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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6년 8월 제 11회 베를린 하계 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선수가 우승하자,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선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
2. 사건의 배경
전 민족적 항쟁인 3.1운동 이후 총독부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언로를 개방하고 통치의 정당화를 위해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신문을 허가했다. 이는 언론을 통해 사회적 불만을 어느 정도 배출시키고, 언론 상에서 표출되는 불만을 미리 살펴서 한국인의 민족운동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를 위해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개인과 단체에만 신문발행을 허가했고, 『동아일보』는 이런 배경 속에 창간되었다.
『동아일보』는 한국 민중과 민족운동의 대변지(代辯紙)임을 자부하면서 신문을 발행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창간된 『시대일보』는 경영난으로 인해 불안정한 운영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1933년 여운형이 사장으로 취임하여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꾸고 재창간하면서 경영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언문신문 차압기사 집록(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1932.6.)
이 신문들은 총독부의 의도와 다르게 운영되었지만, 그렇다고 ‘문화정치’를 표방한 이상 이미 허가된 신문들을 폐간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20~30년대 전반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정당정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이런 자유주의적 성향의 정치 상황은 식민지에도 영향을 끼쳤고 총독부도 언론을 적극적으로 탄압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때문에 총독부는 검열 기준을 제시하여 신문이 제작되어 배포되기 이전 기사 내용을 미리 통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검열 기준은 매우 엄격하였다. 한국 독립과 관련한 긍정적인 내용이거나 해외 독립단체의 활동에 관한 내용은 금지였다. 이런 엄격한 기준 하에 기사들은 수정, 삭제되었고 사안이 심각하다고 생각되면 정간 처분까지 가는 강경한 처분을 내리며 신문사들을 압박했다.
「언문신문의 현황과 당국의 취체방침」, 『경무휘보』 362호(1936.6.)
1920년대만 해도 기사 압수와 삭제 처분이 각 신문사별로 수백여 건 발생했다. 발행정지도 여러 번 단행되었다. 이는 총독부의 언론통제가 가혹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신문 기자와 편집진들의 기사를 통한 저항이 지속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문이 정간 처분을 받는다면, 상당수의 기자들과 편집진은 자신들의 주장을 대중에게 전할 매체를 잃게 되고, 신문사 운영 또한 어려워져 신문기자들의 생계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따라서 신문들은 정간에 이를 정도의 논조는 피하지만 총독부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 민중을 대변하는 글을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정치적 억압이 강화되고 언론의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신문들의 필봉(筆鋒)도 조금씩 무디어졌다. 이렇게 직접적인 비판과 언급은 자제되었지만 여전히 일제와 총독부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신문사들은 논설과 각종 기사, 그리고 여러 가지 행사들을 통해 여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했다. 총독부도 이런 신문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신문들의 편집 방침과 내용을 바꾸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압박도 가하였지만, 신문사들은 지속적으로 저항하며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했다.
일제의 대륙침략은 1930년대 중반 중일전쟁으로 확전되었고, 군부의 요구에 의해 일제의 군국주의화가 가속화되며 총독부의 언론통제도 더욱 까다로워지고 엄격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36년 총독부가 제시한 「언문신문지면 개선사항」 6개 조항이다. 이는 처음에는 협조 요청이었으나, 점차 강제성을 띤 규정으로 변화해 갔다.
3. 사건의 전개과정
1936년 8월 1일부터 독일 베를린에서 제11회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한국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올림픽 경기에 주목했다. 비록 일본 선수단의 일원이지만 한국인 선수가 7명이나 선발되었고, 그 중에서 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인 손기정의 메달 획득이 유력하게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손기정 선수(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월 9일 마라톤대회가 열렸고,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기록으로 우승했다. 남승룡(南昇龍)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렇지만 시상식 사진에서 보이듯이, 손기정과 남승룡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손기정은 월계수 묘목을 가슴에 끌어안아 일장기를 가리려 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호외와 특집, 논설로써 손기정과 남승룡의 승리를 연일 다루었다. 이들 신문은 손기정, 남승룡의 활약을 무기력에 빠진 한국 민중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최대의 쾌거로 평가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거의 매일 관련 논설을 실었다.
