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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693
성명
한자 南慈賢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3년 0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만주(滿洲)에서 민족해방(民族解放)(爲)하여 활약(活躍)함.
2. 남만(南滿)에서 김동삼 등(金東三等)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동(活動)함.
3. 동만(東滿)에서 12개소(個所)의 예수교회(敎會)와 10여처(余處)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설립(設立)함.
4. 1925년 채찬(蔡燦), 이청산 등(李靑山等)재등실 총독 암살계획(齋藤實總督暗殺計劃)참가(參加)하여 활동(活動)함.
5. 1928년 안창호(安昌浩), 김동삼 등(金東三等) 47(人)검거(檢擧)되었을 때, 지성(至誠)을 다하여 간호(看護)하였으며 석방운동(釋放運動)전개(展開)함.
6. 1931년 김동삼 등(金東三等)이 “하루빈”에서 피체(被逮)되었을 때 탈환(奪還)획책(劃策)하다가 실패(失敗)함.
7.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國際聯盟調査團)이 “하루빈”에 내착(內着)즉시(卽時) 한국독립원혈서(韓國獨立願血書)를 써서 조사단(調査團)수교(手交)하였음.
8. 1933년 이규동 등(李圭東等)주만일본대사(駐滿日本大使) 무등신의(武藤信義)격살(擊殺)할 것을 계획(計劃)하고 “하루빈”에서 폭탄(爆彈)운반(運搬)하다가 일경(日警)체포(逮捕)되어 단식(斷食)으로 생명(生命)위독(危篤)함에 보석(保釋)되었다가 서거(逝去)함. 향년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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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경북 영양(英陽) 사람이다.

19세때 영양군 석보면(石保面) 김영주(金永周)에게 출가하였다.

출가한지 6년후인 1895년에 부군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니 남자현은 삼대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며 시부모를 봉양(奉養)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동년 3월 9일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가하여 활약하는 한편 각 독립운동 단체와 군사기관 및 농촌등을 순회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동만(東滿)일대 12곳에 예배당을 세우고 10여 곳에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를 설립하여 여성계몽과 해방운동에 성심을 다하였다. 또한 남만(南滿)각지를 순회하면서 동지들간의 불화를 화해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도 힘을 다하였다.

1925년에는 채찬(蔡燦 : 白狂雲)·이청산(李靑山) 등과 함께 일제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서울 혜화동 28번지 고(高)씨댁에 근거를 두고 거사를 계획하다가 미수에 그치자 삼엄한 경계망을 돌파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吉林住民會長)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열(片康烈), 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남자현은 이에 적극 참가하여 통합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외 47인이 중국경찰에 잡히게 되자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그 석방에 노력하였다.

1931년 10월에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체포되자 김동삼의 친척을 가장하고 일본영사관에서 여러 동지에게 중요한 연락을 취하고 김동삼이 국내로 호송될 때 탈환을 계획하였으나 시일이 촉박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 조사단 「릿톤」경이 「하얼빈」에 조사를 왔을 때 왼손 무명지 두마디를 잘라서 흰수건에 「韓國獨立願」이란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을 싸가지고 조사단에게 보내어 우리의 독립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하였다.

