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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항일독립 투쟁의 선봉에서 활약

1. 개요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광복군은 정신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군을, 인적 맥락으로는 독립군을 계승하였음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단위부대인 지대로 편제가 이루어졌다. 광복군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병사와 적 후방의 한인 청년을 포섭하는 초모공작,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 적군에 대한 정보 수집과 교란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일전쟁을 전개함으로써, 전후에 교전단체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그 일환으로 1943년 8월 인면전구공작대를 인도에 파견하여 영국군의 대일전을 지원하였다. 1945년에는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였다.

2. 광복군의 창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일본에 대한 대규모 정규전의 전개를 지상목표로 설정하였다. 다만 이러한 목표의 실천은 임시정부가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이유, 나아가 광범위한 대중적 토대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1940.9.17.)ⓒ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1940.9.17.)ⓒ독립기념관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피난 중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광복군의 창설을 준비하고 추진하였다. 1939년 치장(綦江)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를 갖추기 위한 부서 개편과 방략 수립에 나섰다. 군무부 외에 군사계획의 수립을 전담할 기구로 참모부를 증설하였고 독립운동방략을 수립하였다. 임시정부가 국내외 각지의 한민족을 총동원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39년 11월 임시정부는 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화북 일대에 이주해 온 한인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또한 군대 창설에 대한 양해와 재정 지원 약속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미주교포들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았는데, 이는 광복군을 자력으로 창설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940년 중국 대륙을 전전한 끝에 충칭(重慶)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같은 해 9월 15일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 창설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광복군 창설을 선언한 임시정부는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광복군이 정신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군을, 인적 맥락으로는 독립군을 계승하였음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3. 조직 및 편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직 조례(1940.10.9.)ⓒ국사편찬위원회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직 조례(1940.10.9.)ⓒ국사편찬위원회

창설 후 광복군은 총사령부 외에 3개 지대로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충분한 병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총사령부를 먼저 설립하고, 이후 단위부대를 편성해가는 하향식 편제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지대 편성의 방침에 따라 서안의 광복군 총사령부는 제1·제2·제3지대의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총사령부의 기본목표는 3개 사단을 편성하는 것이었고, 총사령부와 군사특파단 인원들로 3개 지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편입하여 제5지대가 됨으로써 모두 4개 지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초기 광복군은 총사령부와 그 단위부대로 4개 지대의 편제를 갖추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광복군의 편제는 1942년에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와 간섭을 일부 받게 된 것도 영향을 주었다. 서안에 나가 있던 총사령부는 중경으로 복귀하고 그 기구는 축소·단순화되었다. 게다가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기존 각 지대의 통합 또는 재편성이 불가피해졌다. 편입된 조선의용대는 제1지대가 되어 중경에 주둔하였다. 종전의 제1·제2·제5지대를 통합한 제2지대가 편성되어 서안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안휘성 부양에서 활동하던 징모 제6분처가 발전하여 제3지대가 성립되었다. 이 3개 지대는 일제 패망 때까지 유지되었던 광복군의 기본적인 단위부대였다

4. 병력 모집 및 선전 활동

광복군은 창설 초기부터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 지방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 광복군은 이들을 대상으로 적지 않은 한인청년들을 모집하였다. 아울러 1944년 이후 학병(學兵)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온 한인 청년 수십 명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국사편찬위원회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국사편찬위원회

이와 같이 적극적인 병력 모집 활동 결과 창설 당시 수십 명에 불과하던 광복군은 1945년 8월이 되자 1천 명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모집된 인원들의 훈련을 위해 서안에서는 중국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안휘성 임천에서는 한국광복훈련반을 설치하고, 모집된 청년들을 군사 초급간부로 양성하였다.

광복군은 선전활동을 중시하였다. 광복군이 국제적인 지위를 얻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선전활동이 대단히 중요하였다. 광복군은 충칭방송국을 통하여 선전활동을 수행하였다. 즉 3.1절이나 광복군 창설 기념일, 기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기념선언문과 성명서를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렸다. 이처럼 광복군은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통해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지를 얻고, 동정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충칭방송국을 통해 광복군에 대한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였다. 그밖에도 일본군에 대한 반일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고 기관지 『광복』을 발행하여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5. 인도·버마에 공작대 파견

광복군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영국군과 협동하여 대일전을 수행하였다. 광복군은 인도 주둔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1943년 8월 광복군 대원으로 구성된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하였다.

