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노병대
노병대
, 1857 ~1913
, 독립장
(1968)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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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포 노병대의 생애
노병대(盧炳大, 1856.12.30. ~ 1913. 7.10.)는 1856년 12월 4일(음력) 경북 상주군(尙州郡) 화령면(化寧面) 관제리(官堤里)에서 아버지 노종구(盧宗九)와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포(錦圃)라 하였으며, 처음 이름을 병직(炳稷)으로 쓰다가 나중에 병대(炳大)로 고쳤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 중종 10 ~ 1590, 선조 23)의 아우인 후재(厚齋) 노극신(盧克愼, 1524, 중종 19 ~ ? )의 14대 주손(冑孫)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조(才操)와 기국(器局)이 범인(凡人)과 달랐으니, 7세에 글을 읽고 외웠으며, 10세에는 글을 지었다.
노병대는 1868년 13세에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 나아가 서울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1877년 22세에 부친의 상고(喪故)를 당하였다. 1880년 25세에 의성(문소) 김원덕(金遠德)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에 즈음하여 금오랑(金吾郞) 윤모(尹某)와 더불어 무사 8인을 모집하고, 군란에 관련된 인물의 제거를 모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89년 34세에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고, 이듬해 1890년 모친의 상고를 당했다.
노병대는 1895년 10월 향교의 향사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진사 허운(許運) 등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했다. 노병대와 함께 활동하였던 진사 허운은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유생이었다. 노병대는 1898년 정월 진사 허운과 함께 중국 곡부(曲阜)에 가서 공자의 72세손 연성공(衍聖公)을 만나고 귀국하여 조종과 태학(太學)에 향교 향사의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당시 각처 향교 부근에는 범장된 묘가 많았는데, 노병대는 호남지방에서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여덟 군데나 있었다. 그는 곧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하여 모두 파 가도록 하였다.
1905년에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북향통곡(北向痛哭)하고 서울로 올라가 전 판서(前判書) 이용원(李容元)을 만나서 “지금 국기(國基)가 기울어지고 있는데 밀조(密詔)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내 스스로 거사(擧事)를 하겠다.”고 간청하였다. 이에 노병대는 고종으로부터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를 선조 계사년의 예에 따라서 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 비서원 비서승(特差秘書院秘書丞)을 특별히 제수한다.”는 밀조(密詔)를 받았다. 그는 환향하여 동지 약간 명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영양의 김도현(金道鉉)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창의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는 일시적으로 이강년 의병진에 좌종사(佐從事)로 참여하기도 했다.
1907년 8월 20일(음 7월 13일) 노병대는 “종사를 보전하고 황제의 굴욕을 설치하며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속리산에서 창의하였다. 그는 김운로(金雲老)를 맹주로 추대하고, 충북 보은·청주, 경북 성주, 경남 안의·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다가 거창의 우두령(牛頭嶺)에서 크게 패하고 속리산으로 귀환하였다. 1908년 7월 13일(음 6월 15일) 보은의 관기의 주점(冠酒店)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노병대는 1908년 9월 18일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폭도내란죄로 기소되어 10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특사로 강제 출옥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노병대는 의병을 재기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3년 4월 17일(음 3. 12) 체포되었다. 그는 1913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를 제기하여 동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2년에 처해졌으며, 동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노병대는 옥중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28일 만인 7월 10일에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정미의병과 노병대의 창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06년 3월 영천에서 정용기(鄭鏞基), 1906년 3월 영덕에서 신돌석(申乭石), 1906년 1월 영양에서 김도현(金道鉉), 1906년 2월 진보에서 이하현(李夏鉉), 1906년 봄 경주에서 유시연(柳時淵), 1906년 봉화에서 이춘양(李春陽), 1905년 의성에서 박연백(朴淵伯) 등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의 강제 퇴위와 7월 31일 한국 군대의 해산으로 의병투쟁은 커다란 분수령을 맞이하게 되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시위대가 봉기하였고, 8월 6일 원주진위대, 8월 9일 강화도분견대에서 봉기하였다. 경상북도의 경우에도 8월 11일 문경진위대의 해산과 8월 16일 안동진위대의 해산 이후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투신하기 시작하였다.
