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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안경근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77년

주요공적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전개

1922년 상해로 이동하여 1930년대 한인애국단에 가입 및 한국독립군특무대를 조직하여 활동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안경근 / 이덕주 / 최흥식

안경근 安敬根 ,1896.06.10 ~1978.12.09 . 황해도 신천 , 독립장 1977 이덕주 李德柱 ,(1908.05) ~(1935.02) . 황해도 신천 , 애국장 1990 최흥식 崔興植 ,미상 ~미상 . 서울 서울 , 애국장 1991
우리가 허다한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끝끝내 폭렬한 행동으로 대항하는 것은 우리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고 사선(死線)을 쫓겨난 우리 한국 사람인지라 이 길을 버리고는 또 다른 길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이 성공되지 못하는 날까지는 이런 폭렬한 행동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한인애국단 선언」(1932.8.10.) 중)

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무조직, 한인애국단

1919년 3.1운동의 결실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독립운동 방략으로 강력한 의열투쟁을 선택하고 그 실천조직으로서 1931년 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 의열투쟁은 월등히 우세한 화력을 가진 일제를 상대로 최소 경비와 소수 인원이 암살·파괴 등 방식으로 무장투쟁을 벌이는 독립운동의 한 방략이었다. 이는 국가나 민족이나 인류 공영을 목적으로 하고 침략 원흉이나 공공의 적 또는 침략기구나 수탈기관 등 소수를 공격 대상으로 특정한다는 점,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거사의 목적과 이유, 주체를 밝힌다는 점에서 테러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데에는 192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임시정부의 곤경을 타개하고 1930년대부터 시작된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에서 한국과 중국 농민 사이에서 수로를 둘러싸고 마찰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악용해 허위 보도를 일삼고 양 국민을 이간해 갈등을 부추겼다. 2개월 후인 1931년 9월 18일에는 관동군이 봉천의 유조구에서 남만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빌미로 만주를 침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난국을 타개하고자 국무회의에서 특무대를 조직해 의열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안을 결정하였다. 임시정부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특무대로서 별도기구를 조직한 것은 한인애국단이 처음이었다. 임시정부는 정부 수입금의 반액을 특무대에 지급하기로 하고, 국무위원인 김구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김구에게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이나 인물 선정 등 모든 권한을 위임하며 다만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전권을 위임받은 김구는 1931년 말 임시정부의 특무조직으로서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다. 한인애국단 본부는 상해 프랑스 조계 신천상리 20호 안공근의 집으로 삼고, 단원 합숙소는 마당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 뒤 살파새로 188호에 두었다.한인애국단은 비밀리에 조직·운영되었기 때문에 단원을 미리 모집하거나 창립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단장 김구가 특무활동을 준비·계획하는 과정에서 결행할 인물을 선정하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 촬영하는 것으로 입단식을 대신하였다. 이에 단원들의 정확한 인원과 명단은 알기 어렵지만, 대체로 단원은 80명 정도이고 그중 핵심단원은 10여 명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단장 김구와 청년단원으로 구성된 한인애국단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도쿄의거를 시작으로,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 등 일제 침략의 본거지와 수뇌부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 특공작전을 이어나갔다. 작전대상은 일제 침략의 본거지인 도쿄와 일왕, 식민지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와 조선총독, 상해침략의 첨병인 상해파견 일본군사령부와 일본군 수뇌부, 만주침략의 전진기지인 관동군 사령부와 사령관 등이었다. 임시정부 직속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선 일종의‘반침략전’이기도 하였다.

2. 국내에서 조선총독 처단 의거에 나선 이덕주

한인애국단은 한국을 식민통치하는 최고 책임자인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를 처단하려고 하였다. 단원 유진식과 의거에 나선 인물은 이덕주였다. 서리균(徐利均)이라는 이명으로도 불린 그는 1909년 1월 2일 부친 이원국(李源國)과 모친 배현후(裵賢厚)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 사직리 219호이다.

이덕주가 24세 때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단장 김구에게 남긴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6세 때 상지현 향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고 12세 때 해주고보에 입학하였다가 경성의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17세 때 과수업, 19세 때 재목상(材木商)을 하다가 20세 때 상해로 왔다고 한다.

일제측 기록에서는 이덕주가 1930년 5월 봉천, 대련을 거쳐 상해로 건너왔다고 파악하였다. 상해 도착 후에는 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상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 상해 한국독립당, 상해 한인청년당 등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았다. 이때 한인애국단원의 합숙소이기도 한 프랑스 조계 살파새로 188호 3층에 살고 있는 유진식 의 거처에 종종 찾아와 지낸 사실도 확인된다.

한인애국단원 이력서 및 봉투(이덕주, 유상근)
한인애국단원 이력서 및 봉투(이덕주, 유상근)

이덕주가 조선총독 처단 의거에 나선 것은 단장 김구의 제안 때문이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현상을 상술한 후 일본과 중국의 시국이 점점 착종(錯綜)되는 상황에서 조선 민족으로서 독립 의지를 세계 각국에 알리고 임시정부의 재정확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지령을 내렸다.

