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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142
성명
한자 李麟榮
이명 李寅榮, 李時榮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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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3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1895년 유인석 등(柳麟錫等)거의(擧義)하여 1896년 여름에 해병(解兵)하고 1905년에 다시 원주(原州)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었고 그 (後) 양주(楊洲)로 옮겨 의병(義兵) 원수부(元帥府) 삼도총대장(三道總大將)이 되었는데 그 때 각 도(各道)에서 회합(會合)의병 수(義兵數)만여명(萬餘名)이었다 그 (後) 즉시(卽時) 서울로 진격(進擊)하여 통감부(統監府)분쇄(粉碎)하고 위납(僞納)취소(取消)하여 국권(國權)회복(回復)계획(計劃)을 세우고 먼저 서울에 심복인(心服人)을 보내 각국 영사(各國領事)호소(呼訴)하여 원조(援助)(請)하고 이인영(李麟榮)이 먼저 3천명(三千名)인솔(引率)하고 동대문(東大門)밖까지 들어와서 왜적(倭敵)분전(奮戰)하였으나 저적(抵敵)할 수 없이 퇴진(退陣)하였다. 또 후군(後軍)여주(驪州)에서 패전(敗戰)하였다.
2.1909년 상주(尙州)에서 산중(山中)에 숨어 있다가 황간(黃澗)에서 체포(逮捕)되어 대전옥(大田獄)에서 경성옥(京城獄)으로 가진 악형(惡刑)을 받다가 옥중(獄中)에서 순사(殉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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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이인영은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이며,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원근에 알려진 유학자로 많은 문인들이 추앙하여 마지않았다. 후에 문경(聞慶)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마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운강 이강년(雲崗 李康秊)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오백 명을 영솔하여 춘천(春川)과 양구(楊口) 사이에서 일군 80명과 격전하여 적 다수를 도륙하였으며, 이때 아군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896년 여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고종의 선유문을 받들어 의진을 해산하고 문경에서 은퇴생활을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1907년 8월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해산군들이 각지의 의병에 합세하여 의병운동의 양상이 변화하고 다양해지는 등 의병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에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原州)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의병장 이은찬(李殷瓚)과 이구재(李九載, 求采)가 해산병 80명이 포함된 5백 명의 의병을 소모한 후 이인영을 찾아와 의병대장이 되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나도 창의(倡義)의 뜻을 품은 지는 오래되나 부(父)가 병상에 누워 있어 기거를 사람에 의지해야 할 형편이므로 차마 가정을 떠나지 못할 정리라."" 고 말하였다.

이에 이은찬은 ""이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날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사사로써 공사를 미루리오."" 하면서 4일간 그곳에 머물면서 간곡히 권유하였다.

이인영은 드디어 이를 승낙한 후 강원도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 창의 대장에 오른 후 사방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소모하였다. 격문이 자자구구마다 비분강개에 차 원근으로부터의 응모자가 날로 불어났다.

이때 소모의 방법은 사람을 시켜 마을마다 격문을 보내어 일반에게 알리고 응모자를 비밀리에 지정된 장소로 모이게 하는 것이었다. 소모에 응한 의병이 수천 명(그 중에 해산병 2백 명)에 달하자 우선 급한 것은 식량과 자금 문제였다. 일부 무고한 양민의 미곡을 탈취하여 의병운동의 자금으로 유용하고자 하는 무리도 있었으나, 이인영은 ""가련한 창생에게 참해(慘害)를 주어 기한(飢寒)에 떨게 하는 것은 차마 우리들이 할 바가 아니오. 또 의병이 할 행위가 아니니, 우리는 오직 천의(天意)를 대신하여 그들 매국노 5간7적(五奸七賊) 및 신협약을 체결하는데 부화뇌동한 현 내각원(內閣員) 등의 불의의 재보를 빼앗아 군자(軍資)를 도울 뿐이라."" 하여 매국노들의 재산을 빼앗아 의병활동에 충당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인영이 관동 창의 대장에 오르자 그의 공평한 인품을 흠모하여 원근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주야부절로 모여들어 군세는 더욱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이인영은 원주를 떠나 횡성(橫城)·지평(砥平)·춘천을 횡행하며 8도의 의병 규합에 진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격문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발하여 1907년 11월에 각도의 의병 부대를 양주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원주를 버리고 양주를 8도 의병의 집결처로 한 것은 원주 땅은 교통이 불편하여 대사를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용병(用兵)의 요결은 고독(孤獨)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은 즉 각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로 경기 땅을 쳐들어가면 온 천하는 모두 우리 것이 될 것이다"" 즉 이인영은 이 격문에서 고립적인 의병항쟁을 지양하고 대동단결의 힘으로 서울을 공략하여 의병들의 최후 목표를 달성하고자 호소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인영은 이에 앞서 1907년 9월(음력) 원주에서 관동창의대장의 이름으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동포들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초하여 발송하였으니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제국주의 군인을 모조리 죽이는데 힘을 다해야 한다.

