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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주기철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구분 : 국립묘지

묘소명 :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주기철

주기철 , 1897 ~1944 , 독립장 (1963)

뜻을 세우지 못하고 청년기를 방황하다

주기철(朱基徹, 1897.11.25 ~ 1944.4.21) 선생은 한말 대한제국이 출범한 해 늦가을인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진해시 웅천 1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현성(朱炫聲)은 그 지역 아전 출신으로,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주현성이 첫 부인과 사별한 후 그와 재혼한 조재선(曺在善)이었다. 주현성은 첫 부인에게서 3남 3녀를 두었는데, 조재선과 재혼하여 막내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의 어렸을 때 이름은 주기복(朱基福)이었다. 어려서 집안에서 한문을 배운 후, 1906년 웅천 개통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까지 초등교육을 받았다. 이 무렵 맏형인 주기원을 따라 1910년 성탄절부터 웅천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선생이 개통학교 졸업반이었던 1912년 춘원 이광수가 웅천에 내려와 오산학교의 학생모집과 학교후원을 위한 강연을 하였다. 선생은 이에 감명받아 당시 이광수가 교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진학할 결심을 하였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로 이광수·유영모·조만식 등 쟁쟁한 민족의식이 강한 교사진이 포진하여 있던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계 사립학교였다. 선생은 1913년 봄 선생의 사촌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3월 제7회 졸업생으로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오산학교에 다닐 무렵 설립자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다가 1915년 2월에야 풀려나 학교로 돌아왔다. 그동안 이광수가 대리 교장을 맡고 있었으나, 이광수와 유영모는 선생이 입학하던 해 가을 교사직을 사임하였고 조만식이 교장을 맡았다. 따라서 오산학교 시절 선생은 초기에는 이광수·유영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후기에는 교장인 조만식과 이승훈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4월, 신설학교로서 아직 총독부의 설립인가도 나지 않은 서울의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채 1년도 다니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어린 시절부터 앓았던 ‘안질’이 이유였다고 하나, 그것만으로 보기는 어렵고 집안사정과 진로에 대한 회의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선생은 의지가 굳은 사람이었고 하려고만 했다면 무슨 사정이 있더라도 복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온 선생은 1년 후인 1917년 10월 후에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동지가 된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김해읍교회 교인인 3살 연하의 안갑수(安甲守)와 결혼하였다. 안갑수는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그의 어머니가 김해의 합성학교를 설립할 만큼 개화된 기독교 가정 출신이었다. 선생은 교회출석도 계속하여 1919년 이전에 출석하던 웅천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어떤 자료들은, 선생이 이 기간에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이고 ‘민족자결주의’의 세계풍조에 따라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한다. 특히 3.1운동 때 그 지방 만세운동의 행동책으로 활동하다 1개월 동안 구류를 살았다고 한다. 그만한 나이에 대학까지 중퇴한 의식 있는 청년이라면 으레 그럴 수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 기간은 어디에도 신념을 가지고 전력투구하지 못한 방황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교회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술에 취해있을 때가 있었다는 일화는 선생의 이러한 실의와 방황의 단면을 말해준다.

웅천 교회 전경
웅천 교회 전경

기독교에 헌신하여 지도자로 자리잡다

1920년 9월 인생의 목표를 잃고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선생에게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된 계기가 찾아왔다.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서 ‘중생의 체험’을 한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그 두 달 후인 11월 1일 선생이 다니던 웅천교회에도 초청되어 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선생은 여기서도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기독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목사가 되려면 소속 노회의 시취(試取)를 거쳐 노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마쳐야 했다. 선생은 이듬해인 1921년 12월 문창교회에서 열린 제12회 경남노회에서 ‘신학청원’을 하여 허락을 받았고, 입학시험을 거쳐 1922년 3월 봄학기부터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시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졸업생이 305명, 재학생이 461명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신학교였다. 선생이 입학하던 해부터는 재학생 중심의 학우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는데, 선생은 신입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회의 부서기 직책을 맡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숙사는 각 선교부별로 학교 구내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같은 선교부 소속 학생들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도록 하여 ‘지방색’이 짙었는데, 선생은 이러한 ‘지방색’을 싫어하여 학생들과 의논하여 학년별로 생활하도록 건의하였고 1923년 가을학기부터는 이에 따르도록 개선되었다.

