 최봉준 선생 그리고 ‘권업회에서 노인동맹단까지 이어진 신한촌의 지도자’김학만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아래에서는 이 세 분의 항일운동 역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신민회 조직자에서 권업회 설립의 주역으로 선 이종호

1)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과 교육활동

대한제국기 광무황제(고종)의 최측근으로 내장원경을 지낸 이용익의 손자(양손)인 이종호는 한말 애국계몽운동가이며, 항일운동가였다. 러시아로 망명한 이후에는 일제가 연해주 일대 항일운동가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자’로 지목할 만큼 1910년대 연해주 지역 항일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함경북도 명천에서 출생한 이종호는 조부의 ‘광건학교(廣建學校)’의 유지를 이어받아 일찍부터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거나 학교 경영을 지원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06년 5-6월에 자신의 고향인 함북 명천에 사립보성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1906년 9월에는 청주에 있는 사립청명학교를 충북보성중학교로 개명하여 일대 혁신을 하였으며, 그해 12월에 개교한 아산의 사립둔포학교와 온양의 사립온양보성학교의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1907년 1월에는 서울 용산 전(前) 별영창 안에 사립삼호보성학교를 신설하였으며, 청주에 삼호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찬성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이 무렵 함북 종성 대성촌에 함북보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조부 이용익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사망한 1907년 2월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제2대 교주가 되어 학교 운영을 책임졌다. 그런데, 1905년 4월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이용익이 을사늑약의 체결로 그해 9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직후부터 사실상 학교 운영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종호는 1906년 10월 서울에서 오상규, 이준, 이동휘 등의 함경도 인사들과 함께 국권 회복과 민권 신장에 목표를 두고, 민지(民智)의 개발을 통한 실력의 양성과 단합을 당면과제로 삼은 애국계몽운동단체인 한북흥학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한북흥학회는 1907년 1월 부설로 한북의숙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이종호의 재정 후원으로 유지되었고, 이종호는 여기에 설치된 속성사범과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한북흥학회가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통합하여 서북학회로 성립된 이후 한북의숙은 서북협성학교로 계승되었다. 이종호는 서북협성학교 발족 초기 재정을 전담하였으며, 교장을 맡았다. 협성학교는 1년 과정의 속성사범과로 출발하여 교사양성에 주력하였다. 교과과정은 산술, 지리, 역사, 법률, 물리학, 교육학, 영어, 일어 등으로 신사상을 교육하였는데, 특히 지리와 역사, 교육학에 비중을 두었다. 이는 협성학교의 교육 목적이 애국사상을 고취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협성학교는 당시 각 지역에서 설립되고 있던 사립학교들에게 교육목적과 교육방법, 교육내용 면에서 모델을 제시하였다고 평가된다.

서북학회 등을 통해 항일운동에 점차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한 이종호는 1907년 결성된 신민회 활동에 가담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안창호,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어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신민회의 창립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는 데 있었는데, 이를 위한 한 방법으로 전국 각지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학교가 평양의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였다. 1908년 9월 이종호는 안창호, 윤치호와 함께 한국근대교육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신민회는 다른 애국계몽운동단체와는 달리 의병운동에 공감하고 자신들이 직접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는데, 이종호 역시 이 무렵부터 항일운동과 무장투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준의 헤이그특사 파견 과정에도 깊이 관여하여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비밀리에 자신의 집에서 성공을 기원하는 송별연을 베풀기도 하였으며,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이범윤 의병부대에 재정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종호의 활동은 일본 당국의 감시망에 포착되었으며, 이종호는 위험인물로 분류되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이종호는 곧바로 배후 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는 11월 초 고향 명천에 다녀오는 길에 원산에서 체포되었고, 서울의 집도 수색을 받아 서류들이 압수되었다. 3개월 넘게 수감되어 조사를 받은 이종호는 1910년 2월 19일에야 안창호, 이갑, 이기종, 김명준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석방된 이종호는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이종호는 1910년 4월 이갑 등과 함께 망명의 길에 올랐다. 첫 망명지는 중국 청도였다. 청도에서 안창호, 유동열 등 신민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이종호는 이후 곧바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2) 권업회를 통한 항일운동