특집기사도 며칠간 계속되었다. 『동아일보』는 「조선의 아들 손기정, 세계의 영웅이 되기까지」 (1)~(3) (1936.8.11.~13.), 「세계 제패의 개선가」(1936.8.11.), 「어서 오라 너 조선의 두 아들들이여」(1936.8.12.), 「그들은 세계에 알렸다. 영예의 남승룡군」 (1)~(2) (1936.8.14.~18.), 「우리 패업을 완성한 베를린 올림픽 총결산」(1936.8.18.), 「젊은 조선의 세계 제패, 마라톤 손·남 양군에 쏠리는 감격」(1936.8.25.) 등을 게재했다. 『조선중앙일보』도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십여 만 명 관중 환호리 손군 일착의 극적장면」(1936.8.11.), 「금번 올림픽에 일등한 손기정군 미담」(1936.8.12.), 「베를린-조선, 마라톤왕 우리들의 손군이 세계의 영관(榮冠)을 얻기까지」(1936.8.13.) 등을 게재했다. 심훈(沈熏)의 축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도 게재했다.(1936.8.11.)
동아일보는 각종 기념사업도 기획했다. 손기정 우승을 기념하는 체육관을 건립하자는 캠페인을 적극 전개했다. 또한‘스포츠 조선 세계제패가(歌) 공모’를 8월 20일부터 시작했다. 8월 26일부터는 베를린 올림픽 영화를 서울 부민관에서 무료 상영했다. 많은 인파가 몰렸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한국 언론들이 손기정의 승리를 기점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기사를 쓰는 것은 제재하지 않았고 다만 분위기가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사태를 지켜보았다.
일장기가 말소된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시상식 사진, 조선중앙일보(1936.8.13.)
그런 가운데 『조선중앙일보』가 8월 13일자 기사에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기정과 남승룡 상의 유니폼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말소(삭제)시켰다. 당시 손기정의 양정고등보통학교 마라톤 선배였던 기자 유해붕(柳海鵬)이 사진부원들과 협의하여 일장기를 삭제했다. 다만 손기정 선수를 비롯해 선수들 얼굴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사진 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검열관들이 일장기의 의도적 삭제를 파악하지 못했다.
『동아일보』도 8월 13일자 조간 1판인 지방판 2면에 『조선중앙일보』의 사진과 거의 동일한 사진을 게재했다. 그런데 손기정 선수의 상의 유니폼 일장기 표식이 직사각형의 테두리는 그대로 있었지만, 가운데 일장기 표식이 흐릿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옆에 서 있던 남승룡 선수의 상의 유니폼 사진에는 일장기가 그대로 있었다. 조간 2판인 경성판 2면에서는 시상대 위에 선 선수들 사진 중 손기정 선수의 사진만을 오려서 게재했다. 역시 가슴의 일장기가 흐릿하게 된 상태였다. 다만 이들 사진 역시 상태가 좋지 못했고, 일장기가 완전히 말소된 것이 아닌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검열관들이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수사 과정에서도 일제 경찰은 『동아일보』 8월 13일자의 손기정 일장기가 흐릿하게 된 부분은 문제 삼지 않았다. 그 주체에 대해서 현재까지는 증언이나 다른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13일자 보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것인지, 인쇄상의 문제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영예의 우리 손군 동아일보(1936.8.25.) 석간 제2판 2면
그런데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자 석간 제2판 2면에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다시 게재했는데, 이때 손기정 선수 상의 유니폼의 일장기가 완전히 말소되어 게재되었다. 8월 13일자 사진에서는 일장기 표식이 흐릿하게 되어 있었던 것과 달리, 이때의 사진은 일장기 부분이 시커멓게 인쇄되어 완전히 삭제된 사진이었다. 석간 제1판에는 일장기 표식을 그대로 실었다가, 제2판에서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을 실었다. 일장기 말소 사진 옆에는 검열에 걸려 기사가 삭제되어 빈 면으로 인쇄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사진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에 검열관이 일장기 말소를 바로 파악했다.
일제 수사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는 처음에는 운동부장 이길용(李吉用)이 『오사카 아사히 신문』 남선판과 서북판에 실린 사진을 가지고, 화가 이상범(李象範)에게 일장기를 흐리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이상범이 원 사진에 흰색 물감을 써서 일장기를 흐리게 했다. 그 후 사회부 기자 장용서(張龍瑞)가 사진과장 신낙균(申樂均) 및 사진부 기자 서영호(徐永浩)에게 보다 확실하게 일장기를 말소하자고 제안했고, 신낙균의 지시를 받은 서영호가 청산가리를 사용해서 완전히 일장기 부분을 말소하여 인쇄를 넘겼다.
4. 일제의 언론 탄압과 언론 장악
조선총독부는 일장기 말소를 인지하자, 당일 『동아일보』의 발매 및 배포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이길용과 이상범을 비롯한 관련자 다수를 연행해 취조했다. 여기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신동아』 주간 겸 잡지부 주임 최승만(崔承萬), 『신가정』 주간 변영로(卞榮魯)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행된 사람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사장 송진우와 주필 김준연(金俊淵) 등 『동아일보』 경영·편집진과의 연관 여부를 집중 추궁당했다.