평양신학교 사경회 기념사진(1935.12.20).
평양신학교 사경회 기념사진(1935.12.20).

선생은 1923년 봄부터는 경남노회 소속 양산읍교회 조사(助事)로 부임하여 첫 목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선생은 1925년 12월 22일 평양신학교를 제19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그 며칠 후인 30일에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의 청빙을 받아 1926년 1월 10일 그 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 해부터 노회에서 운영하는 경남성경학원 강사로 출강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후에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조용학 영수, 신사참배 거부로 5년간의 옥고를 치른 손양원 목사 등이 이 경남성경학원에서 선생으로부터 성서를 배웠다. 선생은 1931년 7월까지 초량교회에서 목회하였는데, 부임 초기에 200명이 채 못 되었던 교인 수가 선생이 사임할 무렵에는 4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반종교운동의 영향을 받아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신자의 수가 정체되거나 감소 추세에 있던 교회가 많았는데, 초량교회는 그 수가 오히려 배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인격과 목회는 노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1928년 1월 제24회와 1930년 6월 제28회 경남노회에서는 부노회장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선생은 1931년 6월 21일 초량교회 제직회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 노회의 원로 목사들이 당시 분규에 싸여있던 마산교회(문창교회)에 선생의 부임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초량교회 교인들은 눈물로 사임을 철회할 것을 요청했지만, 선생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이미 두 차례나 경남노회 부노회장에 피선된 바 있었던 선생은 1932년 1월 제30회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에 피선되고, 이듬해 1월 제31회 노회에서도 노회장에 재선되었다. 그만큼 교계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선생은 명설교가로 이름이 나 1933년 이후에는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비롯한 각지의 설교 요청에도 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목회는 ‘성공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1933년 5월에 부인이 서른 넷의 젊은 나이에 갓 돌 지난 막내 아들을 남기고 병사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 8월에는 부친 주현성도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이 무렵에 ‘사(死)의 준비’라는 죽음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내를 사별한 후 2년 여를 홀로 지냈으나 목회를 계속하려면 아내의 내조가 절실하였다. 그러던 중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선생이 담임하던 교회 집사이기도 한 오정모를 만나게 되었다. 오정모 집사는 평남 강서 출신으로 정의여학교를 마치고 의신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문창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서른 세 살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였다. 선생은 1935년 여름에 오정모와 재혼하였다.

그 후 1년을 더 마산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나, 이제 그곳을 떠나 새로운 목회지가 필요했고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무렵 평양의 산정현교회도 예배당 신축과 진보적 신학 문제로 담임목사와 당회원 간의 의견 충돌이 생겨 담임목사로 있던 송창근 목사가 사임하였다. 산정현교회는 새로운 목회자를 찾게 되었고,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로 그 교회에 출석하던 박형룡 박사의 추천으로 마침 그 교회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던 조만식 선생이, 그의 오산학교 제자이기도 한 선생을 마산까지 몸소 찾아와 청빙하자 선생은 그 청빙에 응하였던 것이다.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신사참배에 정면으로 저항하다