광무 11년(1907년) 9월 25일

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영

또한 김세영을 서울에 파견하여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격문을 발송하였으니 그 격문의 개의는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조난(遭難)을 설명하면서 의병은 순수한 애국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여 정의·인도를 주장하는 여러나라의 동성응원(同聲應援)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 격문은 각국으로 전달되어 항일의병투쟁의 합법성을 국제적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인영의 격문(통문)에 따라 1907년 11월(음력) 각도 의병장들은 속속 양주(楊州)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각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온 각도의 의병장들을 보면, 전라도는 문태수(文泰洙), 충청도는 이강년(李康秊), 강원도는 민긍호(閔肯鎬), 경상도는 신돌석(申乭石), 평안도는 방인관(方仁寬), 함경도는 정봉준(鄭鳳俊), 경기도는 허위(許爲), 황해도는 권중희(權重熙)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통문을 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방인관(方仁寬, 평안도)은 80명의 의병을, 정봉준(鄭鳳俊, 함경도)은 7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자발적으로 연합전선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때 각도의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받은 이인영은 각도 의병장과 상의한 후 진명(陣名)을 내리고 각군의 칭호를 정한 후 전국 연합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하였다. 황해도의 권중희는 그후 13도 창의대장 이인영의 배하에 소속케 되어 황해도는 공장(空將)의 도가 되었으므로 허 위가 경기·황해도를 지배하고 박정빈(朴正斌)을 황해도의 아장(亞將)으로 삼았다. 확정된 부서는 다음과 같다.

13도 창의 총대장:이인영

전라유진소 전라창의대장:문태수호서유진소 호서창의대장(충청):이강년

교남유진소 교남창의대장(경상도):신돌석

진동유진소 진동창의대장(경기):허 위(아장 박정빈)

관동유진소 관동창의대장(강원도):민긍호

관서유진소 관서창의대장(평안도):방인관관북유진소 관북창의대장(함경도):정봉준

이렇게 구성된 13도 연합 의병 부대의 총수는 약 1만 명(혹은 8천명)이었고 그 가운데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근대적 무기, 즉 양총을 가진 과거의 진위대 병사들 및 기타의 훈련받은 군인이 약 3천 명이 있었다. 즉 문경으로부터 이은찬과 이구재가 거느리고 온 80명, 강원도의 민긍호의 부하가 약 8백 명, 강화·청주의 해산병, 기타 경기 각지의 해산병, 기타의 훈련받은 구군인이 양주 집합시 약 3천 명이나 되었다. 이는 해산병과 그 이전의 군인이었던 자를 합한 숫자였다. 그러나 그 이후 의진의 개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수부 13도 총대장:이인영

