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537
성명
한자 羅錫疇
이명 馬仲達, 馬忠大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열투쟁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2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재령(載寧) 명신학교(明信學校) 2년 수업(年修業) (後) 농사에 종사하다가 23세 때(歲時)간도(間島)로 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하고 27세에 귀국 황해도(黃海道) 겸이포(兼二浦)에서 상업을 경영하면서 적정(敵情)을 탐지함.
2. 29세 때(歲時)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 일어나매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자금을 조달하고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주재소(駐在所) 왜경(倭警)상월면장(上月面長)을 총살하였으며 안악군(安岳郡) 모 부호(某富豪)사살한 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臨時政府) 경무국(警務局) 경호원(警護員)을 거쳐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대 장교로 복무함.
3. 1926년 4월 유림대표(儒林代表) 김창숙(金昌淑)의 말에 감동되어 은행 및 동척(東拓)의 파괴를 결심하고
4. 1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동척(東拓)에 가서 내외를 탐지한 후 식산은행(殖産銀行)으로 가서 대부계(貸付係) 철책에 투탄하고 다시 동척(東拓)으로 와서 수위실에 있던 조선부업협회 잡지기자(朝鮮副業協會雜誌記者) 고목길강(高木吉江)사살하였으며 또다시 이층으로 가서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 기술과 차석(技術課次席) 대삼태차랑(大森太次郞), 과장(課長) 능전풍(陵田豊)사원(社員) 무지광(武智光)을 쏘아 넘어뜨리고
5. 다시 조선철도회사(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가 수위 송본(松本)용산(龍山) 천진당 시계점원(堂時計店員) 금정열기(金井悅己)에 각각 1발을 쏘아 치명상을 입히고 황금정(黃金町)쪽으로 피해가다가
6. 경기도(京畿道) 경찰부(警察部) 전전유부(田畑唯夫)를 쏘아 즉사케 하니 마침내 그들은 기마대(騎馬隊)까지 동원하였다가 역전(力戰) 끝에 자결(自決)함 (향년 35세)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그는 재령 명신학교(明新學校) 2학년을 수료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23세때 만주로 건너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27세때에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표면상 점포를 경영하면서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를 규합하여 상해의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한대홍(韓大弘)과 같이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주재소 일경과 상월면장을 사살하였고 다시 안악군(安岳郡) 친일파(親日派) 부호를 사살한 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1920년 9월 22일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약하다가 하남성(河南省)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있으면서 보안육군강무당(保安陸軍講武堂)에 적을 두었으나 이때 봉직전(奉直戰)관계로 퇴학하였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그는 1926년 4월 천진(天津)으로 가서 김창숙(金昌淑)과 상면하여 김창숙으로부터 조국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조선은행(朝鮮銀行)·식산은행(殖産銀行) 등을 폭파하여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를 구해 달라는 권고를 받고 이를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동년 12월 26일 그는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하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여 지부이통환공사(芝 利通丸公司)의 역부로 가칭하고 천진(天津)에서 상선 융극호(戎克號)에 편승하여 위해위(威海衛)를 거쳐 이튿날 27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는 28일 오후 중국청년으로 변장하고 동척(東拓)으로 가서 회사의 상황을 정찰한 다음 그 길로 남대문통에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 일반 통용문으로 들어가 대부계 철책 앞에서 폭탄 한 개를 던졌다. 다시 오후 2시 동척(東拓)으로 가서 수위실 책상에서 무언가 쓰고 있던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잡지기자 고목길강(高木吉江)을 사살하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놀라 따라 올라오던 사원 무지광(武智光)을 쏘아 쓰러 뜨리고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 기술과장실로 들어가서 차석 대삼태사랑(大森太四郞)과 과장 능유풍(綾由豊) 등을 저격한 후 폭탄 한 개를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그는 다시 층계를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 조선철도회사(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갔다. 정문에 들어서자 회사 수위 송본필일(松本筆一)과 마침 이곳에 왔던 천진당(天眞堂) 점원 김정열(金井悅)을 쏜 후 황금정(黃金町) 길거리로 발길을 옮길 때 경기도 경찰부(京畿道警察部) 경부 전전유차(田畑唯次)를 만나 그를 사살하였다. 