신사참배 광경
신사참배 광경

당시 평양은 기독교 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전통 깊은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35년 11월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교장을 겸하고 있던 북장로회 선교사 매큔(G. S. McCune, 尹山溫)을 비롯한 기독교 학교 교장의 신사참배 거부로 1936년 1월 3숭의 교장이 파면되고, 3숭의 폐교 문제를 놓고 선교부와 각계의 의견이 갈려있던 때였다. 더욱이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에 일제는 전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황민화정책을 강화하고 신사참배를 독려하였다. 선생이 신사참배 거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총독부 경무국은 1938년 2월 이른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것을 수립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학교와 학생뿐만 아니라 교회와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한국 기독교계 특히 장로교는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고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강력히 반대해 왔으나, 일제의 강요가 심해지자 이에 굴복하는 개인과 교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장로회 노회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 문제에 굴복한 것은 평북노회였다. 1938년 2월 9일 평북 선천읍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에서 일제 당국의 주장대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임을 시인”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이에 격분한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당시 평북노회장 김일선 목사가 학교 구내에 심어놓은 나무를 베어버리는 일이 일어났고, 일제가 이들을 신사참배 거부자로 구속하였다. 선생도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해 봄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평양경찰서에 1차 구속을 당하였다. 구속을 당한 경위와 날짜는 정확치 않으나 앞에서 서술한 일본에서 도미타 일행이 신사참배 문제를 설득하기 위해서 평양에 왔을 무렵에 맞추어 풀어준 것으로 보아서, 이 문제에 강력히 반대하는 선생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시도가 순교를 각오한 선생에게 통할 리 없었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신사참배 거부자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의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선생이 다시 검속된 것은 그 해 8월 말경이었다. 이에 앞서 6월 배민수 목사의 농촌연구회 사건으로 경북 의성경찰서에서 장로회 총회 농촌부 관련자들을 잡아들이는데, 평양의 선생과 이유택 목사도 이 사건과 연루시켜 검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검속은 그 해 9월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앞둔 예비검속의 성격이 강하였다. 결국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총대들을 예비검속하고 참석한 총대들을 위협하여, 9월 10일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그 즉시로 각 노회 대표들을 부총회장인 김길창 목사의 인솔로 평양신사에 참배하게 하였다. 장로회 총회의 이 결의가 일제 경찰의 치밀한 공작 아래 이루어졌음은 그날 발표한 평남경찰부장 세토[瀨戶]의 담화와 9월 30일 평남경찰부에서 이른바 “신사참배 문제해결 공로경찰관” 89명에게 대거 표창을 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선생이 대구경찰서에서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인 1939년 1월 29일이었다. 석방이 늦어진 것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일제 경찰에 일단 검속이 되면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선생의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차라리 죽기를 원했으나 죽기 직전까지 구타·고문하고 죽게 되면 병보석으로 석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선생은 몸이 약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심한 구타와 발길질을 당했다. 한 번은 매질하러 들어온 경찰관에게 선생이 “당신은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당신은 이런 것들과 다른 죄들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 경찰관은 멈칫하며 하려던 고문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에 시달리다

선생이 산정현교회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건강이 나빠져 혼자서 목회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석방 후에도 일제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신사참배 문제에 순응한 교회의 교인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1939년 10월에 모인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목사나 장로는 주일 예배에서 설교나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를 하게 했다. 선생이 이에 개의치 않고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계속하자, 일제는 10월 중순경 정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을 공적인 목회에 종사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구속하였다.

주기철 선생의 목사직 파면 보도기사, <매일신보> 1939년 12월 20일자.
주기철 선생의 목사직 파면 보도기사, <매일신보> 1939년 12월 20일자.

