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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2014
성명
한자 閔宗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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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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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일찍이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나 시세(時勢)가 글러저 감을 보고 고향인 정산(定山)은퇴(隱退) 해 있었다.

2.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체결(締結)되자 제일(第一) 먼저 동지(同志)들을 규합(糾合)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이듬해 5월 의병(義兵)을 일으켜 남포(藍浦), 보령군(保寧郡) 등을 점령(占領)하고 동월(同月) 19일에 일본 헌병(日本憲兵)주둔(駐屯)하고 있는 홍주(洪州)습격(襲擊), 점령(占領)하였다.

3. 왜군(倭軍)에 패한 바 왜 헌병(倭憲兵)에 체포되어 이듬해 7월 평원리(平原里)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그 후 고종(高宗)특사(特赦)석방(釋放)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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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규합(糾合) : 어떤 일을 꾸미려고 세력이나 사람을 모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민종식은 명성황후의 척족으로 1861년 여주(驪州)에서 판서 민영상(閔泳商)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뒤에 충남 정산(定山)으로 옮겼다.

1882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으나, 1895년 을미사변 등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정산을 중심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자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하자 상경하여서 황제에게 윤허를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우선 김복한(金福漢).안병찬(安炳瓚)과 접촉하여 뜻을 모았다.

다시 척신인 민영휘(閔泳徽).민경호(閔京鎬), 그리고 김승규(金昇奎)와 함께 상소할 일을 의논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만류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이 일본 헌병대에 노출되어 상소문마저 빼앗기고 고향으로 하향하였다.

1906년 3월 처남되는 이용규(李容珪).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하여 정산군 천장리(天庄里)를 거점으로 하여 격문 및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청원문 작성, 군용품(軍用品) 준비 및 동지 규합에 나섰다.

민종식은 충청남도.전라북도 지역의 의진과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의병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906년 6월 민종식 의진은 홍주(洪州) 근처 합천(合川)에서 일대교전을 벌였으나 박창로(朴昌魯).안병찬(安炳瓚) 등 40여인이 체포되었다.

이즈음 최익현(崔益鉉) 역시 정산에서 의거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민종식의 의진이 형성되었음을 알고, 임병찬(林炳瓚)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남 태인(泰仁)을 거점으로 하여 활약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 호남과 호서 의진을 형성하여 호응하기로 약조하였다.

가재(家財)를 기울여 거의 준비를 마친 민종식은 드디어 1906년 5월 11일(음력 4. 18) 이용규.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정재호(鄭在鎬).황영수(黃英秀).이세영(李世永),이상구(李相龜) 등과 함께 충청도 홍산(鴻山) 지치(支峙)에서 거의하였다.

이들은 행군하여 서천(舒川)의 구병동(九兵洞)·문장동(文章洞)을 거쳐 서천읍에 이르렀을 때 의병의 수는 이미 천여 명에 달하였다.

또 비인(庇仁).판교(板橋)를 거쳐 남포(藍浦)에 이르렀을 때 사방에서 호응하는 군사가 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을사의병 중 가장 성대한 의진이었다.

특히 서천과 남포에서는 많은 총포와 탄약을 접수하였다. 그리고 두 고을의 친일군수를 감금하고, 일군과 접전하여 수명을 생포하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4일간 남포에서 유진하던 중 보령(保寧)의 우국지사 유준근(柳濬根)을 맞이하였다. 이때 의병 해산을 종용하러 온 관군측과 담판이 있었는데 의병진의 사절을 관군이 억류하였다. 이에 유준근이 적중으로 들어가 의리로 따져 적의 기개를 꺾고, 결박되어 있던 사절을 데리고 돌아왔다.

민종식은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남포에서 다시 보령(保寧)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5월 19일(음 4월 26일) 홍주(洪州)로 진격하였다.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대항하는 적군을 격파하고 성중(城中)으로 포화를 퍼부었다. 적군은 거류 일본인과 함께 북문으로 탈출하여 예산(禮山)으로 달아나 홍주성은 의병진의 손에 장악되었다. 입성한 후 민중들을 안심시키고 진용을 정비하여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 드리고 피를 마시며 구국전투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서하였다.