1933년에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일본대사관 무등신의(武藤信義)를 격살(擊殺)할 것을 계획하고 만주 건국일인 3월 1일을 기다렸다. 남자현은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차 「하얼빈」에 가서 2월 27일 중국걸인 노파로 변장하고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다가 「하얼빈」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어 여섯달동안 혹형을 받아오다가 그해 8월부터 단식항쟁을 시작하였다. 그후 15일만에 사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순국하여 「하얼빈」 남강(南崗) 외국인묘에 안장되었다.(1967년 서울현충원 이장)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52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3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873·880·91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자현 - 경북 영양 길림대검거사건, 부토[武藤信義] 처단 의거
본문
1872년 12월 7일(음력) 아버지 남정한(南珽漢)과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에서 1남 3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지경리(地境里)로 추정된다. 남편의 본적지는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一直面) 일직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영양 일대에 거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부친이 일찍부터 글을 가르쳤는데 7세에 이미 한글과 한문을 터득하고, 12세에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읽었으며, 14세에는 사서(四書)를 독파하였고,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1891년 영양 석보면의 김영주(金永周, 김상주(金尙周)와 혼인하였다. 을미의병운동에 참여했던 남편이 1896년 7월 11일 당시 진보(眞寶) 진보면(眞寶面, 현 경북 청송 진보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남편의 전사 후 12월에 태어난 유복자를 기르며, 시댁에서 생활하였다. 효심이 지극하여 진보 진보면에서 효부상을 받을 정도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무너졌다. 이어 1907년에는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고 말았다. 이 무렵 친정아버지 남정한이 의병운동에 나서자, 이를 적극 지지하였다고 전한다. 1910년 국권상실이후 친가와 시가인 안동과 영양의 지사들이 국권회복의 뜻을 품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3년 무렵부터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1919년 2월말 서울 남대문통에 살던 김씨부인의 편지를 받고 상경하였다. 상경한 후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한 3·1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3월 9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퉁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망명한 경상북도 인사들이 1919년 5월에 설립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시작된 일본군의 독립군 대토벌작전을 피해 서로군정서가 백두산 안도현을 거쳐 지린성(吉林省) 어무현(額穆縣)으로 이동하자 함께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독립군의 간호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이로써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192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1921년 지린성 어무현(額穆縣) 나인구에서 20여 개가 넘는 교육단체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환런현(桓仁縣)에서 여자권학회(女子勸學會)를 조직하였다. 주로 순회강연을 통해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데 온 힘을 쏟았다. 1925년 4월 채찬(蔡燦) · 박청산(朴靑山) · 김문거(金文居) · 이청수(李靑守) 등과 함께 지린성 안에서 조선총독암살 계획을 세웠다. 4월 김문거로부터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받아 직접 서울로 잠입하였다. 혜화동 지인의 집에 머물며, 교회신자로 변장하고 총독 암살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1934년 발행된 『진광(震光)』에는 1928년에 4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거사를 시도하려고 서울에 잠입했지만 4월 6일 단원이 피체되어 실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6년 12월에는 지린성 판스현에서 정의부, 한족노동당, 남만청년동맹 등이 모여 조선혁명자후원회(朝鮮革命家後援會) 조직을 위한 발기회 92명 중 1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조직은 1927년 11월 초순 완전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는데, 이때 김상덕(金相德) · 고할신(高豁信) · 이광민(李光民, 위원장) · 이관린 · 권진화(權進華)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2월 ‘길림대검거사건(吉林大檢擧事件)’ 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계 지도자 175여 명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지린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大獨立黨)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피체되어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 피체된 독립운동가 중 47명이 지린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들을 일본 경찰에게 인수할 것이므로 이를 저지하고자 독립운동계가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때 이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이 사건을 여러 곳에 알리고, 비상대책반을 꾸리는 등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구금된 독립운동가들은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다. 1928년 1월 길림여자교육회(吉林女子敎育會)의 부흥총회를 열고 만주의 한인여성들의 통합과 운동을 결집하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10월,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김동삼(金東三)이 체포되어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에 갇히게 되었다. 이에 친척으로 가장하여 김동삼을 면회하고, 안팎 소식을 알렸다. 김동삼이 신의주로 이송된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작전을 세웠지만 이동 날짜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1932년 만주국을 수립하자 침략의 불법성을 조사하기 위해 5개국 대표로 구성된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파견되었다. 국제연맹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자르고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냈다. 자료에 따라서는 ‘조선독립원’, ‘대한독립원’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1933년 2월 이춘기(李春基)등과 주만일본대사(駐滿日本大使)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부토 노부요시(武藤信義) 처단계획을 세웠다. 만주국건국 1주년 행사가 열리는 1933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2월 27일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숨기고 장춘으로 향하던 중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후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6개월간의 가혹한 고문과 옥고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수감 6개월 후인 8월부터 일제에 항거하며 단식투쟁을 시작하였다. 단식한지 9일 만인 8월 1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출옥 후 여관에서 병간호를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1933년 8월 22일 순국하였다. 마지막 순간, 조선이 독립되는 날 자신의 돈 200원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것과 손자에게 교육을 시켜 내 뜻을 알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광복 후 유족들은 이 유언에 따라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이를 전달하였다. 8월 23일 영결식을 치르고 하얼빈의 외국인 공동묘지 마가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8월 27일 『조선중앙일보』에 「부토(武藤信義) 모살범(謀殺犯)」이란 기사로 순국 사실이 국내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1933년 10월 12일 묘비석이 세워졌다. 묘지는 1958년 하얼빈시 도시건설 ‘대약진’ 때에 시내에 있던 중국인과 외국인 묘지가 모두 황산(皇山) 공원묘지로 옮겨갔지만 한국인 묘지가 없어지면서 묘는 ‘주인 없는 묘’로 소실되고 말았다.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성장한 구식 여성이지만 46세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하여, 14년 동안 독립운동 현장에서 일제에 맞서서 무장항일투쟁과 교육계몽운동, 의열투쟁을 펼쳤던 여성독립운동가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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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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