경기·황해·진동의병대장:권중희군사장:허위

관서의병대장 : 방인관

관동의병장:민긍호

관북의병대장 : 정봉준호서의병대장 : 이강년

호남의병대장:문태수

교남의병대장:박정빈

13도 연합 의진은 서울 공략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11월부터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군과 싸워 퇴군하던 1908년 2월 초순(음력 1907년 12월말)까지 서울 근교에서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당시의 의진의 모습에 대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서로 연락하여 그 성원을 받아 각 도에 격문을 전하고 고기(鼓起)로써 하니 원근 응모자가 주야부절로 모인 자가 만여 인이었다. 이에 있어서 서울로 진군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협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하여··· 군사(軍師)는 그 군여(軍旅)를 정돈하고 진발(進發)을 준비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각도 의여(義旅)로 하여금 일제 진군을 재촉하고, 몸소 3백 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각 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병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분전하였으나 적에게 대적할 수 없어 이에 퇴군하였다."" 본래 연합 부대의 계획은 동대문 밖에서 전군이 집합하여 대오를 정비한 후 음력 정월을 기하여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즉 1908년 1월 28일(음력 12월 25일) 의병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 사망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이인영은 부음을 듣고 곧 후사를 군사장 허 위에게 맡기고 자신은 즉시로 문경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군사장인 허 위가 친히 3백의 정병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집합하기로 약속한 각지 의병 부대와 연락이 끊어지게 되고, 이 기미를 알게 된 일본군에게 각 처로부터 닥쳐오는 의병 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연합 의진의 서울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앙양되어가는 가운데 단행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1908년 2월(양력) 이후 서울 근교에서의 의병들의 활약 기사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이인영의 하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후 부친의 장례를 마친 이인영에게 많은 의병들이 다시 거의를 권하였으나, 그는 나라에 불충한 자는 어버이에게 불효요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나라의 불충이니, 효이니 충이니 하는 것은 그 도가 하나요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국풍(國風)을 지켜 3년 종상(終喪)의 효도를 다한 후 재기하여 13도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으로 일인을 소탕하겠노라고 말하면서 유생의 입장에서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후 이인영은 노모와 슬하의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尙州郡)에 잠류(潛留) 하였다가 다시 충북 황간군 금계동(黃澗郡 金溪洞)에 이거하여 살던 중 1909년 6월 7일 일군 헌병(憲兵)에게 체포되어 동년 9월 20일 경성 감옥에서 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126·127·128면
  • 대한매일신보 1909. 9. 21
  • 일본외교문서 41책 81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02·503·504·506·507·51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인영 자는 공진(公振), 호는 중남(中南), 이명: 이인영(李寅榮), 이시영(李時榮) 경기 여주 정미의병
본문
1868년 9월 23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북면(北面) 교항동(橋項洞, 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서 이현상(李顯商)과 청주 한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공진(公振), 호는 중남(中南), 이명은 인영(寅榮), 시영(時榮)이다. 집안은 대대로 여주군 북면에 거주하며 관직과 문필을 계승한 양반가문이다. 어려서 서울 선비 정동현(鄭東鉉)에게 유학을 배워 어릴 적부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부친상 중에 국내의 시사문제를 다룬 『도기기언(道基記言)』이란 책을 집필하는가 하면 무신이었던 고조부 · 증조부의 영향을 받아 군사분야에도 지식이 있었다. 한편 관상 · 천문 · 방위(方位)와 같은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고 성품은 호탕하면서도 엄격하고 효성이 깊었다. 직책으로는 무임직인 대성전(大成殿) 재임(齋任)을 지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 2월 초에 경기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는 영월에서 의병장에 오른 제천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이 각지에 보낸 창의격문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주에는 심상희(沈相禧)가 창의하여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주를 떠나 원주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전신선을 절단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민심의 변화와 군량 부족으로 의병운동의 열기가 식어가자 자신의 부대를 떠나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합류했다. 