다음에 새로이 아래와 같이 부서(部署)를 확정하였다.

대 장 민종식(閔宗植) 서 기 문석환(文奭煥)

참모장 김광우(金光祐) 운량관 박제현(朴齊賢)

조희수(趙羲洙) 성재평(成載平)

채광묵(蔡光默) 향 관 박윤식(朴潤植)

중군장 정재호(鄭在鎬) 좌우사 소모장 최상집(崔相集)

황영수(黃英秀) 엄순영(嚴淳永)

이세영(李世永) 좌익장 이상구(李相龜)

유격장 채경도(蔡景燾) 우익장 신현두(申鉉斗)

좌군장 윤필구(尹弼求) 참모사 안병찬(安炳瓚)

윤병일(尹炳日) 박창로(朴昌魯)

송순묵(宋淳默) 안항식(安恒植)

우군장 이병년(李秉年) 신복균(申復均)

이범구(李範九) 이용규(李容珪)

홍순대(洪淳大) 이식

소모장 지우범(池禹範) 유병장 유준근(柳濬根)

소모관 이만식(李晩植) 유병소향관 민정식(閔廷植)

수문장 최선재(崔璇在) 유격장 김광현(金光鉉)

수성장 조병순(趙炳舜) 윤상배(尹相培)

선봉장 이남규(李南珪) 돌격장 남계원(南啓元)

박영두(朴永斗) 안병림(安炳琳)

후군장 정해도(鄭海燾) 곽한일(郭漢一)

의진이 홍주에 입성하자 신보균(申輔均).신현두(申鉉斗).이 식.안항식(安恒植).김상덕(金相悳).윤석봉(尹錫鳳).유호근(柳浩根).채광묵(蔡光默) 등이 입진(入陣)하였다. 그 중 김상덕은 군사(軍師)에, 신보균은 유병소 서기에 임명하였다. 모든 군사들을 6대로 나누어 4대문과 각 요소를 지키게 하였는데, 적군도 그날로 홍주 근처에 집결하였다.

4월 27일(양 5월 20일) 적의 총공격으로 피아간에 일대 공방전이 있었다. 처음에 의병진의 전세가 크게 유리하여 35인을 사로잡아 처형하였으나 적군측의 정예병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윤 4월 7일(5월 29일) 예산(禮山) 지방에서 곽한일(郭漢一).남규진(南奎振)의 의진이 홍주성으로 입성, 홍주의진에 합류하여 방비태세를 강화하였다.

이에 일부 부서를 개편 재배치하여 접전에 대비하였다.

중군장 이세영(李世永) 후봉장 박영두(朴永斗)

참모장 김상덕(金相悳) 참 모 윤상봉(尹相鳳)

소모장 곽한일(郭漢一) 채광묵(蔡光默)

향 관 민정식(閔廷植) 이상두(李相斗)

선봉장 정해두(鄭海斗, 燾) 유준근(柳濬根)

9일(양력 31일) 새벽 3시경 일본군사가 폭약으로 동문을 부수고 습격해 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참모장 김상덕(金相悳).채광묵(蔡光默)부자.성재평(成載平) 등 6~70명이 전사하였으며 적군은 300여 명이 사망하는 등 유례없는 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의진은 훈련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병력이 크게 부족하였기 때문에 주요 병력 83명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 민종식 등 일부 의병장은 훗일을 기약하고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최익현의 태인(泰仁) 의진의 13명과 함께 경성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6월(양력)에 70여 명이 풀려나고 남규진.유준근.이 식.신현두.이상구.문석환.신보균.최상집.안항식 등 의사 9인 및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유배당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홍주 의진의 의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적국으로 유배당한 이들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심정을 시로 지어 달래었다.