인도 현지에 도착한 공작대 대원들은 영국 인도군총사령부에서 영어와 방송기술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대원들은 영국군에 분산 배치되었다. 일본군과 접전하고 있는 최전선에 투입된 공작대는 일본군에 대한 선무공작, 후방지역의 교란, 일본군 포로의 심문, 노획한 문서의 번역 등 전쟁수행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롤랜드 C. 베이컨 대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원, 인도야전방송부대 장교의 단체사진
롤랜드 C. 베이컨 대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원, 인도야전방송부대 장교의 단체사진

공작대는 1944년 초부터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전을 벌였던 임팔 전투에 투입되었다. 당시 연합군측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이른바 버마공로(滇緬公路, Burma Road)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작전이 임팔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공작대는 임팔방어작전에 참여하여 대적선전, 포로 심문, 적 문서 번역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영국 신문들은 이들의 활약상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5년에는 버마에서 일본군을 축출하는 버마 총반격전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작대의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영국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은 광복군이 인도-버마에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공작대는 1943년 8월 인도에 파견된 시기부터 1945년 7월 인도-버마 지역에서의 활동을 종료할 때까지 2년간에 걸쳐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참여하였다. 공작대는 일제가 항복한 후 충칭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공작대의 활동은 영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아가 한국독립운동의 공간을 확대하였다는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것이었다.

6. 한미합작과 국내진입작전 추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임시정부는 미국정부 혹은 주중 미군사령부에 대해 한인의 대일전 참여를 지속적으로 제의하였다. 이러한 제의는 광복군이 오랫동안 지향해왔던 국제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광복군은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면서 북상하고 있는 미군과의 합작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1945년 미국 OSS와 합작, 광복군 대원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투입하여 정보수집과 게릴라 활동을 전개한다는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였다.

한미양측은 시안 주둔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 훈련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였다. 합작훈련 제1기 훈련생으로는 한인 학병출신들과 기존의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 중에서 50명의 적격자들이 선발되었다. 주된 훈련내용은 이들이 한반도에 침투해서 적의 중요군사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시 이를 무전으로 중국으로 타전하기 위한 첩보훈련과 통신(무전)훈련이었다. 그 밖에 일본에 대한 심리전 기술, 연합군의 공중폭격이나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기상학교육도 포함되었다. 8월 초 제1기 훈련생들이 엄격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수료하였다.

독수리 작전을 위한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무선교신 훈련 사진
독수리 작전을 위한 한국광복군 대원들의 무선교신 훈련 사진

8월 5일, 김구․이청천․엄항섭 등 임시정부 및 광복군 수뇌부로 구성된 시찰단은 시안으로 가서 광복군 훈련생들을 사열하고 격려하였다. 8월 7일 김구는 시안에 와 있던 워싱턴의 OSS 총책임자인 도노반과 한미공동작전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다. 한미 양측은 회담에서 한반도를 목표로 하는 공동작전의 조속한 실행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광복군이 추진하였던 국내진입작전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미처 실행되지 못하였다. 8월 9일 시안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김구는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고 탄식하였다.

대신에 광복군은 국내정진군을 조직하고 그 선발대로서 국내정진대를 서울로 진입시켰다. 하지만 일본군의 서울 진입 불허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이 미국 OSS와 합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한 것은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영국군과 합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광복 직전 광복군이 거둔 귀중한 성과였다.

7. 역사적 의의

광복군은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지향했던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광복군은 대한제국의 국군과 항일무장투쟁을 수행했던 독립군을 계승하였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30여 명으로 출발한 이래 열악한 물적·인적 기반과 중국이라는 타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한 제약 속에서도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통해 국제적 여론을 끌어내고 국내외 동포들에게는 광복군의 활동과 한국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렸다. 창설 당시 수십명의 병력으로 시작한 광복군은 일제 패망 무렵에는 1천 명에 가까운 인원을 확보한 정규군으로 발전하였다.

국제적으로 광복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일전쟁을 전개함으로써, 전후에 교전단체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을 추구하였다. 그 일환으로 광복군은 인도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미국 OSS와 합작하여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 규모나 실현 여부를 떠나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려는 자주적 독립의지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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