황급히 출동한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은 그는 최후를 각오하고 권총 세발을 자신의 가슴에 쏘고 쓰러졌다. 일경은 그를 총독부 병원에 입원시켜 응급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약간 정신이 되살아 나는 듯 하였다. 이때 일경이 그의 이름을 묻자 "나석주(羅錫疇)"라 대답하고, "김창숙(金昌淑)과 밀의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일경은 폭탄 두 개, 스페인제 10연발 권총 1정, 탄환 66발을 그 자리에서 압수하였다. 1927년 5월에 동지 이화익(李化翼)이 북경에서 붙잡혀 신의주(新義州)로 압송되자 비로소 그의 의거가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다. 동월 31일에 그의 장남 응섭(應燮)이 상경하여 사진으로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유해를 인도받아 안장하였다. 응섭(應燮)이 백운학(白雲鶴)으로 변성명한 후 감시망을 뚫고 상해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자 상해의 동지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그의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99·102·243·244·285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86면
  • 기려수필 259·260·264·385-38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3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52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9·70·216·273·36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28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14·634·74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92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339·34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5면
  • 벽옹김창숙일대기 191·19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346·537·86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30·62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392·403·40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나석주 이명 : 나리(羅李), 김영일(金永一), 나석주(羅石柱), 마중덕(馬中德), 마중달(馬中達) 황해 재령(載寧) 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일제경찰 처단 사건,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사건
본문
1892년 2월 4일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북율면(北栗面) 진초리(進礎里)에서 아버지 나병헌(羅秉憲)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1남 2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이명은 나리(羅李) · 김영일(金永一) · 나석주(羅石柱) · 마중덕(馬中德) · 마중달(馬中達) 등이다. 집안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고, 아버지는 농민이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열한 살 때 네 살 위인 이문성(李文成)과 결혼하여, 열다섯 살 때 아들 응섭(應燮)을 낳았다. 열여섯 살 때 고향에 있는 보명학교(普明學校)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스무 살 때 안악(安岳)으로 가서 김구(金九)가 설립한 양산학교(楊山學校)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김구와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다. 1913년 처자를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滿洲) 모아산(帽兒山)으로 갔다. 그곳에 친척 형 나석연(羅錫淵)이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에 기반을 마련하여 부모를 모셔오려는 계획이었지만, 왕청현(汪淸縣)에 있는 나자구(羅子溝) 무관학교에 들어가 8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나자구 무관학교는 이동휘(李東輝)가 설립한 것으로, 대전학교(大甸學校)라고도 불렸다. 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경작하던 농토를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회사)에 빼앗겼다. 동척회사는 1908년 일제가 설립한 경제 침략의 대표적 기관이었다. 한국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소유하거나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분배하였고, 소유한 농지는 대부분 한국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경작하게 하면서 높은 소작료를 받아 농민들을 약탈하였다. 특히 고향 북율면 일대는 대부분 왕실의 궁장토(宮庄土)였는데, 동척회사가 이를 관리하게 되면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동척회사의 무리한 소작료 인상에 항의하다가 소작농지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가족들을 데리고 이웃 고을인 황주군(黃州郡) 겸이포(兼二浦)로 이사를 갔다. 