한편 홍주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의병장들은 6월에 청양 축치(靑陽 杻峙), 7월에는 온양 석암사(溫陽 石岩寺), 8월에는 공주 노동(公州 蘆洞) 등지에서 군사적 활동을 하였다. 이어서 9월 그믐에 정예 수백 명을 예산(禮山) 근처에 매복시키고 맹주인 민종식과 함께 한곡(閑谷)의 전 참판 이남규의 집에서 회합하였다. 그리고 민종식을 성우영(成祐永)의 집에 피신시키고 며칠간 전략을 협의하여 의병을 규합해서 10월 5일 예산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고을의 일진회원이 그 기미를 알고 적에게 밀고하였다. 10월 2일 새벽 적군들에게 포위되어 이용규.곽한일.박윤식.이석락.이남규 등이 체포되어 예산 주차소(禮山 駐箚所)에 감금되었다. 적군들은 민종식의 거취를 알아내어 발본색원코자 무수한 악형을 가하였다.

홍주성과 예산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민종식은 그 이후 일 개월 이상을 산 속을 전전하면서 피신하였다. 그 동안 이용규.박윤식(朴潤植)은 온 몸이 바스러지도록 고문당하였으나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남규(李南珪)는 아들 충구(忠求)가 고문에 못 이겨 혀를 깨무는 것을 보고 하는 수 없이 자백하고 끝내 숨졌다. 민종식은 이미 은거처에서 탈출한 뒤이기는 하지만 그의 거취가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5일(음) 민종식은 김덕진(金德鎭)과 함께 공주 탑산리(塔山里)에서 잡혀서 공주부(公州府)에 이르러 보니 황영수(黃英秀)도 벌써 잡혀 와 있었다. 이들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오랜 심문 끝에 1907년 7월 2일 민종식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7월 26일 민종식이 맨처음 의거를 상의하였던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석방되어 돌아가면서 민종식의 충의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다.

충신 뒤에 또다시 충신이 있어

열성은 천신을 감응시킬 만 하오.

계획 없이 착수했다 나무라지 마소

세상에선 왜 의사를 원수로 보는가.

(芚趾故家復有臣 若心自足感天神無謀虛着豈爲咎 今世滔滔讐義人)