김구의 제안을 승낙한 이덕주가 조선총독 처단을 위해 국내에 파견된 것은 1932년 3월 초였다. 그는 단장 김구에게 권총 1발과 탄환 25발, 여비 120엔을 받고 3월 10일 중국 기선 이통호(利通號)를 타고 상해를 떠나 천진에 왔다. 천진부터는 육로로 산해관, 금주, 봉천을 경유하여 3월 19일 본적지인 황해도 신천에 도착하였다.

신천 도착 후 이덕주는 경계가 엄중하여 단독으로는 조선총독 처단 의거 추진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단장인 김구에게 동지 파견을 요청하였다. 1932년 3월 31일자로 이덕주가 ‘김정애’라는 인물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며칠 전 보낸 편지를 받아보았냐”고 물은 뒤, “자신의 요청을 들으면 뜻대로 잘 될 것 같으니 회답을 바란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보면, 신천 도착 후 이덕주는 단장 김구에게 편지로 도착 보고를 한 후 회신이 없자 재차 편지를 보내 지시를 요청한 것 같다. 이덕주는 ‘현재 상황을 속수무책’이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곤란한 상황도 전달하였다.

단장 김구는 이덕주를 돕기 위해 3월 말 의경대원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4월 2일 상하이를 떠나 단동을 거쳐 신의주를 지나 황해도 신천에 도착한 유진식은 이덕주와 합류하여 조선총독 처단 의거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덕주의 신천 도착 후부터 이미 그를 예의주시하던 신천경찰서가 이덕주와 그의 일행을 붙잡아 취조한 끝에 조선총독 처단 준비 사실이 발각되면서 의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이덕주는 1932년 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 평양형무소로 이감 후 평양복심법원 공판을 기다렸다고 하나, 결국 1935년 2월 12일 까지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덕주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3. 대련에서 관동군 사령관 등 처단의거에 나선 최흥식

한인애국단원 최흥식이 동료 유상근과 함께 준비한 의거는 대련에서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 고위 관료 처단 계획이었다. 이는 리튼(Lytton) 조사단의 중국 현지 조사일정에 따른 것이었다. 1931년 9.18 만주침략과 1932년 3월 1일 ‘만주국’수립 등 일제 침략에도 불구하고 당시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국민당 정부는 무저항주의로 일관하며 만주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하였다. 중국정부의 제소를 받아들인 국제연맹은 리튼을 위원장으로 조사단 파견을 의결하고 1932년 2월부터 7월까지 현지 조사를 계획하였다. 그중 대련은 1932년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머물 예정이었다.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는 리튼 조사단의 대련 도착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하였다. 조사단의 움직임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고, 조사단이 도착할 때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 고위관료가 반드시 영접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련이 일제의 조차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의거를 결행하면 일제의 책임소재는 물론,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른바 ‘대련의거’를 위해 먼저 대련에 파견된 인물은 최흥식이었다. 『도왜실기』에 소개된 최흥식의 이력에 따르면, 그는 서울 황금정(黃金町) 이정목(二丁目) 22번지에서 부친 최한조(崔漢朝)와 모친 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팔경(八慶)이었다. 모친이 44세 때 난산으로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최흥식 출생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출생 당시 72세였던 부친도 7세 때 작고하면서 이후 형 광식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최흥식은 11세 때 서울의 수하동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4세 때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상광인쇄소의 견습생이 되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이듬해 겨울에 집을 나서 19세까지 5년 간 인천, 충청, 전라, 경상 등 각지를 다니며 만두장사를 비롯,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20세 때 지등공사(紙燈公司) 외무원으로 다니던 그는 ‘큰 포부와 위대한 뜻을 품고 죽음으로써 3천 만 생령을 고통과 압박에서 구해낼 생각’으로 중국 망명을 결심하였다.

최흥식 사진
최흥식 사진

최흥식의 중국 망명은 1931년 4월 추진되었다. 우선 봉천을 거쳐 대련에 도착한 그는 여비 마련을 위해 일본인 상점의 판매원이 되어 일을 하다가 11월 경 배편으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 도착 후에는 먼저 윤봉길이 취직해 있던 종품공사(鬃品公司)에서 1931년 12월부터 3개월 정도 근무하였다. 이때 한인애국단원 숙소인 살피새로 188호에 거주하며 2층을 사용했다고 한다.

최흥식이 단장 김구를 만나 특무작전을 제안받은 것은 1932년 2월경이었다. 먼저 그는 조선총독 처단 임무가 적힌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을 목에 걸고 1932년 2월 10일 패륵로 신천상리 20호 안공근의 집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3월 24일 또는 25일 중국식 복장에 브라우닝 2호 권총을 들고 두 번째 사진촬영을 하였다.