쌀가게를 차려 운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김덕영(金德永) 등의 동지들과 태극기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3월 10일 내종리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겸이포를 떠나 사리원(沙里院)으로 이사하였다. 1920년 1월 김덕영 · 최호준(崔皓俊) · 최세욱(崔世郁) · 박정손(朴正孫) · 이시태(李時泰) 등과 의열투쟁 조직을 결성하고 권총과 탄환을 구입한 뒤, 군자금 모집활동과 친일파 처단에 나섰다.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炳恒)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것이 탄로나 일제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었고, 최세욱과 최호준은 장연(長淵)에서 밀고자에 의해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황주로 피신하였다. 사리원 · 재령 · 황주의 3개 경찰서 경찰들이 동원되어 포위망을 좁혀오자, 일제경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포위망을 벗어났다. 김덕영과 함께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4월 안악(安岳)의 부호 김응석(金應石)과 원형락(元炯洛)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한 것을 비롯하여,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에서 일제경찰 1인을 처단하고, 황해도 은율군(殷栗郡)에서 악질 친일파로 지탄을 받고 있던 은율군수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사리원 부호 협박사건, 협박전후의 대담한 태도’, ‘여러 군데서 운동금 모집, 목선타고 중국으로’ 등의 제목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여러 활동으로 인해 일경의 경계와 체포 대상이 되었다.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1920년 9월 일제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나 사리원에서 단신으로 목선을 타고 서해바다를 건넜다. 텐진(天津)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다 상하이(上海)로 갔다. 상하이에 도착하여 김구를 찾아갔다. 당시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휘하에 들어가 경무국 소속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경무국은 임시정부와 동포사회에 파고드는 밀정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일과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923년 초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추천으로 한단군사강습소(邯鄲軍事講習所)에 입교하였다. 한국노병회는 1922년 10월 김구 · 여운형(呂運亨) · 손정도(孫貞道) 등이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1만여 명의 군사를 양성하고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로, 청년들을 중국의 무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진국(鄭鎭國) · 성주식(成周寔) · 송호성(宋虎聲) 등과 함께 중국군벌 우페이푸(吳佩孚)가 설립 운영하는 허베이성(河北省)의 한단군사강습소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졸업 후 장교로 임관되어 바오딩(保定)에 있는 중국군 공병단(工兵團) 철도대에 배속되어 복무하였다. 이 동안 기관사 역무와 수리 등을 비롯하여 철도 파괴 등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1924년 쑨더푸(順德府)에 있는 중국군 제1사단 사령부로 보직되어 근무하였다.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김구와 편지로 연락하며 관계를 맺었다. 김구도 『백범일지』에서 그를 “친하게 믿는 지사요 제자”로 표현하면서 각별하게 여기고 있었다. 김구에게 편지를 보낼 때 나리(羅李)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 무렵 베이징(北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열단(義烈團)의 이승춘(李承春)에게도 편지를 썼는데, 이름을 김영일(金永一)이라고 썼다. 김구에 의해 그의 삶이 뒤바뀌게 되었다. 김구가 김창숙(金昌淑)을 만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김창숙은 1925년 국내에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인심이 크게 변하여 호응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많은 자금을 모금할 수 없었다. 1926년 5월 상하이로 돌아온 김창숙은 이동녕(李東寧) · 김구 등을 만나 국내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청년결사대에게 자금을 주어 무기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가 일제 기관을 파괴하여 국민들의 의기를 고취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국내에 들어가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국민들의 민심을 격동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때 김구가 김창숙에게 추천한 인물이 나석주와 이승춘 두 사람이었다. 김구는 이들을 추천하면서, 텐진에 의열단원들이 많으니 의열단 간부인 유자명(柳子明)과 의논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유자명을 만나 상의하고 무기를 구입해 달라며 자금을 건네주었다. 유자명은 폭탄과 권총을 구입하였고, 김창숙은 유자명과 함께 베이징으로 왔다. 베이징에 도착한 후, 유자명이 의열단원 한봉근(韓鳳根)을 추천하였고, 이들은 함께 텐진(天津)으로 갔다. 