경북 북부 지방에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1907년 8월 6일 원주진위대의 봉기였다. 원주진위대는 민긍호 부대와 김덕제 부대로 나뉘어 강원도·충청도·경기도 동부 등지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민긍호는 의병부대를 다수의 소단위 부대로 편성하여 8월 12일 여주읍과 8월 14일 홍천읍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원주진위대의 봉기로 시작된 의병투쟁은 1907년 8월부터 10월경까지 강원도를 중심으로 충북·경기도 동부·경북 북부지역으로 파급되었다. 경북 북부지역의 경우, 8월 11일 영주군 내에 의병 300명이 일어나 분파소와 우편국을 습격하고 철도노선을 파괴하였고, 8월 27일 순흥·풍기를 공격하여 풍기분파소의 순사 1명을 살해하고 산을 넘어 충북으로 퇴각하는 등 의병의 활동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들은 경북과 충북·강원도의 접경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였는데, 봉화·풍기·순흥 등지에는 강원도의 영월·평창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민긍호 부대, 용궁·예천·문경 등지에는 충청도의 단양·영춘 등지에서 넘어온 이강년 부대가 활동하였다. 따라서 1907년 8월 하순 소백산 남쪽 경북 북부지역 일대는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가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경북지역 각처에서는 유력한 인물들이 민긍호 부대·이강년 부대·신돌석 부대·산남의진 등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양에서 김성운(金成雲), 안동의 박인화(朴仁和), 청송의 강진선(姜進善), 상주의 노병대(盧炳大) 등이 소규모의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20일(음 7월 13일) 노병대는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전 주사 임용헌(林容憲)·충남 연산(連山)군에 사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창의하였다. 노병대는 “종사를 보전하고 황제의 굴욕을 설치하며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이었다. 이들은 서울시위대 및 청주진위대의 해산병 2백여 명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는데, 곧이어 서울에서 해산병 수백 명이 추가로 합세하여 군중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노병대 등은 김운로를 맹주로 추대하고, 보은군을 공격하여 일인 2명을 사로잡고, 상주(尙州) 청계사(淸溪寺)로 진을 옮겼다. 그때 적병이 급습하여 청주(淸州) 미원(米院)으로 패주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적 5명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미원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오래 머물 만하지 못하였다.
노병대는 군대를 나누어 호남을 거쳐 성주(星州)에 이르러 적 십여 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거창에서 또다시 적의 습격을 받아 피해가 컸다. 이렇듯 노병대의 의병부대는 충북 보은(報恩)·청주(淸州), 경북 성주(星州), 경남 안의(安義)·거창(居昌), 전북 무주(茂州) 등지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다시 우두령(牛頭嶺)에 이르러 크게 패하고 속리산에 돌아오니 군사 겨우 50여 명이었다.
1908년 7월 13일(음 6월 15일) 보은의 관기의 주점(冠酒店)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의 노병대에 대한 심문이 있었는데, 그 당시의 문답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의 종족을 다 없애려 한 것이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노병대는 거사할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였다. 그가 끝내 굴하지 않자 일경은 그의 한 눈을 제거하였다. 그는 단식하여 자진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공주재판소(公州裁判所)로 송치되어 1908년 9월 18일 대전지검 공주지청에서 소위 폭도내란죄(暴徒內亂罪)로 기소되어 10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특사로 풀렸으나 “너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며 항거하다가 강제 출옥되었다.
