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441
성명
한자 朴準承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7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삼십삼인중의 일인으로 2년 징역형을 받음
1927년 3월 23일 서거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891년(고종 29)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1897년(광무 1)에 접주(接主)가 되고, 1908년(융희 2)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에 전남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巡諭委員長)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경에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하여 장성(長城)·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그는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하였다.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검토를 하였다. 그는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 고등경찰요사 17·2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1·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92·50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14·20·28·39·41·44·46·5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8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66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3·147·148·45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준승 자암(泚菴) 전북 임실(任實) 3.1운동
본문
1865년 11월 24일 전북 임실군(任實郡) 청웅면(靑雄面) 남산리(南山里)에서 아버지 박호진(朴昊鎭)과 어머니 변씨(邊氏)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도호(道號)는 자암(泚菴)이다. 7세 때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0세 때 동료를 가르칠 정도로 총명하였다. 15세 때부터 2년간 양한묵(梁漢默)과 함께 김영원(金榮遠)에게 사숙하였다. 24세가 되던 1890년 4월 23일 동학(東學)에 입도하였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기포(古阜起包)를 계기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7월 임실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후 동학여당(東學餘黨) 색출을 피해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결코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동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1897년 접주(接主), 수접주(首接主), 1902년 도집(都執)에 선임되어 동학농민운동으로 와해된 교단 조직을 재건하고 교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04년 8월 말 동학 교단에서 문명개화운동을 위해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흑의단발운동(黑衣斷髮運動)을 전개하자 청웅면 남산리에서 진보회 지회를 조직하고 그동안 길러왔던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러나 진보회가 일진회(一進會)와 통합하여 친일행위에 앞장서자, 손병희(孫秉熙)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명하고 퇴회신교(退會信教)를 통해 일진회 추종자를 제거해 나가는 한편 이용구(李容九) 등 일진회 핵심인물 1백여 명을 출교시키는 등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이 시기 전라도의 유력한 접주로서 손병희와 뜻을 같이 하면서 이용구의 일진회에 대항하여 교인들을 수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다. 1906년 청웅면 삼화소학교 건립추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천도교 임실교구 설립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1912년부터 전남 장성군(長城郡)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巡遊)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천도교 전라도 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전파하였다. 1916년 2월 천도교단 내에 이종일(李鍾一)을 중심으로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이 결성되자 이종훈(李鍾勳), 장효근(張孝根), 김홍규(金弘奎)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 교서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화원칙의 일환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천도교단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 교단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이 시기 천도교중앙총부 경도사(敬道師), 도사(道師)로 활동하였다. 천도교단 지도자들은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1919년 1월 상순 재일유학생들이 파견한 송계백(宋繼白)으로부터 2 · 8독립선언 계획을 듣게 되었다. 손병희는 젊은 학생들이 의거를 감행하려는 이때에 자신들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독립운동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이에 기독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여기에 학생층이 참여하여 민족대연합전선을 형성함에 따라 3 · 1운동 계획은 일원화되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3 · 1운동 계획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인 2월 24일 천도교 도사로서 손병희에게 기도회의 종료를 보고하고, 1월 21일 붕어(崩御)한 광무 황제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 다음날 손병희를 방문한 뒤, 이어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났다. 이때 권동진으로부터 조선총독부에 건의서를 제출하여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주저 없이 3 · 1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임예환(林禮煥), 권병덕(權秉悳),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홍병기(洪秉箕), 양한묵, 이종훈, 이종일 등과 함께 천도교 측 민족대표 15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어 2월 28일 손병희 집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한용운의 식사(式辭)에 이어 참석자 모두는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이들은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경무총감부에서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조선은 4천 년 전에 건국하였으며 나도 날 때는 독립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독립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구주(歐洲)에서 국제연맹회의를 하고 있는 고로 이 좋은 기회에 독립하지 아니하면 안 될 줄로 생각한다”라고 대답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법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조선 독립이 될 줄 믿고 있는가”라고 묻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거침없이 대답하여 민족 독립에의 확고한 신념을 분출하였다. 나아가 일본인 판사가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금후 기회만 있으면 하겠다”고 답변함으로써 불요불굴(不搖不屈)의 독립정신을 드러냈다. 경성지방법원의 3차례 신문에 이어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하였다. 옥고를 치루는 중에도 천도교단 도사직을 유지하였다. 출감 이후 1922년 천도교중앙종리원 종리사(宗理師), 감사정(監査正), 포덕사(布德師)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천도교단이 신 · 구 양파로 분화되자 구파의 천도교중앙종리원 종법사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27년 3월 23일 전북 정읍군 산외면 평사리에서 61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장례는 천도교장(天道敎葬)으로 지내고, 정읍군 북면(北面) 마정리(馬亭里)에 안장하였다. 1963년 6월 정읍 구미동(龜尾洞) 성황산(城隍山)으로 이장하고, 33인의 한사람인 이갑성(李甲成)이 묘비문(墓碑文)을 찬하였다. 저술로는 『우묵눌(愚黙訥) 삼자(三字)』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징역 2년(원판결 취소),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신청은 각하(却下)함, 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5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6 인물카드 보안법위범 징역2년 경성복심법원 1920-10-31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북도 정읍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2 기타 봉황각 서울특별시 강북구
3 기념관 애국지사 박준승 기념관 전라북도 정읍시
4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5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6 공원 독립유공자 박준승선생 추모공원 전라북도 임실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박준승(관리번호:2441)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