텐진에 온 김창숙을 만났다. 김창숙으로부터 김구가 보낸 편지를 받았고, 거사에 대한 계획과 취지를 들었다. 그 자리에서 국내에 들어가 거사를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동척회사와 조선식산은행(식산은행)을 폭파 · 파괴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들 기관의 횡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직접 이들 기관으로부터 농지를 빼앗긴 경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도 노부모와 처자가 남아 있던 고향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재령에 3년째 흉년이 계속되고 있다는 소식, 동척회사의 침탈과 일본인 이주민들이 농토를 계속 잠식 강점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항의가 계속 이어지면서 유혈 집단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 등이었다. 이에 비통함을 토로하면서, 경제침탈의 핵심 기관인 동척회사와 식산은행을 폭파 파괴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1926년 5월 김창숙 · 유자명 · 한봉근 · 이승춘과 함께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방법 등을 논의하였다. 거사는 유자명 · 한봉근 · 이승춘 등과 함께 4명이 실행하기로 하고, 국내로 들어가는 방법은 배를 이용하기로 결정되었다. 의열단에 가입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정식으로 의열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김창숙으로부터 자금을 건네받고, 유자명 · 한봉근 · 이승춘과 함께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갔다. 웨이하이웨이에서 배를 매입하여 해로를 이용하여 국내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배를 매입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5개월가량 시간을 소비하면서, 자금이 바닥이 났다. 자금 관계로 배를 매입하기가 어려웠고, 또 4명이 함께 국내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동지들과 논의하여 자신만 혼자서 국내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유자명 · 한봉근 · 이승춘은 텐진으로 돌아갔다. 1926년 12월 24일 혼자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이통환(利通丸)이란 배에 올랐다. 신분은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하고 작업복과 선원복, 그리고 선원증명서도 마련하였다. 이름은 마중더(馬中德)이란 가명을 사용하였고, 배에 오르기 전 텐진으로 떠난 동지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되는 것 같소”라며,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나는 결코 살아서 돌아올 사람이 아니니, 이것이 나석주의 유언이라 생각하고 매사에 매진하길 부탁하오. 만약 성공을 하더라도 왜놈들에게 잡혀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면서 동지에 관한 정보를 흘리거나 자백을 하게 된다면 이는 독립운동가로서 죽는 것만 못한 더러운 삶이 될 테니, 성패간에 나는 자결로서 최후를 마칠 각오가 서 있소”라고 하여, 거사와 더불어 자결할 각오임을 알렸다. 웨이하이웨이에 머물고 있을 때, 그가 국내로 잠입하였다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가 1926년 11월 7일자로 ‘나석주 잠입설은 허보(虛報)라고 선전’이라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다. 그의 국내 잠입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보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에 황해도 ·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사건들이 자주 일어났고, 일제측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를 들먹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제경찰이 그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같은 해 12월 27일 인천항(仁川港)에 도착하였다. 인천에 들어와 일장기에 검은색 리본이 달린 것을 보았다. 요시히토(嘉仁) 일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들어가 일왕이 죽은 일로 인해 일제 경찰의 감시와 경계가 삼엄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관 주인에게 진남포(鎭南浦)로 장사를 하러 떠난다고 말하고, 그날 밤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남대문 근처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동춘잔(同春棧)이란 여관에 묵었다. 여관 숙박부에는 장쑤성(江蘇省)에 사는 장사꾼 마중다(馬中達)라고 적었다. 같은 해 12월 28일 유서 3통을 남겨두고 여관을 나왔다. 조선일보 신석우(申錫雨) 사장에게 편지도 보냈다. 중국옷을 입고, 중국인 행세를 하며 식산은행과 동척회사를 사전 답사하였다. 식산은행은 남대문통(南大門通) 2정목(町目, 현 남대문로 2가)에, 동척회사 경성지점은 황금정(黃金町) 2정목(현 을지로 2가)에 있었다. 오후 2시 5분경 먼저 식산은행으로 들어갔다. 대부계를 향해 창구의 철책을 넘겨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대부계 뒤의 담벼락을 맞고 그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폭발하지 않았다. 