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함남 홍원(洪原) 사람이다. 아버지 강신포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난 강연상은 7세 되던 1890년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아버지가 재혼하자 할머니와 형수 밑에서 성장하였다. 8세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으며, 18세부터는 야학에 다니면서 공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 후 홍원사립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21세 때는 홍원의 차상리에 큰 서당을 차리고 70여 명의 학생들에게 한문을 강의하였다. 그 후 6개월 간 측량강습소를 이수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천도교 지방 전교사, 교구 임원, 순회 강사 등으로 몇 해 동안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1915년부터 1919년 2월까지 천도교 상임 임원과 공선원으로 활동하면서 농민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3월 16일 홍원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그 해 여름에는 서울 서대문 감옥에 미결수로 있던 홍원군 인사들을 후원하기 위하여 동지 박주섭과 함께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동지들이 판결을 받은 후 동년 8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9월 10일 중국 봉천성(奉天省) 장백현(長白縣)에 도착한 그는 이곳에서 홍원 시위운동을 주도한 윤덕보(尹德甫)를 만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조직하였으며, 중앙집행부 재무부 주임을 맡았다. 강연상이 활동했던 대한독립군비단은 1919년 3월 만주지역에서 3·1운동이 전개된 후 동년 5월경 함경남도 혜산진(惠山鎭) 대안(對岸) 장백현에서 함경남도 출신의 이희삼(李熙三)·이동백(李東白)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1919년 11월 1일경 이 단체의 주요 간부는 단장 이태걸(李泰杰), 부단장 김동준(金東俊), 총무장 김 찬(金燦), 재무장 이동백, 경무부장 이광랍(李光拉), 참모장 서병호(徐丙鎬) 등이었다. 강연상은 대한독립군비단이 1921년 10월 흥업단(興業團) 등 주변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조직하였을 때, 동서남북 4부 중 남부부장으로 일하였다. 당시 함께 일한 인물로는 회장 김 호(金虎), 부회장 이은향, 총무 윤덕보, 비서 김용대(金容大), 의사부장 윤세복(尹世復), 서무부장 석 계(石桂), 군사부장 김 찬 등이 있었다. 1922년 8월경 장백현에서 군비단·흥업단·태극단(太極團) 등이 대한광정단(大韓匡正團)을 조직하였을 때는 부단장으로 일하였다. 단장은 김 호, 총부장 윤덕보, 군무장 강진건(姜鎭乾), 재무장 김관용(金寬用), 비서장 장승언(張承彦) 등이었다. 한편 광정단이 1924년 11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비롯한 남만주지역의 독립운동대표들과 길림(吉林)에서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결의하고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할 때 정의부에서 강연상을 선전부장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취임하지 않고 군비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윤덕보·김용대 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러시아로 들어간 그는 러시아 농촌 꼴호즈에서 일하였으며, 1931년 이후 꼴호즈 검사 위원회 회장 등으로 일하다 1949년 작고하였다. 강연상의 며느리인 황율라(강연상의 아들 강일리아의 부인)는 현재 카자흐스탄 침켄트시에 생존해 있으며, 강연상의 묘소는 침켄트주 제트사이스키주(구명:빠흐뜨랄스키) 인터네셔널 콜호즈 근방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연감 147·152·153·161면
- 독립군의 수기(국가보훈처) 17∼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702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1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315면