민종식의 투쟁이 좋은 결말이 있기를 기원하는 글이었다. 그러나 법부 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주선으로 사형이 면해지고, 곧 순종이 즉위하게 되자 진도(珍島)로 종신유배되었으며, 감일등된 지 한달 뒤인 12월에 황제의 특사로 보석(保釋)되었다. 석방 후의 그의 행적은 전하여지는 바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49.91.92.9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19.339.340.97.116.677.673.674면
  • 고등경찰요사 4.6면
  •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85면
  • 독립운동대사전 395면
  • 매천야록 375.376.398.418.432.4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57.130~228.298.320.329.330.317.331.299.318.376.332.333.303.324.319.8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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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민종식 자 : 윤조(允朝), 호 : 퇴초자(退樵子) 경기 여주 을미사변, 을사늑약, 홍주성 전투
본문
1861년(철종 12) 3월 4일 경기도 여주에서 민영상(閔泳商)과 기계 유씨(俞氏)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윤조(允朝), 호는 퇴초자(退樵子)이다. 여흥민씨 가운데서도 권세를 떨쳤던 삼방파(三房派) 집안으로 증조부인 민치병(閔致秉)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생부인 민치록(閔致祿)과 재당질(再堂姪) 사이다. 부친은 명성황후의 조카뻘로 문과에 급제하고 충청도 관찰사를 비롯하여 이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고종(高宗)의 신임을 받은 관료였다. 20살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체구와 얼굴이 크며 성긴 구레나룻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문신이면서도 동시에 무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1886년(고종 23)에는 시강원겸사서에 올랐고, 다음 해에는 인사권을 관장하는 이조전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대사간 등 요직을 거친 다음 1891년부터 1892년에는 예조, 이조, 형조 참판을 역임하는 등 종2품의 품계까지 올랐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93년과 1894년에는 고종을 곁에서 모시는 도승지를 맡는 등 탄탄대로의 관료생활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겪고 난 후 관직을 버리고 어려서부터 살던 충청도 정산(현 충남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으로 내려갔다. 이후 명성왕후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1896년 어머니를 여의고 모친상을 치룬 후 은거하였다. 그 와중인 1904년 한산 이씨 이은식(李殷植)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부인은 후일 홍주의병의 동지인 이용규(李容珪)의 이복동생이며 안동관찰사를 역임한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의 종제(從弟)였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처남인 이용규와 이남규는 의병 동지가 되어 힘을 보탰다. 홍주 을미의병의 총수였던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이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하여 상경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상경하였다. 서울 전동의 여인숙에 투숙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설에게 상소문의 초안을 의뢰하고 한편으로는 민영익(閔泳翊)과 민영휘(閔泳徽) 등 여흥 민씨의 당대 고관들을 만나 상소의 일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상소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그만 두라는 권유만 받았다. 그 사이 이설과 김복한이 체포, 구금되고 이설이 작성한 상소문마저 압수당함에 따라 충남 정산으로 돌아왔다. 낙향 이후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마침 을미의병 당시 홍주의병의 주도자로 홍주향교의 전교를 맡고 있던 안병찬(安炳瓚)이 홍성, 청양 일대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설은 민종식에게 편지를 보내 1895년 의병을 일으킬 때 통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면서 의병을 이끌어줄 것을 권했다. 이어서 1906년 2월 하순경 안병찬, 박창로, 이용규 등은 그의 집인 정산 천장리까지 찾아와 의병대장이 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병대장 자리에 올랐다. 의병대장에 오른 그는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 원을 마련하여 군수품으로 제공하였다. 이어서 의진의 근거지를 자신이 거주하는 정산군 천장리로 삼고 의진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의진의 주요 구성원은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용규, 홍순대, 박윤식, 정재호, 이만직, 성재한 등이 있다. 이어서 통문을 발표하고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청원문을 보냈다. 그 중에서 안병찬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통문이 현재 전하고 있다. 부대 편성을 마치고 1906년 3월 15일 광수장터(현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의 첫 깃발을 들었다. 이때 참석한 의병은 600여명에 달했다. 우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이튿날 바로 홍주로 향하기 위해 동문 밖 하우령(일명 하고개)에 진을 쳤다. 이후 의병들에게 홍주성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잡아오면 머리 하나에 1천 냥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면서 홍주성 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자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다음날 이세영(李世永)이 의진에 도착하였다. 홍주 을미의병에 참여한 후 정식 군대에 들어가 계급이 부위에까지 오른 이세영의 참여는 의진에게 큰 힘이 되었다. 회의를 개최한 후 다시 광수장터에서 군세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부 관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의병의 선두가 묵방(일명 먹고개, 현재 청양군 비봉면 중묵리)에 이르렀을 때 공주부 관군과 경병 300여 명이 청양읍에서 휴식 중이라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의병은 진로를 화성면 방향으로 옮겨 합천(合川, 청양군 화성면 합천) 일대에 진을 쳤다. 