경무국은 8월 27일 조사결과를 발표했고, 동아일보에 대한 무기정간 조치를 취했다. 동아일보는 이미 인쇄된 8월 28일자를 마지막으로 8월 29일부터 무기 정간에 들어갔다. 정간은 무려 10개월이나 계속되었고 1937년 6월 2일이 되어서야 해제되었다.
『동아일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조선중앙일보』에 대한 수사도 9월 1일부터 시작되어, 4명이 연행되었다. 이에 『조선중앙일보』는 9월 4일자 석간을 마지막으로 자진 휴간(休刊)하였다. 『동아일보』의 무기정간 처분을 보면서, 동일한 처분을 예상하고 자진 휴간에 들어간 것이다. 이후 내분 속에 복간되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경영진은 복간(復刊)을 위해 총독부와 교섭에 나섰다. 그렇지만 조선 총독으로 새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강경한 정책을 추진했다. 총독부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강압적 언론정책을 본격화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인사개혁’과 ‘지면의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인사개혁의 주요 요지는 사장 송진우의 사임을 비롯하여, 주요 간부 및 사원들의 해고와 사내 다른 직무종사 금지, 사장·부사장·주필·편집국장 임용시 당국의 사전 승인, 당국이 지정한 항목에 대한 지면쇄신 서약 등이었다.
「동아일보 게재의 손기정 사진 중 일장기 말소에 관한 건」(경성지방법원, 1936.8.28.)
총독부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동아일보』를 총독부 통제 하의 언론기관으로 전면 개편하려고 했다. 그를 위해 ‘인사개혁’이란 명목으로 일장기 말소사건에 관련된 기자들뿐만 아니라, 경영과 편집 등 신문사 모든 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장 송진우를 비롯해서, 그와 가까운 주요 간부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사장·부사장·주필·편집국장 등 신문사 핵심 간부들을 임용할 때 총독부의 사전 승인을 받을 것을 제시했다. 인적 개편을 통해 언론통제를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8월 28일에 주필 김준연이 사직했다. 9월 25일에는 이길용 등 일장기 말소사건 관련자들이 사직하였고, 직후 석방되었다. 11월 11일에는 송진우가 사장에서 물러났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에서 추천한 양원모, 김병로(金炳魯) 등의 사장 인선을 모두 거부했다.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조치를 ‘무단정치의 재현’이라고 비판하고 폐간을 거론하면서 총독부에 저항하였지만, 총독부는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1937년 5월에는 정해진 방침에 따라 해결하지 않으려면 속히 폐간계를 제출하라는 최후통첩을 통보했다.
폐간의 기로에 선 『동아일보』는 백관수(白寬洙)를 영입하여 사장 후보로 선출하고, 총독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총독부는 백관수를 사장으로 내락(內諾)하면서, 지도정신의 시정과 「언문신문지면개선사항」등과 같은 검열기준을 준수할 것, 불량사원 정리, 사장 이하 주요 간부 임명 및 선임 사전 승인, 서약 위반 시 제재 등의 내용을 담은 서약서를 제출할 것, 또한 송진우의 주식을 새 사장에게 양도하고 취체역에서 사임할 것 등을 요구했다.
『동아일보』는 이러한 총독부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1937년 6월 2일, 『동아일보』의 무기정간이 해제되었다. 『동아일보』가 수용한 「언문지면쇄신개선요항」은 신문의 거의 모든 기사 내용과 편집방향을 세세하게 규제하는 강력한 언론보도지침이었다. 이러한 보도지침 하에서는 민족 언론으로서의 역할은 고사하고 사실의 정확한 보도도 어려웠다. 이 지침은 이후 여타 언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수용되었다.
5. 사건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
「동아일보 발행정지에 관한 건」(경기도 경찰부장, 1936.8.29.)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신문들은 민족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일제 만주침략 이후 정치적 억압이 강화되면서, 또한 언론의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신문들의 필봉(筆鋒)도 조금씩 무디어졌지만, 그렇다고 일제와 총독부에 대한 비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신문들은 한국 민중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당시 민족 언론의 분위기와 역할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을 계기로, 이를 매개로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각을 꾀하고,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지를 표출하고자 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은 그런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이었다. 당시 일부 기자들은 저항의식과 민족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장기를 말소했다.
일제는 일장기 말소사건을 민족 언론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한 구실로 이용했다. 그 결과 『동아일보』에 대해 무기 정간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정간 해제 조건으로 송진우를 비롯한 『동아일보』 주요 간부들의 사퇴와 강력한 언론보도지침 수용을 강제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폐간할 것을 종용했다. 생존의 기로에 선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요구를 수용했고, 10개월여 만에 정간이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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