러시아 원동 연해주는 이전부터 이종호와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조부 이용익이 블라디보스톡에 체류하던 1906년부터 이미 연해주를 왕복하고 있던 이종호는 1908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항일신문을 발간하는 준비과정에 직접 가담하였다. 신문 발간을 위해 연해주의 한인들은 이종호에게 ‘학식이 뛰어난’ 인물들을 천거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이종호는 박은식과 협의한 끝에 보성전문학교 제자로 자신이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보낸 바 있는 김하구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을 교섭하여 이들을 연해주로 보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해조신문』이 창간되었던 것이다.

이종호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당시 연해주에는 한인의 자치기관인 권업회가 막 태동하고 있었다. 이종호는 권업회 설립에 깊이 관여하여 1911년 12월 창립총회에서 의장 이상설과 함께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권업회의 조직과 『권업신문』의 발간에는 이종호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그는 가장 중요한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권업회의 재정 수입은 회칙상 회원의 의무금, 유지가의 의연금, 업무 이익금, 연례금 등으로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권업회의 수입 가운데 대부분은 기부금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부금은 거의 대부분은 이종호로부터 나왔다. 1911년 12월부터 1913년 1월까지 권업회 1차 회계연도의 총수입은 3,141루블이었는데, 이중 이종호의 기부금이 2,133루블을 차지하였다. 권업회의 총회 유지 및 신문 발간의 모든 경비는 대부분 이종호에 의해 충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12년 3월 한민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그 건축자금도 ‘강제병탄’ 직후 자결한 대한제국 주러공사 이범진이 블라디보스톡청년회에 기부한 1천 루블과 이종호가 기부한 5천 루블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권업회가 해산되면서 이종호 역시 더 이상 블라디보스톡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일제의 압박에 블라디보스톡 밖으로 퇴거 명령을 받은 이종호는 하바롭스크로 옮겨 갔으나 역시 여기서도 다시 추방되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연해주에서 쫓겨난 이종호는 중국 왕청현 나자거우(羅子溝)로 가서 이동휘 등과 함께 무관학교인 대전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동휘가 교장을 맡은 대전학교의 교사와 기숙사는 주민들의 추렴과 노력을 동원하여 세웠는데, 운영비를 담당한 사람은 이종호였다. 그러나 1915년 말 일본영사관의 강청으로 대전학교는 결국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이종호는 상해로 갔으나 1917년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고향인 명천에서 1년 여 감금생활을 한 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를 다시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조부 이용익이 일본 제일은행에 예치해 둔 거금을 인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새문 밖과 돈의동 등으로 셋방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던 이종호는 1932년 3월 28일 부인 장계인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누추한 임정(林町) 257번지 단칸방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종호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독립운동에 전재산을 바친 연해주 해상왕 최봉준

1) 연해주 이주와 재산 축적

함경북도 경흥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최봉준은 8세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하여 한인의 최초 이주지인 치신허(地新墟)에 정착하였다. 치신허는 문자 그대로 ‘새로운 땅’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이주한 1869년은 이른바 ‘기사흉년’이라고 부르는 극심한 기근으로 함경도의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월경 이주한 해였다. 그러나 조국에서 기근을 피해 찾아온 연해주의 상황도 녹록치는 않았다. 당시 이주자의 절반이 굶어 죽었다고 할 정도였다. 최봉준의 아버지 역시 이주 이듬해인 1870년 사망하고 말았다. 어머니와 단 둘이 남은 최봉준은 삯품팔이를 하고 곡식의 이삭을 주워 먹으며 겨우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성장한 최봉준은 1876년 치신허를 떠나 추풍으로 갔다. 그러나 마적의 창궐로 생업에 종사하기 힘들어 1880년에는 다시 연추 남쪽으로 옮겨가 두만강변 녹둔도 근처인 향산동에 새로운 촌락을 개척하였다. 향산동은 최봉준의 개척 이후 인근의 한인들이 모여들어 연해주 남부 우수리주의 한인마을을 대표하는 한 곳으로 성장하였다. 이곳에서 김씨와 혼인을 하고, 농사를 크게 지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최봉준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능히 마을을 통솔하고 풍속을 유지할 만하다고 하여 주민들에 의해 거류지 민장으로 추대되었다.