폭탄이 폭발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웨이하이웨이에서 머무는 동안 지하실의 습기가 있는 곳에 보관을 하였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은행에 있던 일본 육군 중좌 오다(小田)가 폭탄임을 알고 경찰서에 연락하였고, 경찰이 은행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곧바로 동척회사 경성지점으로 향했다. 오후 2시 15분경 폭탄을 신문지에 싸가지고 정문으로 들어서면서 책상에서 무엇을 쓰고 있는 사람을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렸다.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잡지기자 다카키(高木吉江)였다. 2층으로 뛰어 올라가다가 총소리에 놀라 뛰어나오는 회사원 다케지(武智光)에게도 권총을 쏘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들어갔다.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는 과장 아야타 유타카(綾田豊)과 과장 차석 오모리(大森太四郞)를 쏘았다. 이어 개량부 사무실로 들어가 권총을 난사하며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러나 이 폭탄도 폭발하지 않았다. 폭탄을 투척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동척회사 건물 안에 있는 조선철도주식회사 현관에 앉자 있던 수위 마쓰모토(松本筆一)와 그와 이야기를 하던 사람을 쏘았다. 시계점원인 기무라(木村悅造)였다. 건물을 나와 황금정 길거리에 나섰을 때, 마침 경찰복을 입고 있는 경기도 경찰부 경무과 경부보 다하타(田畑唯次)와 맞닥뜨렸다. 그를 쏘아 거꾸러뜨리고, 전차길을 건넜다. 이때 충돌한 일제 경찰 4~5명이 쫒아왔다. 삼성당 건재약국 앞 전신주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 그리고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에 세 방을 쏘았다. 쓰러지면서 달려드는 경찰을 향해 권총을 난사하고는 정신을 잃었다. 경찰들이 차에 싣고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가 주사를 놓아 정신이 들었을 때, 경찰이 그의 신분과 소속에 대해 물었다. 자신은 ‘황해도 재령의 나석주’이며 의열단원이라 밝히고는 4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조선총독부 당국이 보도를 통제하면서, 이 사건은 세상에 곧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두 주일이 지나 보도통제가 해제되면서 『동아일보』가 1927년 1월 14일자로 호외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호외는 「백주돌발(白晝突發)한 근래(近來) 초유(初有)의 대사건(大事件)」이라는 제목 하에 ‘동척(東拓)과 식은(殖銀)에 폭탄을 투척, 권총을 난사(亂射)하야 일거(一擧)에 7명 저격(狙擊)’이라는 대활자를 뽑아 보도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진과 의거 현장 약도를 싣고, ‘위선(爲先) 식은(殖銀)에 일탄(一彈)’에서부터 ‘가두(街頭)에서 경부사격(警部射擊) 다음은 자기흉중(自己胸中)’이라는 소제목으로 사건의 전말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그리고 “피해자들 모두가 총알을 두 방 혹은 세 방씩 맞았는데 가슴이나 머리에 모두 명중되었으며 그는 사격의 명수임이 분명하였다”라고 하여, 사격이 정확하였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기도 하였다. 여관에 남겨둔 유서 3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일보 사장에게 보낸 편지는 21년 만에 공개되었다. 『조선일보』가 의거 21주년이 되던 1947년 12월 28일자에 그의 편지를 보도하였다. “의열남아가 희생적으로 단결한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왜적의 관 · 사설기관을 물론하고 파괴하려고 금차(今次) 회국(回國) 도경(到京)한 바, 최후 힘을 진력하여 휴대물품을 동척회사 식산은행에 선사하고 힘이 남으면 부내(府內) 본정(本町) 1·2·3·4정에까지 출두하여 시가화전(市街火戰)을 하고는 자살하겠기로 맹서코 실행전 동포동족에 보고하오니 이차(以此) 조량(照亮) 후 본인의 의지를 가급적 귀보에다 소개하여 주심을 바랍니다. 그런데 본인이 자살하려는 이유는 저 왜적의 법률은 우리에게 정의를 주려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닌데 불행히 왜경에게 생포되면 본인의 전투력은 다 빼앗긴 후에 소위 심문이니 무엇이니 하면서 세계에 없는 야만적 악행을 줄 것이 명백하므로 불복(不服)하는 뜻으로 현장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사망소식을 전해 받은 장남 나응섭이 친척 형과 함께 상경하여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총독부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일제경찰은 이들을 구금하고 사전에 무슨 연락이 있었는지를 대라며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8일 만에 풀려난 나응섭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으나 이미 매장한 뒤였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제경찰은 조문객도 받지 못하게 하고, 상여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받아 봉분도 못하고 평토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1999년 11월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거사장소(현재 서울 중구)에 ‘나석주열사의 상’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의열기념관 경상남도 밀양시
2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3 동상 나석주의사 동상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나석주(관리번호:1537)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