이는 개화파 정부의 의병해산 권유를 받아들여 주변의 소규모 의진에 해산을 강요하는 심상희 의병장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6년 5월 중순 의병부대를 이끌고 충북 수안보와 가흥의 일본군 수비대를 여러 번 공격했으나 무기 열세와 군량 부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96년 5월 하순 제천의병이 전열을 재정비할 때 별영장(別營將)을 맡았고, 이어 후군 소모장 별진에 소속되어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였다. 제천의병이 개화파 정부의 해산 권유를 거부하고 북상할 때 유인석에게 의진을 원주군 안창으로 옮기도록 권했다. 그러나 제천의병이 강원도 정선을 거쳐 다른 길을 택하자 따라가지 않고 개화파 정부의 해산권유에 응하여 귀가했다. 이후 정미의병이 거의하기 전까지 부모를 모시고 문경에 은거했다. 1907년 8월말 여주 · 지평 · 원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구채(李球采)와 이은찬(李殷瓚)이 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찾아왔다. 이들은 4일간이나 시사를 논하며 의병장에 오를 것을 간곡히 청했다. 게다가 병석에 누워있던 부친도 창의를 적극 권했다. 이에 9월 2일 원주에서 거의의 깃발을 들었다. 의병장에 오른 후 각지에 격문을 보내 창의를 독려했다. 그러자 많은 군사들이 몰려들어 대규모 연합부대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제천 일대에서 활동하던 이강년(李康秊) 의병의 휘하 부대와 합동작전을 펴면서, 군사들의 약탈 행위를 엄히 금하고 부족한 군량과 물자는 친일파의 것을 빼앗아 사용했다. 이어 원주는 교통이 불편해 큰일을 도모할 곳이 못되기 때문에 친일파와 일본군을 축출하고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양주(楊州)로 진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의병활동의 목표를 고종 구출로 정한 후 관동지역 의병부대의 편성작업에 착수했다. 서울진공작전의 주축을 이룬 관동창의군의 중요 직임에는 관동창의대장인 그를 필두로 총독장에 이구채, 중군장에 이은찬, 좌군장에 방인관(方仁寬), 우군장에 권중희(權重熙), 유격장에 김해진(金海鎭), 좌선봉장에 정봉준(鄭鳳俊), 우선봉장에 김병화(金炳和), 후군장에 채상준(蔡相俊), 운량관에 현이보(玄履甫), 재무장에 신창선(申昌先) · 민춘원(閔春元), 좌총독장에 김현복(金顯福), 우총독장에 이귀성(李貴成), 진위대사령부에 민긍호(閔肯鎬) 등이 임명되었다. 관동창의군을 이끌고 원주에서 지평으로 이동하여 1개월간 머물며 일본군과 수차례 전투를 치렀다. 이때 친일파 세력과 일본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려면 서울진공작전이 반드시 필요하고, 서울진공작전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대규모 연합부대를 편성해야 한다는 인식 하에 군사력 보강에 나섰다. 이에 16진의 병력을 합하여 수천 명의 의병이 그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관동창의군의 군세를 성대하게 갖춘 후에 전국 의병부대의 통합과 의병운동이 독립전쟁임을 널리 알렸다. 1907년 10월경 서북 양도를 제외한 전국 각 지역의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촉구했다. 이는 전국적인 통합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서울로 진격하여 고종 구출작전을 벌이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이와 동시에 10월 중순 일본의 대한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13도 관찰사, 대한매일신보사, 각국 공사관, 일본 통감에게 보냈다. 또한 1907년 9월 25일자 대한관동창의장(大韓關東倡義將) 명의의 격문을 각국 영사관과 미국주재 한인들에게 보냈다. 이는 한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세력을 물리치고 국가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동창의군을 이끌고 지평에서 양주로 이동하여 13도창의대진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수비대 및 친일관군과 수십 회의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전투는 1907년 11월 7일부터 9일까지 전개된 지평군 상동면 일대에서 벌어진 삼산(三山)전투와 연천군 마전읍 일대에서 벌어진 마전(麻田)전투였다. 이 두 차례 전투는 을사늑약 후 항일의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개한 전투 중 1906년 5월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이 치른 홍주성전투와 함께 규모와 피해가 가장 컸던 전투였다. 수천 명의 의병들과 5~600명의 일본군이 동원된 2차례의 전투는 양측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그야말로 대격돌이었다. 그가 보낸 격문에 호응하여 양주에 집결한 의병부대는 총 48진, 약 1만 명에 달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통솔하는 강원도의 부대가 1천 명, 민긍호 부대가 2천 명 등 강원도 의병이 약 6천 명, 경기도의 허위 부대가 약 2천 명, 평안도의 방인관 부대가 80명, 함경도의 정봉준 부대가 80명, 전라도의 문태수 부대가 100명 등이었다. 다만 충북에서 활동 중이던 이강년 부대는 합류하지 못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긴밀한 협의를 거쳐 13도창의대진소를 성립시킨 후 그를 13도창의대장에 추대했다. 그가 대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구채 · 이은찬으로부터 또 고종의 측근으로부터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고 의병장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각지 의병을 양주로 집결시키는 데 성공한 점, 을미의병운동 때 공정하게 행동하여 타인의 신뢰를 얻은 점, 양주에 집결한 여러 의병장들 중 신분과 문벌이 가장 높은 점 등이 다각도로 고려된 결과였다. 1만여 명이 양주에 모여 전국적인 연합의병 부대가 성립되자 13도창의군의 직임을 배정했다. 1907년 말에 부대 편제를 전국적 의병조직에 맞게 재편했지만,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느라 상경하여 합류하지 못하는 의병부대가 생김에 따라 1908년 1월경에 다시 부대 편제를 재편했다. 