하지만 이날 관군과 경군은 오후 6시 경 먹고개에 도착하여 의병에 대한 탐문을 마치고 10시경 합천 인근에 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인 3월 17일 오전 5시 의병진은 관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하였다. 이에 안병찬 등 23명이 체포되었고 그와 홍주의병은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안병찬은 이남규 등의 노력으로 5월 5일 석방되어 의진의 참모사로 다시 종군함으로써 그가 홍산에서 5월 9일 재기하는 데 힘을 보탰다. 합천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각지를 잠행하던 그는 전주의 친족인 민진석(閔晉錫)의 집에서 지내던 중 이용규, 이세영, 이상구(李相龜), 이봉학(李鳳學), 조상수(趙尙洙) 등과 재기를 협의하였다. 5월 9일 홍산군 지티동의 주막에서 의진을 다시 일으킨 그는 또 다시 대장에 추대되었다. 이때 선봉에 박영두(朴永斗), 중군장에 정재호(鄭在鎬), 후군장에 정해두(鄭海斗)를 임명하였다. 지티에서의 재기에는 처남인 이용규의 역할이 컸다. 이용규는 합천 싸움에서 패한 뒤 전주, 진안, 용담, 장수, 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서천과 인근의 남포, 오천 등지에서도 의병 초모와 함께 군량을 준비하여 재기를 가능케 하였다. 5월 13일 그는 의병을 이끌고 서천읍을 공격하였다. 관아에 돌입한 의병 부대는 서천 군수 이종석(李鍾奭)을 감금하고 양총(洋銃) 등 무기를 획득하였다. 이때 군수의 인장을 이용하여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다음날 비인을 함락하고 남포에 가는 도중에 일본인 한 명을 체포하였으며, 남포 읍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의병의 공격에도 공주의 관군이 합세하며 군세가 늘어난 관군은 요해지인 남포 읍성을 지키며 방어하였다. 그럼에도 5일간의 전투 끝에 그의 의병 부대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남포 군수 서상희(徐相喜)를 감금하고 관군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키고 군량을 확보하였다. 이때 남포의 유생 유준근(柳濬根)이 유생으로 조직된 유회군(儒會軍) 33명을 거느리고 합세하여 오자 유준근을 유병장(儒兵將)으로 삼았다. 그 후 남포 부근의 용동에서 일본인 석공 2명을 체포한 후 총상을 입은 한 명을 총살하였고 광천에서는 일본인 6명을 체포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유학자 서승태(徐承台)의 권유를 받은 지역 부호 박익병(朴翼秉)이 곳간을 열어 의병에게 군량미를 제공하였다. 사기가 오른 홍주의병은 결성군 방면으로 진군하여 하루를 지내고 5월 19일 홍주로 다시 들어갔다. 이후 홍주성 공격은 장날인 5월 19일 개시되었다.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은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기고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의병의 우세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일본군과 관군은 북문을 통해 덕산 방면으로 도주하였고 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한 후 총기와 탄약, 그리고 우편국에 있는 금품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김상덕, 유호근 등 명망 있는 지방 유생들이 의병을 모집하여 차례로 입성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은 총을 소유한 600여명, 창을 소유한 300여명, 유회군 300여명 등 모두 1,200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홍주성을 점령하고 이내 새로운 조직을 편제하였다. 이들 지휘부는 충남의 서북부 지역 인사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그가 거주하던 청양 출신의 인사가 많았다. 정산면의 박윤식, 이식, 화성면의 안병찬, 안병림 형제, 안항식, 채광묵, 임한주, 임승주 형제, 장평면의 이세영, 김덕진, 한태석, 한훈 형제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예산의 이남규, 남규진, 보령의 유준근, 신보균, 신현두, 부여의 이용규, 이상두, 해미의 박두표, 온양의 곽한일 등이 있다.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알선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해미 군수만이 포군 10명과 약간의 군수물자를 보냈다.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그는 곧바로 상주문을 작성하여 이민학(李敏學)에게 보내 고종에게 올리게 하였다. 그 내용은 을사오적과 이토 히로부미 주륙의 당위성 등을 담고 있으며 거병한 이유와 의병을 일으킨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민학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홍주성은 일본군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고, 이 계획은 중지되고 말았다. 홍주의병에 대한 고종황제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이 홍주의병의 의로움을 치하하고 거의(擧義) 명분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아울러 의병을 ‘늑멸’해서는 안되고 효유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관군의 적극적인 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응은 철저한 군사적 진압작전으로 전개되었다.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은 공주에서 병력을 지원 받아 20일부터 홍주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의병부대는 번번이 이를 격퇴하였다. 21일에는 수원의 헌병부대로부터 증파된 헌병과 경찰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22일에 서울 경무고문부의 배원(排原) 경시와 조선 경무관 및 그 부하 20명이 증파되었는데, 이들은 24일 공주 진위대에서 파견한 57명의 관군과 함께 의병을 공격하였다. 27일에는 동원(桐原) 경시의 지시를 받은 토방(土坊) 경부, 한국인 경찰 송(宋) 총순 등이 순사 5명을 이끌고 서문 밖을 정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의병에게 체포되었다. 29일 밤에 그는 선봉장에 명하여 체포한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 2명을 함께 총살시켰다. 이날 곽한일과 남규진의 부대 400여명은 의병을 지원하기 위하여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이와 같이 몇 차례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결국 5월 30일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의 명령을 받은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1/2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파견된 일본 정규군은 우세한 화력과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다나카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의 숲 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새벽 2시 반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에 의병들은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다. 