향산동의 민장으로서 최봉준은 악습을 금하고, 교량과 도로를 수축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하천을 정비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고, 학교를 확장하여 한인 자제들의 교육에 힘쓰는 등 마을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런 활동으로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사람들은 최봉준을 촌장을 일컫는 ‘최노야(崔老爺)’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최봉준은 민장으로 향산동 개발에 노력하는 동시에 러시아 군대에 군용품을 공급하며 상업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연해주에 주둔하던 러시아 군대에게 용품을 제공하는 군납업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였다. 그중에서도 함경도 일대의 생우(生牛)는 이들 군납업자를 통해 러시아 군대에 제공되는 주요 수출품이었다.

1900년경 향산동의 민장을 그만두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온 최봉준은 본격적으로 상업 활동에 뛰어들었다. 마침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최봉준의 군납업은 더욱 활발해졌다. 최봉준은 1903년 일본 기선을 임대해 매월 3회 이상 원산-성진-블라디보스톡을 왕래하며 생우 무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 와중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납업 사업이 더욱 확장되어 마침내 상당한 정도의 자본을 형성한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최봉준은 이러한 자본을 바탕으로 블라디보스톡에 본점을 두고 성진, 원산 등에 지점을 설치해 연안무역에 종사하고, 홍콩과 일본으로까지 사업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이미 운영하고 있던 여러 척의 소형기선에 더해 일본에서 새로 군함을 구입해 <준창호>라는 이름을 붙이고 원양무역에 나섰다. 준창호는 출항할 때 배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는데, 한 번 출항할 때 승선인원이 200여 명이었다. 1908년부터 1911년까지 준창호가 수출한 생우는 해마다 1만에서 2만여 두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최봉준은 ‘무역왕’, ‘해상왕’ 등의 명성을 얻게 되었고, 김학만, 최재형과 더불어 ‘강동의 영웅 3걸’로 불릴 정도의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2) 『해조신문』과 권업회를 통한 항일운동

최봉준은 자신의 사업에 진력하면서도 연해주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힘을 쏟았다. 이는 1908년 2월 『해조신문』의 창간으로 나타났다. 『해조신문』은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간행된 최초의 신문으로, 이후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신문』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한인 언론의 효시였다. 『해조신문』이 러시아 한인의 민족운동 발전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특히 기사가 제목 이외에는 모두 한글로만 작성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최봉준은 『해조신문』 창간호에 기고한 「발간하는 말」에서 “우리 문명제도를 본받아가던 일본에게 보호라 하는 더러운 칭호를 받으니”라고 하며 을사늑약을 강력히 비판하고,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우리의 지식을 발달시키고 견문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1908년 3월 21일자 『해조신문』에는 안중근의 「인심결합론」이 게재되어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해조신문』은 일제의 압력과 사업상의 어려움으로 총 75호를 내고 1908년 5월 26일 폐간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어 최재형 등이 『대동공보』를 발간하자 최봉준은 『해조신문』을 간행할 때 사용하였던 인쇄기를 양도하여 『대동공보』의 원활한 발간을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상당한 금액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최봉준은 문명개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일찍부터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사업을 위해 국내에 머무르던 당시 성진에서 현지의 유지들과 박문회를 조직하고 보통소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많은 학교의 설립과 운영 등에 참여하였다. 1907년 5월 블라디보스톡 개척리에 최초의 한인학교인 계동학교가 설립될 때 최봉준은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찬성장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1908년에는 이포에 명동학교가 설립되자 총감으로서 학교 발전에 기여했으며, 연추 향림동에 설립된 선흥의숙에도 교장 최재형, 부교장 김학만과 함께 찬성장으로 참여하여 후원을 하였다. 1909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개척리 한인거류민회의 민장이 되어 계동학교의 증축을 위한 건축비 600여 루블을 기부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에는 의연금을 쾌척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한국 강점 부당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최봉준의 활동은 1911년 조직된 권업회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12월 19일 권업회 창립총회에서 특별임원으로 이범윤, 김학만, 최재형 등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권업회가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창간하자 신문에 기부금을 보내 간행을 지원하였음은 물론이다. 또한 권업회 지방지회가 설치되자, 연추지회의 의사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14년 한인이 러시아로 이주한 지 50주년을 맞아 권업회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최봉준은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여기에 참가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의 한인들은 자치기관으로 고려족중앙총회를 조직하고 7월 기관지인 『청구신보』를 간행하였다. 당시 추풍으로 이사해 와있던 최봉준은 여기에 참여하여 『청구신보』 창간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9월 이질에 걸려 별다른 활동은 하지 못하고 향년 59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추풍 허커우 정교당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최봉준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4. 권업회에서 노인동맹단까지 이어진 신한촌의 지도자 김학만