최흥식은 상해에서 대련으로 출발할 때 단장 김구에게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남만주철도 총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裁)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처단방법은 열차로 움직이거나 타고 내릴 때 폭탄 또는 권총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단장 김구의 지령을 받은 최흥식은 3월 27일 오전 10시 태고기선회사의 통주환(通洲丸) 편으로 상해를 출발하였다. 4월 1일 대련에 도착한 후에는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 집을 거처로 삼고 대련 상황을 파악하였다.

최흥식이 대련에 온 지 한 달 후인 4월 27일, 유상근이 대련에 도착하자 최흥식은 그와 만나 대련의거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국제연맹 조사단 일행이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에 대련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련역으로 마중 나오는 혼조 시게루 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혹시 의거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조사단이 대련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5월 30일 오전 9시에 두 번째 의거도 준비하였다. 의거에 필요한 무기 운반은 대련 현지에 거주하는 이성원·이성발 형제가 맡았다.

최흥식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
최흥식이 김구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거사일을 이틀 앞둔 1932년 5월 24일, 최흥식이 일경에 붙잡히면서 결국 추진되지 못하였다. 대련의거 준비 과정에서 최흥식이 ‘패륵로 신천상리 20호 곽윤(郭潤)’ 앞으로 보낸 편지가 ‘배달불능 전보’로 분류되고, 전보를 수상하게 여긴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관동청에 발신인 체포를 요청하면서 최흥식이 붙잡힌 것이다. 이후 최흥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판결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순국일은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는 최흥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4. 한인애국단원의 뜻을 이어나간 안경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무조직으로 결성된 한인애국단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정확한 인원과 명단은 확인되지 않는다. 단장 김구가 단원들의 명단을 발표한 일도 없고, 단원들도 가명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제측 기록에서는 한인애국단 인원을 80여 명으로 추정했는데, 각종 기록에서 확인되는 한인애국단원 중에는 안경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4촌 동생이기도 한 안경근은 1896년 음력 6월 10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안태민(安泰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석천(石泉)이고 이관오(李冠五)라는 이명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18세 되던 1914년에 김마리아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 안철생이 태어났고 1918년 가족 모두 국내에 남겨둔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상해로 온 안경근은 1922년 4월 운남성 곤명의 운남강무학교 입학을 위해 상해를 출발해 1924년 12월 학업을 마치고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그후 만주로 가서 정의부에 참가하다가 ‘南方 某地’의 군관학교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정황상 안경근은 1926년 11월부터 1927년 8월에 이르는 5기생 입교 기간에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근무 후 상해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경근은 1931년 말 한인애국단이 결성되자 단원으로 참여했으나 단장 김구가 계획한 의열투쟁에 나서는 등 직접적인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후 중국국민당 정부가 단장 김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자 그를 보필하면서 김구와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특히 상해의거의 결실로 중국 측의 지원을 받아 1934년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 특별반이 설립되자 안경근은 생도계를 맡았다. 1934년 8월 한인 특별반을 퇴교한 김구 측 입교생을 대상으로 소위 ‘김구구락부’로 불리는 한국특무대독립군이 별도 결성될 때에는 안경근이 조사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안경근이 김구가 주도하는 항일 특무조직의 핵심역할을 맡은 데에는 의거 중 희생된 한인애국단원의 뜻을 계승하려는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예컨대 대련의거 준비 중 일경에 체포된 최흥식은 의거가 비록 좌절되었지만 한인애국단원들은 단념하지 않고 의열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단장 김구 또한 일제의 왜곡 보도에 맞서 1932년 8월 10일자로 한인애국단 선언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독립이 성공되는 날까지 의열투쟁을 이어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윤봉길 사진
윤봉길 사진

이러한 상황에서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침체된 독립운동이 활성화되고 특히 중국측의 지원으로 중국 군관학교를 통해 한인 군사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어 안경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안경근의 노력으로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한 한인 청년들은 이후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기초이자 핵심세력이 되었다. 한국특무대독립군 소속 한인 청년들도 개별적으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 인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안경근은 제2, 제3의 한인애국단원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한 것은 물론, 김구 직계 가족의 연락·소통 및 김구와 동행하며 그의 신변 경호업무도 함께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항일 특무활동도 병행하였다. 1933년 5월 남화한인청년연맹 단원들과 협력하여 일제 밀정노릇을 하던 안공근의 처조카 이종홍을 처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938년에는 천진의 일본군 작전지대로 잠입하여 일본군 및 일본경찰의 동향, 천진거주 일본인 상황 조사 등 첩보와 정보수집 활동도 함께 전개하였다.

주로 김구를 보필한 안경근은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서도 활동을 이어나갔다. 우선 그는 1935년 11월 창당 이래 김구의 정치 기반이 되었던 한국국민당 이사로도 활동한데 이어, 1936년 11월 10일 가흥에서 개최한 제2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7월 16일 임시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대일 군사활동을 지도할 기구로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는 9명의 군사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6년 5월 귀국한 안경근은 경교장에 기거하며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김구를 보필하였다. 그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앞두고 김구의 특사로 4월 초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내려가 반독재·통일운동을 위해 활동을 이어나가던 안경근은 1978년 12월 9일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서 서거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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