3. 국권피탈과 노병대의 재기
일제는 1910년과 1911년 두 차례에 걸쳐 황해도에서 소위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1910년의 경우, 11월 하순부터 1911년 4월 중순까지 약 4개월 동안 일본군 조선주차군사령관의 명을 받은 제2사단장이 보병 제29연대와 제65연대에서 보병 7중대와 기병 및 공병 등을 동원하여 의병을 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또 1911년의 경우,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보병 제3여단장이 이끄는 보병 16중대, 기병 2중대, 그리고 약 80명의 헌병·경찰관을 동원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 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1910년 소위 토벌작전에서 일본군은 의병 190명을 체포하고 다수의 무기를 몰수하였고, 1911년 토벌작전에서는 의병 약 250명을 체포하였다. 일본군의 의병탄압으로 많은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피체되었고, 더 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두만강·압록강을 넘어 만주·연해주로 이동하였다. 한편 일본군의 의병탄압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은 포위망을 탈출하여 각처에서 소규모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1910년과 1911년 경북 북부지방과 황해도지방에서 전개된 소위 토벌작전으로 1912년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이 종식된 것으로 일본군은 파악하였다. 그러나 1914년 이후 1916년까지도 국내에 잔존한 의병들은 불굴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황해도의 김정언(金貞彦)을 비롯한 생존의병들은 1914년 5월 서흥 지방에서 최후의 1인까지 싸워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경북 북부지방에서 이강년 의병진에 참가했던 이식재(李湜宰)는 1914년 11월 최욱영(崔旭永)·강병수(姜秉秀) 등과 같이 충북 제천군 근북면에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또 1907년 8월 속리산에서 창의했던 상주의 노병대(盧炳大)는 1908년 6월 피체되었다가 1910년 합방 특사로 방면되었다가 다시 거병하였고, 봉화의 김병일(金炳一)은 1911년 음 6월 창의하여 1913년 3월까지 경북 북부와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07년 8월 강원도에서 박화암 의진에 참여했던 김종철(金鍾鐵)은 1910년 3월 활동을 재개하여 1913년부터 1915년까지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후 노병대는 의병을 재기하기 위해 군자금의 모집을 시작하였다. 1911년 음력 4월 노병대는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풍기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바 있었고, 같은 해 음력 7월 노병대는 함창의 한익원(韓翊源)과 함께 상주읍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음력 12월에는 구동식(具東植, 보은)·손일현(孫日鉉, 경산)·강봉주(姜鳳周, 연산) 등과 함께 선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노병대는 1912년 음력 11월 경북 비안군(比安郡) 모창동(毛昌洞)의 최덕로(崔德老)의 집에서 강봉주(姜鳳周)·손요득(孫了得) 등과 함께 안동 하회동(河回洞)의 참봉 유시일(柳時一)의 집에 돌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11월 18일 유참봉의 집에 돌입하여 총기로 집안사람들을 위협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3년 3월 12일(음) 체포되었다.
노병대는 1913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를 제기하여 동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2년에 처해졌으며,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동년 7월 10일 기각되었다.
노병대는 옥중에서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28일 만인 1913년 7월 10일에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그때 일인은, “강도 노병직(그의 초명)은 월여 동안 복종치 않다가 단식·토혈(斷食吐血)하고 죽었는데, 병명은 뇌일혈이다.”라고 발표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ㆍ張黙相, 〈錦圃盧公義烈錄〉
ㆍ張炳逵, 〈烈士錦圃光山盧公殉國碑銘〉
ㆍ盧天可, 〈義兵將盧炳大公年譜〉
ㆍ≪고종시대사≫ 6집, 1907년 8월 21일.
ㆍ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95.
ㆍ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Ⅰ, 민족주의운동편, 1967.
ㆍ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권, 1986.
ㆍ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의병항쟁재판기록), 1974.
ㆍ김자상, 〈錦圃盧炳大烈士抗日行蹟考〉, 담수회, ≪담수≫ 34, 2005.
ㆍ박윤성,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선생〉, 상주문화원, ≪尙州文化≫ 18, 2008.
ㆍ권대웅, 〈일제하 독립운동단체 “민단조합”〉, ≪한국학보≫ 74, 일지사, 1994.
ㆍ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ㆍ상주문화원,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열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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