함남 단천 출신으로 최재형, 최봉준과 함께 ‘강동의 영웅 3걸’로 불리던 김학만은 초기 연해주 한인사회의 주요 지도자로 연해주 한인사회의 안정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인물이다.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은 1900년대 초부터 한인 자제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학교 설립 운동이 청년 세대의 실력을 양성하는 길이고 결국 실력 양성이 독립을 전취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노력의 결과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 러시아 연해주 한인마을들에는 10여 개의 한인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최초로 세워진 학교가 블라디보스톡의 개척리에 설립된 계동학교이다. 김학만은 계동학교 설립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력하였으며, 설립 이후 초대 교장을 맡았다. 계동학교의 설립은 러시아 연해주 전체 한인들과 러시아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김학만 관련 정보보고 문서
김학만 관련 정보보고 문서

교장인 김학만을 필두로 감독 김치보, 총무 차석보 외에 교사로 이현재, 김연상, 조창용, 김종철 등이 근무한 계동학교는 한인사회의 의연금으로 운영되었으며, 일제 침략과 조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프로그램과 한국의 말과 역사, 지리 등을 가르쳤다. 3개 반(7세반, 8~12반, 13세 반)으로 구성된 계동학교의 학생 수는 대략 40~50명 정도였다. 교과목은 한문, 한글, 습자, 산술, 수신, 체조, 한국 지리, 역사, 러시아어였다. 계동학교에서는 대한학교 학생들과 당시 한국의 상황을 주제로 연합 토론회를 개최하거나 전명운, 장인환을 위한 의연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또한 김학만은 1908년부터 명동학교, 동흥학교, 선흥의숙 등의 한인학교 설립과 운영을 적극 후원하였으며, 연추 향림동에 설립된 선흥의숙에서는 교장인 최재형에 이어 부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당시 함경북도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부대에 재정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김학만은 1910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인거류민회 회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 개척리에서 이상설, 유인석, 이범윤 등 6명과 함께 성명회를 조직하여 취지서를 발표하였으며, 일제의 한국 강점 부당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회선언서>에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1911년 12월 19일 권업회 창립총회에서 김학만은 특별임원으로 이범윤, 최봉준, 최재형 등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때 김학만은 권업회 활동의 일환으로 이승희와 함께 중국 밀산현 봉밀산 일대에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한인정착촌인 한흥동 건설사업을 적극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17년 9월 <대동단결선언서>와 찬동통지서를 받고도 봉밀산에 있던 탓에 서명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19년 2월 중국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이른바 무오독립선언서)에는 서명하였다.

김학만은 1919년 3월 블라디보스톡에서 결성된 대한노인동맹단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46세 이상의 남녀 노인을 대상으로 조직된 대한노인동맹단은 1919년 5월 31일 이승교(이동휘의 부친), 윤여옥 등 7인을 경성에 파견하여 종로 보신각 앞에서 시위운동을 펼쳤으며, 6월 24일에는 일본 정부에 21명의 단원이 서명을 한 독립요구서를 보내기도 했다. 1919년 9월 2일에는 신임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노인단원 강우규가 폭탄을 던지는 등 과감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김학만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이달의 독립운동 목록 > 이종호(관리번호:8911)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
이전달 다음달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