그러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의 성 안 침투를 허용하였다. 결국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분투했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의병 측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일본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불과 1시간도 안된 4시경에 홍주성은 일본군이 점령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기마병을 보내 의병을 추격 사살하였고, 이때 양민 다수도 희생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은 10여명의 사망자를 낸 반면 의병 측은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를 비롯하여 학살된 양민의 수를 합하면 300여명에 이른다. 여기에 체포된 의병은 145명으로 보고되었다. 그 중에 김상덕 등 78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일본군 사령부의 심문을 받은 후 윤석봉 등 70명은 7월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준근, 안항식, 이상구, 신현두, 이식, 남규진, 최상집, 문석환 등 9의사는 대마도 유배형에 처해져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이세영은 6월 체포되어 겨울에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황해도 황주의 유배지인 철도(鐵島)로 보내졌다. 홍주성전투에서 패퇴한 후 그는 간신히 성을 빠져나와 예산의 한곡(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계획하였다. 11월 20일 처남 이용규의 도움을 받아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다시 재기하고자 뜻을 모았다.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 추티에서 의병을 다시 집결시켜 부여와 노성 지역을 거쳐 연산의 부흥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때 조병두가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전역에서 사망하였고 채경도, 오상준 등은 공주부에 갇혔다. 이용규는 그해 10월경에 이남규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를 추진하였다. 이때의 지휘부는 그가 대장이었고, 중군장에 황영수와 정재호, 운량관에 박윤식, 참모에 곽한일, 이용규, 김덕진으로 편제된 상황이었다. 이들 외에도 이남규, 박덕일, 안병찬, 박창로, 이세선, 윤병일, 윤필구, 조희수 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진회원이 그와 간부진의 모의를 밀고하여 발각되고 말았다. 그 결과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 10여명과 지방병 40여명, 일진회원 수십 명의 습격을 받고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의 재기 움직임에 일제는 불안을 느끼고 이 지역의 중요 인물들에 대한 감시와 학대를 강화하였다. 1907년 9월에는 일본 기마대 1백여 명이 이남규 부자를 체포해 가던 중 귀순을 강요하였다. 이를 거부하자 온양의 평촌(현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서 이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1월에는 김복한이 의병을 지원했다고 구속하여 악형을 가하였다. 이때에도 미리 신창군 성우영(成祐永)의 집으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 공주 탑곡리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했다. 일본 경찰대는 신창에서 김덕진과 신창규(辛昌圭)를 체포하여 고문 끝에 그의 은신처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결국 11월 20일 체포된 후 공주부로 압송되었다. 다시 서울로 압송된 그는 12월 7일과 25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그가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 상경하였을 때 김복한과 이설을 만났던 일에 대한 심문이 이루어졌고 왕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추궁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사실 무근이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이때 그를 심문한 일본 경찰이 그를 일러 “완고하고 과묵하고 침착한 태도로 진술하면서도 타인에 누를 끼치는 것을 피하였다”라고 하여 그가 비록 옥에 갇혀 있는 형편임에도 의병장으로서 의연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경찰이 그를 취조한 문서에는 그의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의병 봉기의 분명한 목적이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대체로 갑신정변과 갑오변란, 을미사변, 을사늑약 같은 일제의 침략 행위에 분개하면서도 침착하게 일본인을 멸망시키고 5적을 섬멸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을 일으켰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07년 7월 3일 결국 교수형을 선고받았는데 죄목은 내란에 해당하는 “정사(政事)를 변경하기 위하여 난(亂)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한 후 진도 유배형에 처했다.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지 5개월 뒤인 1907년 12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특사로 석방되었다. 풀려난 후 1911년 여주의 영릉(英陵)에 있는 수 만평의 토지를 개간할 계획을 세우다가 처남인 이용규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1917년 6월 26일 56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총독부에서 “폭도대장”(暴徒大將)이라 하여 선영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3개월 만에야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의 선영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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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교(絞) 평리원 1907-07-0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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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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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홍주성 충청남도 홍성군
2 비석 의병대장민종식유허비 충청남도 청양군
3 비석 홍주의병출진기념비 충청남도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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