이때 다시 그는 13도창의대장에 올랐고, 군사장에 허위, 관동창의대장에 민긍호, 호서창의대장에 이강년, 교남창의대장에 박정빈, 진동창의대장에 권중희(權重熙), 관서창의대장에 방인관, 관북창의대장에 정봉준 등이 임명되었다. 이는 영 · 호남 지역에서 활동 중인 문태수 · 신돌석을 빼고 조만간 상경이 가능한 충청도의 이강년을 그대로 두고, 경기도를 맡은 진동창의대장 허위를 군사장(참모장)으로 승급시킨 재편이었다. 13도창의대진의 서울진공작전 기본구상은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모여 대오를 정비한 후 1908년 1월을 기해 서울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일제 통감부를 타격하여 항복을 받고 신협약(정미7조약) 등 망국조약들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또 한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인정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제1조의 내용대로 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이 복안에 따라 허위로 하여금 300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허위의 선봉대는 무기와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1908년 1월 15일경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 허위를 응원하기 위해 약 2천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당도했으나 선봉대의 패배로 인해 의병의 사기가 꺾인 상태였다. 곧이어 1월 28일 부친의 부음을 접한 그는 “나라에 불충함은 부모에 불효함이고 부모에 불효함은 나라에 불충함이다. 그 도(道)는 하나며 둘이 아니다. 국풍(國風)을 지켜 3년상을 치르고 효도를 마친 후 재기하겠다”며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당부하고 문경의 본가로 내려갔다. 귀향하면서 활동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진에 배부했기 때문에 모든 의병부대는 서울진격작전을 중지했다. 3년상을 마치면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헌병과 경찰은 13도창의대진소의 총대장인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유인석으로부터 외국으로 피신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군의 수색이 날로 심해지자 이름을 ‘시영(時榮)’으로 바꾸고 숨어 지냈다. 검문을 피해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충북 황간군 금계동에 이거했다. 그러나 끝내 부친의 3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1909년 6월 7일 문경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을 때 13도창의대장으로서의 의연함과 당당함을 유지하며 일본인들을 준열하게 꾸짖고 독립정신과 충효정신을 분명히 밝혔다. 창의 목적을 추궁하는 일본인들에게 “시모노세키조약의 내용대로 한국의 독립과 황실의 안전을 꾀하고자 했다”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고 우리의 독립을 공고히 한 후에 간신을 살육하려 충군애국했다” “충군애국의 뜻은 성의에서 나온 것이다” “일러전쟁과 군대해산으로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거의했다”고 말했다. 이는 유교사상에 기반한 충국애국론 · 반일의식 · 근황(謹皇)의식 · 독립정신에 따라 일본군과 친일파를 물리치고 황실을 공고히 하고 한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의병운동을 벌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심문조서 작성이 끝날 무렵 최후 진술을 권하는 일본인들에게 “국가를 위하여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창의하여 성의를 나타냈으나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부친의 임종도 뵙지 못하고 말았다. 충효(忠孝) 공히 죄인으로 천지에 몸 둘 바가 없게 되었으니 죽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1909년 8월 13일 경성 지방재판소에서 ‘내란 조의(造意) 및 지휘범’의 혐의로 교살형을 언도받고, 9월 2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의 교수대에서 생애를 마쳤다. 임종 시에 서양의 침략을 막아내려면 한일 간의 평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동양평화론이 담긴 한시를 남겼다. """"밝고 밝은 해와 달이 중주(中洲)에 걸렸는데 / 온 세상의 바람과 물결이 넘쳐 흘러드네 / 도요새와 조개는 어찌 그리도 다투는가 / 서주(西洲)가 힘도 안들이고 그 둘을 잡아가겠네."""" 유해는 가족에게 인계되어 처음에는 처가가 있는 원주에 묻혔다가 나중에 김천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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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수범 교(絞) 경성지방재판소 1909-08-1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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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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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항일의병 13도창의군 탑 서울특별시 중랑구
2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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