산정현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선생의 뒤를 이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그러자 평양경찰서는 10월 21일 아침에 갑자기 교회 장로·집사 18명을 불러들여 “첫째, 교회 위원은 전부 매주일 한 번씩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둘째, 설교 또는 기타 교회 사무는 위원만이 집행하고 서양인이나 기타인은 교회 일에 관여하지 말 것, 셋째, 금일 오후 3시까지 회답할 일” 등 세 가지 항목을 지시하고, 만약에 불응하면 교회를 폐쇄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들은 교회에 돌아와 그 다음 날인 일요일에 제직회를 소집하여 결정하기로 하고 유계준 장로 등 대표 3인을 경찰서에 보내 회답 시일을 하루만 연기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10월 22일 제직회에서 이 문제를 의논한 결과 제직자 이외에는 설교나 기도, 기타 교회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신사참배 문제는 신중히 협의할 문제이므로 제직회에서 처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서에도 오윤선 장로 등 교회 대표를 보내 그렇게 통보하자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교회를 폐쇄시키겠다는 경고를 다시 하였다. 더욱이 11월 2일에는 오윤선, 유계준 장로 등을 경찰서로 불러 “주기철 목사를 경질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정현교회는 오히려 “신사참배를 한 사람은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결의하고 일제 경찰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선생이 소속된 평양노회에 압력을 가하여 12월 19일 임시노회를 소집하게 하고 선생의 파면을 결의하게 하였다. 이 노회에서는 이미 신사참배를 하고 있던 이인식 목사를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래도 산정현교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평양노회는 이듬해 3월 정기노회에서 장운경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권위원 8명을 선임하여 3월 24일 주일예배를 인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이 반발하고 시위를 벌이자 일제 경찰들이 개입하여 양재연 집사를 비롯한 주동자 9명을 검거하고, 전권위원들은 그날 오후 “당분간 예배를 정지”할 것을 공고하고 예배당을 폐쇄하였다. 경찰에 검거된 사람들 가운데는 선생의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전권위원들은 얼마 후 선생의 가족들도 교회의 사택에서 쫓아내었다.

구타와 고문 속에 마지막까지 신념을 지키다

선생을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평양 산정현교회 문제가 일단락되자, 4월 20일 선생은 평양경찰서에서 풀려났다. 그러자 각지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면서 선생의 석방과 지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4월 22일 평양의 채정민 목사집에 모여 선생의 석방 환영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경남지역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한상동 목사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새로운 노회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선생은 아직은 시기 상조라고 만류하였다. 일제 경찰이 선생을 석방하였던 것은 산정현교회 문제가 일단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선생과 기맥을 통하고 있던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선생은 이때부터 감시와 가택 연금을 당하여 외부와 연락을 하기 어려웠다. 일제 경찰은 검찰의 지휘를 받아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을 조사하여 그 해 9월 20일 새벽에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일제 검거를 실시하였다. 보고에 따르면 그날 하루 검거한 수가 193명에 이르렀다.

선생의 마지막 검속도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이때 검속된 선생을 비롯한 평안남도 지역 신사참배 거부자 68명은 1941년 5월 15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겨졌고, 그 이듬해인 1942년 5월 12일에야 끝까지 저항하던 35명에 대해서 예심을 청구하여 8명은 기소유예, 25명은 불기소 처분을 하였다. 이 마지막 검속이 그 전의 검속과 달랐던 점은, 그 이전의 검속은 위협하여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마지막 검속은 회유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격리시켜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확산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검거된 거부운동의 지도자들에게 거의 5년에 걸친 지리한 신문과 옥고가 이어지면서도, 정작 1945년 5월 18일에야 평양지방법원의 예심종결 결정이 났던 것은 일제의 그런 목적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감옥 생활은 너무나도 열악하였고 신문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이 잇따랐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최봉석 목사, 박관준 장로, 최상림 목사 등 순교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선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생은 1944년 4월 13일 건강이 악화되어 병감으로 이감되었다가 21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선생의 나이 47세 때였다.

선생의 일제에 대한 항쟁은 기본적으로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일제의 ‘전시체제’하 ‘황민화정책’을 비롯한 식민지 통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그것을 무효화(無效化)·무력화(無力化)시키는 비폭력 항쟁이었다. 선생의 설교와 옥중 수난은 선생이 목회하던 산정현교회의 교인들은 물론, 같은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고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고 순응하던 이들에게는 경고가 되었다. 또한 선생의 죽음은 일제의 비인도적·전근대적 종교탄압에 대한 명백한 고발이요 폭로였다. 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선생의 절개와 항쟁과 희생은 암흑시대를 밝히는 등불로서 우리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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